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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세설신어'를 읽고(2013.7.4.목)/분재 1장

 

 [정민의 세설신어] [217] 무료불평(無聊不平)

조선일보/사외칼럼/정민 한양대교수 고전문학 

입력 : 2013.07.03 03:03

 
료(聊)는 부사로 쓸 때는 '애오라지'로 새기고, 보통은 힘입다, 즐긴다는 의미로 쓴다. 무료(無聊)하다는 말은 즐길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옛글에서는 흔히 무료불평(無聊不平)이라고 썼다. 회재불우(懷才不遇)! 재주를 품고도 세상과 만나지 못했다. 꿈이 있고 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데 세상은 나를 외면하고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 이때 생기는 마음이 무료불평이다. 마음에 맞는 일이 없어 무료하고, 그 끝에 남는 것이 불평이다. 불평은 마음이 들쭉날쭉 일정하지 않아 울근불근하는 상태다.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우성전(禹性傳)에게 쓴 짧은 편지에서 "그의 글은 앞서 보았는데, 그 말에 무료불평의 뜻이 조금도 없어 깊이 경복할 만합니다"라고 했다. 충분히 무료불평을 품을 만한 상황임에도 그가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인상적이라는 내용이다. 사람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으면 무료불평에 빠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무료불평을 꾹 눌러 이것을 창조적 에너지로 쏟아 부을 때,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한유(韓愈)는 '고한상인을 전송하는 글(送高閑上人序)'에서 "장욱(張旭)은 초서를 잘 써 다른 기예는 익히지 않았다. 기쁨과 노여움, 곤궁함과 즐거움, 원한이나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술에 취해 무료불평이 마음에 격동됨이 있으면 반드시 초서에다가 이를 폈다"고 썼다. 그의 초서가 위대한 것은 손재주로 쓴 글씨가 아니라 그 안에 무료불평의 기운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이정귀(李廷龜)도 권벽(權擘)의 시집에 쓴 서문에서 "희로애락과 무료불평을 반드시 시에다 펼쳐서 밖으로 영욕(榮辱)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시에 대한 몰입과 맞바꾸지 않았다"고 썼다. 이럴 때 무료불평은 건강한 창작 활동의 원천이 된다.

젊음은 본능적으로 무료불평의 상태다. 무언가 하고 싶은데 세상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할 수 있는데 인정하지 않는다. 때로는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몰라서 무료불평에 빠지기도 한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구성원의 무료불평을 어떻게 창조적 에너지의 동력으로 삼도록 해주느냐에 달려 있다. 무료불평을 술 먹고 부리는 행패로 풀게 하면 안 된다. 자신에게 나는 분(忿)을 남에게 퍼부으면 못쓴다. 시스템의 마련만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의지가 중요하다.

(간추린 요점)

 

 꿈이 있고 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데 세상은 나를 외면하고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 이때 생기는 마음이 무료불평이다.

 

사람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으면 무료불평에 빠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무료불평을 꾹 눌러 이것을 창조적 에너지로 쏟아 부을 때,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장욱(張旭)은 초서를 잘 써 다른 기예는 익히지 않았다. 기쁨과 노여움, 곤궁함과 즐거움, 원한이나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술에 취해 무료불평이 마음에 격동됨이 있으면 반드시 초서에다가 이를 폈다"고 썼다. 그의 초서가 위대한 것은 손재주로 쓴 글씨가 아니라 그 안에 무료불평의 기운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이럴 때 무료불평은 건강한 창작 활동의 원천이 된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구성원의 무료불평을 어떻게 창조적 에너지의 동력으로 삼도록 해주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에게 나는 분(忿)을 남에게 퍼부으면 못쓴다. 시스템의 마련만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의지가 중요하다.

 

(단상) [정민의 '세설신어'를 읽고]

 

조선일보 정민의 [세설신어]의 제목이 '무료불평(無聊不平)'이다.

 

'무료불평'이란 꿈이 있고 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데 세상은 나를 외면하고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 이때 생기는 마음이 무료불평이라고 한다...^-^

 

유성룡이 우성전에게 쓴 편지에 "그의 글은 앞서 보았는데, 그 말에 무료불평의 뜻이 조금도 없어 깊이 경복할 만합니다"

 

한유(韓愈)는  '고한상인을 전송하는 글(送高閑上人序)'에서  "장욱(張旭)은 초서를 잘 써 ...............술에 취해 무료불평이 마음에 격동됨이 있으면 반드시 초서에다가 이를 폈다"

 

이정귀(李廷龜)도 권벽(權擘)의 시집에 쓴 서문에서  "희로애락과 무료불평을 반드시 시에다 펼쳐서 ................시에 몰입과 바꾸지 않았다."

 

정민의 '세설신어' 중 이와 같은 글을 읽고....'유성룡/우성전/한유/장욱/이정귀/권벽' 등의 인물을 검색하느라...어제 밤을 꼴딱 새어...새벽 5시까지 했다...ㅎㅎ...^-^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린 인물이 유성룡인데...일사불란하게 정리를 하지는 못하겠으나...한마디로 결론을 낸다면 훌륭하고 유연한 지략가이자 경세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ㅎㅎ...^-^

 

 

대략 간추린다면, 유성룡은 이순신 보다 3살 연상으로...어린시절 같은 고향에서 자랐는데...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추천하였고..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는 유성룡도 실각한 어찌보면 운명을 같이한 인연이라 할 수 있겠다...ㅠㅠ...^-^

유성룡은 탁월한 경세가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이순신과 함께 일익을 담당한 재상이며,  조세제도에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아 사대부들의 거센저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대동법의 전신인 '작미법'을 시행하고...병역면에서 양반과 천민이 '속오군' 에 의무적으로 편입하도록 개혁을 일구어낸 백성을 위한 진정한 청백리 재상이었다...또한 실각 후 임진왜란의 전황을 상세하게 기록한 '징비록'(국보)의 저자이기도 하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우성전, 김성일과 동문수학하고 함께 동인으로 활동했는데...정철의 처벌문제로 인해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

이때 우성전이 남산 밑에 살아 남인, 이발이 북악산 밑에 살아 북인이라 불리게 되었으며....남인은 온건파인 유성룡, 우성전 등이고, 북인은 강경파인 이발, 이산해, 정인홍 등이라고 한다...^-^

 

"무료불평의 뜻이 조금도 없어 깊이 경복할 만합니다." 라고 유성룡의 편지에 쓴 동문수학 친구인 '우성전'은 임진왜란 때 '추의군'을 만들어 의병활동을 하다 부평에서 전사했는데...그의 부인이 허난설헌의 언니이며,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누이 였다는 내용 등을 흥미진진하게 읽다가 더욱 밤을 새게 된 것이다...ㅎㅎ...^-^    

 

한유가 "장욱(張旭)은 초서를 잘 써 ...............술에 취해 무료불평이 마음에 격동됨이 있으면 반드시 초서에다가 이를 폈다"고 정민의 세설신어에서 소개했는데....한유와 장유는 당나라 사람으로, 한유는 문학가이자 철학자이고...초서를 잘 쓴 장욱은 전해지는 얘기로는 그가 종종 크게 취한 뒤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이 돌아다닌 뒤 붓을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장미치광이'[張顚]라고 불렀다고 하는 내용을 읽었다...ㅎㅎ...^-^

 

이정귀(李廷龜)가 권벽(權擘)의 시집에 쓴 서문에서  "희로애락과 무료불평을 반드시 시에다 펼쳐서 ................시에 몰입과 바꾸지 않았다."는 글귀를

써 주었다고 정민의 세설신어에서 소개되었다.....ㅎㅎ...^-^

 

이정귀를 역시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이정귀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치려한다는 명나라 장수 정응태의 무고가 있자, ‘조선국변무주문(朝鮮國辨誣奏文)’(변명상소문)을 지어 명나라에 가서 무고임을 밝힌 명성높은 문장가 재상이라고 한다...ㅎㅎ...^-^

 

권벽은 여러 왕들의 실록을 편찬하는 등 오랫동안 사관을 지냈는데  안명세(安名世)·윤결(尹潔) 등 청류 선비들과 교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당시 윤임(尹任) 등과 친하며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공박하면서 야기된 을사사화에 화를 입자 모든 교유를 끊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고 벼슬을 하는 중에도 평생 남과의 교유를 끊고 폐쇄적 삶을 살았다고 한다. 

 

권벽의 아들은 시인 권필인데...권필은 광해군의 외척인 유희분의 세력을 풍자하는 '궁류시'를 지어 발각이 되는 바람에...광해군의 친국으로 말미암아 장살에 맞은 독이 퍼져 죽은...인조반정의 시발점이 되게 한 시인이다.

 

세상에 말없이 항의하며 침울하게 살아간 아버지, 불의한 세태와 타협하지 않는 형들 아래 시인 권필은 강인한 비판적 지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 권력에 빌붙어 권세를 부리던 외척 유희분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는 혐의로 광해군의 친국(親鞫ㆍ임금이 직접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 아래 혹독한 형벌을 받은 직후였다. 들것에 실려 동대문 밖으로 나왔다가 친구들에게 막걸리를 청해 마셨는데 장독이 올라 이튿날 죽음에 이른 것이다. 

 

'주생전'을 지은 권필과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절친한 벗이며 동갑내기였고, 당대의 탁월한 시인이면서 시대의 아웃사이더 였다...권필이 죽은지 6년 후에 허균이 서울의 저자거리에서 역모죄로 그의 머리가 막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 2013년 7월4일 목요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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