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전쟁', 세자빈은 한달 동안 원손의 생사조차 몰랐다.
23일 막을 올린 JTBC의 주말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이하 '꽃들의 전쟁', 극본 정하연,연출 노종찬)을 보기로 했다.
우연히 재방송 중인 '무자식 상팔자'를 두 번 본 적은 있지만 공중파가 아닌 종편의 드라마 본방송을 보기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 내가 쓴 소설 '민회빈 강씨'(도서출판 멜론)와 주인공만 다르지 시대적 배경이나 등장인물이 거의 같다.
나는 드라마를 써본 적이 없고, 쓸 줄도 모르지만 정하연 작가는 나도 아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재미있게 풀어가는지 지켜보고 싶어서다.
또 '꽃들의 전쟁' 리뷰는 줄거리를 요약하기보다 가능한 한 드라마와는 다른 역사적 진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써보려 한다.
사극은 사실(史實) 그대로 옮기려다 보면 딱딱해지고 재미도 없게 돼 상당부분 픽션이 가미되기 마련이다.
그게 지나치면 역사왜곡이라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꽃들의 전쟁'을 보다 시비라도 걸어보겠다는 건 절대로 아니다.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재미있게 보되 사실을 알고 보면 공부도 되고, 왜 그런 픽션을 곁들이게 됐는지 등등 드라마 작법에도 눈을 돌려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첫 회는 병자호란에서 패한 뒤 인조(이덕화)를 비롯한 왕실과 조정이 어떤 굴욕을 당했고 백성들이 얼마나 지독한 고초를 겪었는지를 적나라하게 잘 드러내 보여주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탈것도 타지 못하고 삼전도까지 걸어서 내려와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찧는 삼배구고두례라는 치욕적인 항복례를 올린 건 사실이다.
오늘은 딱 두 가지만 드라마 내용과는 다른 사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먼저, 드라마에선 소현세자빈(송선미)이 볼모가 되어 청나라로 가기 전 원손 석철에게 젖을 물리고 자장가를 불러주는 장면이 꽤 오랜 시간 방영됐었다. 눈물겨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세자빈은 국혼을 한지 8년 만에 회임, 병자년(1636) 3월 25일 원손을 낳았다. 청나라 군이 쳐들어오자 임금과 세자 등은 남한산성으로, 세자빈은 8개월된 원손을 안고 왕실과 대신 가족들과 함께 강도(江都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었다.
예성강, 임진강, 한강 등 세 강의 어귀에 있는 강화도는 물길을 모르는 사람은 접근하기 어려운 요새라서 한 달여는 잘 버텼다.
하지만 정축년(1637년) 1월21일, 청 태종의 이복동생인 도르곤이 이끄는 1만6천여 병사가 뗏목을 만들어 도하준비를 끝냈다는 소식을 들은 세자빈은 내관 김인을 불러 '유모와 함께 원손을 데리고 산속에 숨어 있다가 섬을 빠져 나가라'고 명했다.
다음 날 강화도는 적군에 함락됐고 세자빈 등은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월5일 세자빈은 세자(정성운)와 함께 당시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으로 떠났다.
아마도 원손의 생사조차 모른 채 볼모가 되어 머나먼 이국땅으로 향하는 세자빈의 속은 새까맣게 탔을 것이다.
'원손은 무사하다' 소식이 대권에 알려진 건 2월 18일이었다. 김인으로 부터 원손을 넘겨 받은 송국택 등이 원손을 모시고 성을 넘어 교동(喬桐)에 잠시 머물다 충남 당진(唐津)으로 가 안전하게 피신하고 있다고 알려 온 것이다.
이 사실이 세자빈에게 전해진 것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원손을 유모의 품에 안겨 보낸지 한달 만이었다.
또 하나, 드라마에선 청나라 역관인 정명수라는 자가 조선에 호의적인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조선인이지만 일찌기 청나라로 가 조선어 역관 노릇을 하고 있던 정명수는 처음부터 조선의 대신들을 멸시하며 함부로 굴었다.
정축년 2월5일자 왕조실록엔 '왕세자가 오랑캐 진영에서 와서 하직을 고하고 떠나니, 신하들이 길 가에서 통곡하며 전송하였는데, 혹 재갈을 잡고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가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이에 정명수(鄭命壽)가 채찍을 휘두르며 모욕적인 말로 재촉하였으므로 이를 보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돼 있다.
정명수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왕실과 조정에 끊임없이 벼슬과 금품을 요구하는 등 횡포를 일삼아 '조선의 골치거리'로 꼽혔을 정도였다.
[출처] '꽃들의 전쟁', 세자빈은 한달 동안 원손의 생사조차 몰랐다. |작성자 김용상
남한산성 행궁 '남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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