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악후 전성시대(2) '천명:조선판 도망자 이야기'문정왕후
[출처] 사극 악후 전성시대(2) '천명:조선판 도망자 이야기'문정왕후 |작성자 김용상
<사신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의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 을축년(1565) 4월6일자 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여기서 윤씨, 윤비는 문정왕후이고, '강한'은 억세고 사납다는 뜻이다.
KBS2 수목드라마 '천명 : 조선판 도망자 이야기'(극본 최민기, 연출 이진서)에서 박지영이 연기하는 문정왕후는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의 왕비이자 13대 왕 명종의 모후다. 명종이 12살 때 보위에 오르자 20살이 될 때까지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조선왕조에서 대비나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한 사례는 몇 번 있었으나 문정왕후처럼 권력을 마음껏 휘두른 사람은 없어 조선왕조실록은 그를 가장 혹독하게 평가한다.
문정왕후는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 덕에 왕위를 차지한 중종이 세 번째로 맞은 왕비였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는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였는데 연산군 때의 권신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다는 이유로 폐출됐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금슬이 좋았지만 자신을 택군(擇君)한 신하들의 기세에 눌려 신씨가 폐서인이 되는 꼴을 멀거니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다.
중종이 두 번째로 맞은 왕비는 반정의 주도세력이었던 윤임(尹任)의 여동생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였다. 헌데 왕비가 된지 8년 만에 아들(훗날 인종)을 낳고는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경왕후가 죽은 뒤 단경왕후를 다시 맞아들이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논이 잠시 오갔으나 반정주도세력이 아직 조정에 많이 남아있던 때라 금방 잦아들었다.
나중에 세자로 책봉된 원자의 외삼촌 윤임은 당시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경빈(敬嬪) 박씨 등 후궁 자식들로부터 원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가문에서 계비를 맞아들였으니 그가 곧 문정왕후다. 국혼 당시 17세였던 윤씨는 당시의 여자로는 드물게 글을 배우고 학문을 닦아 아버지 윤지임(尹之任)으로부터 아들들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국혼 후 줄줄이 딸만 넷을 낳은 데다 중종이 총애하던 경빈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福城君)이 정쟁에 휘말려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살얼음을 밟듯 조심하며 살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세자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세자를 끼고 도는 것 말고는 없었지만, 그 와중에 중전이 아들을 낳으면 세자를 위협할 수도 있을 것이라 판단한 윤임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중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왕비가 된지 20년이 다 되어 갈 때 아들(경원대군, 훗날 명종)이 태어난 것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보호막으로 끼고 돌았던 세자 대신 제 아들에게 보위를 물려주기 위해 치밀하게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일엔 그의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 등이 적극 나서주었다.
이때부터 윤씨들 간에 틈이 벌어져 윤원형 측의 소윤과 윤임 측의 대윤 간에 다툼이 시작됐다. 야사들은 문정왕후는 세자를 죽이기 위해 세자궁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심약한 세자에게 독설을 퍼부어 놀라게 했는가 하면 무속의 힘을 빌려 저주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계획했던 계략이 다 완성되기도 전에 중종이 죽자 왕위는 세자에게 돌아갔고, 권력은 대윤 윤임에게 넘어갔다.
문정왕후는 정권을 틀어 쥔 윤임에게는 맞서지 못하고 병약하고 심약한 인종에게 막말까지 쏟아내며 무척 괴롭혔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인종은 용상에 앉은 지 8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고, 왕위는 중종의 유일한 적자인 문정왕후 소생 경원대군에게 넘어갔다.
문정왕후가 인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도 흘러 나왔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자신을 핍박했던 윤임 등 대윤파와 인종 때 등용된 사림들을 제거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는가 하면, 조선이 개국한 이래 이어져 온 숭유배불(崇儒排佛)을 무시하고 도첩제를 실시,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불교중흥에 팔을 걷어붙였다.
문정왕후의 묘소인 태릉 <사진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승려 보우를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하고 지금의 서삼릉 희릉(禧陵 장경왕후 묘소) 옆에 있던 중종의 능침인 정릉(靖陵)을 봉은사 근처로 천장(遷葬)하고 봉은사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중창했다. 자신이 죽으면 중종과 함께 묻히길 바랐으나 지대가 낮아 해마다 재실까지 물이 찰 정도여서 그 뜻을 이루진 못하고 서울 노원구 공릉동(孔陵洞)의 태릉(泰陵)에 묻혔다. 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그 규모가 웅장하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스무 살이 되면서 공식적으론 수렴청정을 그만 두었으나 그 뒤에도 아들 명종에게 일일이 지시하는 방식으로 윤원형과 함께 죽을 때까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혹 명종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네가 왕이 된 것은 순전히 내 힘이었다'며 윽박지르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했다 한다.
이런 문정왕후를 두고 근래 일각에선 남존여비가 정당한 가치관으로 통하던 시대에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을 빌어 남성이 지배하는 관료층을 발아래 두고 자신의 권력과 왕권을 오로지 하였다는 점에서 탁월한 정치가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출처] 사극 악후 전성시대(2) '천명:조선판 도망자 이야기'문정왕후 |작성자 김용상
선정릉의 <정릉>...중종의 릉
<정릉> 안내판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하고 지금의 서삼릉 희릉(禧陵 장경왕후 묘소) 옆에 있던 중종의 능침인 정릉(靖陵)을 봉은사 근처로
천장(遷葬)하고 봉은사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중창했다.
자신이 죽으면 중종과 함께 묻히길 바랐으나 지대가 낮아 해마다 재실까지 물이 찰 정도여서 그 뜻을 이루진 못하고
서울 노원구 공릉동(孔陵洞)의 태릉(泰陵)에 묻혔다. 결국 중종의 릉인 <정릉>은 홀아비능 이다...^-^
서울 삼성동...봉은사 일주문
봉은사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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