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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허동현의 모던타임스]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4] '해외유학'이 韓·中·日 운명을 갈랐다/최초의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 일동 1장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4] '해외유학'이 韓·中·日 운명을 갈랐다

조선일보/오피니언/허동현 경희대교수 역사학 

입력 : 2012.04.05 23:09

20세기 초 한국과 중국은 식민지와 반(半)식민지가 됐고 일본은 제국이 됐다. 세 나라의 실패와 성공이 엇갈린 것은 서구 문물 수용 태도와 시기가 차이 났기 때문이다. 결정적 분기점은 청일전쟁(1894~1895년)이었지만, 성패는 1880년대에 이미 갈렸다.

중국은 1860년 북경이 영·불 연합군의 군홧발에 짓밟힌 후 무기와 기술이 뒤졌음을 깨닫고 양무(洋務)운동을 시작했지만 해외 유학 필요성을 깨닫는 데는 10년이 넘게 걸렸다. 1872년부터 10세 전후의 '유미유동(留美幼童)' 120명을 15년 유학 예정으로 미국에 보냈던 청나라는 1881년 이들을 돌연 소환했고, 1889년부터 1896년까지 유학생을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 유학생들은 일요일마다 감독 관청에 모여 옹정제(雍正帝)의 유교적 가르침이 담긴 '성유광훈(聖諭廣訓)'을 암송해야 했다. 그들은 중국의 변화를 이끌 힘이 없는 천자의 가신(家臣)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의 해외 유학생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 나가기 시작해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급증했으며 1873년에 1000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문명개화(文明開化)'를 기치로 내걸고 서구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 했으며, 일찍 유학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은 1880년대에 이미 그 성과를 국민과 나누는 사령탑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이 성공했더라면 20세기 동양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1872년 8월 11일 청나라의 1차 ‘유미유동’ 30명이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기 전 상하이 ‘윤선초상총국’ 앞에서 찍은 사진. 10세 전후의 아동 120명이 15년 유학을 목표로 미국으로 떠났으나, 9년 만에 소환됐다.
"오늘은 모두가 지식의 힘으로 자웅(雌雄)을 겨룰 뿐이다. 과거(科擧)를 혁파하면 지금 공명을 좇는 무리가 앞다투어 외국에 나가 재주와 기예를 습득해 돌아올 것이다." 1881년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에 참가한 한국의 어윤중(魚允中)은 유학생 파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1883년까지 일본에 파견된 한국 유학생 100여명은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을 장악한 원세개(袁世凱)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근 130년, 이제 미국 유학생 수는 중·한·일 순서로 역전됐다. 이런 변화는 동양 삼국의 진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엉엉1883년까지 일본에 파견된 한국 유학생 100여명은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을 장악한 원세개(袁世凱)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고 말았다....ㅠㅠ...^-^

 


짱나남의 나라 장군에 의해 우리나라의 유학생 100여명이 사라지다니...통탄할 일이다...ㅠㅠ...^-^

 

- 2013년 2월26일 화요일...수산나 -

 

 

최초의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 일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