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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허동현의 모던타임스]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24] "자살-다시 한 번 생각을…"/전주향교 앞 박진효자비 2장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24] "자살-다시 한 번 생각을…" 

조선일보/오피니언/허동현 경희대교수 역사학

입력 : 2012.09.20 22:29

"다시 한 번 생각을…" - 2004년 7월 30일 아침 서울 한강대교 위에서 벌어진 자살소동. 공개된 장소에서의 자살 기도는 소통 부재의 사회를 향해 손잡아 주길 바라며 내미는 마지막 손길이다.
자살은 '사회적 타살(他殺)'이다. 따라서 자살은 한 시대 사회 모순의 총화로서 역사성을 갖는다. 남성 자살률이 여성의 1.5~3배에 달하는 것이 시공을 넘어 세계 보편의 추세다. 그러나 남성 우위 가부장(家父長)사회였던 조선시대는 그렇지 못했다. "왕명(王命)을 따르는 효도는 작고 남편을 따라 죽는 의리는 크기 때문이다." 정조 임금이 영조의 만류에도 곡기를 끊어 지아비를 뒤따른 화순옹주(和順翁主)를 기리는 정문(旌門)을 세울 것을 명한 사유가 웅변하듯, 지아비의 죽음이나 실절(失節)은 왕의 딸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살 이유였다.

일제 식민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열녀(烈女)'는 사라졌다. 그러나 1920년대에 유행병처럼 번진 '정사(情死)'라는 남녀 동반 자살은 자기 몸의 주권을 외친 가수 윤심덕 같은 신여성조차 가부장 사회의 높은 벽에 좌절했음을 잘 보여준다. 1930년대 이후 남성보다 낮아졌지만, 오늘에도 세계적 추세에 비춰볼 때 여전히 높은 우리나라 여성의 자살률은 열악한 여권(女權)의 현재를 대변한다. 전통 시대 이래 사회적 최약자는 지위 고하와 경제적 빈부를 넘어 여성이었다.

생활고 외에도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남긴 후유증에 따른 자살이 끊이지 않았던 1950년대를 갓 넘어선 1961년 한국은 이미 세계 최고의 자살 공화국이었다. 자살률 27.2명으로 미국(10.8명)의 2배가 넘었고 일본(21.3명)보다도 높았다. "바쁘다 바빠"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강행군에 강행군을 거듭한 압축 성장의 1970~90년대 우리는 시대의 그늘에 눈감았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심화, 대립적 노사 관계, 입시 지옥으로 표현되는 과도한 교육 경쟁, 인간 소외의 심화와 가치관 혼란…. 그 결과는 참담했다.

경쟁 지상주의는 자살을 '88만원 세대'로 스스로를 비하하는 20대는 물론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청년 세대의 사망 원인 1위로 만들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촉발한 이촌향도(離村向都)와 대가족 해체는 소외와 빈곤에 시달리는 노년층이 삶을 스스로 끊는 비극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이 한 해 1만6000명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떠안게 된 오늘이다. "앞이 안 보인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새파란 청춘과 노인이 남긴 유서는 그들을 자살로 내몬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경종이다.

 

뭥미곡기를 끊어 지아비를 뒤따른 영조의 딸-화순옹주(和順翁主)...드라마 '이산'에선 세자였던 정조를 죽이려고 했던 영조의 딸은 '화완옹주.'... 덕분에 왕들의 딸들에 관해 공부했다...인터넷 검색하면 모두 나온다...참~ 좋은 세상, 편리한 세상이다...ㅋㅋㅋ...^-^

 

1950년대를 갓 넘어선 1961년 한국은 이미 세계 최고의 자살 공화국이었다. 자살률 27.2명으로 미국(10.8명)의 2배가 넘었고 일본(21.3명)보다도 높았다.

한국이 한 해 1만6000명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떠안게 된 오늘이다...ㅜㅜ...^-^

 

- 2013년 3월24일 일요일 수난성지주일날...수산나 -

 

 

21대 영조의 딸들...^-^

 

정빈 이씨 → 효장세자(진종)

 

화순옹주(서장녀) : 김한신(경주)에게 출가.

 

남편 김한신이 1758년 1월 17일에 죽었는데..

 

그녀는 죽음을 슬퍼하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결심하였다고 함.

 

영조가 소식을 듣고 그녀를 찾아가 만류했지만..

 

그녀는 음식을 끊은 지 14일만에 자살하였다고 함.

 

김한신은? 전각에 재주가 뛰어났고, 오위도총부 총관을 지냄.

 

영빈 이씨 → 사도세자(장조) → 22대 정조

 

화평옹주(서차녀) : 박명원(반남)에게 출가. 박명원은? 당대의 명필.

 

영조는 영빈 소생의 딸들을 아꼈는데, 특히 화평을 총애했다고 함.

 

1748년 6월 24일에 그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 갔는데..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

 

화협옹주(3녀) : 신광수(평산)에게 출가. 1752년 11월 27일에 죽음. 영의정 신만의 며느리.

 

화완옹주(4녀) : 정치달(연일), 정후겸을 양자로 삼음.

 

1746년에 천연두로 죽을 뻔했으나 살아남. 조카 정조와 대립.

 

귀인 조씨

 

화유옹주(5녀) : 황인점(창원)에게 출가. 1771년(정조 1년) 5월 21일에 죽음.

 

숙의 문씨

 

화령옹주(6녀) : 심능건(청송)에게 출가.

 

화길옹주(7녀) : 구민화(능성)에게 출가. 1772년 12월 18일에 죽음.

 

 

 

박진 효자비...전주향교 앞 소재...^-^

 

박진 효자비 안내문...전주향교 앞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