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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루르드성지와 벨라뎃다성녀(2013.6.4.화)/인천 차이나타운-해안성당 루르드성모상 2장

 [루르드성지와 벨라뎃다성녀]

 

큰딸이 올해 5월19일 부터 성당을 다니기로 하여 5월19일 부터 교리공부를 하고 있다...^-^

 

세례명을 생각한 것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벨라뎃다"로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인터넷으로 '벨라뎃다'를 검색해 보니...프랑스의 '루르드 성모 성지'를 만들게 한 성녀라고 한다...^-^

주요 내용만 추린것은 아래와 같다...^-^

 

성모님은 가난한 집의 14세의 소녀인 벨라뎃다에게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열여덟 번 발현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기적수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가? 1858년 2월 15일, 아홉 번째 발현 때 성모님께서 벨라뎃다에게 물을 마시라고 해서 동굴 뒷편의 땅을 팠더니 처음에는 흙탕물이 나왔고 계속 파들어가자 물이 솟아오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도 그 물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고 현재 매일 27,000갈론의 물이 나온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루르드의 기적수를 분석해 본 결과 인체에 대단히 유익한 게르마늄 성분이 다른 물보다 훨씬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현재도 많은 순례객들이 이 기적수를 먹고 그 물에 목욕을 한다.

 

1862년 1월 18일 프랑스 타르브(Tarbes) 교구장 로랑스(Laurence) 주교는 성모님께서 루르드에 발현하셨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교서를 발표하고, 성모님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 동굴 위에 성당을 건립할 것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성모님의 원의대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성전이 건립되어 1876년 축성되었다.

 

1879년 4월 16일 베르나데트(벨라뎃다)는 지병이 악화되어 35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 천상에 들었다. "이 죄인을 위해 기도해주셔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그녀의 시신은 부패되지 않은 채 루르드를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고 있다. 교황 비오 11세는 1933년 12월 8일 베르나데트를 성인품에 올렸다.

 

현재 루르드 성지에는 성모님 발현을 기념하여 지어진 여러 성당이 있다. 처음에는 작은 성당을 지었다가 순례객들이 많아지자 차츰 증축하였고 최근에는 다른 성당들도 지어졌다. 그리고 대광장의 아래에는 수만 명이 들어가는 웅장한 지하 성당이 있다. 성모님이 발현한 동굴 앞에도 제대가 있어서 매일 미사가 드려지고 있다.

박물관에 가면 당시 성모님의 발현 기사가 있는 신문을 읽을 수 있고 당시 본당 신부의 흉상 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매일 오후 3시에 환자들은 성당 앞에 모이고 장엄한 성체 강복이 거행된다. 그때 많은 환자들에게 치유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저녁 8시에는 촛불을 켜고 광장을 돌면서 여러 나라 말로 묵주기도를 드린다.

루르드는 기적도 일어나지만 순례객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고 기도하는 분위기를 제공해 준다. 그래서 매년 많은 순례객들이 찾는 것이다. 요즘 한국도 90년대에 해외 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많은 교우들이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

 

 

'벨라뎃다' 성녀에게 나타난 성모님은 흰옷에 푸른색 띠를 허리에 두르고 오른팔에는 묵주를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두 발에는 노란색 장미가 각각 한 송이씩 놓여있었다고 한다...^-^

 

성모님...감사합니다...아멘...^-^ 

 

- 2013년 6월4일 화요일...수산나 -

 

내가 본 루르드 1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던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그분이 직접 활동했던 성지들을 순례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성모 신심이 강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이스라엘의 성지들뿐 아니라

교황님이 계신 로마와 성모님이 발현한 성지들을 많이 순례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는 성모님에 대한 수많은 성지가 있다.

다행히 전세계의 여러 성모 발현 성지를 순례할 기회를 가졌다.

이런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성모님의 성지를 순례한 경험을 교우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순례기를 쓴다.

 

 

먼저, 성모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보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모님예수님을 낳으신 분이시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죽으시고 승천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는 성모님을 "은총의 중개자" 라고 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성모님은 전 세계 모든 사제들의 수호자이고 한국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이다. 그리고 교회 전례력을 보면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과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등 17개의 성모님 축일이 있다. 이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의 깊이를 잘 보여 준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에는 인간에게 거의 나타나지 않으셨다. 아마 1673년 예수 성심에 깊은 신심을 가진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이 유일한 발현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프랑스의 방문 수녀회(The Visitation) 소속인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18개월 동안이나 나타나셔서

 

 

"사람들은 내 성심을 공경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을 영원한 사랑으로 대하는 내게 그들은 냉담한 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당시 얀세니즘(Jansenism)이란 이단이 만연한 것을 걱정하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발현하신 유일한 경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성모님을 자주 세상에 발현시키고 계신다. 예수님은 거의 매 세대마다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고 기적을 보여 주시는 데에 인색하지 않으시다.

 

 

루르드로 가는 길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사제가 된 후에도 성모님의 발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다. 당시 필자가 가지고 있는 성모 발현 성지에 대한 지식은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 성모님의 발현 성지가 있고 기적수가 솟아 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병이 치유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기회가 있으면 한번 순례를 하고 싶었는데 마침 1982년 4월 포크라레 단기 연수 교육을 받으러 로마에 가게 되었다. 좋은 기회다 싶어서 교육을 마치고 루르드 성모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서 아예 한국에서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로마로 갔다.

 

 

외국이라고는 처음 나온 데다가 불어를 전혀 못했기 때문에 연수 교육을 받는 동안 파리에서 루르드로 어떻게 갈 것인가 걱정을 많이 하였다.

다행히 함께 교육받는 신부 중에 파리에서 지내다 온 베트남 신부가 있어서 물어보니 파리에 있는 세 개의 역 중에서 루르드로 가는 역을 가르쳐 주었다. 불어 발음이 어려워 종이에 적어 달라고 했다. 연수를 마치고 교구 신부 두 사람이 공부하고 있는 바오로 기숙사에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일찍 파리로 떠났다.

 

 

드골 공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적어 온 역 이름을 보여 주었더니 친절하게 데려다 주었다. 출발 시간을 확인하고 표를 끊고 나니 긴장이 풀어지면서 심한 허기를 느껴 식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프랑스어로 된 메뉴판을 보니 어떤 것이 밥인지 반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돈을 가지고도 점심을 굶을 판이었다. 마침 앞좌석에 햄버거를 먹고 있는 할머니가 있어서 웨이터에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같은 것을 가져오라고 해서 겨우 점심을 해결했다.

 

 

열차에 오르니 한국에서 보았던 007 영화에 나오는 칸막이 열차 칸이 있어서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그 칸에 앉았다. 그러나 조금 후에 승무원이 오더니 프랑스어로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눈치를 보니 뒷쪽 칸으로 가라고 하는 것 같아서 뒷편 열차 칸에 가서 앉아 있는데 또 오더니 같은 말을 하면서 더 뒷쪽으로 가라고 했다. 말을 모르니 왜 귀찮게 하느냐고 물어 볼 수도 없고 해서 마지막 칸에 가면 더 뒷쪽으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마지막 칸으로 갔다.

 

 

그곳에는 서너 명의 승객밖에 없었다. 그 중 한 사람에게 "루르드 오케이" 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했던지 나는 잠이 들어 있었는데 누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기에 눈을 떠보니 친절하게도 내가 처음에 물어보았던 아주머니가 이곳이 루르드라고 알려 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승무원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더러면 큰일 날 뻔했다. 루르드는 스페인 국경과 맞물려 있는 피레네 산맥 가까이에 있는 시골 마을이다.

그리고 파리에서 출발한 열차는 스페인으로 가는 국제 열차이고 루르드로 가는 승객들은 루르드 가까운 역에서 뒷편에 몇 칸만 다른 기관차가 끌고 간다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던 한국 신부님이 열차의 앞칸에 앉아 있다가 스페인까지 간 헤프닝도 있다고 한다.

 

 

로마에서 하루 만에 먼 루르드까지 오긴 왔는데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로마에서 교육받을 때 한국 신부들 중 한 사람의 사촌 여동생이 루르드에서 봉사하고 있다고 해서 전화번호를 적어 달라고 했었다.

그래서 공중전화로 그녀에게 전화를 하니 외국 사람과 같이 와서 호텔을 잡아 주고 다음날 아침 루르드 성지를 안내해 주었다.

필자가 처음으로 성지에 도착했을 때 놀란 것은 전 세계에서 온 수만 명의 순례객 때문이었다. 전날 저녁 늦게 열차에서 내린 사람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많은 순례객들이 어떻게 왔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루르드는 가톨릭(천주교)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성모님의 성지로서 일 년에 약 300만 명이나 순례를 온다는 것이었다.

 

 

루르드의 어제

 

 

그러면 루르드 성모 성지는 어떤 곳인가? 성모님은 가난한 집의 14세의 소녀인 벨라뎃다에게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열여덟 번 발현하셨다.

성모님은 어린 벨라뎃다에게 본당 신부님에게 가서 이곳에 성당을 지으라고 청하라 했다. 그 말을 들은 벨라뎃다는 본당 신부에게 가서 성모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그러나 본당 신부는 첫영성체도 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성모님이 발현해서 성당을 지으라고 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성모님이 어린 소녀에게 발현한다는 소식이 프랑스 전역에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사실인가 확인하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성모님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오직 벨라뎃다가 기도를 드릴 때만 발현하셨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으셨다.

성모님의 중요한 메시지는 성당을 짓는 것 만이 아니라 죄인들의 회개묵주기도를 많이 드리는 것도 포함한다.

 

 

(발췌:'마리아(maria)', 통권 114호, 염봉덕 신부, 아베마리아출판사)

'내가 본 루르드'는 계속됩니다.

 

내가 본 루르드 2

 

 

성모님은 당신이 발현한 곳에 성당을 지으라는 메시지를 벨라뎃다에게 말씀하셨으나 본당 신부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신부는 소녀에게 발현하시는 분의 이름을 알아오라고 말했다.

벨라뎃다가 성모님에게 본당 신부의 말을 전했더니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말했다. 벨라뎃다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제관까지 가는 동안 계속해서 외어서 본당 신부에게 그대로 전했다. 이 말을 들은 신부는 성모님이 발현하셨음을 확신하고 주교님에게 보고를 드렸다.

 

 

본당 신부님은 그 당시 신학자들이나 쓰는 어려운 성모님의 호칭을 어린 소녀가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1862년 1월 18일에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 께서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신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벨라뎃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루르드를 떠나서 "길다르드(The Convent of St. Gildard)" 수녀원에 들어가서 수녀가 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1879년 4월 16일 젊은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모님의 품안으로 돌아갔다.

현재 성녀 벨라뎃다의 시신은 1926년 이래 수녀원의 작은 경당에 아름다운 청동과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관에 보관되어 있어서 순례객들이 볼 수 있다. 안내 책자의 사진을 보면 시신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잘 보존되고 있다.

 

 

루르드의 오늘

 

 

현재 루르드 성지에는 성모님 발현을 기념하여 지어진 여러 성당이 있다. 처음에는 작은 성당을 지었다가 순례객들이 많아지자 차츰 증축하였고 최근에는 다른 성당들도 지어졌다. 그리고 대광장의 아래에는 수만 명이 들어가는 웅장한 지하 성당이 있다. 성모님이 발현한 동굴 앞에도 제대가 있어서 매일 미사가 드려지고 있다.

박물관에 가면 당시 성모님의 발현 기사가 있는 신문을 읽을 수 있고 당시 본당 신부의 흉상 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매일 오후 3시에 환자들은 성당 앞에 모이고 장엄한 성체 강복이 거행된다. 그때 많은 환자들에게 치유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저녁 8시에는 촛불을 켜고 광장을 돌면서 여러 나라 말로 묵주기도를 드린다.

루르드는 기적도 일어나지만 순례객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고 기도하는 분위기를 제공해 준다. 그래서 매년 많은 순례객들이 찾는 것이다. 요즘 한국도 90년대에 해외 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많은 교우들이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

 

 

그러면 기적수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가? 1858년 2월 15일, 아홉 번째 발현 때 성모님께서 벨라뎃다에게 물을 마시라고 해서 동굴 뒷편의 땅을 팠더니 처음에는 흙탕물이 나왔고 계속 파들어가자 물이 솟아오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도 그 물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고 현재 매일 27,000갈론의 물이 나온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루르드의 기적수를 분석해 본 결과 인체에 대단히 유익한 게르마늄 성분이 다른 물보다 훨씬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현재도 많은 순례객들이 이 기적수를 먹고 그 물에 목욕을 한다. 그리고 성모 동굴 앞에는 장애인들이 건강을 되찾고 난 후에 버리고 간 수많은 목발들이 걸려 있다.

 

 

루르드에서는 아직도 기적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가? 그렇다. 필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다가 "성모님의 기적"이라는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탈리아의 한 군인이 대퇴부에 악성 종양이 생겨서 약 1년 동안 육군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병이 호전되기는 커녕 점점 더 악화되어 뼈는 거의 없어지고 근육으로만 다리가 붙어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군의관들은 본인과 부모들에게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사형선고와 같은 군의관의 말을 들은, 열심한 가톨릭 신자인 그의 어머니는 이제 성모님에게 의탁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과 같이 루르드에 가서 며칠간 순례를 하고 기적수에 목욕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별로 차도가 없었다. 어머니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아들과 열일곱 시간 동안이나 열차를 타고 가서 루르드를 순례했다.

루르드에 돌아 온 다음 날 아들은 이상하게도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서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환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실을 몇 바퀴 돌았다. 이 소식을 들은 군의관들은 즉시 엑스레이를 찍어보았다. 그랬더니 거의 없어진 뼈들이 놀랍게도 정상인과 같이 되어 있었다.

 

 

병이 완치된 그는 얼마 후 퇴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성모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어머니와 함께 루르드에 있는 국제 의학 심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루르드 성지를 순례하고 병이 나았다고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그들의 치유를 기적이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는데 신중을 기하고 있다.

하지만 위원회는 그의 기록을 검토한 후 이것은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일이고 루르드를 순례한 후에 일어난 기적이라고 인정했다. (가톨릭)교회에서도 그 이탈리아 군인의 치유는 루르드에서 일어난 기적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유명한 정형학회 학술지에도 이 기적적인 치유에 대한 글이 게재되었다.

(발췌:'마리아(maria)', 통권 114호, 염봉덕 신부, 아베마리아출판사)

 

루르드에 오신 성모님 1

 

 

루르드는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베르나데트(벨라뎃다)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는 1844년 1월 7일 루르드에서 가난한 (농촌의 물방앗간)방앗간 주인의 여섯 아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서 천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으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까닭에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14세까지 학교 교육은 물론이요 교리 교육도 전혀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성이 매우 단순하고 신앙적이었으며 다른 기도는 알지 못했어도 묵주기도만은 열심히 바쳤다고 한다.

 

 

루르드에 오신 천상의 어머니

 

 

성모님께서 다시금 이 지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곳은 루르드의 가브(Gave) 강변에 있는 마사비엘르(Massabielle) 동굴로,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열여덟 번이었다.

 

 

첫 번째 발현 - 2월 11일 목요일, 베르나데트(벨라뎃다)는 또래의 다른 소녀와 함께 나무를 하기 위해 마사비엘르 동굴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동굴 앞에 흐르고 있는 시내를 건너기 위해 그녀가 양말과 신발을 벗으려는 순간 동굴 쪽에서 휙 몰아치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또다시 같은 소리를 듣고는 동굴로 시선을 두는 순간 그녀는 동굴 위에 아름다운 부인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부인은 흰옷에 푸른색 띠를 허리에 두르고 오른팔에는 묵주를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두 발에는 노란색 장미가 각각 한 송이씩 놓여있었다.

 

 

그 부인이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자 그 순간 그녀는 두 발이 땅에 얼어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발을 떼지 못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묵주를 쥐고 십자성호를 그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부인이 커다랗고 빛나는 십자가가 달린 묵주를 쥐고 십자성호를 긋자 그녀도 간신히 기도를 할 수 있었다. 그 부인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묵주알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것을 그녀는 기도 중에 볼 수 있었다. 이 발현은 약 15분 동안 지속되었지만 옆에 있던 다른 두 소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함께 땔감 나뭇가지를 주우러 갔던 그의 동생 뚜아네뜨(Toinette)와 친구 쟌느(Jeanne)는 보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동생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사실을 말해 주었으나 어머니에게 알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마도 잘못 본 것이겠지" 하시며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주어온 나무를 팔고 빵을 사는 등의 일상적인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낮의 일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밤에 저녁기도를 바칠 때 성모송을 하게 되자 벨라뎃다는 그날 아침 부인의 만남이 떠올라 감격이 격해져서 응답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벨라뎃다를 설득시키기 위해 애를 쓰셨다. "그건 꿈이야! 착각일 뿐이다!" 어머니는 잠을 자면 그런 생각들을 잊어 버리리라 생각하며 뚜아네뜨와 벨라뎃다를 일찍 자도록 하였다.

 

 

그 이튿날 금요일 벨라뎃다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시 그 생각에 사로 잡혔다. 정신을 온통 빼앗아 버리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애써 보았으나 억제하기에는 너무 힘에 겨워 "어떤 힘이 나를 마사비엘 동굴로 끌고 가고 있어요." 하고 말하였다. 어머니는 "일이나 해라." 하고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루르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처음 알게된 이래 이때까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였다. 그들은 로마제국과 반달족 그리고 아리우스와 알비겐 등 여러 민족과 이단자들의 박해를 극복하였다.

소위 종교개혁이라는 거센 물결이 밀어 닥쳐서 인근의 많은 주민들이 가톨릭(천주교)에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개종할 때도 루르드 주민들은 그들의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그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국내 전체가 흥분과 영광의 도가니 속에 빠져 들어갈 때도 그들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지식인과 자유주의자들이 하느님을 거슬러 일어난 반란에도 그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특히 성모 마리아 공경에도 아주 열성이 대단하였다. 성모님이 루르드를 택하신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성모님이 발현하셨다는 뉴스가 전파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루르드의 마사비엘 동굴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모님을 보는 것은 벨라뎃다 한 사람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컴컴한 동굴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때 동굴에 모인 사람들은 벨라뎃다의 모습을 봄으로써 성모님의 발현을 알게 되었다. 벨라뎃다는 성모님이 발현하면 곧바로 탈혼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의 말을 모든 사람들이 확고히 믿게 되었다.

그러나 관리들과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비웃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소란을 피우며 모여드는 군중을 해산시키고 통제를 가하였다.

 

 

두 번째 발현- 1858년 2월 14일(주일), 벨라뎃다의 동생 뚜아네뜨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기에, 호기심 많은 아이들과 함께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벨라뎃다는 마사비엘 동굴로 내려갔다.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둘째단이 끝나갈 무렵 "보아라! 저기 서 계신다." 하고 벨라뎃다가 소리쳤다.

 

 

"저기 계신다. 묵주를 오른팔에 늘어뜨리고 그분은 너희들을 바라보고 계신다."

 

 

아이들은 성수를 뿌리면서 마귀 쫓는 기도를 하는데 벨라뎃다는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셨으면 그대로 계시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가십시오"

 

 

라고 중얼거렸다.

 

 

그럴수록 부인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때 벨라뎃다는 신비적인 환상으로 몰입되어(탈혼상태에 빠져)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몰랐다.

이때부터 루르드의 마을에서 일어나는 성모님의 발현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발췌:'마리아(maria)', 통권 144호, 아베마리아출판사,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

김영대(루드비꼬), 성요셉출판사)

'루르드에 오신 성모님'은 계속됩니다.

 

루르드에 오신 성모님 2

 

 

세 번째 발현 - 2월 18일 목요일, 베르나데트(벨라뎃다)는 동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성모님을 향해 종이와 펜을 내밀며 "당신의 이름을 적어주십시오." 라고 청했다. 그러자 성모님은 "그럴 필요는 없다." 고 하시며 "15일 동안 이 동굴에 와주겠니?" 라고 물으신 후 그녀가 그러겠다고 약속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이 세상에서는 너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겠지만 저 세상에서는 행복하게 해주마."

 

 

여섯 번째 발현 - 2월 21일(주일) 아침 일찍 마사비엘 동굴로 향했는데 100여명이 이미 동굴 주변을 꽉 메우고 있었다. 성모님은 슬픈 표정을 하시면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모님은 곧 표정을 바꿔 미소를 지으셨다. 발현이 있은 이날은 마침 사순절 첫번째 주일이라 벨라뎃다는 미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경찰에 의해 쟈코베 서장 앞으로 끌려갔다. 쟈코베는 날카로우면서도 직접적이고 예기치 않은 질문을 소녀에게 계속하였다.

 

 

그러나 벨라뎃다는 그 질문에 따라 핵심을 빗나가는 일 없이 분명하고 간단하며 냉정하게, 때로는 잠시 생각하고 대답하기도 했지만, 한결같이 자신있게 대답을 하였다. 특히 핵심적인 발현에 관계되는 질문에 관해서는 더욱 정확한 대답을 하였다.

 

 

"그래, 그 여자......아니 그 부인은 옷을 입고 있었느냐?"

"푸른 리본을 맨 흰옷에 머리에는 흰 수건을 쓰고 있었고, 양쪽 발엔 노란 장미가 있었지요. 그리고 손에는 묵주를 들고 있었어요."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니?"

"아니요. 알지 못합니다.'

"예뻤니?"

"네, 아주 예뻤어요."

"누구만큼? 벨라송부인이나 뒤포양만큼 예뻤니?"

"그분들과 그 부인은 비길 수가 없습니다."

"나이는?"

"젊습니다."

"처음에 이런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 했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제일 처음 동생 뚜아네뜨에게 이야기했고, 오후에는 쟌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다음엔 누구에게 이야기했지?"

"밤에 어머니께 말씀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뭐라고 하셨지?"

"꿈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곳에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수녀들에게도 이야기했나?"

"원장 수녀님과 재봉을 가르쳐 주시는 수녀님께 이야기했습니다."

"모두가 너를 비웃고 있고, 네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고, 네가 미쳤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니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너는 다시는 동굴에 가지 말아야 한다."

"저는 보름동안 그곳에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총경은 소녀를 납득시키는데 실패했다. 게다가 그 조용하고 차분한 명석함은 미친 아이가 아닌 게 분명하였다. 첫 영성체도 하지 않은 아이가 속임수를 쓸 수도 없지 않은가? 또한 소녀는 성모님의 발현에 대해 생명과 같이 굳센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성모님과의 약속을 소중히 간직하며 지키기로 다짐하였다.

 

 

일곱 번째 발현 - 2월 23일 화요일, 성모님은 그녀에게 특별한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하지만 그녀는 성모님의 뜻에 따라 그것을 비밀로 지켰으며 죽을 때까지 매일 그 기도를 바쳤다. 성모님은 이날 그녀에게 이렇게 지시하셨다.

 

 

"사제에게 가서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여기에 성당을 짓기를 내가 원한다고 전하여라."

 

 

여덟 번째 발현 - 2월 24일 수요일, 이삼백명의 사람들이 동굴에 모여있었다.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매우 슬픈 표정의 베르나데트(벨라뎃다)는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보속하라, 보속하라..." 고 되뇌었다. 그러고는 성모송을 바쳤는데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그렇게하라고 성모님께서 요청하셨다고 그녀는 전했다.

 

 

아홉 번째 발현 - 2월 25일 목요일, 성모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내 딸아, 지금 샘으로 가서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어라. 그 가까이에서 자라는 풀을 먹도록 해라."

 

 

이 말씀을 하신 뒤 성모님은 손가락으로 어떤 지점을 가리키셨다. 그곳엔 더러운 흙탕물이 있었다. 베르나데트는 차마 그것을 마실 수가 없어서 네 번이나 더 깊이 판 후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었다. 그리고 풀도 먹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동굴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미친 것이 틀림없어." 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베르나데트가 손가락으로 그 샘을 찾아낸 이후 그곳은 하루에 십만 리터의 물이 나오는 굉장한 규모의 샘이 되었으며 그 샘물로 인해 많은 이적 현상들이 일어남에 따라 그것은 "기적의 물", "기적수"라고 불리게 되었다.

 

 

열세 번째 발현 - 3월 2일 화요일, 동굴엔 1650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성모님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하셨다.

 

 

"사제에게 가서 성당을 지으라고 전하여라. 난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원한다."

 

 

베르나데트에게서 성모님의 말을 전해들은 본당 신부는, 먼저 그 부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라고 명했다.

 

 

열여섯 번째 발현 - 3월 25일 목요일, 지난 3월 4일 발현 후 20일 가량 성모님께서 발현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녀는 지난 밤 동굴에 꼭 가야 된다는 어떤 강한 충동을 느껴 새벽 5시에 일어나 동굴로 향했다.

이른 새벽인데도 경찰서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이미 거기에 나와있었다. 동굴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성모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성모님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성모님은 미소만 지으셨다. 그리고 네 번째 물음에 드디어 대답하셨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벨라뎃다)가 알아듣는 그곳 방언으로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Que soy era Immaculada Concepciou)."

 

 

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녀는 그말의 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잊어버리지 않게 입으로 자꾸 반복하여 외워야 했다. 그리고 발현이 끝나자 곧장 본당 신부님에게로 달려갔다. 입으로는 그 말을 계속 되뇌면서, 숨이 턱에 닿는 듯 달려간 그녀는 신부님이 그동안 궁금해했던 대답을 드디어 들려줄 수 있었다.

 

 

열여덟 번째 발현 - 7월 16일 금요일, 카르멜 산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그날 베르니데트는 매우 강한 내적 충동을 느껴 동굴로 올라갔다. 저녁 8시였다.

6월 10일 이후로 그곳은 울타리가 쳐져 있어 동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기에 그녀는 가브 강가에 무릎을 꿇고 동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예전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깊은 황홀경에 빠졌다. 성모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그날 성모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대신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의 성모님을 볼 수 있었다. 루르드에서의 마지막 발현이었다.

 

 

루르드 발현의 의미

 

 

루르드 발현이 주는 첫 번째 의미는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를 성모님께서 직접 확인시켜주신 데 있다. 루르드에서 열여섯 번째 발현하셨을 때 성모님은 당신을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 라고 세상에 공포하셨다.

그런데 원죄 없는 잉태 교의는 루르드 발현이 있기 4년 전인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의 회칙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Ineffabilis Deus)에 의해 선포되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그때까지 오랜 세기에 걸쳐 이 교의는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때 비로소 그 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의미는 성모님께서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 루르드에 오셨으며 그것을 위해 우리의 기도보속을 요청하셨다는 점이다.

성모님묵주를 가지고 계셨으며 발현 첫날에는 베르나데트와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시기까지 하셨다.

이것은 루르드 발현의 핵심이다. "죄인들이 피난처"이신 어머니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지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는데 루르드 이전이나 이후의 발현을 통틀어 볼 때 공통적인 주제는 죄인의 회개기도의 촉구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의미는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의 역사가 가시적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다른 발현들에서도 그 발현의 진실을 증명할 수 있는 표지로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동반되었지만 루르드에서는 훨씬 두드러진 듯하다.

그해 2월 25일 베르나데트의 손을 거쳐 최초로 세상에 드러난 샘물은 많은 병자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을 영적 삶으로 이끌었는데 물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은 부정한 것을 씻어 정결하게 하고(레위 11, 32; 민수 19,1;히브 10,22), 모든 것에 생명을 주며(판관 15, 19; 1사무 30, 11; 이사 41, 17; 에제 47장),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다(창세 1,2; 시편 29장),

 

 

또한 물은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고(마태 3,11),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표징(요한 4,14)이 된다. 그리하여 세상의 한편에 있는 시골 마을이던 루르드는 세계적인 순례지로 거듭나고 오늘도 그곳에서 하느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1862년 1월 18일 프랑스 타르브(Tarbes) 교구장 로랑스(Laurence) 주교는 성모님께서 루르드에 발현하셨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교서를 발표하고, 성모님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 동굴 위에 성당을 건립할 것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성모님의 원의대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성전이 건립되어 1876년 축성되었다.

 

 

(발췌:'마리아(maria)', 통권 144호, 아베마리아출판사,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

김영대(루도비꼬), 성요셉출판사)

 

 

루르드에 오신 성모님 3

 

 

발현 이후의 베르나데트의 삶과 죽음

 

 

"난 이 세상에서는 너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겠지만 저 세상에서는 행복하게 해주마." 라는 성모님의 말씀처럼 베르나데트의 삶은, 적어도 인간적인 시선으로 살펴볼 때에는 갖가지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세상적인 기준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루르드의 샘에서 많은 이들이 치유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 샘은 저를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라는 그녀의 말처럼 고질병으로 늘 고통을 받았고, 가난으로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한 탓에 수도생활을 하는 중에도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야 했다. 또한 지상에서 천상의 분을 만나는 은혜를 입었지만 그로 인해 많은 고통도 받아야 했다.

 

 

1879년 4월 16일 베르나데트(벨라뎃다)는 지병이 악화되어 35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 천상에 들었다. "이 죄인을 위해 기도해주셔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그녀의 시신은 부패되지 않은 채 루르드를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고 있다. 교황 비오 11세는 1933년 12월 8일 베르나데트를 성인품에 올렸다.

 

 

루르드 성모님의 기적

 

 

루르드에 사는 맹인 석수장이인 루이 부리에뜨는 성모님이 주신 샘의 기적적인 보화를 발견한 첫번째 사람이었다. 성모님이 열세번째 발현이 있던 날 그는 자기 딸을 시켜서 그 샘에 가서 기적수를 좀 가져 오도록 하여 그의 눈을 씻었다.

그 순간 20년동안 보지 못했던 그의 눈이 번쩍 열렸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기적수로 인하여 병을 고친 사람은 수천명을 헤아린다.

 

 

성지 순례자들을 위해 목욕탕도 마련되었다. 제이 케이 후스만은 "성모님은 목욕탕지기로 변하셨으며 성모님이 일하시는 곳도 바로 이 더러운 물과 습기로 가득찬 목욕탕 속이다." 라고 말하였다. 비록 사람들이 보지는 못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자주 영육의 치유를 주시기 위해서 루르드에 내려 오신다. 불치병 환자가 그곳에서 기적으로 병을 고치는 경우 사람들은 성모님이 다녀가신 것을 깨닫는다.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놀라우리만큼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1905년 교황 비오 10세가 자주 영성체할 것을 권고한 후로 기적은 목욕탕 안에서보다 성체 거동 도중에 더 많이 일어났다. 1882년에는 의료국이 생겼다. 그것은 루르드에서 발생하는 기적을 철저히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시신경이 완전히 쇠퇴되었던 비레 부인은 1908년 그녀의 시력을 회복했다. 안과 의사들은 그녀는 자연 법칙으로 볼 때 완전히 장님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시력 회복 후 아주 작은 글씨까지 모두 읽을 수 있었다.

한쪽 발이 짧아 절룩거리던 피에르 드 루데르는 1875년 왼쪽 발이 순간적으로 3cm나 자라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기적은 루르드 성당에서 일어났는데 과학적인 법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맥소리 신부는 그의 저서 "교회사 개요"라는 책에서 1858년 이후 50년 동안 루르드에서 발생한 기적적인 치료의 수는 4천 건에 달한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기적이 1년 평균 15건씩 발생한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놀라운 일은 루르드의 한결같은 기적이다. 그곳의 병원은 환자를 남녀별로만 구별해서 수용할 뿐, 병의 종류는 전연 고려하지 않는다. 가지각색의 병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이 같은 방에 빽빽하게 수용되어 있다.

목욕탕의 경우에도 하루에 한번밖에 물을 갈지 않는다. 가지가지의 전염병 환자가 한 목욕탕에서 함께 몸을 씻는다. 그렇지만 그 빽빽한 병실이나 비위생적인 목욕탕에 들어가는 환자치고 본래 있던 병이 더 악화된다든지 다른 사람의 병을 옮겨 받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20세기초 일단의 의사들은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루르드를 폐쇄하려 들었다. 그러나 루르드를 찾아드는 순레자중에 단 하나의 감염자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영국의 한 간호사는 "성모님은 루르드의 모든 병균을 꼼짝 못하도록 하신다"고 말했다. 그와 같이 자연법칙을 정지시키는 성모님의 작업은 오늘날까지 1세기 이상 계속되고 있다. 이 모든 일을 과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의 대부분은 루르드의 일을 무턱대고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육신의 병에 대한 루르드의 기적적인 치료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치료이다. 루르드의 목욕탕이나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루르드의 순례는 누구에게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기 병을 고치려는 희망을 가지고 루르드에 간 병자들도 돌아올 때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곤 한다.

병이 없는 순레자들도 마찬가지다. 그곳을 방문하는 모든 순례자들은 영혼의 새로운 양식을 얻어 성모님을 더욱 공경하게 되며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하게 된다.

 

 

유태인계 오스트리아인인 프란츠 베르펠은 1940년 우연히 루르드에 가게 되었다. 그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프랑스는 이미 독일군의 점령하에 있었다. 베르펠은 나치스 독일군이 잡아죽이려고 찾고 있는 유대인의 한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아내와 함께 스페인으로 피신하려고 국경지대에까지 갔다.

그러나 경비가 철저해서 그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그 근처에 있는 루르드에 숨어 있게 되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벨라뎃다와 성모님의 발현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감명을 받은 나머지 후에,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비참하게 살던 어느 날 나는 속으로 맹세했다. 내가 만일 그 절망적인 상태를 벗어나 미국 땅에 발을 딛게 된다면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나의 모든 능력을 다해 벨라뎃다의 노래를 부르겠다."

 

 

그가 이러한 맹세를 한 것은 언제 독일군에게 잡힐지 모르며 또 달아날 길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였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그는 그곳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미국에 발을 딛게 되자 자기의 맹세를 실천에 옮겼다. 원래 소설가인 그는 "벨라뎃다의 노래"라는 소설을 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녀의 가벼운 사랑등을 얘기하는 세속적인 소설보다 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더욱이 이 책은 영화화 되어 미국과 전세계 곳곳의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수백만 관중들을 놀라게 했다.

 

 

그 책이나 영화를 본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톨릭(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기적같은 것을 믿지도 않는 소위 현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이기엔 너무 우연이다. 프란츠 베르펠이 루르드라는 알지도 듣지도 못한 조그만 마을에 가게된 것도, 신자가 아니면서 예수님의 모친께 대한 얘기에 그렇게 감명을 받아 소설을 쓰게된 것도, 그리고 비신자로써 그런 존경심을 가지고 얘기를 엮어나간 것도 모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 마리 드 몽포르 성인의 예언을 상기하면 대답은 어렵지 않다. 하느님은 당신 모친께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알려지시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성모님은 벨라뎃다와 같이 묵주기도를 하심으로써 묵주기도의 가치를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성모송은 성모님 스스로에게 올리는 기도문이기 때문에 통경하시지 않았지만 영광송은 벨라뎃다와 같이 통경하셨다.

성모님은 당신을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Que soy era Immaculada Concepciou)." 라고 말씀하셨다.그것은 중요한 교리를 다시 강조함과 동시에 이를 선포한 교황 비오 9세가 한 일을 다시 확인하신 것이다.

루르드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성모님은 초자연적인 일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신다. 성모님은 또한 1년 동안 수만 명이 순례하는 기념 성당을 남겨 놓으셨다. 이 거대한 기도의 전당에서 일어난 영신적인 치료와 종교적인 열정은 양으로 헤아릴 수 없으며 프랑스와 전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해안성당  루르드성모상...^-^

 

 

인천 차이나타운...해안성당 루르드성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