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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펜화 에세이

중앙[김영택의펜화기행] 한국풍경 20개

 

[김영택의펜화기행] 방원의 복수

[중앙일보] 입력 2007.06.21 15:29 / 수정 2007.06.22 05:33

광통교

1890년께의 광통교, 종이에 먹펜, 36 X 50cm, 2007.
조선의 도읍지 한양은 낙산.북악산.인왕산.남산에 둘러싸인 분지에 중심 하천인 청계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西出東流)로 명당수(明堂水)라 합니다. 그러나 큰비만 오면 홍수 피해가 막심하여 태종 6년(1406) 자연 하천에 둑을 쌓고 바닥을 파낸 뒤 개천(開川)이라 불렀습니다.

개천에 놓인 다리 중 제일 큰 광통교(廣通橋)의 나무와 흙으로 만든 교각이 홍수로 떠내려가자 태종 12년(1412) 옛 정릉(貞陵)터에 남아 있던 석물로 돌다리를 놓습니다. 현재 복원된 광통교 석축의 구름과 당초(唐草)무늬의 화려한 장대석들이 바로 정릉의 병풍석입니다.

현재의 광통교.
태조는 끔찍이 사랑한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芳碩)으로 왕세자를 삼습니다. 계비가 죽자 도성 안에는 무덤을 쓸 수 없다는 금기를 어기고 서대문 안 서부황화방(西部皇華坊)에 화려한 능을 만듭니다. 태조 7년(1396) 다섯째 아들 방원(芳遠)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비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2차 난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왕위에 오른 9년 뒤 태종은 원수지간이던 계모 신덕왕후의 능을 북한산 산골로 옮겨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초라한 능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서부황화방의 정릉에 방치된 석재들은 광통교에 써버린 것입니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대보름 날 종루의 인경 소리를 듣고 열두 다리를 밟으면 일 년 동안 다리병을 앓지 않는다"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정월 보름달이 뜨면 광통교와 수표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답니다. 광통교는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콘크리트 아래 묻혔다가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다시 햇빛을 보게 됐습니다. 그러나 워낙 훼손된 부분이 많아 부재들의 대다수는 새것으로 교체했다 합니다. '개천'은 청풍계천(淸風溪川)으로도 불렀으나 1910년께 청계천(淸溪川)으로 바뀝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조선후기 상업의 중심

[중앙일보] 입력 2007.07.05 15:53 / 수정 2007.07.06 05:21

서소문

서소문, 종이에 먹펜, 30X40cm, 2007.
서소문(西小門)은 태조 5년(1396)에 만들어졌습니다. 첫 공식 명칭은 소덕문(昭德門)이었다가 후에 소의문(昭義門)으로 바꾸었습니다. 처음엔 문루(門樓) 없이 옹성만 둘렀던 것을, 영조 20년(1744)에 새로 문루를 세웠습니다. 서소문은 인천과 강화를 잇는 관문으로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체를 도성 밖으로 내갈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조선후기 성문 밖에 칠패시전이 생겨 상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대한제국 시절, 서소문 안에는 물지게를 지던 물꾼에서 대신으로 출세한 이용익이 살았고, 문 밖에는 상점의 하인으로 법부대신 자리까지 올랐던 이하영의 집이 있었습니다.

 빠른 발로 소문난 이용익은 짧아도 닷새는 걸린다는 전주∼한양 간을 12시간 만에 주파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놀라게 합니다.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한 황후와 고종 간의 긴밀한 소식을 번개같이 전달해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 공로로 단천부사를 거쳐 병사로 승진해 황실의 재정을 도맡는 실세가 됩니다. 친러파인 이용익은 일본이 득세하면서 러시아로 망명했습니다만, 많은 재산을 육영사업에 쾌척해 남은 재산이 없었답니다.

 
중앙일보 야외주차장 자리에 있는 서소문(소덕문)터 비석.
부산 상점 하인이었던 이하영은 한양으로 올라와 미국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 박사의 심부름을 하며 영어를 배웁니다. 미국 유학 뒤 미국 주재 공사관의 서리 공사가 된 이하영은 1000여 명의 명사를 초대해 워싱턴 역사상 가장 큰 댄스파티를 개최합니다. 갓 쓴 도포 차림에 유창한 영어와 능숙한 춤 솜씨로 ‘상투 멋쟁이’라 불리며 인기가 대단했답니다. 이탈리아 육군 대신의 딸이 이하영에게 반해 청혼했으나 국법에 어긋난다고 거절하자 그녀의 어머니가 이탈리아 황제로 하여금 고종 황제에게 국제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청을 넣기도 했답니다. 이후 일본 주재 공사, 외부대신, 법부대신에 이르는 파격적인 출세를 합니다.
 구한말의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서소문은 1914년께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습니다. 서울 중구 순화동 중앙일보 사옥 야외주차장 자리가 옛 터입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정문이 된 동쪽 문

[중앙일보] 입력 2007.07.19 16:31 / 수정 2007.07.20 05:29

대한문

1980년대의 대한문, 종이에 먹펜, 36X 50cm, 2007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光化門)이고, 창덕궁은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은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은 흥화문(興化門)이다. 모두 화(化)자 돌림인데 유독 덕수궁의 정문만 대한문(大漢門)인 이유가 뭘까.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잿더미가 된 한양에 돌아온 선조는 정릉동에 있는 월산대군 사저를 행궁 삼아 16년을 살다 승하했다. 뒤를 이은 광해군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이라 이름 짓고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췄지만 광해군 7년(1615)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경운궁이 활기를 되찾은 것은 을미사변으로 왕후를 잃은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때 궁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을 세웠으나 사용하기 불편해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이 정문 역할을 했다.

 
현재의 대한문
고종 43년(1906) 대안문의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쳤다. 매천야록에는 류시민이 류운룡(류성룡의 형)의 무덤에서 나온 비결이라며 고종에게 바친 서찰에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도읍을 안동 신양면으로 옮기면 나라 운수가 번영하리라”는 내용이 있어 개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으로는 대안문의 안(安)자가 여인(女)이 갓을 쓴 모양인데, 실제 모자를 쓴 여인들이 경운궁을 드나들면서 나라를 망쳐먹고 있어 바꿨다는 속설이 널리 퍼졌다. 러시아 베베르 공사 부인과 그 언니인 손탁 부인이 서양 모자를 쓰고 드나들며 고종과 엄비의 환심을 샀고, 이토 히로부미의 첩인 배정자 또한 양장에 서양 모자를 쓰고 드나들며 밀정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1968년 태평로를 확장하며 덕수궁 담장을 뒤로 물릴 때 대한문만 길에 따로 남아 있다가 70년 비로소 뒤로 옮겨졌다. 지금에 와선 문 앞의 월대는 흔적조차 없고 계단 소맷돌인 돌짐승 한 쌍만 남아 문을 지키고 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서울 깍쟁이·정치깡패의 본부

[중앙일보] 입력 2007.08.16 14:57 / 수정 2007.08.17 05:39

수표교

1900년대의 수표교,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수표교는 청계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엄지기둥 11개 사이에 동자기둥을 세워 난간석을 받친 형태는 조선시대 돌다리의 모범입니다. 세종 3년(1421) 6월 나흘 동안의 폭우로 도성 안은 물바다가 되어 75채의 집이 떠내려가고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이 사고 뒤 10년간 청계천과 지류의 바닥을 파내고, 오간수문 옆에 이간수문을 더 내고, 중요 다리 여섯 곳을 돌다리로 고쳐 놓습니다. 수표교도 이때 세운 다리로 근방에 말을 매매하던 마전(馬廛)이 있어 마전다리라 하였습니다. 세종 23년(1441) 마전다리 옆에 치수가 새겨진 나무 수표(水標)를 세우고 개천의 수위를 임금에게 아뢰게 합니다. 이후 수표교로 이름이 바뀝니다. 이 수표는 성종 때 돌로 바뀝니다.

 
현재의 수표교.
영조 36년(1760) 인부 20만 명을 동원하여 청계천을 대대적으로 준설하고 새 수표를 세웁니다. 이때 파낸 모래를 쌓은 가산(假山·현재 방산동)에 한양 거지들의 총두목인 ‘꼭지딴’의 본영이 생깁니다. 광교나 수표교 등의 다리 밑에 사는 거지들을 ‘깍쟁이’라 불렀고 이들의 두목을 ‘꼭지’라 했습니다. 성 내외 여섯 명의 꼭지가 모여 선출한 꼭지딴은 생사여탈권이 있어 기강이 엄했답니다. 이들은 당시 세도가들의 부탁을 받고 정적을 염탐해 주는 등 권력에 줄을 대기도 했습니다. 나라에서도 이들에게 손을 쓰기 어려워 내의원이나 혜민서에서 약으로 쓰는 두더지·지네·고슴도치 같은 것을 납품하는 권한을 주어 다스렸답니다.

 구한말 독립협회 회원들이 가두연설을 할 때는 수구세력의 사주를 받은 꼭지딴의 부하들이 각설이 판을 벌이거나 뱀을 휘둘러 청중을 쫓아냈답니다. 자유당 시절 날뛰던 정치깡패의 원조인 셈입니다. 수표교는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신영동에 잠시 머물다가 65년 장충동에 자리를 잡습니다. 다리 서쪽에 있던 수표(보물 제838호)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갔습니다. 복제품이라도 곁에 세워 두면 좋겠습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달 희롱’ 을 허하노라

[중앙일보] 입력 2007.08.30 16:09 / 수정 2007.08.31 06:03

함양 농월정


 한국 최고의 정자 답사코스로는 담양 일대와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계곡을 손꼽습니다. 담양의 대표 정자는 소쇄원(瀟灑園)이고 화림동에서는 농월정(弄月亭)이 으뜸입니다.

 덕유산 남쪽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흐르는 화림동 계곡의 물길을 따라 거연정·군자정·동호정을 지나면 넓디넓은 반석이 펼쳐집니다. 달바위(月淵岩)라 부르는 반석을 앞에 둔 농월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마루에 한 칸짜리 작은 방을 두었습니다. 휘영청 달 밝은 날 농월정 난간에 앉아 흐르는 물에 달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면 ‘달을 희롱한다’는 정자의 이름이 정말 멋져 보입니다.

  이 농월정이 2004년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몽땅 타 버렸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찍어 놓은 사진을 뒤적여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농월정의 전체 모습, 현판, 황룡과 청룡이 조각된 충량뿐만 아니라 5종의 화반에 중건기와 시(詩)를 새겨 놓은 13개의 목판이 모두 컬러 슬라이드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건물의 바깥 모양만 그리는 제가 이렇게 완벽한 자료 사진을 찍은 것은 난생 처음입니다.

  오래된 건물에는 영(靈)이 있다는 말처럼 농월정에 영이 있어 앞일을 예견하고 모든 사진을 찍도록 시킨 것 같은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이만한 자료라면 완벽한 복원이 가능할 것 같아 함양군청에 ‘모든 자료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연락을 해 놓았더니 슬픈 답이 왔습니다. 설계를 마치고 2억원의 예산도 마련해 놓았는데 공사가 무산됐다는 것입니다. 수소문해 보니 농월정을 세운 지족당 박명부의 후손 10명 중 한 명이 토지 양도에 반대했기 때문이랍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복원된 멋진 모습을 빨리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영택의펜화기행] 창녕 관룡사

[중앙일보] 입력 2007.09.13 15:50 / 수정 2007.09.14 06:47

앉은 자리가 천하명당

화왕산 관룡사,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많은 절이 명산의 명당자리에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절이 바위로 이루어진 영산(靈山)에 자리 잡은 해남 달마산 미황사, 합천 황매산 영암사, 문경 희양산 봉암사, 창녕 화왕산 관룡사입니다. 바위 연봉의 아름다움이 금강산에 맞먹는다는 달마산 미황사 펜화를 보고 고궁박물관 소재구 관장이 “사진으로는 제대로 담지 못하는 달마산을 제대로 그렸다”고 했습니다. 펜이 사진보다 표현력이 좋아서 일까요? 아니지요.

 경사가 심한 곳에 자리 잡은 절의 좁은 마당에서 절과 산을 모두 사진에 담으려면 광각렌즈를 써야 합니다. 광각렌즈를 이용하면 가까운 피사체는 크게 찍히고, 먼 곳의 피사체는 작게 나옵니다. 그래서 미황사 사진에 달마산 연봉이 작고 보잘 것 없게 나오는 것입니다.

 
관룡사 전경
2004년 학고재에서 연 개인전에 온, 동양철학을 한다는 나이 드신 도사분이 황매산 영암사지 펜화를 보고 “그림에서 황매산의 좋은 기가 강하게 나오니 팔지 말고 애들 공부방에 걸어놓으면 공부 잘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중간색이 없는 펜화는 원근 표현을 펜 선의 굵기로 조절합니다. 황매산의 원경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세계에서 제일 가늘다는 펜촉의 끝을 사포에 갈아 0.05~0.07 굵기로 만들어 썼습니다. 묘사가 잘되면 그림에서도 기가 나오나 봅니다.

  신라 진평왕 5년(583)에 지었다는 관룡사(觀龍寺)도 영산으로 알아주는 화왕산(火旺山)의 기맥에 지은 절입니다. 비탈에 지은 절이라 사진으로는 화왕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담을 수가 없습니다. 펜화에는 화왕산의 전체 모습이 제대로 나오도록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10여 일 동안 화왕산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화왕산이란 이름이 ‘기가 강한 산’이란 뜻으로 해석 되었습니다. 약사전이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에 불타지 않은 것도 화왕산 기맥의 혈(血) 자리에 지었기 때문이랍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엽서 덕에 풀린 미스터리

[중앙일보] 입력 2007.10.04 15:17 / 수정 2007.10.05 06:26

통도사 범종각·만세루

1920년대 통도사 범종각과 만세루,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2002년 초부터 1년6개월 동안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살았습니다. 펜화로 캘린더를 만드는 소임을 맡아 법사실에 살림을 차린 것입니다. 전생에 어떤 공덕이 있어 스님도 배정받을 수 없다는 법사실에 살게 되었을까요? 기도를 많이 하였다는 스님이 “영산전 팔상탱(八相幀·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의 그림에 담은 불화)을 그린 유성(有誠) 스님이 당신의 전생이었네”라고 하더군요. 조선 최고의 불화가인 유성 스님이 그린 통도사 팔상탱은 보물 제1041호입니다. 색채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에서 불화뿐만 아니라 한국화 중에서도 비교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전생의 화력이 있어 현생에서 세밀한 펜화를 그리나 봅니다.

 통도사 법당들을 펜화로 그리면서 만세루(萬歲樓)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다른 절의 만세루는 벽체가 없는데 통도사 만세루만 4면 모두 벽으로 막혀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궁금증은 얼마 전 인사동 골동품가게에서 만난 사진엽서로 풀었습니다. 1930년대 까지만 해도 만세루 전면에 벽체가 없었던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현재의 통도사 범종각·만세루
사진엽서에 담긴 범종루는 현재의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기둥과 지붕을 받치는 활주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숙종 12년(1686) 수오대사가 세운 범종루는 중수한 기록이 없습니다. 사진엽서의 목재 상태를 보면 초창기 때 목재로 보입니다. 현재 범종루는 난간을 계자각 난간으로 바꾸었고 단청을 입혀 화려해 보입니다. 88년 1만5000근짜리 범종을 추가로 달았고, 법고와 목어도 하나씩 더 달았습니다.

 2003년 캘린더를 펜화로 만들었고, 2004년 캘린더는 영산전 팔상탱의 훼손된 부분을 컴퓨터로 복원하여 만들었습니다. 현생의 작품과 전생의 작품으로 캘린더를 만들어 본 작가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극락 가는 배 타는 곳

[중앙일보] 입력 2007.10.18 15:30 / 수정 2007.10.19 07:39

화왕산 용선대

화왕산 관룡사 용선대,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어디로 갈까요? 교회에 다니던 분은 요단강을 건너 천국에 가고, 절에 다니던 분은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고해(苦海)를 건너 극락세계로 간다고 합니다.

 통도사 극락전 뒷벽에 잘 그린 반야용선 벽화가 있습니다. 용머리와 꼬리를 갖춘 배에 일로왕보살과 지장보살이 여러 인간을 극락세계로 데려가는 모습입니다.

 반야용선이 그림으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녕 화왕산에 진짜 반야용선이 있습니다. 관룡사 마당을 거쳐 20분쯤 오르면 배처럼 생긴 큰 바위를 만나게 됩니다. 신라 사람들이 이 배 위에 부처님을 모셔서 진짜 반야용선을 만들었습니다. 망망대해와 같은 드넓은 산야를 내려다보는 부처의 용모와 자태가 뛰어납니다. 신체의 비례가 좋고, 법의도 제대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근엄한 표정에 정이 갑니다. 비바람 거센 바위 위에서 이처럼 훌륭한 불상을 조각한 석공은 누구일까요. 좌대의 조각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관룡사 용선대(左)와 통도사 극락전 반야용선 벽화
보물 제295호인 석조여래좌상은 높이가 2.98m로 꽤 큰 편입니다. 헬리콥터도 없던 신라시대에 수십 길 절벽 위에 무거운 부처와 좌대를 어떤 방법으로 모셨을까요. 조사해 보니 절벽 위의 돌로 부처와 좌대를 만든 것으로 판명되었답니다. 만든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좁은 바위 위에서 부처와 좌대를 어떻게 옮겼을까요? 천야만야한 벼랑 위 좁은 터에 굵은 기둥을 얽어 세워놓고 부처와 좌대를 들어 옮긴 신라의 드잡이(무거운 물건을 들어 옮기는 장인)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펜화로 옮기며 석등의 하대석과 근래에 설치한 쇠 난간을 빼버렸습니다. 이 가을 용선대를 찾아 가시면 5만여 평에 달하는 화왕산성 억새꽃의 장관은 특별 보너스가 됩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광화문 네거리의 '잊혀진 건물'

[중앙일보] 입력 2007.11.01 15:18 / 수정 2007.11.02 08:04

기념비전

1910년께의 기념비전,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서울 광화문 네거리 동북쪽 코너에 정자 모양을 한 잘 생긴 한옥이 있습니다. 자주 지나치면서도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高宗卽位四十年稱慶紀念碑)’를 보호하는 건물인줄 아시는 분이 적습니다.

 1902년에 세운 비석에는 고종황제가 즉위 40주년이 되었고, 나이 51세로 기로소(耆老所)에 이름을 올렸으며,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비석을 보호하는 건물에 기념비전(紀念碑殿)이란 편액을 달았으나 기념비각(紀念碑閣)이라 낮추어 부르는 분이 많습니다. 건물의 품격을 차별하기 위하여 이름을 지을 때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을 구분하여 씁니다. ‘비전(碑殿)’과 ‘비각(碑閣)’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본 펜화는 1910년께 일본인들이 만든 사진엽서를 이용한 것입니다. 엽서에는 기념비전 편액과 홍예문에 새긴 만세문이란 글을 지우고 인쇄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칭경기념비 존재 자체가 싫은 일본인들이 기념비각이라 낮추어 부른 것입니다.

 
현재의 기념비전
기념비전은 6·25동란 때 일부 파손된 것을 1954년 보수하였으나 본래의 모습과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궁궐의 용마루에 설치하는 백색 양성추녀마루가 기와로 바뀌면서 잡상이 없어졌고, 금속으로 만든 상륜부는 온 데 간 데 없는데 절병통도 디자인이 다릅니다. 담장이 없어지고 외문이 삼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일본인이 옮겨서 자기 집 대문으로 이용하던 홍예문틀과 청동문을 되찾은 것은 다행입니다.

 기념비전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짬을 내서 찬찬히 살펴보세요. 당대 최고 장인들의 뛰어난 솜씨를 보시면 안목이 높아집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스님과 ‘중선생’ 금강산서 손잡다

[중앙일보] 입력 2007.11.15 16:15 / 수정 2007.11.16 06:45

[펜으로 복원한 문화재] 신계사

금강산 신계사와 집선연봉, 종이에 먹펜, 43X60cm, 2007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에서 신계사(神溪寺)를 만났습니다. 6·25전쟁으로 삼층탑 하나만 남아 있던 폐허에 13개 전각이 복원되어 옛 대찰의 영화가 아이맥스 화면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절 앞으로 소나무 군락이 천만 병사로 도열하였고, 그 너머로 금강산 집선연봉(集仙連峯)이 병풍처럼 장대하게 둘러섰습니다. 이처럼 기막힌 구도를 만나는 기회가 펜화가의 일생에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집선연봉과 여러 건물의 세밀한 묘사를 위하여 화폭을 넓게 잡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늘다는 펜촉을 사포에 갈아가며 연봉 하나하나와 기와 한 장까지 그렸습니다. 9월 18일 금강산에서 돌아와 달포를 그렸으니 다른 펜화보다 서너 배 공력이 든 셈입니다. 펜촉 60여 개를 갈아가며 대략 200만 번이 넘는 펜선을 긋는 동안 집선연봉의 기운이 함께하여 피곤을 잊었습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환희심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4년 4월 첫 삽을 뜬 뒤 4년 만에 이처럼 많은 당우를 중창한 사례는 2000년 한국 불교 역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남북이 힘을 합친 불사구요. 이처럼 큰 공사를 남측 조계종단에서 도감(都監)으로 파견한 제정스님 혼자 총감독을 하였습니다. 북측 군사지역이라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을 해가며 온갖 난관을 해결한 대단한 스님입니다.

 신라 법흥왕 6년(519년) 보운(普雲)스님이 창건하여 효봉(曉峰) 한암(漢岩) 큰스님이 수행하였던 신계사를 이제 다시 볼 수 있게 됐으나 그곳서 남측 ‘스님’을 만나게 될지 북측 ‘중선생’을 보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창을 시작할 때 완공 후 관리 합의가 없었답니다. 큰스님의 인도로 여법하게 예불을 들이고 싶은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북측 불자와 함께라면 더 좋겠지요.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우리 절은 왜 안 그리는고? ”

[중앙일보] 입력 2007.11.29 16:15 / 수정 2007.11.30 08:36

해인사 일주문<一柱門>

1920년대의 해인사 일주문,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지난해 학고재 개인전을 보시고 “왜 절을 많이 그리셨습니까?”라고 묻는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 약 65%가 불교문화재입니다. 그러니 건축문화재 그림 열 장을 그리면 그중 예닐곱 장은 사찰 건물이 됩니다. 또 다른 이유는 주업으로 삼았던 디자인 사업을 접고 펜화로 전환한 다음 생활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절에서는 말만 잘하면 먹고 자는 것이 공짜거든요.

올해 초 해인사 주지스님께서 “이사람이 우리 절은 왜 안 그리는고?” 라고 하셨답니다. 해인사가 어떤 절입니까. 부처님 말씀을 담은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사찰로 삼보사찰 중 하나요, 강원·선원과 율원을 갖추어 한국 최초로 ‘총림(叢林)이 된 지 40년이 된 절입니다. 그러니 이 절 저 절 그리면서 해인사를 빼먹었다고 꾸중을 들어도 싸지요. 그러나 사실은 두 번을 들렀으나 그림 구도가 보이지 않아 못 그린 것입니다. 다시 찾아가 주지스님께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씀드린 뒤 절 구석구석을 돌며 구도를 찾아보았습니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강한 기운으로 팔만대장경을 보호하는 절입니다. 건물들도 딱딱한 분위기여서 구도를 찾지 못하고 쩔쩔 매다가 마음에 드는 구도를 찾았습니다. 일주문을 뒤에서 본 구도로 여태까지 그렸던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구도입니다. 그림은 1920년대 사진을 참고하여 고쳐 그렸습니다. 지금은 ‘가야산 해인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나 사진에는 해인사 홍하문(海印寺 紅霞門)이라고 내려 쓴 편액이 있었습니다. 문 좌우에 폭 7자쯤 되는 낮은 담도 있었습니다. 일주문은 사찰의 경내와 밖을 구분 짓는 상징적 건물인데 담장이 있으니 그 뜻이 명확해지고 정감이 있어 보입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1940년이랍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7살 어린이가 쓴 현판

[중앙일보] 입력 2007.12.13 15:29 / 수정 2008.08.27 12:53

펜으로 복원한 문화재
밀양 영남루

밀양 영남루,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대갓집 넓은 마루를 ‘6칸 대청’이라고 하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 마루의 넓이를 뜻합니다. 밀양 영남루(嶺南樓)는 정면 5칸에 측면 4칸으로 넓이가 20칸에 달하는 큰 이층 누각입니다. 좌우측에 능파당과 침류각 두 건물이 붙어있어 더 커 보입니다. 영남루보다 낮은 자리에 지은 침류각 쪽으로 3단 계단인 월랑(月廊)이 있어 영남루가 돋보입니다.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처럼 아름다운 월랑의 3단 기와 지붕은 영남루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영남루를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 3대 누’로 손꼽는 것은 크기와 함께 남천강을 내려다보는 수려한 전망, 월랑이 딸린 건물의 자태가 빼어나기 때문입니다. 영남루 마루에 누워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을 보다 문득 ‘밀양 사람들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남루와 함께 산다는 것은 자랑이며 행운입니다.

 보물 제147호인 영남루는 고려 공민왕 14년(1365) 폐사된 영남사(嶺南寺) 자리에 지은 정자로 여러 번 화재로 고쳐 짓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 밀양부사 이인재가 세운 밀양도호부 객사 부속건물입니다. 요즈음 지자체가 자체 건물을 너무 크게 짓는다고 말이 많은데 이 부사도 말 좀 들었을 것입니다. 건물이 크니 대들보 등 부재들도 커서 시원시원합니다. 현판도 큼직한데 누 안에 걸린 ‘영남루’란 현판의 큰 글씨는 일곱 살짜리 어린이가 썼고, ‘영남제일루’란 큰 글씨는 열 살짜리가 썼답니다. 어린애가 붓글씨를 너무 잘 쓰면 ‘서예가의 혼이 붙었다’고 하여 쳐주지 않는 법인데 웬일인지 모르겠습니다.

 1920년대 사진을 보면 지금의 영남루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룻배 한 척이 세월을 거슬러 오르고 있을 뿐입니다. 사진 속 강가의 모습은 옛 모습 그대로 입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조선 519년을 지킨 터

[중앙일보] 입력 2007.12.27 15:10 / 수정 2007.12.28 07:02

건원릉

건원릉,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대통령 선거철이면 명리학자들은 후보의 생년월일로 당선 가능성을 따지고, 풍수가들은 조상 묘 자리로 우열을 가립니다. 명풍수로 소문난 육관 손석우 도사가 ‘제왕이 나올 명당’이라며 수백억원을 부른 자리에 선친의 묘를 옮긴 후보가 당선되어 이장 효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올 대선에는 선친의 묘를 옮기고도 3수 도전에 실패한 후보가 있습니다. 풍수가의 안목 부족일까요? 후보의 과욕이었을까요?

  조선 왕조가 519년 역사를 유지한 것이 동구릉(東九陵) 터가 좋았기 때문이라 하기에 찾아보았습니다. 9개의 왕릉으로 국내 최대 규모인 동구릉은 우거진 숲과 개울, 잘 관리된 조경으로 답사뿐 아니라 데이트 코스로도 일품입니다. 능의 구성 요소인 홍살문, 정자각, 비각, 봉분을 한 화면에 담을 수 있는 능이 건원릉(健元陵)입니다.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능으로 홍살문을 들어서면 혼령만이 다니는 신도와 왕이 다니는 어도가 일직선으로 정자각까지 뻗어 있습니다. 건원릉에는 제사를 올리는 정자각,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 능을 지키는 관리의 거처인 수복방 등이 온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봉분에는 잔디 대신 태조의 고향에서 옮겨 왔다는 억새가 거친 모습으로 북방의 바람을 일으키고, 문인석과 무인석 등 석조물들이 힘이 있어 건국 초기의 기상을 보는 듯합니다.

  펜화를 그리면서 기록화로서의 역할을 위해 봉분을 가린 소나무 가지를 제외하고 홍살문과 정자각, 봉분의 크기를 조정하여 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만들었습니다. 문화재청에서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는 능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한답니다. 조상을 극진하게 모시는 우리민족의 정신까지 등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영택 화백

 

[week&] 김영택 화백 '펜화기행' 출간

[중앙일보] 입력 2008.01.10 15:32 / 수정 2008.01.11 08:06

김영택 화백이 전국의 문화유산들을 펜으로 옮긴 작품 60여 점을 모아 ‘펜화기행’(지식의숲)을 출간했다. Week&에 ‘김영택의 펜화기행’을 연재하고 있는 김 화백은 국내 미술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장르인 펜화를 개척해 지난 15년간 열정을 쏟아 왔다. 하나의 작품에 보통 보름이 걸리며, 대략 50만 번의 손질이 간다고 한다. 그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탄생한 펜화에는 우리 전통건축물이 가진 그윽한 품격이 그대로 살아 있다. 펜화의 소재를 찾아 전국을 돌며 만난 자연과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글들이 그림을 보는 재미를 한결 북돋운다.

 담양 소쇄원, 고창 선운사, 영천 만불사 등 우리 땅의 아름다운 유적들을 ‘산, 물, 흙, 사람, 하늘’이라는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눠 엮었다. 그림 속 문화유산의 유래와 의미를 감성적인 문체로 알기 쉽게 설명했다. 새로운 형식의 문화유산 답사기라 할 만하다.

 

[김영택의펜화기행] 통도사 석조봉발

[중앙일보] 입력 2008.01.17 14:52 / 수정 2008.01.18 12:05

부처님 밥그릇 안엔 뭐가 들었을까

종이에 먹펜, 26x37m, 2008
불보사찰 통도사 용화전(龍華殿) 앞에 큰 돌그릇이 받침돌 위에 놓여 있습니다. 높이 3m에 뚜껑까지 덮여 있는 돌그릇을 석조봉발(石造奉鉢)이라 부르는데 보물 제471호입니다. 공식 명칭은 봉발탑(奉鉢塔)으로, 희귀한 불교문화재입니다. 봉발이란 스님이 밥을 얻으러 다닐 때 들고 다니는 그릇, 즉 발우(鉢盂)를 모셨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출가 후 평생 동안 갖고 다닌 것은 헌옷 한 벌과 밥그릇 하나뿐이었습니다. 철저한 무소유였으니 세상을 뜨실 때 수제자에게 물려줄 것은 밥그릇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입적을 하기 전 제자 가섭존자에게 “내 발우를 보관하였다가 미륵불이 출현하면 물려주게” 하시며 발우를 맡기셨답니다. 그래서 석조발우가 미륵부처님을 모신 용화전 앞에 설치된 것입니다.

 이런 전통이 있어 큰스님이 입적할 때 발우를 받는 것을 제자로서 큰 영광으로 알았으나 요즈음에는 물려줄 재산이 없으면 제자 한 명 두기가 어렵답니다. 무소유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지요.

 석조봉발은 사각 지대석 위에 하대석을 놓고, 팔각 중대석에는 마디를 조각하였습니다. 연잎을 조각한 상대석 위에 놓인 돌그릇에 큰 뚜껑을 덮어 놓았습니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초창된 용화전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봅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발우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무척 궁금하였습니다. 불상처럼 유물을 넣어 놓았을까요? 빈 그릇일까요? 아니면 속을 파내지 않은 통자 돌일까요? 통도사에 일 년 반을 살면서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금강산 표훈사

[중앙일보] 입력 2008.01.31 15:52 / 수정 2008.02.01 08:02

이끼 위에 앉은 세월

금강산 표훈사, 종이에 먹펜, 36X50cm, 2008
금강산에는 많은 절과 암자가 있었으나 전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남측에서 복원한 신계사와 표훈사(表訓寺)가 남아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내금강 관광 코스의 중심인 표훈사에는 반야보전·능파루·명부전·영산전·어실각·칠성각에 스님들의 주거 공간인 판도방 등 7채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2층 누각인 능파루 밑을 통해 절 마당에 들어서니 녹색 이끼가 붙은 기와들이 눈길을 끕니다. 공장에서 찍어내 색도 모양도 똑같은 남쪽 절의 기와만 보다가 손으로 만들고 세월의 더께가 고스란히 붙어 있는 기와를 보니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습니다. 이처럼 가난해서 좋은 것도 있습니다만 작은 부처 세 분만 계신 법당은 무척 썰렁해 보였습니다.

두 명의 북측 중선생이 안내를 하는데 나이든 분은 회색 법복에 붉은 가사를, 젊은 분은 곤색 법복에 붉은 가사를 걸쳤습니다. 양복에 가사만 걸쳤던 예전 모습에 비해 발전한 셈이지만 머리를 깎지 않아 아직도 어색해 보입니다. 종교학과를 나왔다고 하는데 종교가 없는 북측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궁금합니다. 신계사 복원을 맡았던 남측의 제정 스님은 북측의 요구로 철수했답니다. 무척 섭섭했을 스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내금강 코스의 정점인 묘길상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북측 안내인이 ‘펜화를 배우고 싶다’고 하네요. ‘손이 시리지 않으냐’며 장갑을 빌려주고 ‘길이 미끄럽다’며 팔짱을 끼는 등 처음부터 수상쩍다 했더니 속셈이 있었던 게지요. 곱고 복스럽게 생긴 북측 미인의 부탁을 거절할 남측 남정네가 있겠습니까. 남측에도 없는 제자가 북측에 생겼는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난감합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관음보살이 바다에 누운 까닭은

[중앙일보] 입력 2008.02.21 15:39 / 수정 2008.02.22 06:00

펜으로 복원한 문화재 양양 휴휴암

휴휴암 관음상, 종이에 먹펜, 26X37cm
강원도 양양 바닷가 휴휴암(休休庵)이란 작은 절에 매일 수십 대, 많은 날에는 100여 대의 관광버스가 몰려듭니다. 사찰 순례 방문인데 무엇이 있어 참배객을 부를까요?

휴휴암 앞 바다의 너럭바위는 2000~3000명이 야외 법회를 해도 될 만큼 넓습니다. 이 너럭바위를 연화대라 하는데 주변에 특이한 모양의 기암괴석이 둘러 있어 시선을 끕니다.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알바위’, 발가락 모양이 완연한 ‘발가락 바위’에 ‘발바닥 바위’, 네 마리 오징어를 널어놓은 것 같은 ‘손가락 바위’, 짓궂은 얼굴의 ‘달마바위’ 등 갖가지 볼거리가 많아 천연 석조물 전시장을 방불케 합니다.

압권인 것은 누워 있는 모습의 관음보살바위입니다. 큰 코에 두툼한 입술과 턱이 완연하고 발치에는 좌대석까지 갖추었습니다. 머리맡에는 연꽃 바위와 연밥도 있어 화관을 갖춘 관음보살이 되었습니다. 얼핏 보면 알아보기 힘들지만 스님의 설명을 들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관음보살 가까운 바다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보살 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관음보살을 따르는 ‘남순동자’라 하여 ‘거북바위’ 또는 ‘동자바위’라 부릅니다.

관음보살이 누워 계신 곳이라 ‘쉬고 또 쉰다’는 뜻을 가진 휴휴암, 국내에 단 하나뿐인 여기의 천연 관음보살상을 보려고 매일 참배객이 넘쳐나니 한마디로 ‘대박 난 절’입니다. 기암괴석을 찾아낸 스님의 안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가난한 여인의 기도

[중앙일보] 입력 2008.03.06 15:20 / 수정 2008.03.07 05:42

[펜으로 복원한 문화재] 통도사 석등

어느 큰 교회에서 훌륭한 목사를 모셔 올 때 ‘개인 헌금에 대해 일절 발표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목사님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한 것입니다.

목사님의 올바른 의지는 오래 가지 못하고 꺾였습니다. 헌금이 줄어 교회 운영을 못할 지경이 된 것이지요. 주보에 발표를 안 하면 하나님이 모르실까요?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에 부처님이 방문하는 날 아자타사투왕은 죽림정사에 1만 개의 화려한 연꽃등을 달았습니다. 이를 본 가난한 여인 ‘난다’는 구걸한 돈으로 절 귀퉁이에 작은 등불을 밝히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조그만 등불을 공양하오니 너그러이 받아 주십시오. 이 작은 불빛이 중생의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해 주고, 가난한 이들에게 용기와 복덕을 내려 주소서. 저에게도 훗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그날 밤 세찬 비바람이 휘몰아치자 왕이 켜 놓은 등은 모두 꺼졌으나 오직 난다의 등만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저 등불은 가난하지만 착한 여인이 정성으로 밝힌 등불이라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공덕으로 난다는 다음 세상에 부처가 될 것이다. 공양물이나 이웃에게 보시하는 게 비싼 것이라고 많은 공덕을 받는 게 아니라 정성과 깨끗한 마음에 의해 공덕을 받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김영택의펜화기행] 금강산 보덕암 - 절벽 위의 한 칸 방, 막다른 참선 도량

[중앙일보] 입력 2008.03.21 00:59 / 수정 2008.03.21 02:10
종이에 먹펜, 43X60cm, 2008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1600여 명이 부처의 단계인 ‘아라한’이 됩니다. 모두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피를 받은 것이지요.

이런 수행을 ‘타력수행’이라 하며 반대로 ‘자력수행’이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타력수행은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는 것이고, 자력수행은 걷고 뛰고 수영을 하며 미국에 가는 것입니다.

자력수행 방법으로는 처절하게 수행을 하여도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렵습니다. 불경에도 방법이 없고, 스승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 깨달음이니 얼마나 힘들고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장소를 찾아 전국을 떠돕니다.

금강산 만폭동계곡 분설담 옆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작은 암자가 붙어 있습니다.

구리기둥으로 마룻귀틀을 받치고 그 위에 단칸 기와집을 지었습니다. 팔작지붕을 얹고 그 위를 맞배지붕으로 가리고 맨 위에는 사모지붕에 상륜부까지 올려서 무척 아름답습니다.

너무 멋있어서 스님들의 별장으로 오인하기 쉬우나 깊이 5.3m, 너비 2~1m, 높이 2~1m의 작은 동굴에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막고, 겨울에도 참선할 수 있도록 한 평이 채 못 되는 좁은 전실을 만든 것입니다.

목수가 고안했는지 스님의 아이디어인지는 몰라도 뛰어난 설계입니다. 강한 기운이 감도는 좋은 수행처로 보입니다만 직접 체험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고구려 안원왕 때 보덕스님이 창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숙종 1년(1675)에 지은 것을 순조 8년(1808)에 중수하였습니다. 구리로 감싼 기둥을 중종 6년(1511)에 세웠다는 기록을 보면 그 이전에는 나무기둥이었나 봅니다. 옛 사진을 참고하여 띠살창을 달고 보덕암(普德庵)이라는 현판을 그려 넣었습니다. 없어진 판도방(判道房·스님들의 거처)도 되살리고 상륜부에 없어진 부재도 새로 올리는 등 복원도를 만드는 데 달 반이 걸렸습니다.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왜 펜화를 그리냐고 물으신다면 …

[중앙일보] 입력 2008.04.04 01:02 / 수정 2008.04.04 02:44

펜으로 복원한 문화
불국사 노송

종이에 먹펜, 22.5X30cm, 1995
펜화가 생소해서인지 ‘펜화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으며, 왜 건축문화재만 그리느냐’고 묻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1993년 전 세계 디자이너 중 57명에게 수여된 ‘디자인 앰배서더’가 돼 ‘제1회 세계 로고 디자인 비엔날레’ 초청작가로 유럽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그림엽서·복제화·캘린더 등 다양한 펜화 복제품을 만나게 됩니다. 주로 건축 문화재를 그린 펜화를 접하며 ‘한국 건축 문화재를 펜화에 담아 세계에 알리면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이 수천 년간 붓으로 기록을 하는 동안 유럽에서는 갈대나 깃털로 만든 펜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특히 유럽의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펜화는 기록화로서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정확한 묘사력으로 세밀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제판기술이 발달하면서 펜화가 쇠락합니다만 아직도 향수 어린 옛 그림으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귀국 후 늦은 나이에 펜화가로 직업을 바꾼 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제적 고생을 하면서도 ‘세계적인 펜화가’가 되고 싶은 욕심에 유럽 펜화를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적 정서가 담긴 독창적인 펜화 기법’이어야 유럽의 펜화와 경쟁할 수 있다고 보았거든요. 선배도 없고 선생도 없이 독학을 하면서 많은 시행착오가 따랐습니다. 검정 잉크가 빛에 바래 장기 보존이 어려운 것도 몰랐고, 다양한 굵기의 펜촉이 있는 것도 몰라서 세밀한 묘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늘 보여 드리는 불국사 앞 노송 그림이 초기 작품으로 요즈음 그림과 많이 달라 보일 것입니다. 사실 초기 3~4년 동안 소나무를 제대로 그리기 어려워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펜화 기법도 하나하나 터득하다 보니 지난해 그림과 올해 그림이 다릅니다. 이제는 선조들의 혼이 담긴 건물과 산하의 기운까지 화폭에 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첫 개인전 때 학고재 우찬규 사장님이 “펜으로 그렸는데 조선 백자의 향기가 납니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한국적 펜화를 만드는 데 성공한 셈이니까요.

건축 문화재만 그리는 이유는 시각 문화재 중 건축물이 국가를 대표하는 문화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름다운 건축 문화재를 500점 이상 펜화에 담아 세계에 널리 자랑하고 싶습니다.

1년에 20여 점 밖에 못 그리지만 명리학의 대가인 조용헌씨와 최고의 관상가인 주선희 교수가 저를 보고 “89세까지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으니 제 소원은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김영택

 

 

혜화문...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

 

혜화문 안내문...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