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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허동현의 모던타임스]

[허동현의 모던타임스] [22] 한국 버린 루스벨트의 거래… 日 군국주의 부메랑 돼/조미수호조약 등 2장

[허동현의 모던타임스] [22] 한국 버린 루스벨트의 거래… 日 군국주의 부메랑 돼

조선일보/오피니언/허동현 경희대교수 역사학 

입력 : 2012.09.06 22:32

'미국 공주'의 조선 스타일? - 대한제국을 방문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에서 석마에 올라탄 모습.
1905년 1월 1일 일본 육군은 뤼순(旅順)의 러시아군(軍) 요새를 함락했고, 5월 29일에는 해군이 독도 앞바다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무릎 꿇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일본은 러시아 수도인 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할 힘이 없었고, 차르는 한 푼의 전쟁배상금도 '작은 일본 원숭이'에게 줄 생각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일본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러시아와의 협상 중재를 요청했다. 7월 8일 가네코 겐타로 특사는 루스벨트에게서 귀에 솔깃한 말을 들었다. 아시아에서 유럽 국가들의 간섭을 배제하는 '일본식 먼로주의'를 펼치라는 조언이었다. 선심 공세는 계속되었다. 7월 29일 도쿄를 방문한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는 가쓰라 다로 총리와 대한제국과 필리핀을 맞교환하는 밀약(密約)을 맺었다.

일본은 루스벨트의 사탕발림에 넘어갔다. 그가 말한 아시아의 범위는 한반도와 남만주, 그리고 사할린의 반쪽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문명과 인류애를 위해 배상금은 잊어야 한다"고 일본 수뇌부를 강박했다.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이 조인된 후 두 체약국의 희비는 엇갈렸다. 협상장을 나온 러시아 대표는 "단 한 코페이카(러시아의 화폐단위)의 배상금도 주지 않는다. 우리의 완전한 승리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전장에서 승리하고 회담장에서 패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일본의 만주 독식을 막기 위해 러시아 편을 든 루스벨트는 한국을 제물로 일본을 달랬다.

미·일의 밀거래를 알 리 없던 고종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의 방한 소식에 희망을 걸었다. 9월 19일 인천항에 내린 '미국 공주'에게 황제 전용 열차를 내주었고 선례가 없는 만찬을 베푸는 등 극진하게 대접했지만 돌아온 것은 냉소뿐이었다. 조(朝)·미(美) 수호조약 제1조에 규정된 '거중조정(good offices)'의 의무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한국을 일본의 먹잇감으로 던져 준 루스벨트는 포츠머스조약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한 추악한 거래로 훗날 미국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일본식 먼로주의'는 1940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불씨를 지폈고, 그가 예찬한 일본군의 뤼순항 기습은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재현되었다. 일본이 형상기억 합금처럼 패전 이전의 군국주의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는 오늘, 미국은 과거의 잘못된 선택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을지 궁금하다.

짱나조(朝)·미(美) 수호조약 제1조에 규정된 '거중조정(good offices)'의 의무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한국을 일본의 먹잇감으로 던져 준 루스벨트는 포츠머스조약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05년 7월 29일 도쿄를 방문한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는 가쓰라 다로 총리와 대한제국과 필리핀을 맞교환하는 밀약(密約)을 맺었다.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이 조인된 후 두 체약국의 희비는 엇갈렸다. 협상장을 나온 러시아 대표는 "단 한 코페이카(러시아의 화폐단위)의 배상금도 주지 않는다. 우리의 완전한 승리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전장에서 승리하고 회담장에서 패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일본의 만주 독식을 막기 위해 러시아 편을 든 루스벨트는 한국을 제물로 일본을 달랬다.

 


- 2013년 3월20일 수요일...춘분날에...수산나 -

 

[ 朝美(조미) 수호통상조약(1882년 5월 22일)/미국에 파견된 報聘(보빙)사절단(1883년)/1887년 11월-박정양을 미국 초대 공사로 파견]

 

1882년 5월 22일. 조선은 제물포(인천)에서 미국과 朝美(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을 노리는 淸(청)나라와 일본 등 주변 불량이웃을 견제, 나라를 지키려 했다.

 

특히 조약 제1조에 제3국으로부터 不公輕侮(불공경모·불공정하거나 깔보고 업신여김)하는 일이 있을 경우.....必須相助(필수상조)한다.는 규정을 두어 조선은 미국과 연대(聯美), 당시 조선을 괴롭히던 淸日(청일)을 견제하려 했다.

게다가 조선은 이듬해(1883년) 미국에 파견된 報聘(보빙)사절단에게 한 아서 대통령의 미국은 다른 나라 영토를 점령, 지배할 의도가 없다.는 발언에 무척 고무됐던 터이다.

러나 조선은 재정난과 청나라의 방해로 미국에 상주 공사관을 두지 못하다 1887년 11월에야 박정양을 초대 공사로 파견했다.

조선은 1891년이 돼서야 당시로서는 거금인 2만 5천 달러로 워싱턴의 건물을 사들여 大朝鮮 駐箚 美國 華盛頓 公使館(대조선 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을 설치할 수 있었다 . (이 건물은 한일강제병탄으로 단돈 5달러에 일본에 팔렸다).

하나 초대공사 박정양은 청의 압력으로 결국 1888년 11월 소환됐고 귀국 뒤 고종에게 미국방문 경험을 아뢰었고

이에 고종은 앞으로 아름다운 나라 美國(미국)이 조선에 큰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가졌다.

고종의 미국에 대한 환상은 1904년 러·일 전쟁으로 산산히 깨졌다.

1905년 9월 러일전쟁 뒤 미국 포츠머스에서의 조약에 앞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요즘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테디 곰 인형은 의 애칭 테디에서 비롯됐다)은 그해 7월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를 일본에 보내 카쓰라 다로 총리와 密約(밀약)을 맺게 했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카쓰라-태프트 밀약이 그것이다.

조선과의 조약은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조미수호조약(1882.5.22)/조미수호조약 영문본.......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국에 파견된 報聘(보빙)사절단(1883년).......대한민국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