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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허동현의 모던타임스]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8] '국방'이 없는 나라에서 '외교'가 겪은 비극/ 을사늑약 전시물 3장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8] '국방'이 없는 나라에서 '외교'가 겪은 비극

조선일보/오피니언/허동현 역사학 

입력 : 2012.05.10 23:05

 

1년 5개월 동안 홀로 1인 공관을 지키며 공사의 직무를 대행했던 이한응이 자결 직전 촬영한 사진과 자필. 나라는 57년이 흐른 뒤에야 그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러일전쟁 개전(開戰)이 임박했던 1904년 1월 초 민영돈 영국 주재 공사는 돌연 귀국길에 올랐고, 갓 30세 난 3등 참서관(參書官) 이한응(李漢應)이 서리공사의 중책을 떠안았다. 한국 최초의 관립(官立) 근대식 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운 그는 민씨 척족의 한 사람으로 이렇다 할 외교 활동을 펼친 적이 없던 민영돈 공사와는 달랐다. 영국 외무성에 남아 있는 1년 5개월에 걸친 그의 외교활동이 담긴 두 권의 기록은 이한응이 이해 당사국과 외교적 협상을 벌인 한국 최초의 외교관이었음을 증언한다.

이한응이 공사의 직무를 맡자마자 영국 외무성에 전달한 장문의 메모와 각서는 그가 당시 국제질서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동아시아의 안정을 깨는 영국과 일본, 프랑스와 러시아 등 두 개의 동맹을 해체하고 영·프·러·일의 '4개국 조약'(a quadruple treaty)을 맺어 평화체제로 전환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열강 간 세력균형을 이뤄 나라를 지키려던 그의 외교적 노력은 영일동맹(1902)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일제가 외교권을 앗아간 1904년 8월 1차 한일협약 이후 본국과의 연락이 두절되고 공사관 운영비도 송금되지 않았지만 이한응은 포기하지 않았다. 1905년 2월 말 그는 다시 한 번 한국의 독립이 지켜져야 할 당위를 설파한 각서를 보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he knows nothing)." 이 각서 위에 영국 차관보가 남긴 코멘트가 웅변하듯이, '힘의 정치'(power politics)가 펼쳐지던 그때 약자의 호소는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을사늑약이 맺어지기 6개월 전인 1905년 5월 12일, 그는 훤히 내다보이는 나라의 멸망을 막을 방법이 없음에 좌절했다.

"나라는 주권이 없고 국민은 평등을 잃었으니,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하다. 종묘와 사직이 무너지고 민족은 노예가 될 것이니, 구차히 산다 한들 욕됨이 더할 것이다." 자결 이유를 밝힌 유서가 읽는 이의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 그는 망국에 책임을 지고 죽음으로 속죄할 위치에 있던 정권의 실세가 아니었다. 이한응의 순국(殉國)은 자력 없이 남의 힘에 기대는 책략으로 생존하려 했던 한 세기 전의 아픈 역사가 어떤 비극을 빚었는지를 일깨우는 성찰의 거울로 다가온다.

 

엉엉이한응의 순국(殉國)...을사늑약이 맺어지기 6개월 전인 1905년 5월 12일, 그는 훤히 내다보이는 나라의 멸망을 막을 방법이 없음에 좌절했다.

 

영국 외무성에 남아 있는 1년 5개월에 걸친 그의 외교활동이 담긴 두 권의 기록은 이한응이 이해 당사국과 외교적 협상을 벌인 한국 최초의 외교관이었음을 증언한다.

이런 사람들의 '기개'가 있어 한국이 눈부시게 발전했나 보다...^-^

- 2013년 2월27일 수요일...수산나 -

 

을사늑약문...ㅜㅜ...치욕의 역사...^-^

 

을사늑약 직후 코리안페이퍼에 실린 풍자화...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민영환 유서와 헐버트의 대한제국흥망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