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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펜화 에세이

중앙[김영택의 펜화기행] 한국풍경 20개

 

[김영택의 펜화기행] 청송 방호정

[중앙일보] 입력 2004.03.18 15:59 / 수정 2006.02.15 00:33

조선 백자 그릇에 만든이의 낙관이나 서명이 있으면 무조건 가짜랍니다. '내 작품이니 잘 만들겠다'는 욕심을 부리지 않던 조선 장인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아(無我)의 미'라고 하여 세계적인 석학들이 조선 백자를 '도자 예술의 최고 경지'라고 극찬하는 근본 이유입니다.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서양 건축처럼 개성이 두드러지는 한옥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그림같이 올라 앉은 방호정을 보면 '어떻게 짓느냐'보다 '어디에 짓느냐'를 더 중요시하였던 조선 도목수의 마음자세가 확연히 느껴집니다.

방호정은 조선 광해군 11년(1619년) 방호 조준도가 지은 정자로 바닥은 ㄱ자형이나 절벽 쪽 온돌방 위로 맞배 지붕을 내고 풍판을 달아서 지붕 모양은 丁자형입니다. 마루에는 절벽이라서 강하게 들이치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위에만 창호지를 바르고 아래는 판자로 막은 독특한 창문을 달았습니다. 다소 답답해 보입니다만 학문 연구를 겸하던 곳이라 필요할 때만 열어놓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정경도 일품이지만 방호정 마루에 앉아 휘돌아 흐르는 길안천을 내려다 보는 풍류는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합니다.

방호정을 마을분들은 '방대정자'라고 부르는데 정자 좌측 아래에 새로 놓은 다리가 현란한 모양과 색으로 정자와 전혀 어울리지 못하여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문제점을 이해하고 빨간색 칠을 연회색으로 바로 바꿔준 청송군에 감사드립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펜화기행] 거창 요수정

[중앙일보] 입력 2004.04.01 16:08 / 수정 2006.02.15 00:33

구한말 조선을 다섯 차례나 방문한 영국 지리학회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조선 땅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이런 천혜의 자연에서 살아온 우리 선조들은 이 땅과 자연을 살아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큰 바위나 오래된 고목은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산맥과 지맥을 끊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전국 명승지의 정자들을 보면 기가 강한 암반 위에 지어진 것이 많습니다. 기의 흐름을 알았던 것이지요. 산맥의 기는 산줄기를 타고 흐르다가 산자락에 돌출된 큰 바위에 뭉쳐 있어 그 위에 정자를 지으면 휴식과 수행에 더없이 좋습니다.

거창군 위천면의 요수정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덕유산의 맑은 물이 흐르는 원학계곡의 집터만큼 너른 너럭바위를 주춧돌 삼아 지은 정자는 정면 3간, 측면 2간짜리 누각입니다. 마루 가운데 판자로 한 간의 온돌방을 냈습니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은 요수 신권(1501~1573)이 지은 정자입니다. 정자 앞을 흐르는 위천에 암구대라는 거대한 거북바위가 있습니다. 암구대에는 요수정과 암구대의 정취를 읊은 시와 이름들이 빼곡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요수정에서 내려다보는 암구대도 일품이지만 암구대에서 바라보는 요수정과 바위, 노송의 어울림은 보는 이의 넋을 잠시 빼앗아갑니다. 이곳 모두를 수승대라고 부르며 거창 최고의 명승지로 손꼽습니다. 암구대 뒤에는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에 세운 구연서원이 있어 답사의 볼거리를 더해 줍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대전 남간정사

[중앙일보] 입력 2004.04.15 15:30 / 수정 2006.02.15 00:33

최고급 주택가로 손꼽히는 서울 북한산 남쪽자락의 평창동이 한때는 험한 산언덕으로 집짓기 망하다 하여 땅값이 무척 헐했습니다. 그러나 재주 좋은 건축가들이 지형의 특성을 살려 멋진 집을 짓기 시작하자 풍치 좋은 특급 주택지로 변했습니다.

대전의 남간정사도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조선 최고의 멋쟁이 집입니다. 가운데 대청마루 밑으로 샘물이 그대로 흐르게 했고 계곡물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연못가에는 바위들이 있고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 했습니다.

우암 송시열(1607~89)이 노년(1683)에 세운 강학당입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건축분야에도 높은 안목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전면 4칸, 측면 2칸짜리 집인데 굵은 원형 기둥을 써서 꼼꼼하게 지은 고급건물입니다. 좌측에 2칸짜리 온돌방이 있고 가운데는 4칸짜리 마루방이며, 오른쪽은 뒤편에 한칸짜리 온돌방을 두고 앞에는 기둥을 세워 한칸짜리 누마루 방을 들였습니다. 전면에 14짝 띠살창들이 집을 무척 아름답게 만듭니다.

건물 앞 좌우측의 돌담과 솟을삼문이 어색하고 답답해 보인다 했더니 우암 사후에 남간정사 뒤편에 사당을 지으면서 설치한 것이랍니다. 그 바람에 멋진 누마루 방이 담장 속에 갇힌 꼴이 되었습니다. 솟을삼문도 없었지요. 스승만 한 제자가 없었나 봅니다.

고봉산 자락의 남간정사는 바로 옆으로 도로가 나고 우암사적공원으로 개발되면서 옛 정취를 잃었으나 눈을 감고 옛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거창 정온 선생 고택

[중앙일보] 입력 2004.04.29 16:11 / 수정 2006.02.15 00:33

조선시대 양반집에는 남편이 쓰는 사랑채와 부인이 쓰는 안채가 따로 있었습니다. 남녀가 평등한 격식인데 재산관리는 부인이 했다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폼만 좋았지 실속은 안방에 있었던 게지요. 남편의 공간인 사랑채는 높은 기단 위에 지어서 권위를 돋보이게 하고 오른쪽에 누마루 방을 내달아서 선비의 풍류를 상징했습니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의 정온 선생(1569 ~ 1641) 고택의 사랑채는 정면 6칸, 좌측면 2칸 반에 두 줄로 방을 들였고, 오른쪽에 1칸 반 크기의 누마루 방을 내달아 지은 큰 건물입니다. 둥근 기둥 위의 누마루 방은 전면과 좌우 삼면에 처마 아래로 다시 처마를 덧대고 눈썹지붕을 달아 한껏 멋을 부렸습니다. 비가 들이치지 못하게 하는 기능보다는 멋을 더 중요시했을 것입니다.

누마루 방의 좌우측 창은 네 짝 분합문으로 접어서 들어 올리게 했고 정면의 창은 좌우로 열게 돼 있어 창을 모두 열면 세면이 탁 트인 공간이 됩니다. 정면과 좌측 창은 삼등분해 아래 위에는 정자살로, 가운데는 완자살로 치장했습니다. 전국 사랑채 경연대회에 나가면 일등은 떼어놓은 당상일 것입니다. 굵은 홍송으로 정성 들여 지어 나뭇결이 곱습니다. 지붕 용마루 밑에도 작은 눈썹을 달았습니다.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한 충신 정온 선생이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청에 항복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집입니다. 정려문으로 충신가문임을 자랑하는데 14대 종부가 정갈하게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경주 최부잣집 맏딸로 까만 세단을 타고 신행을 올 때 거창고을이 떠들썩했답니다. 손님을 가리지 않고 후하게 대접한다는데 집안 전통 솜씨인 육포가 별미랍니다. 펜화가는 채식가여서 멀거니 보기만 했고 동행한 집사람만 혼자서 별미를 즐겼습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괴산 화양구곡 암서재

[중앙일보] 입력 2004.05.13 15:31 / 수정 2006.02.17 00:33

속리산 국립공원 내 화양구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사담(金沙潭)의 높은 바위 위에 자리잡은 암서재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노년(1666년)에 지은 서재입니다. 전면 세 칸, 측면 한 칸 반의 작은 집이지만 높은 곳에 앉아 금사담을 내려다보는 자태에서 그의 호방함이 느껴집니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통치사상인 성리학을 재정립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또한 노론의 거두로서 효종과 함께 북벌을 주장하는 등 정치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힘이 장사였다고 하는데 숙종 15년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여든두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앞서서 반대하다 사약을 받고 죽을 만큼 성품이 강직하였습니다. 암서재는 방 두 칸에 한 칸 반짜리 낮은 누마루를 둔 소박한 형태입니다. 집 앞에 두른 철제 난간과 우측의 대문은 근래에 세운 것이라 빼고 그려 옛 모양을 되살렸습니다. 암서재에 앉아 화양천 맑은 물이 큼직큼직한 바위 사이에 푸른색으로 고였다가 하얗게 부서지며 흐르는 모양을 보노라면 모래가 금가루 같다고 해서 붙인 금사담이란 이름이 마음에 쏙 듭니다.

건너편 산속에 도롱이를 쓴 사람처럼 생긴 바위기둥이 있는데 이름이 특이하게 첨성대랍니다. 이 첨성대가 남자 성기처럼 보인다는 분도 있다니 인품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달라지나 봅니다. 옆에는 채운암이란 전망 좋은 절이 있습니다. 주지스님의 마음이 넓어 쉬어가기 좋은데 공양주 보살이 없어 끼니는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됩니다.

"금강산 남쪽에서 제일가는 경치"라고 하듯이 화양구곡에는 계곡을 따라 경천벽.운영암.학소대 등 아홉 곳의 절경이 늘어서 있습니다. 차량 운행이 금지되어 있으니 걸어서 구경하다 보면 건강도 좋아질 것입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양산 영축산 자장암

[중앙일보] 입력 2004.05.27 15:39 / 수정 2006.05.09 00:33

스님이나 도사들이 좋은 수행장소로 손꼽는 곳에는 큰 바위와 연관된 곳이 많습니다. 산의 정기가 바위를 타고 흐르기 때문이라는데 영축산 자장암도 큰 바위 위에 지은 훌륭한 기도처 입니다. 거북바위란 큰 암반 위에 지었는데 바위를 깨내지 않고 그대로 집을 지어 법당 바닥에 암반이 솟아 있습니다. 모든 자연을 살아 있는 존재로 보았던 선조 들의 지혜가 보입니다. 바위를 깨고 산을 헐고 산맥을 끊어가며 건축을 하는 현대인들이 본받을 점입니다.

자장암은 신라 선덕여왕 15년(서기 646년)에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에 유학 가기 전에 수행을 하던 기도처입니다. 통도사의 여러 법당을 펜화로 담기 위해 통도사 법사실에서 1년 반을 머물 때 귀한 손님이 오면 모시고 가던 통도사 산내 암자입니다. 특히 자장암의 다실인 취현루에서 내다보는 전경이 일품입니다.

해발 1059m에 달하는 영축산의 장대한 연봉이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막 날아오르려는 모양을 하고 있고, 낙락장송은 천년 고찰의 정취를 말해줍니다. 펜화기행 취재로 전국의 여러 절을 다녀보았지만 이만큼 기막힌 절경은 기억에 없습니다. 프랑스 르몽드지 사장이 자장암 다실에서 내다 본 절경에 넋을 잃고 시쳇말로 '뻑' 갔다는 스님의 자랑처럼 펜화가도 '뻑' 갔습니다.

법당 뒤에는 자장 스님이 손가락으로 암벽에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하였다는 금와공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조선불교통사'에도 기록이 있으니 오랫 동안 개구리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다는 것이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금개구리를 보려고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데 함께 온 일행 중에 금개구리가 안 보인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시커멓다면 안 보인다니 직접 찾아가 시험해 보십시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김영택의 펜화기행] 장성 백양사 쌍계루

[중앙일보] 입력 2004.06.10 15:52 / 수정 2006.02.18 00:33

그동안 들러 본 절집 누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손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백양사 쌍계루를 들 것입니다.

백암산의 두 계곡이 합쳐지는 곳에 자리잡은 쌍계루가 백암산 정상의 학바위와 비자나무 숲을 배경으로 서있는 모습은 그림엽서처럼 아름답습니다. 특히 가을 단풍철 형형색색의 단풍과 어울린 쌍계루의 절경이 물위에 비쳐 또 다른 모습으로 보일 때 아름다움은 곱배기가 됩니다.

쌍계루는 밖에서 보아도 아름답고, 누마루에 올라 밖을 내다보아도 아름답습니다. 전면 세간, 측면 두간의 누각에는 여러 시인 묵객들이 쌍계루를 노래한 시들로 빼곡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액자에 넣은 작품 사진처럼 추억이라는 마음 속 앨범에 소중하게 남습니다.

우리의 전통 건물이 모두 그렇듯이 쌍계루도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주변과 기막히게 잘 어울리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좋은 건물터를 찾을 줄 알던 조상의 지혜가 소중해 보입니다.

고불총림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년) 신라 사람인 여환이 창건해 백암사라 하였고, 고려 덕종 3년(1034년) 중연선사가 중창한 후 정토사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백양사 입구 관광단지의 도로에는 잘생긴 소나무들이 도로 한가운데와 길가에 묘하게 서 있습니다. 도로를 넓히면서 옛날 좁은 길 양편에 있던 나무들을 베어내지 않고 그대로 살려 둔 채 공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멋쟁이 도로입니다. 도로 계획을 한 분은 분명 자연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크게 돼야 나라가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날카롭고 차갑다? 다정하고 부드럽다! 김영택의 펜화 기행

[중앙일보] 입력 2006.10.29 20:46 / 수정 2006.10.29 20:56

펜은 날카롭다. 딱딱하다. 그리고 차갑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도 한순간에 날아간다. 펜화가 김영택의 그림을 접하는 순간이다. 다정다감하고, 부드럽고, 익숙하다. 차가운 물성을 따뜻한 감성으로 바뀌게 하는 것은 그의 손길이다. 달력 만한 크기(37×48㎝)의 펜화 한 점을 그리는 데 10일간 꼼짝 않고 50만번 펜 선을 그려야 한다. 대자연의 기운이 느껴지는'숙정문과 서울성곽'의 경우 100만번의 수고로움이 낳은 결과물이다.

우리 문화재를 답사하고 이를 펜화로 정교하게 그리는 김영택씨가 두번째 개인전인 '펜화기행Ⅱ'(11월 7일까지 인사동 학고재.02-739-4937)를 연다. 육각 정자가 특이한 창덕궁 존덕정, 고즈넉한 한개마을 한주정사(사진), 꽃이 흐드러진 선운사 등이다. 전시장에선 작품마다 실물 사진과 기행문을 함께 선보인다. '추녀 끝에 토기로 만든 사래토수가 씌워져 있는데 그 모양이 제법 예쁘다'(창덕궁 존덕정) 는 등 건축물의 세부적인 구조와 감상을 적고 있어 우리 문화유산의 기록으로도 손색이 없다.

김씨는 "우리 문화재 500점을 펜화에 담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한 작품에 꼬박 열흘을 매달려야 하는 데 그만한 다작이 가능할까. "언젠가 명리학자가 저의 관상을 보더니 89세까지 산다고 하더군요. 오래 산다고 하니 좋은 작품 많이 내놓아야지요."

박지영 기자

 

[김영택의펜화기행] 연꽃 처마

[중앙일보] 입력 2007.01.04 15:50 / 수정 2007.01.05 09:10

통도사 해장보각


한국 불교의 종갓집인 불보사찰(佛寶寺刹.부처의 진신사리가 있는 절) 통도사 중심부에는 사당에서나 볼 수 있는 '솟을삼문'이 있습니다. 대문에는 개산조당(開山祖堂)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문 바로 뒤 해장보각(海藏寶閣)에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스님의 영정을 모셨다는 뜻입니다.

해장보각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반의 작은 건물입니다만, 오밀조밀 짜임새가 뛰어난 고급 건축물입니다. 처마 공포(包.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등에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에 연꽃 조각을 넣은 세련된 기법이 돋보입니다. 문도 특이합니다. 열 짝 문 중 좌우측 끝의 것만 옆으로 열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접어 들어 올리도록 했습니다. 전면을 훤히 개방한 거지요. 이런 문을 '들어열개문'이라고 합니다.

해장보각을 지은 때에 대해선 설이 두 가지입니다. 영조 3년(1727)이라고도 하나 광무 4년(1901)이란 주장이 더 우세합니다. 고종 때 명성황후가 시주해 해인사 팔만대장경 네 질을 새로 만든 뒤 그중 한 질을 통도사에 모시고자 장경각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장경각의 이름을 후에 해장보각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건물 안에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을 그린 단청이 있어 '광무 4년 설'에 힘을 실어줍니다. 담장을 쌓고 솟을삼문을 세운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왕실의 권위를 이용해 양반.관리들의 수탈을 막으려 한 게지요. 그러던 것이 일제 치하가 시작되면서 담장은 없어지고 솟을삼문만 달랑 남았습니다.

이 문이 해장보각에 바짝 붙어 있어 사진으로는 건물 전면을 제대로 담을 수 없습니다. 해서 펜화에서는 솟을삼문을 뺐습니다. 해장보각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럴 땐 펜화가 참 편리합니다.

다음 회에는 성벽까지 그대로 되살린 남대문을 선뵈겠습니다.

김영택 (penwhaga@hanmail.net)

 

[김영택의펜화기행] 성벽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2007.01.18 15:32 / 수정 2007.01.19 07:25

숭례문


1957년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본 남대문(숭례문. 崇禮門)은 엄청나게 크고 웅장했습니다. 7층(21.47m) 높이였던 남대문은 당시 주변의 3~4층 건물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지요. 궁궐 외에는 단층건물만 있던 조선시대 남대문은 한양의 얼굴이었습니다. 4대문 중 으뜸이어서 중국의 사신만 여기로 들어올 수 있었고, 왜국 사신은 광희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숭례문 모습.
비슷해 보이는 동대문은 보물 제1호, 남대문은 국보 제1호입니다. 남대문은 조선 초기작 중 임진왜란에도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입니다. 태조 7년(1398)에 세웠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했으며, 성종 10년(1479)에 중수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입은 상처로 62년 보수를 할 때 태조.세종.성종 때의 상량문이 모두 발견됐습니다. 개축을 하며 처음 썼던 목재를 그대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니 600살이 넘은 남대문과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동대문은 나이만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남대문은 고종 44년(1907) 전차를 복선으로 확장하면서 좌우측 성벽을 헐어내고 일본식으로 주변을 단장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의 상징과 같은 남대문은 병사 잃은 장군처럼 처연한 모습으로 길 가운데 홀로 서 있게 됩니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일본식 석재들을 걷어내고, 좌우측 성벽을 일부나마 복원할 예정이라니 기대가 크군요. 서울역 쪽에서 남대문 홍예밑(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문의 아래쪽)을 지나 남대문시장으로 걸어가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즐겁지 않은가요. 복원에 문제가 되는 것은 '홍예밑의 바닥을 1.6m 아래 있는 옛 바닥만큼 낮춰야 하는가'와, 옛날처럼 '밤 9시 성문을 닫은 뒤에는 어느 통로로 지나다녀야 하는가'랍니다.

펜화는 호주의 사진작가 조지 로스(1861~1942)의 사진을 기본으로 했습니다. 전차용 전선이 없는 것을 보면 1900년 이전의 모습입니다. 성벽 위에 쌓은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의 옥개석(지붕돌)이 없어진 것을 되살려 놓았습니다. 사진에선 어두워 보이지 않는 지붕 밑의 처마 공포(처마 끝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등에 짜맞춰 댄 나무 부재)는 현재의 남대문을 참고했습니다. 고려시대 건축 기법이 남아 있는 소중한 우리 문화재입니다. 다음 회에는 1800년대 말의 수원 화성 모습을 그리겠습니다.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선의 아름다움

[중앙일보] 입력 2007.02.01 16:37 / 수정 2007.02.02 06:09

수원 화성

화성 화홍문과 장안문, 종이에 먹펜, 36.5 X 50cm, 2007
수원 화성(華城)을 아시나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너무 아름답다고요? 그것도 맞습니다. 그뿐인가요. 깜빡 잊었던 화성의 매력 포인트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전투용 성이라는 거죠. 정조대왕의 강건한 의지와 실학자 정약용의 기술력을 버무린, 방어 기능이 무척 뛰어난 성입니다.

현재의 화홍문과 장안문(왼쪽 위) 모습.
정조는 화성의 설계를 젊은 정약용에게 맡겼습니다. 정약용은 임진왜란 중 쌓인 유성룡의 연구를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중국 성은 물론 서양 성의 장단점까지 일일이 따져 이 성을 세웠습니다.

성문 앞에는 옹성(甕城)을 둘러 방어력을 한껏 높였습니다. 성의 일부가 튀어나온 치성(雉城)과 포루(砲樓)는 적에게 상당히 위협적이었을 겁니다. 성벽을 오르는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으니까요.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한 노대(弩臺), 적을 살피기 위한 공심돈(空心墩) 등은 당시 혁신적인 전투 설비였습니다. 정조의 자랑거리였죠.

화성 공사 전체를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치밀함도 놀랍습니다. 축성 계획과 조감도, 각 건물의 모양, 자재의 종류 및 수량과 비용, 22종 장인들의 이름, 일한 장소와 날짜, 급여 등이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파괴된 화성을 제대로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입니다.

화성은 미학적으로도 탁월합니다. 곳곳에 '선(線)의 아름다움'이 배어 있습니다. 성 안을 흐르는 강에도 멋진 수문을 만들었습니다. 북수문과 남수문이 있는데 북수문을 화홍문(華虹門)이라 합니다. '아름다운 무지개 문'이란 뜻이죠. 현판의 글씨도 보기 드문 명필입니다. 옆 언덕 위 방화수류정과 함께 화성 최고의 볼거리로 손꼽습니다.

1800년대 말의 흐릿한 사진을 바탕으로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해 복원도를 만들었습니다. 화홍문 뒤편의 아름다운 노송이 눈길을 사로잡고, 장안문 앞의 초가집들이 정겹습니다.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설움의 흔적

[중앙일보] 입력 2007.02.15 15:21 / 수정 2007.02.16 06:15

서대문 밖 영은문

1895년 이전의 영은문, 종이에 먹펜, 36×50, 2007
독립문 소공원의 독립문 앞에 키가 큰 돌기둥 두개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의 주춧돌이랍니다. 영은문이 얼마나 높았기에 주춧돌의 높이가 5m나 될까요.

조선 태종 7년(1407) 서대문 밖에 모화루(慕華樓)를 짓고 그 앞에 홍살문(紅箭門)을 세웁니다. 세종 12년(1430) 규모를 확장하고 이름을 모화관(慕華館)으로 바꿉니다. 중종 32년(1537)에는 홍살문이 초라하다 해서 헐어내고 높은 주춧돌 위에 청기와를 올린 쌍주문(雙柱門)을 세웁니다. 절의 일주문(一柱門)과 비슷해 보이나 높이가 11.5m로 훨씬 크고 화려합니다. 높기 때문에 쓰러질 염려가 있어 쇠줄 네 개를 이용해 앞뒤로 고정시켰습니다. 기둥과 창방 아래에 운각판(雲刻板)을 붙여 튼튼하면서 동시에 화려해 보이도록 했습니다. 영조문(迎詔門)이란 현판을 걸었으나 중종 34년(1539) 명나라 사신 설정총의 지적으로 영은문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독립문과 그 앞에 서 있는 영은문의 주춧돌.
영은문에는 약소국인 조선의 설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조선의 처녀들까지 조공으로 바치게 강요합니다. 평민뿐만 아니라 벼슬아치의 딸도 선발을 합니다. 태종 8년(1408) 중국으로 보낼 처녀를 뽑는 자리에 평성군 조견의 딸이 중풍에 걸린 것처럼 입을 실룩거리고, 이조참의 김천석의 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 이운로의 딸은 절름발이처럼 절룩거려 선발을 모면해 보려고 합니다. 화가 난 중국 사신 황엄은 아버지들을 귀양 보내고 파직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선발된 처녀들이 영은문에서 가족과 생이별을 할 때 부모형제들의 울부짖는 소리로 영은문 주위는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으니 사신의 배웅을 나온 조선 국왕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청일전쟁이 끝난 뒤인 고종 32년(1896) 영은문은 사라지고 대신 독립문이 들어섰습니다. 이때 영은문의 주춧돌을 남긴 것은 치욕을 기억하고 자주를 위해 국력을 키우자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파묻힌 성벽

[중앙일보] 입력 2007.03.01 16:02 / 수정 2007.03.02 06:59

동대문

1880년대의 동대문,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서울의 성문 중 동대문이라 부르는 흥인문(興仁門)에만 옹성(甕城)을 두른 이유를 아십니까? 조선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고 2년 뒤 성곽을 쌓습니다. 성벽은 주산인 북악산(높이 342m) 능선을 따라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의 남산(265m)으로 이어지는데 동쪽의 낙산(125m)이 가장 낮습니다. 그 낙산 끝자락에 세운 흥인문 자리는 넓은 평지여서 적의 공격에 취약한 곳입니다. 그래서 성문 앞에 반원형 옹성을 둘러쌓아 성문으로 들어오려는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현재의 동대문.
그러나 이 흥인문은 임진왜란 때 전투 한번 못해보고 왜군에게 제일 처음 함락되는 치욕을 겪습니다. 제일 먼저 흥인문 앞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철옹성으로 보이는 흥인문에 겁을 먹고 선뜻 입성을 못합니다. 병사들이 모두 도망가 활짝 열린 문 안쪽엔 아무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함정일까 우려해 여러 차례 정탐꾼을 들여보낸 후에야 진입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췄다 해도 사람의 의지가 부족하면 무용지물입니다.

흥인문 자리는 습지대여서 생나무를 박고 장대석(사각형의 긴 돌)을 우물 정(井)자 형태로 여러 겹 쌓은 위에 지었습니다. 그러나 육중한 무게로 건물이 기울어 고종 6년(1869) 새로 짓습니다. 그래서 1398년에 지은 국보 제1호인 숭례문보다 나이가 390살이나 적습니다. 이 때문에 숭례문보다 격이 낮은 보물 제1호가 됐습니다. 흥인문의 부재들은 숭례문에 비해 화려하나 나약해 보입니다. 국력이 약해지면 장인의 솜씨에도 힘이 빠지나 봅니다.

펜화로 담은 흥인문은 1880년께 모습입니다. 그림 속 성벽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 보일 것입니다. 도로 포장 등을 하면서 흥인문이 어른 키만큼이나 땅속에 묻혔기 때문입니다. 2006년 실측 때 지표면 1.66m 아래에서 성문 바닥에 깔았던 박석이 발견된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통한의 요새

[중앙일보] 입력 2007.03.15 15:21 / 수정 2007.03.16 06:11

강화도 진해루

1900년대의 진해루,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근대 한국'(서문당) 87쪽 사진 참조.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서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중요 요충지입니다. 내륙과 섬 사이를 흐르는 염하강(鹽河江)의 물살이 거세 천혜의 요새라할 만합니다.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고가 쳐들어오자 수도를 강화로 옮긴 것도 그 때문입니다. 고려는 이곳에서 원종 11년(1270)까지 39년간 항전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도 임금이 강화로 피란을 했습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의 피란길이 막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오래 못 버티고 항복하고 맙니다.

이후 효종과 숙종은 강화도 해안에 5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8개의 포대(砲臺), 53개의 돈대(墩臺), 8개의 봉수(烽燧)를 쌓아 방위에 만전을 기합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 신식 총포를 앞세운 서구와 일본의 침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고종 3년(1866)에는 프랑스군이, 고종 8년(1871)에는 미군이 침략해 큰 피해를 줍니다. 고종 12년(1875)에는 일본군이 침략해 살인과 방화.약탈을 합니다. 그러고도 억지를 부려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해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복원된 갑곶돈대.
서구식 군함과 신식 해군이 필요성을 절감한 조선은 고종 30년(1893) 강화도 진해루 안쪽에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이란 이름의 해군사관학교를 세웁니다. 영국군사교관과 영어교사를 초빙해 50명의 사관생도와 500여 명의 수병을 양성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신식 해군의 꿈은 2년이 채 못돼 물거품이 됩니다.

강화도의 관문으로 영욕의 역사를 겪은 진해루는 강화대교가 놓이고 도로가 나면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습니다. 진해루 자리 왼쪽 언덕에 복원된 갑곶돈대 앞을 흐르는 염하강은 약소국의 설움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신문로 ? 새문로 ?

[중앙일보] 입력 2007.03.29 14:14 / 수정 2007.03.30 05:57

서대문

1890년대의 돈의문,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서대문이라 부르던 돈의문(敦義門)이 있던 곳은 어디일까요. 서대문 사거리로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조선 태조 5년(1396) 1월, 한양의 성곽 공사를 시작해 9월에 끝냅니다. 이때 서쪽에 세운 돈의문은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태종 13년(1413) 경복궁의 지맥을 보전한다는 이유로 돈의문을 폐쇄하고 남쪽에 새로 문을 세우고 서전문(西箭門)이라 합니다. 동대문처럼 옹성을 둘렀다고 합니다. 현재 경희궁 서쪽 기상청 주변입니다.

세종 4년(1422) 토성을 돌로 고쳐 쌓으면서 이용이 불편하던 서전문을 헐고 남쪽에 새 문을 세웁니다. 이름 또한 돈의문으로 되바꿉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경향신문사와 강북삼성병원 사이의 사거리입니다. 이렇게 새로 세운 문이 있다고 해서 서대문 안을 '새문안길'이라 하고 한자로는 '신문로(新門路)'라 했다 합니다. 그러나 이 신문로라는 이름은 잘못 지어진 것이란 주장도 있습니다.

1900년대의 돈의문, '민족의 사진첩'(서문당) 1권 60쪽.
태종의 쿠데타에 큰 공을 세운 이숙번은 세도가 대단해 임금이 불러도 병이 있다며 입궐을 거부할 정도였답니다. 이숙번의 호화주택이 서전문 안에 있었는데 우마차의 왕래가 시끄럽다며 서전문을 닫고 서소문으로 다니게 했답니다. 이로 인해 '성문을 막은 집'이란 뜻의 색문가(塞門家)라 불리게 됐고 그 동네를 색문동이라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색문동이란 지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색(塞)자는 '새'로도 읽을 수 있어 '새문'이란 말은 '색문'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입니다. 이 주장대로라면 '새문동길'과 '새문로'로 고쳐야 하겠지요.

돈의문은 4대문이면서도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달리 단층문루였습니다. 숙종 37년(1711)에 중건돼 잘 유지되다 1915년 전차궤도가 복선화하면서 철거됩니다. 복원을 해 옛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한양 최고 별장

[중앙일보] 입력 2007.04.12 15:17 / 수정 2007.04.13 05:48

석파정

석파정의 옛 모습,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조선조 말 한양 최고의 별장은 자하문 밖 '삼계동정자(三溪洞亭子)'였습니다. 인왕산 수려한 계곡에 차일을 친 듯 넓게 퍼진 소나무를 중심으로 안채. 사랑채.별당에 정자가 4개나 있어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답니다.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별장으로, 현대루(玄對樓)란 사랑채에 월천정(月泉亭)과 육모정(六茅亭), 그 외에도 청국 기술자가 벽돌로 지은 사랑채 부속 건물과 동판으로 지붕을 올린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란 이국풍의 작고 예쁜 정자가 있었습니다.

현재의 석파정. 정원수 뒤쪽에는 청나라 기술자가 지은 이국풍의 벽돌 건물이 있었다.
김흥근이 정성 들여 가꾼 삼계동정자를 대원군이 빼앗습니다. 김흥근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임금의 아버지가 정사에 참여하면 안된다'며 대원군을 배척합니다. 결국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미운털이 박힌 김흥근에게 "삼계동정자를 사겠다"고 합니다. 김흥근이 거절하자 "하루만 빌려 달라"고 청합니다. 김흥근은 마지못해 허락합니다. 정자를 빌린 대원군은 고종을 불러 하룻밤 묵도록 합니다. 왕이 묵은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는 법이라 삼계동정자는 결국 대원군의 수중에 들어갑니다.

대원군은 삼계동 별장에서 바라보는 북악산과 북한산의 바위 모양을 따서 자신의 아호를 '석파(石波)'라 짓고 별장 이름을 '석파정'으로 바꿉니다. 이후 대원군의 후손에게 물려오다 남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1958년 서예가 손재형이 벽돌로 정교하게 지은 사랑채 부속 건물을 매입해 계곡 아래 홍지동 125번지로 옮겨 놓습니다. 지금은 '석파랑'이란 식당의 별채가 되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합니다. 부채 관계로 소송이 걸려 있는 석파정을 나라에서 사들여 없어진 건물도 복원하고 새로 가꾸면 1만여 평이 넘는 도심 속의 명소가 될 것입니다.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목탑의 원형

[중앙일보] 입력 2007.04.26 15:56 / 수정 2007.04.27 05:38

쌍봉사 3층목탑

1910년대의 쌍봉사 3층목탑,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세계 최고의 목조건축 기술을 지닌 우리 조상들은 요즈음 건물 20층 높이와 같은 황룡사 9층 대탑을 비롯한 여러 목탑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많은 전란으로 모두 불타 버리고 임진왜란 뒤 중건한 법주사 팔상전(八相殿)과 화순 쌍봉사(雙峯寺) 삼층목탑만 남았습니다.

5층탑인 팔상전은 지붕의 넓이가 위로 올라가면서 급하게 줄어 경주 남산 바위에 새겨진 마애탑이나 우리 선조가 일본에 세운 목탑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이에 비해 쌍봉사 3층탑은 우리 탑다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쌍봉사 3층목탑의 현재 모습.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 때 도윤(798~886) 스님이 창건한 큰 절입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인조 6년(1628)에 중건했습니다. 목탑은 1690년에 중건하고 1724년에 큰 수리를 했습니다. 대웅전으로 이용하던 중 1984년 화재로 전소됩니다. 이때 동네 농부가 불길 속에서 불상 3구를 구해낸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장정 4명이 간신히 들 수 있다는 석가모니불을 아들과 둘이서 업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그 덕에 협시불인 가섭존자의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있습니다.

다행히 62년 해체 수리 때 만든 실측도가 있어 86년 다시 지을 수 있었습니다. 해체 때 발견한 대로 3층 지붕을 팔작지붕에서 사모지붕으로 바꾸고 상륜부를 올려 더욱 탑다워졌습니다.

그림은 10년대의 사진을 바탕으로 그렸습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때의 모습입니다. 절 마당이 온통 밭이고 논입니다. 초가도 보입니다.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봉황 천장

[중앙일보] 입력 2007.05.10 15:36 / 수정 2007.05.11 06:11

혜화문

1890년대의 혜화문,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성북구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큰길 옆 언덕에 새로 지은 혜화문(惠化門)이 있습니다. 본래는 큰길 복판 5~6m쯤 높은 곳에 있어 되너미고개까지 한눈에 보였답니다. 되너미고개란 병자호란에 '되놈'들이 쳐들어 왔다가 되돌아갔다 해서 지은 이름인데 지금은 미아리 고개로 불립니다. 혜화문은 태조 5년(1396)에 지어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으나 성종 14년(1483)에 지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혼동되어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고쳤습니다.

서울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을 폐쇄하고 동소문인 혜화문을 북문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원래 사잇문인 소문은 문을 지키는 출직호군(出直護軍)이 20명이고 대문은 30명인데 혜화문은 30명으로 대문의 대우를 받은 셈입니다.

혜화문 밖에 펼쳐진 넓은 분지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무성하고 복숭아나무가 많아 해마다 봄철이면 놀이 나온 사람들로 골짜기가 미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화동(桃花洞)이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모습을 보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혜화문
임진왜란에 문루가 불탄 지 152년 뒤인 영조 20년(1744)에 문루를 다시 만듭니다. 혜화문의 홍예 틀 내부 천장에 다른 문처럼 용을 그리지 않고 봉황을 그린 것은 도화동 일대에 새가 많아 피해가 컸기 때문에 새들의 왕인 봉황을 이용해 막으려 한 것이랍니다.

1928년 일제가 문루를 헐어버리고 1939년에는 석축과 홍예마저 허물어 버립니다. 1994년 자리를 옮겨 복원했으나 성문 앞에 전봇대들이 시야를 가려 보기 흉합니다. 전선을 땅속으로 묻으면 어떨까요.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광희문

[중앙일보] 입력 2007.05.24 16:45 / 수정 2007.05.25 05:43

만병통치 돌가루


조선의 수도 한양의 성터와 관련해 무학 대사가 정했다느니, 눈이 녹은 자리를 따라 쌓았다느니 하는 속설이 있습니다만, 사실 태조 4년(1395) 윤 9월에 정도전이 직접 백악.인왕산.목멱산.낙산에 올라 실측하여 결정한 것입니다.

공사는 다음해 1월 9일부터 12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 49일 후인 2월 28일 끝납니다. 당시 한양 인구가 5만여 명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원을 동원한 것이지요. 농한기를 이용한 것입니다.

현재의 광희문.
이때 세운 광희문(光熙門)을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렀습니다. 청계천이 가깝고, 도성의 장례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서소문과 광희문뿐이었기 때문입니다. 1886년 콜레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때 광희문 밖에는 내다버린 시체와 죽어가는 환자들로 생지옥을 이루었답니다. 이때 이화학당을 세운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한 소녀를 데려와 치료한 뒤 이화학당에 세 번째로 입학시켜 신여성을 만듭니다. 조선시대 '수구문 돌가루'가 만병통치약으로 통한 것은 '아무리 지독한 병마라도 수많은 원귀에 단련된 수구문에는 꼼짝도 못할 것'이라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일 것입니다.

광희문을 남소문이라고도 하는데 남소문은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으나 풍수가들이 경복궁의 손방(巽方, 남동방향)으로 왕가에 황천문이 된다 해서 폐쇄했다 합니다.

광희문은 일제가 서울 성곽을 철거할 때에도 원래 자리에 남아 있었으나 도로를 내느라 1976년 본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m 옮겨 지었습니다.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새벽 33번, 저녁 28번

[중앙일보] 입력 2007.06.07 15:30 / 수정 2007.06.08 06:54

보신각

1890년대의 보신각, 종이에 먹펜, 28.5 X 41cm, 2007.
시계가 없던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에게 종각(鐘閣)에서 치는 '인경'소리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먼동이 트는 새벽 4시엔 파루(罷漏)라 하여 종을 33번 쳐 4대문과 4소문을 열었고, 저녁 10시에는 종을 28번 쳐서 인정(人定)이 되었음을 알려 통행을 금하였습니다. 종각의 종을 '인경'이라 부른 것은 '인정'이란 말이 변한 것으로 봅니다.

종각은 태조 5년(1395) 지금의 인사동 입구에 2층 누각으로 세웠는데 태종 13년(1413)에 운종가(雲從街-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깁니다. 세종 22년(1440) 동서 5칸, 남북 4칸 건물로 크게 고쳐 짓고 위층에 종을 달고 누각 아래로는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게 합니다. 그래서 종로(鐘路)란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현재의 보신각.
임진왜란 때 종루와 종이 불에 타 없어져 광해군 11년(1619)에 종각을 새로 짓고 세조 14년(1469)에 만든 원각사(圓覺寺)종을 옮겨 답니다. 이 종은 목숨이 끈질겨 숙종 12년(1685)과 고종 6년(1869) 때의 화재에도 살아남았고, 한국전쟁의 폭격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합니다.

종각은 고종 32년(1895) 보신각(普信閣)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순종 3년(1909) 일제가 소리를 못 내게 했으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국민들은 보신각종을 하루 종일 울려 해방의 기쁨을 만천하에 알립니다.

높이 3.69m, 무게 19.66t의 거대한 원각사 종은 여러 차례의 병화에 손상이 가고 소리도 변해 1985년 8월 15일 현대식 디자인의 새 종에게 임무를 넘기고 517살의 나이로 은퇴합니다.

새 보신각은 세종 때의 규모와 같이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제법 그럴듯해 보이지만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김영택 화백

 

 

 

남한산성 남문...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

 

남한산성 남문 안내문...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