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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펜화 에세이

중앙[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56 ~66./시타시나 2장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6. 인물사진

[중앙일보]입력 2006.11.20 22:19 / 수정 2006.11.21 07:12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진 촬영 후
대가로 받은 수표에 '0'이 하나 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 인물사진을 촬영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필자는 한화그룹 창립 45주년 화보집을 만들게 됐다.
"이 쪽을 보시고 고개를 약간 드십시오. 즐거운 생각을 하면 표정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찰칵 찰칵 찰칵…. 1996년 서울 을지로 한화그룹 회장실. 김승연 회장은 햇살이 번지는 창가에서 내 요구에 따라 다양한 포즈를 취했고, 카메라는 순간순간 변하는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김 회장은 며칠 전 인물사진을 찍어 달라고 내게 부탁했었다.

인물사진은 증명사진과 확연히 다르다. 생김새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람의 개성까지 표현해야 한다. 격정적인지, 카리스마가 있는지, 가슴이 따뜻한지 여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사진가는 좋은 인물사진을 찍을 수 없다. 카메라를 들기 전에 내가 파악한 김 회장은 '도전적이면서도 내면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촬영 전에 김 회장과 차를 마시며 대화하고, 그가 주변 사람들 대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내가 찍고자 하는 이미지가 떠올랐고 김 회장도 나를 편하게 대하게 됐다. 자연스러운 사진을 위한 중요한 절차였다. 촬영 현장도 미리 점검했다. 창가에 햇살이 가장 잘 드는 시간을 골라 시간 약속을 했다. 인물 촬영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사진가는 상대가 제왕이라 해도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있는 배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드디어 촬영이 끝났다. 1시간여 걸렸다. 항상 그랬듯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옷이 후줄근해졌다. 필름 10통을 썼으니 360커트 정도를 찍었는데 일에 완전히 몰입해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몰랐다. 내가 땀 흘리며 촬영에 열중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김 회장은 더욱 진지하게 내 요구를 들어줬다. 우리는 공동 작업을 하는 파트너처럼 호흡을 같이 했다.

회장실을 나서는 나에게 김 회장이 사례비를 건넸다. 사무실에 도착해 봉투를 열어본 나는 수표 금액을 보고 깜짝 놀랐다. '0'이 하나 더 붙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용도로 마련한 봉투를 나에게 잘못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김 회장에게 전화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에 대한 마음의 표시입니다. 좋은 일에 쓰시기 바랍니다."

그가 말한 대로 나는 프로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을 배운 곳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었다. 동료들 역시 일에 관한 한 조금의 양보도 없는 진정한 프로들이었다. 귀국 후에도 철저한 프로의 길을 고수했는데 나의 방식은 한국의 관행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일의 대가로 100이 적정하다고 생각되면 그 이하로는 절대 일을 맡지 않았다.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단 맡으면 최선을 다했다. 자지도 먹지도 않고 일에 몰두하기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비용을 초과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200, 300의 결과를 돌려주었다. 처음엔 비싸다고 투덜댔던 사람들도 결과엔 만족했다. 그것이 내가 일하는 방식이었다.

인물사진 촬영으로 인연을 맺은 김 회장은 그룹 창립 45주년 화보집 제작을 나에게 의뢰했다. 나는 전 세계 한화그룹 사업장을 돌며 'Global HANHWA'라는 제목의 책을 성의껏 만들어 그의 호의에 보답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7. 고독한 회장님들

[중앙일보]입력 2006.11.21 20:44 / 수정 2006.11.22 07:13

1990년대 초 거센 구조조정 바람
헤쳐나가려고 밤잠 안 자며 고심

[김희중 갤러리]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다 좋지만 겨울이 오기 직전의 만추(晩秋)는 가슴 시리게 아름답다. 1990년대 필자가 경북 상주에서 경주로 차를 타고 가다 촬영했다.
"우리는 세계와 경쟁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는데 제도.사회.정치가 뒷받침을 하기는 커녕 뒷다리만 잡으니 어떻게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1993년 서울 계동 현대그룹 사옥. 정주영 명예회장은 힘 빠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가 출마했던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될 때였다. 선거 유세 때 김영삼 후보는 "돈으로 정권을 사려는 사람이 있다"며 정주영 후보를 비난했었다. 정 명예회장은 대선 출마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었지만 정치에 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업을 하다 보니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고, 그게 귀찮아서 기업 운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나서봤던 겁니다."

어떻게 이렇게 큰 기업을 일구셨느냐는 물음엔 금세 밝은 표정이 됐다. "일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가슴이 설레고 꿈을 꾸다 보면 가능성이 눈에 보입니다. 그 가능성을 실천에 옮긴 것이 지금의 현대지요."

92년 5월 김우중 회장은 미니버스에 오르자마자 잠이 들었다. 거제도 대우조선 사무실에 있다가 사진을 찍기 위해 조선소로 가는 길이었다. 불과 15분 거리였지만 그는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행비서가 민망한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결례인 줄 알지만 회장님께서는 밤에 잠을 주무시지 않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이렇게 토막잠을 주무셔야 합니다."

'포천'지의 의뢰로 김 회장을 취재하며 여러 번 그분을 만났지만 그는 용무가 끝나면 어디서든 곯아떨어졌다. 시간이 아까워서 밤잠을 자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김 회장이 가끔 바둑은 뒀다. 시간이 나면 넥타이까지 풀고 그룹 내 단골 맞수와 마주앉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돌을 하나씩 놓는 순간에도 머리로는 사업 구상을 하는 것 같았다. 바둑은 몰두하기 좋아하고 느긋하게 몸을 쉬지 못하는 성격이 반영된 취미생활이었다. 김 회장의 별명은 '호랑이'였다. 한 번 먹이를 물면 놓지 않는 호랑이처럼 사업에 뛰어들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의 집요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90년대 초반 우리나라 대기업 회장들은 시대의 조류에 쫓기고 있었다. 국제화.세계화가 화두였다. '구조조정' 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주요 경영목표가 됐다. 하지만 마음만 급할 뿐 덩치 큰 기업의 체질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자택에는 유리로 만든 올빼미가 여러 개 있다. 밤잠 안 자고 일하니까 주변에서 "이 회장은 올빼미"라며 선물한 것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외로움을 안고 사는 듯했다. 이웃이나 친구들을 함부로 만날 수 없었다. 부자였지만 화려한 생활도 하지 않았다. 회장 직함을 빼놓는다면 그들은 서울역 대합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을 모시던 비서들은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정 회장의 구두는 제대로 닦지도 않은 낡은 것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8. 죽음의 문턱

[중앙일보]입력 2006.11.22 19:14 / 수정 2006.11.23 18:42

삼성 해외사업장 취재차 도쿄 방문
식당서 술 곁들인 저녁식사 후 졸도

[김희중 갤러리]1995년 어버이 날 무렵, 광주광역시에 있는 ''사랑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노인. 형편이 어려워 식사를 걸러야 하는 많은 노인들이 이곳에서 따뜻한 한 끼 밥을 대접받았다.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는 사회야말로 아름다운 사회가 아닐까?
눈앞이 환하다. 화사한 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몸은 솜털처럼 가볍다. 발걸음은 허공을 팔랑이는 나비 같다. 이렇게 편안할 수가 있을까?

조그만 개울이 있고 예쁜 구름다리가 그 위에 걸쳐 있다. 다리를 지나 물을 건넌다. 더 환한 세상이 펼쳐진다. 오솔길을 따라 걷는데 앞으로 빨려가는 듯하다. 몸은 안락하고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몸이 흔들린다. 누군가 나를 흔들고 있다. 왜 귀찮게 구는 걸까? 손길을 뿌리치고 계속 걷는다. 더 크게 몸이 흔들린다. 툭 꺼지듯 환한 세상이 사라지면서 눈을 떴다. 하얀 가운을 입고 흰색 헬멧을 쓴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크게 숨을 내쉬었다.

1994년 어느 날 일본 도쿄의 식당에서 나는 졸도했다. 친구들을 만나 반주를 곁들여 저녁을 맛있게 먹은 뒤 "계산은 내가 하겠다"며 카운터에서 지갑을 꺼내던 순간이었다. 3~4분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사이 친구들은 나를 깨우기 위해 흔들고 급히 구조대를 부른 것이다. 쓰러져 있는 동안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하고,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무렵 나는 일생에서 가장 바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화보' 편집장과 '타임' 특파원을 겸하는 상황에서 삼성의 해외홍보를 맡았고, 중앙대에서 강의도 하고 있었다. 졸도한 날도 삼성 해외사업장을 취재하기 위해 보름 일정으로 떠난 출장의 첫 방문지인 일본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릴 때부터 몸은 튼튼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건강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잔병치레 한 번 없이 아흔까지 사셨다. 나보다 아홉 살 많은 큰 누이(75세)는 아직도 인천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다. 스무 살 때 뉴욕에서 시작된 육체의 고통과 정신의 긴장은 수십 년간 지속됐다. 궁핍하고 불안한 7년간의 대학 시절, 살아남기 위해 일한 18년 동안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생활, 그리고 귀국 후 한국 땅에 뿌리내리려고 불철주야 노력한 나날들. 견디다 못한 육체와 정신이 '더 이상은 도저히 못 참겠다'며 두 손을 들고 비명 지르듯 주저앉아 버린 것은 당연했다. 도쿄의 구조대원은 이렇게 말했다. "흔드는 걸 느끼지 못했다면 살아나지 못했을 겁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뒤돌아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성정은 느긋하게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졸도한 다음날부터 예정된 일정을 모두 소화했고 병원도 들르지 않았다. 요즘도 건강을 위해 특별히 하는 것은 없다. 다만 절제를 통해 몸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말씀하셨다. "한 술 더 먹고 싶을 때 숟가락을 놓아라." 가르침대로 평생 소식(小食)했고 즐기는 포도주도 한 병을 넘기지 않는다.

난 행복한 일생을 살았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이 나만 피해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죽는다 해도 미련은 없다.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일본에서 그날 본 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면 죽음이란 편안하게 잠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최후의 순간에는 밝고 화사한 길을 따라 저세상으로 건너간다고 믿는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9. 광고 모델

[중앙일보]입력 2006.11.23 18:42 / 수정 2006.11.23 22:41

사진학도에게 희망 주려고 출연
스포츠지 조사 인기순위 4위에

1993년 안동 병산서원 앞 낙동강 백사장에서 필자가 출연한 CF를 촬영하고 있다.
1992년 말 광고제작사인 제일기획에서 연락을 해 왔다. 동서식품 '맥심' 커피의 방송광고 모델로 나를 등장시키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모델도 아니고 탤런트도 아닌데 광고에 나갈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제일기획과 동서식품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제일기획에서는 '명사 시리즈'인 만큼 전문 모델들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했고, 동서식품도 여러 인맥을 통해 부탁해 왔다. 동서식품 부사장 부인이 내 누이의 친구라는 인연이 동원될 정도였다. 고민하다 결국 승낙했는데 그것은 젊은 사진학도들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우리나라 사진가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구본창씨는 유럽.미국.일본 등을 무대로 전시회와 강연 활동을 펼쳐왔으며 외국에서 한국 현대사진에 대한 특강을 하기도 했다. 신진 작가 김아타씨는 세계 최고의 사진미술관인 뉴욕국제사진센터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세계적인 사진가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사진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성공의 모델로 삼을 만한 선배가 없었다. 학생들은 어떤 사진가처럼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자기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로버트 카파나 까르띠에 브레송을 주워 섬겼다. 그들에게 사진도 제대로 하면 '명사'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광고는 여름용과 겨울용 두 가지를 촬영했다. 여름용은 경북 안동 병산(屛山)서원 앞 낙동강 백사장에서 찍었는데 처음 보는 병산서원은 건축이 자연과 어떻게 어우러져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걸작이었다. 입교당(入敎堂) 마루에 앉아 만대루(晩對樓)를 보니 누각 기둥들 사이로 낙동강과 그 뒤를 둘러친 병산이 일곱 폭 병풍으로 펼쳐졌다.

평생 사진만 찍다 카메라 앞에 서니 마음처럼 쉽게 연기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익숙해져 즐기면서 촬영할 수 있었다. 나중에 편집하는 걸 지켜보면서는 '저 장면에서는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하는 생각도 했다.

온종일 찍었지만 구성은 극히 간단했다. '사진가가 강변에 텐트를 치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데 뱃사공이 배를 저어 강을 건너온다. 사진가와 사공은 오랜 지기처럼 마주앉아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나눈다'. 뱃사공은 연극배우 윤문식씨였다.

광고는 93년 5월부터 1년간 방송을 탔다. 광고 촬영 전에도 여러 차례 방송에 나간 적은 있었지만 1년 동안 반복돼 노출되는 광고의 경우 효과가 달랐다.

고교 시절 개인전을 열며 스타가 된 뒤 수십년 만에 다시 전국적인 유명인사 반열에 오르게 됐다. 당시 한 스포츠 신문이 모델 인기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1위가 김희애, 2위가 최진실, 3위가 유인촌, 그리고 나와 윤석화가 4위 그룹을 형성했다.

유명해지니까 취재 섭외가 쉬워졌다. 사람을 만나 부탁을 할 때 상대가 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알아보니 말과 행동은 조심해야 했다. '스타'는 사생활이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60. 국민훈장

[중앙일보]입력 2006.11.26 22:18 / 수정 2006.11.26 22:51

해외홍보 공로 … 사진가론 처음 받아
동판으로 만들어 아버지 묘비에 붙여

몇 년 전 충청도의 한적한 시골길에서 만난 어릴 적 내 모습. 도시 출신 성인들도 어린 시절에는 개울에서 물장구 치고 피라미를 잡았었다. 소중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김희중 갤러리]
1985년 영구 귀국한 나는 다시 한국인이 되었다. 25년 동안 살았던 미국이 제2의 고향인 것은 분명하지만 미국 국적을 포기할 때는 아쉬움보다 '완전한 한국인이 됐다'는 느낌으로 가슴이 벅찼다. 잃어버린 조국을 다시 찾은 마음이라고 할까.

한국이 나의 능력을 필요로 했던 분야는 국가 해외홍보였다. 86아시안게임이 끝나고 88올림픽이 다가오자 정부는 홍보에 힘을 쏟았다.

'한국화보'를 제작하느라 분주했지만 도와 달라는 곳은 어디든 다녔다. 한국관광공사와 문화공보부.외교부 등을 내 집 드나들 듯했다. 한국 정부는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행사를 앞두고 있었지만 외신기자 취재 지원에서 캘린더.포스터 제작까지 많은 분야에서 경험이 없었다.

내가 가장 힘주어 강조한 것은 '진솔한 홍보'였다. 공무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의 어두운 부분이 가려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외국에 잘 알리는 방법은 '솔직함'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파트 100만 채를 지었다고 자랑하려면 왜 그렇게 많은 주택이 필요했는지 우리의 실상도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최고'라는 이야기도 하지 맙시다. 다른 나라 국민은 열등하다는 얘기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해 긍지를 가질 수 있지만 남의 문화를 얕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세계속의 한국'을 알리는 방법입니다."

94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국가 홍보를 위한 노력을 정부가 인정해준 것이다. 국민훈장은 '국민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훈장이다. 사진가가 좋은 사진으로 문화훈장을 받는 경우는 있었지만 국민훈장은 내가 처음이었다.

훈장을 받은 것은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틈만 나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교육하는 것은 너희만 배불리 먹고 편히 살라는 뜻이 아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쓸 만한 재목이 되어야 한다."

인쇄소와 곰탕집을 운영하셨지만 정치에 뜻이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항상 나라와 민족을 앞세우셨다. 한국전쟁 이후 나라가 워낙 빈곤했기 때문에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와서 나라를 살찌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다.

훈장을 받던 날, 내 가족과 형제들은 전원 남한산성의 부모님 산소를 찾았다. 가장 기뻐할 분은 바로 아버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지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훈장을 산소 앞에 놓고 말씀드렸다. "아버지! 제가 오늘 받은 훈장입니다. 어머니! 저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많은 상을 받았지만 아버지와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국민훈장이 가장 의미 있는 상이었다. 비록 묘소 앞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뭔가 했다는 것을 걸 말씀드릴 수 있어 기뻤다. 부모님 산소에 조그만 비석을 세우고 훈장을 동판으로 제작해 붙였다. 훈장은 아버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61. 미혼모

[중앙일보]입력 2006.11.27 21:26 / 수정 2006.11.27 22:15

몇 차례 보호시설 찾아가 설득
16세 소녀 만삭의 배 사진 찍어

몇 차례 방문 끝에 만삭의 소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들은 두 명이 방 하나를 사용했다.[김희중 갤러리]
"… 큰 죄를 지었어요. 후회돼요. 다시 세상을 산다면 이런 일은 겪고 싶지 않습니다."

1995년 경기도 안양의 미혼모 수용시설에서 만난 16세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이렇게 말했다. 배는 만삭이었지만 얼굴에는 아직 솜털이 남아 있었다.

그해 나는 중앙일보에 '에드워드 김의 영상취재'라는 기획물을 연재했다.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는 독자들이 사진과 글로 구성된 지면을 보며 사회의 주요 이슈를 알게 하는 게 기획의 목적이었다. 미주리대의 이덤 교수에게서 배우고,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다듬은 포토저널리즘을 신문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소재는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걸 선택했다. 온 국민이 궁금해 하던 북한 경수로(輕水爐) 지원, 결식노인 문제, 대졸 취업난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가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들도 취재 대상이었다. 한때 산업 역군이었으나 진폐증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광부들, 제주 해녀의 애환이 그런 것들이었다.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해외 입양 문제였다. 태어나자마자 머나먼 이국으로 떠나는 아기들을 비행기에서 볼 때마다 '저 아이들을 우리가 책임져야지 왜 외국에 맡기느냐?'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데 취재해 보니 해외 입양의 뿌리에는 미혼모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수소문해 찾아간 미혼모 보호 시설에는 17명의 소녀들이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놀라웠던 건 미혼모 자신들이 뱃속에서 자라는 아이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임신을 했고, 중절의 기회를 놓쳤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출산한 뒤 큰 죄의식 없이 아이와 헤어져 다시 사회로 나갔다. 문제는 가정불화였다. 미혼모들은 대부분 화목하지 못한 가정을 등지고 나온 아이들이었다.

나와 마주 앉은 소녀는 좀 달랐다. 미혼모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를 설득해 사진을 찍어야 했다.

"부끄럽겠지만 사진을 찍으면 너와 같은 불행을 당하는 사람을 줄일 수 있단다. 세상 사람들은 너희의 고통을 잘 몰라."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뭐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신문에 나가겠어요."

만삭의 소녀를 카메라 앞에 세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 설득하고 식사도 함께하며 마음의 빗장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세 번, 네 번 찾아가 얼굴을 익히자 드디어 소녀가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미혼모 문제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떤 사진이 좋을까? 논란이 있더라도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옷을 벗기고 부풀어 오른 배만 찍는 것이었다. 산모의 나이는 부른 배를 감싸 안은 여린 손으로 표현하면 되었다.

하지만 소녀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수치심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완전한 믿음을 주지 못한 탓이었다. 누드 사진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햇살이 드는 창가에 그녀를 앉히고 고개를 약간 숙이게 한 다음 꽃을 한 송이 들게 했다. 만삭의 배는 헐렁한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촬영한 사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까지 미혼모를 촬영해 보여준 언론은 없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62. 이명동 사진상

[중앙일보]입력 2006.11.28 22:20 / 수정 2006.11.28 22:30

중3 때 우리 집으로 여자 데려와
"누드 찍고 싶으면 부탁해 보거라"

교복 차림의 남녀 고교생들이 나룻배를 타고 도담삼봉이 떠있는 남한강 상류를 건너고 있다. 1983년 초겨울의 어느 날이다.[김희중 갤러리]
스승 이명동 선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소를 짓게 되는 어린 시절의 하루가 생각난다.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선생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왔다. 그리고는 대뜸 "누드를 찍어보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냉큼 나서지 못하고 쭈뼛거리자 "네가 원하면 이 분께 부탁해 보거라"고 했다. 선생을 따라온 여자는 키가 작고 통통한 편이었는데 별로 망설이지 않고 병풍 뒤에서 옷을 벗었다.

조명을 설치하고 여자 앞에 발을 친 다음 포커스를 맞추자 알몸이 선명히 보였다. 처음 보는 성숙한 여자의 몸이었다. 긴장하면서 몇 커트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해서 스승은 소년 제자에게 누드까지 가르친 셈이다. 선생은 누드가 모든 예술 장르에서 중요한 소재니까 사진가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소년이 스승과 아버지까지 계신 곳에서 여자의 벗은 몸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다. 성인이 되고 사진가로 살아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여자의 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신비한 곡선에 생명까지 있기 때문이다.

이명동 선생은 어린 시절 부친이 송아지를 사려고 할머니에게 맡겨둔 15원 중 12원을 훔쳐 카메라를 사면서 사진에 입문했다. 사진가의 열정을 타고났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성균관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보도 사진가로 입문했는데 내가 선생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어린 나에게 준 가르침은 간단하지만 중요했다.

"작은 것도 크게 보고, 큰 것도 작게 봐라." 데모 현장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전경(全景)만 찍지 말고 한 사람의 눈초리 만으로 현장 분위기를 표현해 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요즘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내용이다.

선생은 4.19 전후의 격동기에 보도 사진으로 이름을 떨쳤다. 3.15 선거 당시 개표장에 불이 꺼져 혼란스러운 가운데 표를 바꿔치기하는 소동이 벌어졌는데 그는 이 장면을 찍어 부정선거를 고발했다. 미국 생활을 하며 '라이프'지 기자들을 볼 때마다 선생이 이런 곳에서 활동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사진은 진실한 것 만이 생명력을 갖는다"고 믿는 분이었다.

선생은 1960년대 초부터 국전(國展)에 사진 분야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 마침내 64년 그 뜻을 이뤘다.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의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여러 대학 사진학과.신문방송학과에서 30여 년간 강의도 했다.

이런 업적을 기려 99년 후학들이 '이명동 사진상'을 제정했다. 해마다 우리나라 사진문화 발전에 공헌한 인사에게 주는 상이다. 전에도 사진상은 있었지만 이 상은 우리나라 사진계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상으로 자리매김했다.

1회 수상자로 내가 뽑혔다. 사진 인생이 시작되도록 가르쳐 주신 분의 상을 받는 소감은 특별했다. 어린 시절 산과 들을 같이 누비던 스승 이름으로 상이 생길 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으며, 내가 첫 수상자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명동 선생은 미주리대의 이덤 교수와 함께 나의 오늘이 있게 한 스승으로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63. 두 번의 결혼

[중앙일보]입력 2006.11.29 21:15 / 수정 2006.11.29 21:29

큰아들 마이클(34 右)과 둘째 선두(23)가 지난해 서울에서 만나 셀프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서른 살 되던 1970년에 결혼을 했다. 아내는 미국 백인 여성으로 세인트루이스 도서관에 근무하고 있었고 장인은 곤충학 박사로 미국정부의 고위 관리였다. 결혼식은 신부 집에서 처가 친지들만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치렀다. 서울의 부모님께는 나중에 말씀드렸는데 "죽어도 거기서 죽고 돌아오지 말라"던 아버지의 말씀이 유효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결혼할 때는 희망에 부풀었다. 아버지처럼 자식도 많이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아내는 조용한 가운데 완벽하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으로 직장에서 신임도 있었고 살림까지 야무지게 했다. 곧 아이가 태어났고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입사해 정신없이 일에 빠져들 때라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이럴 바에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요." 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미안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내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미주리로 가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우리 부부는 워싱턴과 미주리에서 각자 일에 몰두했다.

몇 년이 흐르고 박사 학위까지 마친 아내가 워싱턴으로 돌아와 말했다. "우린 가는 길이 다른 것 같아요. 이만 헤어지는 것이 어떨까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내 생각만 하고 그녀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나 또한 그녀에게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의 요구대로 집 한 채를 사 주고 결혼생활을 끝냈다. 실질적인 동거는 5년이 채 안됐다. 이 결혼은 상대가 미국 여성이었기 때문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회장 딸과 결혼해 출세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한국에 나기도 했다.

1981년 한국인 여자와 재혼했다. 이 사람은 아버지가 아주 좋아했다. 싹싹하고 귀엽고 어른을 잘 모셨기 때문이다. 예쁜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지냈다. 하지만 85년 귀국 후 문제가 생겼다. 난 25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기반을 잡느라 정신이 없었고, 미국에서 성장한 아내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녀가 부탁했다. "당신이 안정될 때까지 나는 미국에 있다 오면 어떻겠어요?" 내 곁에 있어 준다면 좋겠지만 그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좋아서 결혼했더라도 살다 보면 다른 길을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 결혼관은 다른 사람이 나로 인해 희생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두 번 결혼했지만 여자와 같이 산 건 10년이 채 안된다. 돌이켜 보면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나와는 인연이 짧았던 것 같다. 지금도 헤어진 아내들과 소식을 주고받고 어쩌다 만나면 식사도 한다. 미국에 사는 첫 아이는 가끔 서울로 날 찾아오고, 프로골퍼인 둘째는 미국 유학 중이다.

요즘 나는 혼자 지낸다. 외롭고 힘들지만 이제 많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런 삶도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 여정에는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기게 마련 아닐까? 하지만 정말 외로울 때가 있다. 명절이 그렇다. 서울이 텅 비는 추석 때 사무실에 혼자 있으면 대가족이 모여 송편을 빚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64. 나를 뛰어넘어라

[중앙일보]입력 2006.11.30 21:15 / 수정 2006.11.30 22:04

"세계적인 사진교육 요람 만들겠다"
이준방 상명대 이사장 포부에 감동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자랑스러운 산업역군이던 광원들이 90년대 들어 잊혀지기 시작했다. 95년 강원도 고한 동원보건소에 입원 중인 진폐증 광원의병실에 촛불이 밝혀져 있다. [김희중 갤러리]
귀국 후 지금까지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역시 '한국화보' 편집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일이다. 강의는 1992년부터 했다. 7년 동안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에서 포토저널리즘을 강의했고, 2000년부터는 이화여대 교육공학과에서 역시 포토저널리즘과 '시각적인 사고' 등을 가르쳤다.

이화여대에 근무하던 어느 날 이준방 상명대 이사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고 사진학과를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사진 교육의 요람으로 육성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사진가인 내가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자로서의 자세도 나를 감동시켰다.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입 안에 든 것도 내줄 분이었다. 이 이사장과의 만남을 인연으로 2003년부터 상명대 석좌교수로 일하며 사진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과 생활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매년 새 학기가 되면 어떤 학생들이 내 강의를 들으러 올까 생각하며 가슴 설렌다. 학기 말에는 정든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 서운하다. 푸르른 나무같이 젊은 학생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앞길을 밝혀줘야 하는 나는 크나큰 책임감을 느끼고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젊은이는 성공을 꿈꾼다. 나처럼 되고 싶다는 학생들도 많다. 그들에게 "나를 뛰어넘어라"고 말해준다. 내가 한 일을 그들이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성공이란 무엇일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소신껏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다. 돈이나 지위는 그 다음 문제다.

그러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소질을 알고 시야를 넓혀 세상을 보면 그것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이 멀어 보이는 그 꿈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한다. 더 편하고 빠른 길을 찾는 것이다. 특히 젊은이가 돈의 유혹에 빠져드는 모습은 안타깝다.

큰 목표가 정해졌으면 단계별로 작은 목표를 세워 차근차근 실천해야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기자가 되고 싶다면 우선 영어부터 잘 하고 봐야 되지 않겠는가? 첫 단계 목표가 이루어지면 다음 목표는 더 쉽게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세상사람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사실이다.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두세 시간으로 밖에 못 쓰는 사람도 있고, 이삼일처럼 늘여 쓰는 사람도 있다. 고무줄 같은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적극적인 자세도 필요하다. '제비 새끼'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떠먹여 달라며 내 얼굴만 쳐다보는 학생을 보면 힘이 빠진다. 배가 고프면 숟가락을 들고 밥을 퍼 먹어야 한다.

하지만 사진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세계적인 사진가가 되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꿈꾸는 인생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대학을 마치고 시골 고향에 내려가 조그만 사진관을 운영하며 이웃 사람들 사진을 찍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65. 거울 속의 나

[중앙일보]입력 2006.12.03 22:23 / 수정 2006.12.03 22:24

머리카락에 서리 내린 66세지만
건강.경제력.일 모두 가져 행복

[김희중갤러리] 늙으면 약해지고 작아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의지할 곳조차 없다면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1998년 경기도 하남시 영락경로원에서 103세 할머니가 생활지도사의 품을 파고들고 있다.
욕실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날 닮기도 했지만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인다. 볼은 처졌고 주름은 깊다. 이마는 넓어졌고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에는 하얀 서리가 내렸다. 팔과 다리의 근육은 풀어져 탄력이라고는 없고 아랫배도 불룩하다.

저 사람이 누구지? 그는 바로 나다. 탄탄했던 몸매의 내가 후줄근한 모습으로 거울 속에서 나를 보고 있다. 도대체 뭘 하느라 저렇게 늙은 것도 몰랐을까?

'거울 속의 나'를 발견한 순간 늙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1940년생이니까 66세이고 조금만 있으면 고희(古稀)가 되는데도 아직은 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다른 사람이 보는 나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고 한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구나 늙으면 세 가지의 두려움이 생긴다. '건강'과 '경제력'과 '일'이다. 건강을 잃으면 다른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가장 중요하다. 경제력도 과거와 달리 필수적인 것이 됐다. 자식들의 부양을 바라기 힘들게 됐고 사회보장도 아직 부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다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할 일이 없다면 곤란하다. 긴긴 노년기를 등산만 하면서, 골프만 치면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다행스럽게도 아직 건강하고 내 생활을 꾸려나갈 능력이 있으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늘 감사하고 있다. 간절히 바라는 바는 마지막 순간까지 강의실에서 정열을 불태우는 것이다.

요즘 나의 생활태도는 과거와는 다소 다르다. 이제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걸 잘 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도 않고, 하나를 받으면 둘을 준다는 자세로 사람을 대한다. 젊은이들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들을 성심성의껏 도와주려고 한다. 순리대로, 물 흐르듯이 내 역할을 후학들에게 물려준다. 그래야 그들과 어울려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 동년배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전문적인 지식과 경륜을 갖춘 그들이 너무 일찍 은퇴해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 이른 데는 젊은 시절 앞만 보고 달리며 노년기를 준비하지 않은 본인들 탓이 크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일을 찾아보길 권하고 싶다. 눈높이를 낮추고 세상을 살펴보면 전문 분야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일이 많다. 노년기를 건강하게 보내려면 심심하면 안 된다.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한다.

노인이 일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간단한 정책을 제안하고 싶다. 그들에게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자는 것이다. 공공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에는 나이 드신 분들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오히려 젊은이보다 책임감이나 업무 능력이 나을 것이다. 나의 외국 친구들은 은퇴해서 하루 서너 시간씩 도서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들이 느끼는 자부심과 보람은 대단하다. 부담스럽다고 노인들을 피해서는 안 된다.

제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세월이 가면 늙는다. 언젠가는 모두 '거울 속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준비만 잘 하면 인생의 황혼도 즐겁고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66. 인생의 은인들

[중앙일보]입력 2006.12.04 22:40 / 수정 2006.12.04 23:53

고비 때마다 바른 길로 이끌어준
이 분들 덕에 오늘날 내가 있어

필자는 인생의 고비마다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은인을 만났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명동 선생, 다우링 대사, 스펜서 교수, 이덤 교수.
나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삶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열정이 있으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70년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젊음을 불태울 때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들도 연거푸 해냈다. 회사도 나라면 해낼 것으로 믿고 그런 일을 맡겼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회사가 내 능력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한 인간의 성공적인 삶이 어찌 열정 만으로 가능했겠는가?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혼돈스럽고 위태로운 고비마다 나타나 바른 길로 이끌어준 은인들 덕분이다. 인생을 돌아보는 글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 그 분들을 한 분씩 떠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신 아버지와 한없는 사랑으로 감싸주신 어머니, 마음의 창을 열어주신 이명동 선생님, 암실을 짓도록 허락해준 경찰서장님,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 주시고 세상은 넓으니 항상 꿈을 크게 꾸라고 말씀해 주셨던 고교 2학년 때 담임 석만균 선생님.

미국이라는 신세계로 날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다우링 주한 미국대사님, 방황하던 시절 용기를 북돋워 주고 내가 갈 방향을 함께 고민해 준 '라이프'지 레스터 편집인,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진로를 조언해 준 텍사스주립대의 스펜서 교수님, 지혜롭고도 따뜻한 성품으로 포토저널리즘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미주리대의 이덤 교수님, 그리고 학비 마련을 도와준 도박장 청소대장 프랭크.

어떻게 해야 독자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지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나의 능력을 발휘하게 해준 '내셔널 지오그래픽' 동료들, 나를 믿어준 선인장 도둑 로이와 타이너, 70년대 한국 취재 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써주신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나를 도와주려고 문공부에서 내무부로 자리까지 옮긴 오영학씨, 변하지 않는 우정과 의리로 항상 곁에 있어준 정상해씨.

인연은 짧았지만 부부의 인연을 맺었던 두 아이의 엄마들, 자랄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는 못했지만 건강하게 성장한 두 아들 마이클과 선두,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세계적인 국가 홍보지를 만들었던 '한국화보' 직원들, 한국사진계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준 중앙대 김영수 교수님, 상명대 양종훈 교수님, 사진예술 김녕만 사장님, 후학들과 의미있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상명대 이준방 이사장님.

지금은 고인이 된 보고 싶은 어릴 적 친구 김진수, 10년 넘게 내 곁에서 일을 도와주며 힘든 시간을 함께해 준 사랑하는 세진.

하지만 내 인생의 은인들이 어찌 이 분들 뿐이랴. 기억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가운데 도와주시고 지켜봐 주신 많은 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그리고 이 글 '카메라로 바라 본 세상'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연락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끝>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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