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전쟁] 심기원(沈器遠)은 누구인가
JTBC 주말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극본 정하연, 연출 노종찬)에선 김자점(金自點 정성모)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우의정 심기원(沈器遠)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김규철이 연기하는 심기원은 유생 신분으로 인조반정에 참여, 1등 공신에 녹훈되고 반정 직후 형조좌랑으로 등용되어 동부승지 ·병조참판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는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로서 진압군을 지휘했으며, 정묘호란 때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의 도검찰사(都檢察使)를 지냈다.
강화 유수와 공조판서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방어를 맡았으나 제 소임을 다하지 못했었다.
패전 뒤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으나 인조 22년이던 1644년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고 있을 때 역모사건에 휘말렸다.
여러 달 전 부친상을 당한 세자빈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고 몸져누운 어머니에게 인사나 드리고 오겠다'며 세자와 함께 귀국한 빈궁의 친정나들이를 이유 없이 막은 임금의 냉혹한 처사에 실망한 일부 신료들이 '그런 못난 임금은 폐하고 새로운 왕으로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기로 했다'는 고변이 있었다. 드라마에서도 심기원은 그런 강경발언을 몇차례 입에 올렸었다.
고변한 사람은 심기원의 휘하 장졸 두 사람이었다. 심기원은 그들이 다른 사적 감정 때문에 모함한 것이라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회은군 역시 며칠 전 심기원의 아우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간 것 외에는 다른 말을 한 적도 없고 역모의 '역'자도 나눈 바가 없다고 부인했다. 반역 모의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도 드러나지 않았으나 심기원은 주살되고 회은군은 사사되었다.
어쨌든 주화파인 최명길(崔鳴吉)에 동조하며 김자점 등의 세력과 대립하던 그가 처형됨에 따라 이후 조정은 김자점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결과를 빚었었다.
그렇다면 또 회은군은 누군가.
성종대왕의 둘째아들인 계성군(桂城君) 순(恂)의 네째 손자 정양군(正陽君) 회(誨)의 아들로 전주 이씨 31세손이다. 그는 종친이라는 것 말고도 예순여덟 살 나던 해 기적적으로 얻었다는 늦둥이 딸이 '양귀비 뺨치게 예쁘고 재주도 비상하다'는 소문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헌데 이 소문이 어찌어찌 청 태종의 귀에 까지 들어갔던지 정축년 2월, 인조의 항복을 받은 뒤 군사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내 듣자하니 회은군에게 천하절색의 처자가 있다던데, 당장 그 처자를 데려오라. 내가 보고 마음에 들면 황후로 삼겠다'고 했다.
금이야 옥이야 늦둥이 딸을 키워 온 회은군에겐 마른 하늘에 친 날벼락이었으나 승전국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집에 데려가 딸을 데려오자 청 황제는 흡족해 하며 수하들에게 회은군의 딸을 심양궁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했다.
회은군은 하루아침에 애지중지 키워온 딸을 오랑캐에게 빼앗긴 꼴이 됐으나 패전국의 종친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심양궁으로 돌아간 청 태종은 당시 열여섯이던 회은군의 딸을 여섯 번째 황후로 봉했다. 비록 후궁이긴 해도 어엿한 청나라의 황후였으니 그것으로 마무리가 됐다면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을 것이다.
헌데 이듬해 11월, 청 태종은 총애하던 공신 피파이[皮牌]에게 자신이 품어 온 회은군의 딸을 내주었다. 그들에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자신의 아내를 주는 풍속이 있었다 한다. 피파이는 황제가 총애하던 황후를 하사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하긴 미색에 총명하기까지 했으니 왜 아니 기뻤겠는가.
심기원 등의 역모사건이 적발된 것은 세자빈이 뒤늦게나마 아버지 영전에 절이라도 하고 오겠다며 어렵게 청 황실의 허락을 받아 귀국했다가 허탕만 치고 2월 열아흐레 날 다시 북행길에 오른지 한달여 만인 3월 스무하룻날이었고, 세자 내외가 이 소식을 들은 건 심양관에 도착한 지 사흘 뒤인 3월 스무이레 날이었다.
세자는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역모사건 자체도 놀라웠지만 그 주모자가 반정 일등공신인 심기원이며, 그들이 애초 보위에 올리려 했던 사람은 세자였다니 생각만 해봐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야기 아닌가. 다행히 그들 내부에서 '세자는 워낙 효자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반대가 강해 회은군으로 바꿨다고 한다.
만약 그들이 애초 예정했던 대로 세자를 추대했더라면 세자가 역모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여부와는 상관없이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심기원의 모반 소식이 전해들은 세자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세자를 따라 심양관에 볼모로 와 있던 심기원의 아들 석경(碩慶)을 체포해 감금하고, 청나라 황실과 실세들에게도 두루 알렸다. 그렇게 발빠르게 움직인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들이 처음 추대하려 한 사람이 자신이었다니 괜히 꾸물거렸다간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체포를 미루었다가 심석경이 아버지의 역모 사실을 알고 도주, 청나라에 투항해 조선의 이러저러한 세세한 정보를 흘리는 등 반역행위를 한다면 더 큰 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출처] [꽃들의 전쟁] 심기원(沈器遠)은 누구인가|작성자 김용상
남한산성 수어장대
심기원(沈器遠)은 인조 22년이던 1644년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고 있을 때 역모사건에 휘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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