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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허동현의 모던타임스]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6] '냉대' 피해 이 땅 떠난 華僑 1만명/인천 차이나타운 북성동 주민쎈터 1장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6] '냉대' 피해 이 땅 떠난 華僑 1만명

조선일보/오피니언/허동현 경희대교수 역사학

입력 : 2012.04.26 23:03

우리는 신화화된 역사 기억을 갖고 있다. 한민족은 남에게 가해한 적이 없는 평화 민족이라는 오랜 관념도 그중 하나다. 이 때문에 우리는 1931년 7월 중국 길림성 장춘현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던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이 땅에서 벌어졌던 화교(華僑) 배척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142명이 목숨을 잃고 546명이 다친 이 참극은 대륙 침략의 구실을 찾던 일제의 민족 이간책이 원인이었지만 또한 우리 내면 깊숙이 똬리 틀고 있던 중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거부감은 병자호란 이래 형성됐다. 그리고 임오군란 때 조선에 진주한 원세개를 따라온 중국인들이 조선의 상권(商權)을 장악하면서 조선인 위에 군림하려 한 고압적인 행태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청인들이 기왕에 하던 못된 패습을 지금도 고치지 않고 몽둥이로 대한(大韓) 사람을 감히 쳐서 많이 상하거늘"(1899년 3월 1일 독립신문)이라는 신문 기사가 당시 상황을 말해준다.

1920년대 전성기를 맞았던 인천의 중국인 거주지 청관(淸館) 거리〈위 사진〉에는 이제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아래 사진〉, 그 긴 세월 이 땅의 타자(他者)였던 화교들은 사회적인 냉대를 받아야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하지만 화교(華僑)는 신용과 근면을 무기로 이 땅에 자리 잡았다. 비단과 삼베, '마카오 신사'라는 신조어를 만든 양복감, 자장면과 탕수육 등 '청요리'로 우리의 의식주를 풍요롭게 해 주었던 그들은 6·25전쟁으로 생긴 이산가족의 비애도 함께 겪은 살가운 이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조건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1950년과 1961년에 공포된 외환 관리 규정과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 1973년 중화음식점에 내려진 쌀밥 판매 금지 조치 등은 그들의 삶을 옥죄는 족쇄였다. 2002년까지 화교는 영주권조차 받지 못했다.

1970년대 이후 화교 1만명 이상이 재일 동포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보다 더한 법적·제도적 제한과 사회적 냉대를 피해 미국과 대만행 엑소더스를 택했다. 이주 노동자와 외국인 신부가 100만명을 웃도는 오늘, 130년 동안 이 땅의 유일한 소수민족이었던 화교가 겪은 박해의 역사는 우리 사회와 이 땅의 외국인들을 깨어 있게 하는 성찰의 거울로 다가온다.

꺅  중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거부감은 병자호란 이래 형성됐다. 그리고 임오군란 때 조선에 진주한 원세개를 따라온 중국인들이 조선의 상권(商權)을 장악하면서 조선인 위에 군림하려 한 고압적인 행태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청인들이 기왕에 하던 못된 패습을 지금도 고치지 않고 몽둥이로 대한(大韓) 사람을 감히 쳐서 많이 상하거늘"(1899년 3월 1일 독립신문)이라는 신문 기사가 당시 상황을 말해준다....원세개가 일본의 한국인 유학생 100여명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고 한다...^-^

1931년 7월 중국 길림성 장춘현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던 '만보산 사건'...142명이 목숨을 잃고 546명이 다친 이 참극은 대륙 침략의 구실을 찾던 일제의 민족 이간책이 원인이었지만 화교(華僑) 배척에 대한 뿌리이기도 하다...^-^

 

- 2013년 2월26일 화요일...수산나 -

 

인천 차이나타운....북성동 주민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