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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펜화 에세이

중앙[김영택의 펜화기행]-한국 풍경 22개

[김영택의 펜화기행] 경남 합천군 영암사터

[중앙일보] 입력 2003.10.09 19:58 / 수정 2006.02.17 00:33

망한 절터, 즉 폐사지를 찾기는 처음이어서 기대반 우려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암사터의 돌축대를 보는 순간 호기심은 놀라움으로 변하고 결국에는 감격에 휩싸였습니다.

세곳의 축대는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만 쌓았는데 쐐기돌까지 박아 놓은 것이 불국사 외에는 견줄 데가 없습니다. 금당터 앞에 돌출시켜 쌓은 축대 위에는 쌍사자 석등이 빼어난 자태로 서 있습니다. 축대 양옆의 곡선으로 만든 층계 또한 보기 드문 장치입니다. 금당터의 기단은 정방형이어서 목탑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름다운 황매산을 배경으로 우뚝 선 목탑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기단의 층계에는 소맷돌로 나르는 용과 가릉빈가가 투각기법으로 조각되었는데 이 또한 최고급 기법입니다. 통일신라 때 창건돼 고려후기에 폐사되었을 것이라는 영암사터는 그 자체만으로 국보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완도군 보길면 세연정

[중앙일보] 입력 2003.10.23 15:08 / 수정 2006.02.17 00:33

한글 가사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를 찾아 땅끝마을에서 보길도로 가는 뱃길에 단풍으로 치장한 섬들이 수줍게 스쳐갑니다.

윤선도는 보길도의 풍치 좋은 곳마다 낙서재.동천석실.곡수당.무민당.세연정을 세우고 자연을 노래하였습니다. 세연정은 부용동 제일의 절경에 만든 8백50평의 연못 중앙에 지은 정자입니다.

연못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어 인공연못의 느낌이 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정자 앞 연못가에는 동대와 서대를 두어 풍악을 울리며 기녀들이 춤을 추게 하였고, 물 위에 배를 띄우고 동자에게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도록 하였답니다.

-흰 구름 일어나고 나무 끝이 흔들린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에 서호가고 썰물에 동호가자,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흰 마름 붉은 여뀌꽃 곳마다 아름답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양산시 통도사 노송

[중앙일보] 입력 2003.11.06 15:18 / 수정 2006.02.15 00:33

흰눈 덮인 절벽 위의 푸른 소나무에는 강인함과 고고한 기품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이런 소나무를 정신적 상징으로 삼았으니 애국가 2절 가사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이유로 마을의 당산목으로 매년 제를 받는 소나무가 많습니다.

청도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1년에 한번 12말의 막걸리를 대접받으며, 경북 예천군 감천면의 '석송령'은 375000-0000248이라는 주민등록번호가 있고 상속받은 토지에 재산 소득이 있어 매년종합토지세를 내고 장학금까지 지급한답니다. 양산의 통도사를 방문했던 분들은 입구의 울울창창한 소나무숲길에서 깊은 인상을 간직하게 됩니다. 이 보행로 중간쯤에 몸을 숙여 절하는 모습의 소나무가 너무 예뻐 그려보았습니다. 본래의 아름다움을 다 담지 못하였으니 불보사찰인 통도사도 볼 겸 직접 찾아가 만나보십시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장성 백양사 범종각

[중앙일보] 입력 2003.11.20 15:24 / 수정 2006.02.18 00:33

가을 단풍은 내장산이고 봄 꽃은 백양사라고 하지만 어떤 분들은 백양사 단풍을 더 쳐주듯 이 절 앞 연못에 비친 쌍계루와 현란한 단풍은 그림엽서 같이 아름답습니다.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창건되어 5대총림으로 자리 잡은 백양사가 백암산 계곡에 창건될 때의 이름은 백암사였답니다. 처음 백양사에 묵던 날 동터 오르는 새벽 햇살이 백암산 꼭대기의 학바위를 비출때 숨막히는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아직도 어둑한 대웅전 위로 학바위가 큰 부처로 보였던 것입니다. 백양사에 묵으실 기회가 있으면 꼭 확인해 보십시오.

백양사 범종각 앞에 줄기가 'Z'자 처럼 묘하게 자란 소나무가 있어 특이한 구도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스님들이 그리는 선화(禪畵)를 흉내 내어 선(禪)의 세계를 담아 본 것인데 비슷이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번개표 소나무'라는 분이 있으니 애시당초 선화로 인정받기는 글렀나 봅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펜화 기행] 서울 은평구 삼천사

[중앙일보] 입력 2003.12.04 15:18 / 수정 2003.12.04 16:13

북한산 험한 계곡에 자리잡은 삼천사에는 본래 집도 절도 없이 마애불 한 분만 계셨습니다. 통일신라 문무왕(660년)때 창건된 암자가 임진왜란 때 소실돼 혼자가 되셨답니다. 마애불은 조각의 깊이가 낮아 선묘인 듯 보이지만 도톰한 얼굴과 코는 햇빛의 움직임과 보는 위치에 따라 표정이 달라집니다. 각기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맞추어 여러 가지 표정으로 법문을 전하고 계시는가 봅니다.

보물 제 657호인데 머리 위로 물길을 돌린 홈이 있고, 보호각을 세우려고 암벽에 기둥을 박았던 자리가 있습니다. 강한 기운이 넘치는 북한산 자락에 터를 잡았기에 절을 새로 지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령각의 기도가 효험이 있다지요. 삼천사를 다시 찾게 만드는 것은 노인을 위한 요양원, 네 곳의 어린이집, 노숙자 쉼터 등을 직접 경영하면서 시립 노인 복지관.청소년 독서실을 운영하는 등 베푸는 일에서 여느 절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적은 보시금일지라도 좋은 곳에 쓰일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 기분좋은 법 아닙니까?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 기행] 양산시 통도사 범종루

[중앙일보] 입력 2003.12.25 15:53 / 수정 2006.02.17 00:33

새벽 2시58분, 도량석을 맡은 스님이 수박보다 큰 목탁을 치며 통도사 경내를 돌고 나면 범종루의 작은 범종을 두드리며 지옥을 깨고 영혼을 구한다는 새벽종송이 이어집니다. 그 뒤 날짐승을 제도한다는 운판이 고운 쇳소리를 하늘에 흩뿌린 뒤 물짐승을 위해 목어가 맑은 나무소리를 냅니다. 이어서 큰 법고를 승가대 학인스님들이 돌아가며 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일만오천여근의 범종이 깊고 큰 소리로 영축산 계곡을 뒤흔듭니다. 통도사 범종루는 조선조 숙종 12년(1688) 수오대사가 세웠습니다. 규모가 큰 편으로 범종.법고.목어가 두개씩 있고 운판만 하나입니다.

펜화가는 통도사 범종소리를 들으면 숨이 막히고 눈물이 나는데 전생에 통도사에서 불화를 그리던 스님이었기 때문이랍니다. 보물 제1041호인 영산전 팔상탱화를 그렸다는데 워낙 세밀하고 색상이 뛰어나서 멋진 부분들을 취해 2004년 캘린더를 만들었습니다. 2003년 캘린더는 펜화로 만들었으니, 올해는 현생의 작품으로, 내년은 전생의 작품으로 만든 셈이지요.

좋은 다비장까지 있으니 머리 깎고 눌러 살라는 스님도 있습니다만 집사람이 알면 그날이 다비장으로 가는 날이 될 것 같습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 기행] 안동 병산서원

[중앙일보] 입력 2004.01.15 15:37 / 수정 2006.02.18 00:33

병산서원의 2층 누각인 만대루와 서원 앞을 흐르는 강 건너편에 병풍처럼 늘어선 병산과의 어울림은 한국 건축의 백미입니다. 2백여명이 올라가도 여유로운 만대루의 마루는 관리가 잘 돼 있어 맨발로 올라가도 편안합니다. 우리 한옥은 흙과 나무로 지었기 때문에 온돌은 가끔씩 불을 지펴 습기를 없애주어야 하고, 마루는 자주 걸레질을 해야 사람 냄새가 나는 산 집이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죽은 집이 되지요.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 류성룡이 지은 우리나라 5대 서원의 하나입니다. 서원 앞쪽에는 학문의 공간으로 만대루와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와 서재, 원장의 숙소 겸 강학의 장소인 입교당이 있습니다. 뒤쪽에는 사당으로 서애를 모신 존덕사가 있습니다. 이런 구조를 '전학후묘'라 하여 서원의 기본 배치구조입니다.

본 그림은 전사청 마루에 앉아 입교당 후면을 바라보며 그린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사람이 나올 듯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은 관리를 맡은 풍산 류씨의 후손이 정성으로 관리를 해 살아 있는 건물로 유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질녘 만대루에 앉아 병산을 바라보면 마음은 고향 깊은 곳으로 숨어듭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완주 송광사 종루

[중앙일보] 입력 2004.02.05 16:52 / 수정 2006.02.17 00:33

승보사찰인 순천의 송광사 말고도 전북 완주에 송광사가 있습니다. 완주 송광사는 평지 가람으로 산지 가람과 같은 그윽한 멋은 없으나 국내 하나뿐인 +자형 종루가 있어 한옥연구가들이 꼭 찾는 장소입니다.

한옥의 지붕은 암키와를 두세 겹 쌓은 위에 수키와를 얹고, 용마루 등에도 기와를 몇 겹씩 쌓기 때문에 기와 무게만도 엄청납니다. 이런 지붕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는 장치가 공포로서, 쇠못을 쓰지 않고 목재로만 짜 맞추기 때문에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합니다. 그래서 +자형 같은 복잡한 건물은 경험이 많고 솜씨 좋은 도목수가 아니면 지을 엄두도 못 냅니다. 송광사 종루는 8개의 귀공포와 12개 주간포 등 처마 밑이 온통 공포로 가득하여 꽃다발 위에 지붕을 얹은 것처럼 화려해 보입니다.

누마루의 중심을 이루는 4개의 기둥에는 용그림을 휘감아 놓았는데 솜씨가 범상치 않습니다. 마루 중심에 범종을 달고 4면에 법고.목어.운판과 작은 범종을 배치해 +자형 건물의 용도와 일치시켰습니다. 송광사에 국내 단 하나뿐인 화려한 +자형 종루를 지은 것은 평지 가람의 밋밋함을 줄여 보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송광사에는 보물 제1244호인 종루 말고도 대웅전.삼존불과 사천왕상이 보물이며 유형문화재도 7점이나 있어 답사의 기쁨을 높여줍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양산 통도사 대웅전

[중앙일보] 입력 2004.02.19 15:36 / 수정 2006.02.17 00:33

통도사 대웅전은 건물 두채를 붙여 지은 모양으로, T자형으로 결합된 지붕 중심에 청동 찰간대가 있는 독특한 건물로 국보 제290호입니다.

화려한 기단석은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스님이 초창할 때 설치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조선조 인조 22년(1644)에 중건된 건물보다는 오래된 것이 확실합니다.

지붕에는 조선시대에 만든 철제기와와 청동기와가 남아 있습니다. 수막새가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길이 30cm의 큰 쇠못을 박고 그 못대가리가 녹슬지 않도록 백자연봉을 올려놓았습니다. 고급 건축방식입니다. 건물 뒤편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어 법당안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다 대웅전 기단의 우측이 좌측보다 약간 낮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수평잡는 기술이 부족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 선조님들이 뛰어난 자연친화 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도사는 비탈진 계곡에 자리잡고 있어 기단을 완벽한 수평으로 만들면 모든 법당의 기단이 한쪽으로 우뚝 솟게 되어 지형에 거슬리는 흉한 모양이 됩니다.

조상님들은 낮은쪽의 기단을 약간만 높여 큰 차이를 두지 않는 대신 기둥 길이로 건물의 수평을 맞췄습니다. 서양건축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건축방식입니다. 자연에 순응할수록 인간의 마음은 편안해지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수원 화성 서북공심돈

[중앙일보] 입력 2004.03.04 15:50 / 수정 2006.02.15 00:33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줄 모르는 분이 많지만 축성 당시에는 이상적인 형태의 최첨단 성곽이었던 것을 아시는 분도 많지 않습니다. 임진왜란을 혹독하게 치른 조선은 방어능력을 향상시킬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정조는 수원성의 계획을 실학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에게 맡겼고, 다산은 중국과 일본 성곽의 장점을 택하고 공사 시공을 위해 서양과학기술을 도입합니다. 이때 설치된 것들이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성 밖으로 돌출된 치성과 화포를 쏠 수 있는 포루, 쇠뇌를 쏠 수 있는 노대 등인데 가장 눈여겨 볼 것이 공심돈입니다.

공심돈은 일종의 망루로서 내부는 3층으로 층마다 총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안이 있습니다. 맨 위쪽에서는 포를 쏠 수 있어 막강한 공격능력으로 적의 접근을 막도록 했습니다. 수원성 공사가 끝난 뒤 축하 연회 때 정조는 신하들에게 새로 설치된 공심돈을 크게 자랑했답니다. 모든 공사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는 조감도를 비롯해 건물의 도면, 인부의 수와 인건비, 사용된 기계의 설계도, 건축자재의 수량과 구입비용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완벽한 기록으로 건축역사가 짧은 수원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펜화 기행] 화림동 농월정

[중앙일보] 입력 2002.02.25 10:05 / 수정 2006.02.15 00:33

국립공원 덕유산 남쪽에서 발원한 물은 기암 괴석 사이에서 여울이 되고 너른 계곡에서는 고요히 흐르는 못으로 변한 뒤 함양을 거쳐 낙동강이 됩니다.

예부터 이 곳을 화림동(花林洞) 계곡이라 하여 명승지로 손꼽았기에 팔담팔정(八潭八亭) 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네 개만 남아있습니다.

상류로부터 계곡을 따라 거연정(居然亭) , 군자정(君子亭) , 동호정(東湖亭) 을 지나면 계곡은 갈짓자로 휘어지는데, 월연암(月淵巖) 이라는 거대한 너럭바위가 시야를 꽉 채웁니다. 달바위라고도 부르는 이 암반은 넓이가 3천여평이 넘습니다.

금천의 맑은 물이 이 바위 사이를 굽이친 뒤 머물렀다가 쏟아지는 광경은 참으로 장관입니다.

이 달바위 중심으로 소나무숲을 등진 곳에 그림같이 올라앉은 정자가 농월정(弄月亭) 입니다. 추녀 끝을 높이 들어올려 날아 오를 것 같은 모양인데 바람막이 작은 방을 두었고, 걸터앉을 수 있도록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추녀 네 귀에 활주를 세워 넓은 지붕을 안정되게 하였습니다.

조선 선조 때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 박명부가 즐겨 찾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정자입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날 반석 위로 흐르는 물이 달빛을 받아 반짝일 때 달을 희롱한다는 정자의 이름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글.그림=김영택(펜화가)

 

[펜화기행] 불국사 광학부도

[중앙일보] 입력 2002.02.25 10:05

불국사 비로전 옆뜰의 보호각 속에는 화려하게 생긴 부도(浮屠) 가 있습니다.

부도탑의 일반적인 형식을 벗어난 광학(光學) 부도입니다. 둥근 탑신부 사방에 감실을 파서 석굴을 만들고 부처를 양각시킨 독특한 형태로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상.하대석의 연꽃조각과 중대석의 구름조각도 보통 솜씨가 아닙니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澈鑑禪師) 부도탑이 가장 잘 생긴 모범 부도라면 불국사 광학부도는 창의성이 돋보이는 멋진 부도입니다. 이 부도는 27년간 일본에 있다가 돌아온 것으로 더 유명합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한 후 일본의 도굴꾼.장사꾼.고고학자뿐만 아니라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까지 나서서 조선의 문화재를 싹쓸이하듯 도둑질해 갔으니 그 수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세계문화재로 지정된 석굴암에서 없어진 부처상 2개와, 불국사 다보탑의 사리함과 사자 3마리를 훔쳐간 것도 저들의 소행이었습니다.

광학부도는 1906년 일본으로 무단반출돼 식당으로 부잣집 정원으로 팔려 다니다가 33년 불국사로 돌아옵니다.

세키노라는 일본 고고학자의 끈질긴 추적으로 돌아 왔습니다만 한국이 해방될 것을 알았다면 돌려주었을 리 없었겠지요.

 

[펜화기행] 쌍봉사 대웅전 삼층목탑

[중앙일보] 입력 2002.02.25 10:05 / 수정 2005.10.26 00:32

화순군 이양에서 쌍봉마을을 지나 보성 쪽으로 난 산길을 몇 굽이 돌면 개울가 논 위로 삼층목탑이 우뚝 서서 길손을 반깁니다.

쌍봉사 대웅전이기도 한 목탑은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임진왜란 후 중건한 목탑인데, 1984년 화재로 전소됩니다. 86년 다시 세웠는데 옛것만 못하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옛 건물의 3층 지붕이 팔작지붕이어서 조선 한옥의 느낌이 강하였으나 새 탑은 62년 수리 때 확인했던 대로 사모지붕으로 바꾸고 상륜부를 얹어놓아 탑다워졌습니다.

법주사 팔상전 지붕크기가 위로 올라 가면서 많이 줄어드는데 비해 이 삼층목탑은 체감율이 적어서 일본에 남아있는 우리 목탑의 원형을 보는 듯합니다.

신라 경문왕 때 철감(澈鑑) 선사가 창건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쌍봉사는 28년에 나한상과 인왕상 등 4백78구의 각종 불상을 장성의 백양사로 보내야할만큼 황폐해집니다.

그러나 지장전에는 뛰어난 솜씨로 조각된 지장보살과 시왕상, 인왕상 등이 두 줄로 늘어설 만큼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절 뒤편 언덕 위에는 한국 부도탑 중 최고로 손꼽히는 국보 제57호 철감선사 부도와 보물 제170호로 지정된 부도비가 있어 답사의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펜화 기행] 쌍봉사 철감선사부도

[중앙일보] 입력 2002.02.25 10:05 / 수정 2006.02.15 00:33

서구 석조 유물들의 세밀한 조각이 우리 것보다 훌륭해 보인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서구의 석재들이 대부분 대리석이나 석회석으로, 석질이 물러 조각이 쉽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그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화강석 등은 석질이 무척 강하여 세밀한 조각이 어렵습니다.

이렇게 단단한 돌덩어리를 떡 주무르듯 다듬어 놓은 최고의 석조물이 바로 철감(澈鑑) 선사부도 입니다.

신라 경문왕(868년) 때 제작된 높이 2.3m의 이 부도는 구례 연곡사 동부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부도로 손꼽히는데 연곡사 동부도가 홀쭉한 몸체로 여성적인 데 비해 완벽한 비례로 장중하며 남성적입니다.

하대석에는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고, 8면의 안상에 다양한 모습의 사자를 양각하였으며 상대석 위 몸돌 굄대에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가릉빈가를 조각해 놓았습니다.

배흘림 기둥을 세운 몸돌에는 공양비천상의 천의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상륜부가 없어진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부연까지 설치되었는데, 손톱 만한 막새기와에 새겨진 여덟 개의 연꽃잎을 보노라면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못된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훔치려고 국보 제57호인 이 부도를 쓰러뜨릴 때 깨어져 나간 지붕돌을 보면 가슴이 쓰려 옵니다.

글.그림=김영택(펜화가)

 

[펜화 기행] 승선교와 강선루

[중앙일보] 입력 2002.02.25 10:05 / 수정 2006.02.15 00:33

봄의 선암사(仙巖寺) 는 갖가지 꽃이 만발하여 선경을 이룹니다. 특히 작고 흰 꽃들이 둥근 덩어리를 이루어 피는 불두화(佛頭花) 의 꽃잎이 눈처럼 흩날릴 때면 설토화(雪吐花) 라는 별칭이 더 좋아 보입니다.

선암사를 찾아 숲길로 오르면 깊은 계곡이 막아선 곳에 예쁜 무지개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 돌아가면 이번엔 높이가 7m나 되는 큰 무지개 다리가 보입니다. 이 돌다리들을 상.하 승선교(昇仙橋) 라 부르는데 큰 승선교 아래 계곡으로 내려서면 둥근 다리 아래로 강선루(降仙樓) 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옵니다.

승선교는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쌓았는데, 홍수 때 계곡의 급류가 다리 위까지 넘쳐 홍예석(虹霓石) 위의 잡석이 다 떠내려가도 홍예 만큼은 끄덕 없습니다. 치밀한 설계와 뛰어난 솜씨 때문입니다.

강선루는 계곡에 흘러드는 작은 냇물 위에 지은 2층 누각으로서 평지에 지어도 될 것을 계곡 사이에 어렵게 지은 이유는 이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구도를 연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부처가 되어 승천한다는 승선교를 넘어 다시 부처가 사바세계로 강림한다는 강선루를 거치고, 선암사 스님들이 아홉 번 덖어서 만든 칠불전선원차(七佛殿禪院茶) 를 마시면 정말 신선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글.그림=김영택(펜화가)

 

[펜화기행] 문경 새재 조곡관

[중앙일보] 입력 2002.02.25 10:05

임진왜란 초기 신립(申砬) 장군이 탄금대가 아닌 문경새재에서 왜군을 막았다면 전쟁의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임진왜란 후 새재에는 3개의 관문이 들어섭니다.

문경 쪽에서 출발하여 제 1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을 지나 계곡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조령원(鳥嶺院) 터를 지나게 되며, 용추(龍湫) 계곡의 우측 언덕에 새로 지어졌던 교귀정(交龜亭) 이 나그네를 반깁니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보기 드문 한글 비석인 '산불조심' 비를 지나면 험한 벼랑 계곡에 선조 27년(1594) 에 축성한 조곡관(鳥谷關) 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새재 관문 중에서 제일 처음 지어진 성문으로 조동문(鳥東門) 이라고 불렸으나 1907년 의병과 토벌대의 전투로 훼손돼 75년 중건하면서 조곡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누각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서 단청을 올렸습니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이 3.56m, 문짝 두께 11㎝이며 성벽의 높이는 4.5m로서 문루에 올라서면 의병들의 함성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 합니다.

조곡관에서 3.5㎞를 더 오르면, 새재 정상에 제 3관문인 조령관(鳥嶺關) 이 있어 북쪽을 방어합니다.

신작로가 생기고 기찻길이 뚫리면서 새재는 도로로서의 역할을 끝냈으나 이제는 오히려 옛 고갯길의 정취를 간직한 소중한 답사처가 되었습니다.

 

 

[펜화기행] 연곡사 동부도

[중앙일보] 입력 2002.02.25 10:05

지리산 피아골의 수려한 계곡에 자리잡은 연곡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답게 국보로 지정된 두 기의 부도탑과, 4점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부도 중 가장 화려하다는 동부도의 세밀한 조각들은 천년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중대석에 조각된 팔부중상의 의상은 신라복식 연구에 참고할 만큼 세밀한데, 태껸을 하는 무사의 발가락 조각을 보고 있으면 이 것이 신기(神技)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붕돌의 수막새기와에는 연꽃 조각이 남아 있으며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또렷합니다.

하대석에 새겨진 사자 중 무서워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놈, 혓바닥을 쭉 내밀고 장난을 하자는 놈, 뒷다리로 갈기를 긁는 놈들은 강아지보다 더 귀엽습니다.

이런 인간적 아름다움 때문에 일본 민예론(民藝論) 의 창시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인은 인간의 심성에 와 닿는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 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습니다.

서양 디자인을 모방하기에 바쁜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지요.

우리 민족만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새로운 디자인으로 만들어 낼 때 세계 최고가 됩니다.

연곡사 동부도를 보면서 한국인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미적인 능력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펜화 기행] 선교장 활래정

[중앙일보] 입력 2002.02.25 10:05 / 수정 2006.02.17 00:33

전국의 명승지마다 중심이 되는 곳에는 정자나 누각이 있으니 이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 속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을 줄 아는 우리 민족의 특성입니다.

강릉 경포호수가 지금의 몇 배로 넓었던 시절, 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 하여 배다리(船橋里) 라고 부르던 마을에 지어진 선교장(船橋莊) 은 강원도에서는 가장 큰 개인주택입니다. 집 앞에 서면 가로로 길게 자리잡은 행랑채와 뒤편 언덕에 늘어선 노송이 어울려 장관을 이룹니다.

선교장의 특성은 분산 개방된 건물배치로, 이 곳에는 너그러움과 활달함이 늘 가득합니다. 이 가운데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 과 정자인 활래정(活來亭) 은 가장 개성 넘치는 건물입니다.

활래정은 순조 16년(1816) 오은거사가 건립한 정자로 현재의 건물은 오은의 증손인 경농 이근우가 중건한 것입니다. 당시 온돌방에 덧붙여 연못 위로 누마루를 지어서 'ㄱ' 자 형태가 되었는데 방과 마루 사이에 차를 끓이는 작은 다실을 마련하였습니다. 벽이 없어서 문을 전부 열어 놓으면 사방 풍광이 한꺼번에 들이닥칩니다.

활래정에는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 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습니다. 활래정이 화려해 보이는 것은 사방을 둘러 막은 창호문살의 특성이니 현대건축에서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끝>

글.그림=김영택(펜화가)

 

[김영택의 펜화기행] 독락당 계정

[중앙일보] 입력 2003.06.12 15:01 / 수정 2006.02.15 00:33

계곡을 향해 열린 공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옥산서원과 독락당(獨樂堂)까지 걷는 3km 남짓한 길가에는 씀바귀가 지천입니다. 이렇게 화구 가방을 메고 일년 중 절반 이상을 길에서 보내고 있으니 보통 역마살이 아닐겝니다.

전생에 스님이었다니 걸망 메고 만행을 다니던 팔자는 떨구지 못했나 봅니다. 독락당을 집 앞에서 보면 평범한 양반집입니다만 집 옆 개울가로 돌아가면 느닷없이 깊은 산속 계곡에 온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넓적한 반석이 시루떡처럼 쌓인 계곡에는 폭포까지 쏟아지는데 울창한 숲은 맑은 물 속에 어두움을 드리웁니다.

계정(溪亭)은 독락당의 별채로서 방 한칸과 마루 두칸짜리 작은 정자입니다. 계곡의 반석 위에 기둥을 세워 쪽마루를 덧대고 계자 난간을 둘렀습니다. 우리 옛 건물의 특성이 '어떻게 지었느냐'보다 '얼마나 주변과 어울리게 지었느냐'에 있다고 합니다만 계정만큼 어울림이 뛰어난 건물도 드뭅니다.

자연과 아예 하나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계정의 마루에 앉자 맑은 물에 비친 너럭바위와 숲을 내려다 보는 멋도 일품이지만 계곡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계정 또한 무척 아릅답습니다. 옥산 서원에 배향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조선 중종 27년 (1532) 낙향하여 지은 집입니다. 작년 큰 홍수 때 모래가 1m 정도 높이 쌓여 멋진 반석이 보이지 않기에 옛 사진을 참고하여 되살려 그렸습니다. 경주 시장님께 원상 복구를 부탁드립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봉암사 일주문

[중앙일보] 입력 2003.06.26 14:21 / 수정 2006.05.07 00:33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 봉암사(鳳巖寺)로 가는 길에는 이정표가 없습니다. 조계종 특별 선원(禪院)이라 사월초파일 외에는 개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봉암사에서 올 3월 초, 판화본으로 일주문 등을 그려주면 서암 큰스님이 입적했을 때 조문객을 맞이할 공양간 불사에 쓰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智證)국사가 창건한 봉암사의 일주문은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이 있습니다. 가공하지 않은 기둥에선 친근미가 우러납니다. 그림을 완성한 다음날 새벽, 서암스님이 입적하셨습니다.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스님이지만 열반송을 묻는 제자들에게 '그 노장(老長), 그렇게 살다갔다 해라'고 하셨답니다. 스님의 상여가 일주문 앞에서 마지막을 고할 때 내게는 스님의 마지막 말씀이 그 어떤 열반송보다 가슴 깊이 울렸습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펜화 기행] 쌍봉사 철감선사부도

[중앙일보] 입력 2002.02.22 21:47

서구 석조 유물들의 세밀한 조각이 우리 것보다 훌륭해 보인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서구의 석재들이 대부분 대리석이나 석회석으로, 석질이 물러 조각이 쉽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화강석 등은 석질이 무척 강하여 세밀한 조각이 어렵습니다.



이렇게 단단한 돌덩어리를 떡 주무르듯 다듬어 놓은 최고의 석조물이 바로 철감(澈鑑)
선사부도입니다. 신라 경문왕(868년)
때 제작된 높이 2.3m의 이 부도는 구례 연곡사 동부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부도로 손꼽히는데 연곡사 동부도가 홀쭉한 몸체로 여성적인 데 비해 완벽한 비례로 장중하며 남성적입니다.



하대석에는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고, 8면의 안상에 다양한 모습의 사자를 양각하였으며 상대석 위 몸돌 굄대에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가릉빈가를 조각해 놓았습니다.



배흘림 기둥을 세운 몸돌에선 공양비천상의 천의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상륜부가 없어진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부연까지 설치되었는데, 손톱 만한 막새기와에 새겨진 여덟 개의 연꽃잎을 보노라면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못된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훔치려고 국보 제57호인 이 부도를 쓰러뜨릴 때 깨어져 나간 지붕돌을 보면 가슴이 쓰려옵니다.



글.그림=김영택(펜화가)

 

[펜화 기행] 신륵사 보제존자 부도

[중앙일보] 입력 2002.02.22 21:47

석가모니 부처는 "나를 상징하는 것은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고 입적을 합니다.자신의 상징물이 맹목적인 기복신앙의 대상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큰 무덤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놓고 그 주위를 돌며 기원을 시작합니다.이러한 부처의 무덤 모양을 본떠 만든 게 석종형 부도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갖춘 것이 신륵사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화상(懶翁和尙)
의 부도로서 이후 한국 부도의 전형이 됩니다.



나옹선사는 공민왕의 왕사를 지냈고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던 큰 스님으로, 입적하면서 보인 기적으로 여주 신륵사는 유명한 절이 됩니다.



신륵사 뒤편 낮은 언덕을 오르면 보제존자의 석종형 부도와 석종비, 석등이 있는 부도전이 나옵니다.소나무 숲에 싸인 부도전은 풍수를 모르는 분도 알아차릴 만큼 분위기가 아늑한 명당입니다.



높은 기단에 조성한 부도는 완만한 타원형 몸체 위에 불꽃모양을 조각한 보주가 있어 단순하면서도 장중합니다.부도를 밝혀주는 8각 석등은 불을 붙이는 부분인 화사석(火舍石)
에 용과 비천상을 생동감 있게 조각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석등은 보물 231호인데도 무른 납석으로 만들어진 화사석에 못난이들이 마구 긁고 낙서를 하여 보는 사람의 분통을 터지게 합니다.펜화를 그릴 때 보기 흉한 보호철책을 빼버렸으니 양해하여 주십시오.



글 ·그림=김영택(펜화가)

 

 

수원역...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

 

수원역 안내문...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