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모반사건]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 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게 된 원인은 분명하지는 않다.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던 적이 있 긴 했으나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 의 성향과 일치했던 것이 동인에 동조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이이를 공격한 이유로 서인의 미움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래서 그는 동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중 앙에서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는 낙향한 몸이었음에도 동인들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그래서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하였을 때는 대동계를 동원해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대동계의 조직은 더 욱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기인, 모사 세력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 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 빙기를 이용해 황해 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되었다. 이 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옥사로 한때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정여립 모반사건을 정철이 맡아서 처리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여립과 가까웠던 많은 동인들이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 일로 해서 정철은 동인들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후에 정철이 세자를 세우자고 주청을 하고, 이에 선조는 정철을 미워하게 됩니다.
선조가 정철을 미워하게 되자 동인들은 정철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때 정철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과 극형은 너무 심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나눠지고, 이일로 해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눠집니다.
정철을 극형으로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편은 북인, 극형은 면하게 하자는 편은 남인이 됩니다.
결국 정철은 멀리 강계로 위리안치 됩니다.
정여립의 난(기축옥사 ; 1589년)
1589년(선조 27)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것은 정철 등의 서인이었으며, 동인인 이발(李潑) ·이호(李浩) ·백유양 등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는 등 동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정여립에 대하여는 어릴 때부터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며, '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木子亡尊邑興]'는 《정감록》류의 설을 퍼뜨려 왕조를 전복시키려 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반면에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왕권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또 그가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력을 기른 것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서인과 동인 사이에 벌어진 당쟁의 희생자로서 그가 주도했다는 역모(逆謀)는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선조 22년(1589) 10월, 황해감사가 올린 비밀 장계 한 장이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역성혁명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많은 선비들이 죽어 갔다. 조선조 최대의 옥사였다[기축己丑옥사]. ‘천하는 왕의 사유물이 아니고 모두의 것이다’,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지극히 불순한 사상이 역모의 배경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모자로 지목된 사람은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여립(鄭汝立, 1544~1589)이다. 하지만 그는 돌연 의문의 자살을 하고 사건은 조선 최대의 정치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정여립의 난’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이 의금부 추국청에서 국문을 받았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추국청 안은 비명소리와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죄수들은 귀신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형법제도는 보통 3심제이지만 역모 사건은 예외적으로 단심제였다. 따라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갖은 고문이 행해졌다.
자백을 받아낼 때 쓰이던 ‘신장(訊杖)’은 참나무, 박달나무 등의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서 몇 대만 맞아도 살과 피가 튈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 번에 30대 이상은 치지 못하게 돼 있었지만 역모사건의 경우는 제한 규정이 지켜지지 않았다.
역모 사건에는 ‘곤(棍)’이라는 것이 주로 사용됐는데, 대곤은 길이 168cm에 폭 13cm, 두께 1.8cm 정도다. 들기도 버거운데, 형틀에 팔과 다리를 묶어놓고 자백할 때까지 무제한으로 쳤다. 그래서 매를 맞다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매질로도 자백하지 않는 경우에는 무릎을 짓누르는 압슬형(壓膝形)이 가해졌다. 널판 위에 날카로운 사기 조각을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린 뒤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이 올라가 밟기도 했는데, 6명까지 올라가 밟았다는 기록이 있다. ‘낙형(烙形)’이란 것도 행해졌는데, 화로에 벌겋게 달군 인두로 발바닥을 지지는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역모의 피해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다가 죽거나 사형당한 사람은 천 명이 넘는다고 한다. 조선의 4대 사화에서 죽은 사람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수다. 선비들은 물론 평민과 노비들, 서산대사나 사명대사 같은 유명한 승려들도 연루돼 곤욕을 치렀다. 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된 것일까?
광주광역시의 한 아파트에는 4백여 년 전의 사연이 간직돼 있다. 광산 이씨 가문의 후손인 이재수씨는 소중하게 보관해오던 고문서 한 장을 내놓았다. 정여립 역모사건이 발생한 지 20여 년 뒤인 1610년에 작서된 유서였다. 여기에는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돼 멸문지화를 입고 겨우 살아남은 후손이 밀양 이씨 행세를 하며 숨어 지내야 했던 가문의 내력이 적혀 있었다.
유서를 쓴 이는 ‘사건 당시 9세의 어린 나이로 화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도망갔으며, 그 와중에 어머니는 굶어서 돌아가시고 혼자 거지 행세를 하며 살아남은 이원경(李元慶)’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후 이원경은 나주로 피신하여 상민과 결혼해서 밀양 이씨 이정신으로 신분을 위장했다. 하지만 서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몸져 눕는다. 유서는 죽기 한달 전 이원경이 구술한 것을 처가 쪽 인척이 받아 저은 것이다. 세 살박이 어린 아들에게만은 조상을 바로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유서가 발견된 것은 1860년대로, 전염병이 한창 나돌던 때였다. 집안에서 오래된 물건을 찾아 태우라는 무당의 말을 듣고 버려둔 장롱을 뒤지다 한 귀퉁이에 붙어있는 유서를 발견한 것이다.
이원경이 도망간 까닭은 아버지 이급의 동생인 이발(李潑,1544~1589) 때문이다. 이발은 역모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여립과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엘리트인 그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빌미는 정여립과 함께 시국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발은 귀양가다 잡혀와 고문 끝에 죽고 나머지 형제들도 역모를 부인하다가 죽었다. 여든이 넘은 이발의 노모는 압슬형을 받고,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아이들도 매를 맞다가 죽었다.
역모에 대한 수사는 상상을 초월했다. 사건의 여파는 함평의 조용한 제동마을까지 불어닥쳤다. 당시 이곳에서는 호남의 대유학자 정개청(鄭介淸,1529~1590)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50대 후반의 그는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는 정개청의 『우득록(愚得錄)』은 임금이 읽고 칭찬하자 홍문관에서 귀하다는 먹감나무를 전국에 수소문해 목판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에 살던 정여립이 집터를 봐준 것과 그에게 편지를 보낸 것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빌미가 돼 화를 입는다. 그 편지에서 ‘도를 아는 건 당신’이라고 한 내용이 화근이었다. 정개청은 예의상 한 말일 뿐 정여립에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유배당하고 두 달 만에 죽었다.
화는 마을 전체에 미쳤다. 정개청을 따르던 제자 50명이 죽고 20명이 유배당했다. 남아있던 4백여 명도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어이없이 희생된 사람도 많았다. 안질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을 정여립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으로 오해받아 죽는가 하면, 관기(官妓)와 헤어지면서 흘린 눈물이 화근이 돼 역모에 몰리기도 했다.
백유양(白惟讓,1530~1589)이란 사람의 경우를 보면, 그는 정여립의 높은 학식을 흠모해 친아들을 보내면서 아들처럼 대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역적에게 아들을 보내며 친아들처럼 여겨달라고 했다’는 구실로 백유양마저 같은 역적으로 몰렸다.
주모자 정여립의 시신은 만조백관이 보는 앞에서 능지처참됐다.
그 부모와 자식들도 모두 교수형에 처했다. 조선 전체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날조된 유언비어 때문에 희생되는 사람들도 잇달았다.
도동서원에 위패를 모신 최영경(崔永慶,1529~1590_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가 옥에 갇히자 천여 명의 선비들이 모여들 정도로 최영경은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그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정여립의 부하 길삼봉(가공인물임)이란 누명을 썼다. 당시 길삼봉에 대한 진술이 여러 가지였다. 살이 쪘다, 혹은 수염이 허옇고 수척하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나이도 30대다, 50대다, 60대다... 사는 곳도 전주다, 나주다, 진주다 하며 여러 정황들이 있었지만 ‘60세에 수염이 허옇고 수척한 노인’이라는 진술만 채택했다. 실존 인물인 최영경과 비슷한 진술만을 채택함으로써 최영경을 연루시키려고 한 짜맞추기식 수사에 그가 희생된 셈이다. 최영경은 국문을 받던 중 옥사했다. 독살됐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고, 희생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명예가 회복됐다.
16세기 후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정여립 역모사건은 조선사회에 광풍을 몰고 왔다. 그리고 그 회오리는 이름 높은 학자에서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범상치 않은 인물, 정여립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알거나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역모 가담 여부와는 상관없었다. 정여립이 그토록 위험한 인물이었을까?
정여립은 전주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동래 정씨 가문에서 태어나 22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學諭), 예조좌랑, 홍문관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실록에 의하면 자신을 조정에 천거한 이이를 비판한 것이 선조의 진노를 사 관복을 벗게 되고, 그 사건이후 벼슬길이 막혀버린다. 여기에 앙심을 품고 천민과 승려 등 사회 불만계층을 규합해서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한편 정여립의 어린 시절 일화가 전해진다. “여립이 7,8세 무렵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까치 새끼를 부리에서 발톱까지 토막내었다... 아버지 회증이 노하여 누구의 짓이냐고 물었다. 한 여종이 그 연유를 일러바치자 희증은 여립을 크게 나무랐다. 그날 밤 여종의 부모가 출타하고 여종 혼자 자고 있을 때 여립은 그녀의 배를 칼로 찔러 죽였다”, “성격이 흉악해서 형제 대 여섯 명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고, 친척 중에 원수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호의적인 평가도 있다. 조선초부터 인조 때까지의 야사가 실린 『대동야승』을 보면 “정여립은 널벡 보고 잘 기억했고 논의가 격렬해서 거센 바람이 이는 듯했다”고 한다. 훗날 이이도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라고 극찬한 바 있다. ‘잔인무도한 반역자’, ‘박람강기(博覽强記)한 대학자’, 과연 어느쪽이 진짜 정여립의 모습일까?
관복을 벗고 낙향한 정여립이 터를 잡은 곳(김제시 금산면 동곡마을)은 지금까지 다양한 민간신앙이 성행할 정도로 예부터 명당으로 꼽히던 곳이다. 미륵신앙이 성행할 정도로 예부터 명당으로 꼽히던 곳이다. 미륵신앙의 본거지 금산사가 근처에 있고 증산교의 본부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가 하면 강증산이 도를 깨쳤다는 대나무 숲터 예기도 전해진다. 30대 중반의 정여립은 이 일대에서도 이름난 명당, 제비산(帝妃刪) 자락에 집을 짓는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정여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라온 최순식씨는 이곳을 정여립의 집터라고 확신하고 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흉가 터로 알려져 사람들이 접근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집터에서 발견된 일곱 개의 별이 새겨진 범상치 않은 기와는 이 자리에 있던 집이 명문가인데다 재력도 상당했음을 짐작케 한다.
관직을 떠났지만 정여립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멀리서 선비들이 찾아오고 인근 수령들도 앞다투어 그를 방문했다. 사람들이 오면 중국에서 들여온 천문학과 풍수지리학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기도 했다.
정여립의 행동은 보통 사대부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그는 지금도 효험 있는 기도처로 유명한 제비산 중턱의 치마바위에서 천일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시국을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고 한다.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 누구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이런 언행은 당시의 흐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정여립은 풍수나 천문지리에 해박했고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국시(國是)였던 정통 주자성리학의 흐름에 맞서는 것이었다. 더구나 천하에 어찌 정해진 주인이 있느냐는 파격적인 주장을 할 만큼 그는 당시의 기준으로는 일탈된 사상의 소유자였다. 정여립의 급진적 진보 사상의 바탕에는 현실에 대해 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롭게 사고하려는 의식이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정여립은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나간다. 그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산 속의 섬으로 불리는 진안군 죽도(竹島)에 서당을 짓고 양반, 상민, 천민, 승려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그래서 ‘죽도 선생’으로 불리기도 했던 정여립은 다른 한편으로는 무예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
죽도 뒤편으로 덕유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천반산(天盤山)의 가파른 능선을 타고 한시간 쯤 올라가면 정여립이 활쏘기와 무술을 가르쳤다는 곳이 나타난다. 이 일대에서 화살촉과 커다란 솥이 발견되기도 했다. 무려 6백여명이 ‘대동계(大同契)’라는 이름으로 한 달에 한 번 이곳에 모였다고 한다.
대동계의 위력은 대단했다. 1587년 정해(丁亥)왜변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이 도움을 요청하자 정여립은 하루도 안 돼 군사를 모아 왜구를 격퇴했다.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갖춘 지식인 정여립의 행동은 지식인의 행동반경이 좁은 당시 사회에서 금방 포착됐고, 그의 뛰어난 자질과 능력은 정적들에게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체제에 대한 불만, 강한 리더십, 관군을 능가하는 군사력 등 역모의 주동자로서 필요한 조건을 다 갖춘 정여립은 실록에 의하면 대동계원을 모아 치밀하게 거사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민심을 이반시키기 위해 역성 혁명은 필연이라는 도참설을 세간에 유포시킨다.
실제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목자망 존읍흥(木子亡 尊邑興)’ 즉 이씨 왕조가 곧 망하고 정(鄭)씨가 새로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기록에 의하면 ‘선조 23년 정월,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일시에 군사를 일으켜 한강까지 올라가 서강창을 습격, 군량미를 확보한 뒤 홍제원에 진을 친다. 팔도 물산이 올라오는 수로를 차단하고 성 안에 자객을 들여보내 병조판서와 금부도사를 죽인다. 그리고 민심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성 안으로 진입한다’는 거사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고 조정에서는 즉시 체포령을 내린다. 뒤늦게 이 소식을 안 정여립은 죽도로 도망가다가 천반산 중턱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한 작은 굴(‘송판서굴’)에서 최후를 마친다. 당시 그를 뒤쫓던 민인백(閔仁伯)은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립이 옆 사람이 들고 있던 칼을 빼앗았다. 칼을 번득일 때마다 한 사람씩 쓰러졌다. 마침내 여립이 칼을 땅에 꽂고 스스로 목을 찔러 마치 소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죽었다.’
자결한 정여립의 시신은 한양으로 압송됐고 역모의 주모자로 능지처참된다.
정여립 역모는 조작됐다?
정여립은 유교경전뿐 아니라 풍수와 천문 등 다양한 학문에 두루 능통해서 학계와 벼슬아치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게다가 하층민과 무사들을 대규모로 조직할 정도로 강한 리더십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역모를 꾀했다면 왜 싸워보지도 않고 자살을 했을까?
실록에는 조정 중신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정여립의 역모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정여립이 서울로 올라와서 결백을 밝히면 다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정여립은 도망가다가 자결해버린다. 그리고 자결한 것이 역모를 시인한 증거로 해석돼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는 기록이 있다. 17세기에 씌어진 당쟁에 관한 책 『동소만록(桐巢漫錄)』에는 정여립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다고 되어 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었는데 선전관과 현감 민인백이 군사를 데리고 포위하여 그를 때려 죽였다.’ 즉 누군가 치밀한 사전 각본을 만들어 정여립을 죽이고 역모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에 공감하는 학자들은 의외로 많다. 가장 적극적으로 정여립 역모 조작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이희권 박사(전북대 명예교수)다. 처음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정여립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자료를 검토할수록 조작 의혹이 짙어졌다고 한다.
그는 정여립이 싸워보지도 않고 자결했다는 점에 특히 주목한다. 정여립은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정여립의 역모를 증명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정여립이 모반을 위해 대동계라는 무사 집단을 만들었고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그 병력이 지방관의 요청에 의해 왜구를 물리쳤다면 대동계는 비밀 조직이 아니라 공개된 조직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대동계는 어디 있으며, 정여립은 왜 대동계를 두고 도망간 것인지도 의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연루자들이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으므로 정여립이 역모를 꾀한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에 부딪힌다.
작고한 원로 사학자 김용덕 교수는 또 다른 각도에서 조작설을 제기한 바 있다. 정여립의 도주 행적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사람들에게 역모 가담의 증거가 된 것이 서신이다. 실제로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면 도망가면서 서신을 없앴을 것이다. 그런데 정여립은 왜 서신을 그대로 방치했을까?
또 정여립이 체포령을 피해 도망간 곳은 그의 본거지로 이미 알려진 죽도였다. 게다가 자신의 행방까지 알렸다는 점 등이 역모 주모자로서는 비상식적인 행동이라는 주장도 있다.
송강 정철은 흔히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당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정권에서 밀려나있던 정철은 정여립의 역모 고변이 있던 날 밤 아들의 초상을 치르고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입궐을 서두른다. 아무도 정여립의 역모를 믿지 않던 상황에서 정철은 정여립이 도망갔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김장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송강은 입궐해서 선조를 독대했다. 곧이어 수사 총책임자가 역모를 믿지 않았던 정언신(1527~1591, 정여립의 9촌 친척)에서 정철로 교체됐다.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은 옥사의 확대에 나섰고, 배후에는 당시 제갈공명에 비유되던 송익필(1534~1599)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항간엔 송익필이 사건을 사전에 기획하고 정철에 의해 실행 되었다는 설이 나돌았다고 한다.
당시 정국은 동인의 주도 하에 있었다. 정여립이나 당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동인에 속한 인사들로, 역모에 가담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동인의 유력 인사들이 정여립 역모에 연루돼 화를 입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선조는 이 사실을 알면서 방관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 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정에 의해 추대된 임금이다. 따라서 정통성이 약할 수밖에 없는 선조는 당시 동서 분당 대립 구도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10여년 간 정권을 유지하면서 세력이 강해진 동인을 약화시키려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옥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선조의 태도가 돌변했다는 사실로도 짐작된다. 훗날 선조는 정철이 서인의 세력을 만회하려고 제멋대로 무고한 사람들을 연루시켰다며 정철을 강계로 유배 보낸다.
이런 몇 가지 근거로 미뤄볼 때 정여립의 역모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조선조 내내 반역자로 지목돼 족보에서도 지워진 정여립은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 ‘요임금과 순임금, 우임금은 왕위를 세습하지 않고 서로 물려줬으니 그들은 성현이 아닌가?’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은 왕촉(王蠋)이 한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고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나.’ 왕위 세습을 부정하고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이 말은 당시로서는 지극히 반체제적인 발언이었다. 폭군을 갈아치우는 것은 정치 사상적으로 오랜 화두였다. 정여립은 어떤 의미에선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1649)으로 상징되는 서구보다 60여 년 앞서 공화주의를 펴려 한 선각자였다.
정여립이 꿈꾼 이상향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면 실제로 역모를 했든 하지 않았든 정여립이 품은 사상 자체가 당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정여립이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볼 수도 있다. 신분상으로는 기득권층이고,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고향에서 편히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왜 그렇게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됐을까?
금산사는 정여립의 집터에서 그리 멀지 않다. 대표적인 미륵도량인 금산사에는 백성들의 고통과 염원이 서려있다. 건국 초기 백성을 위한다던 명분은 땅에서 떨어진 지 오래였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을 열어준다는 미륵신앙에서 백성들이 구원을 찾을 정도로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중앙의 훈척 세력은 국가의 재산을 빼돌려 사유재산을 늘리고, 바닥난 국고는 백성의 세금으로 채워졌다. 지방 관리들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이득을 취하면서 술과 고기로 잔치를 벌였다. 세금을 피하려고 노비를 자청하거나 유랑생활을 하는 양민들이 부지기수였다. 붕괴 직전에 이른 조선의 현실은 ‘고치려 해도 이미 때가 늦은 것 같다’는 당시 서인들의 상소문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가산을 모두 아우에게 물려주고 지리산 자락에 들어온 남명 조식이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정여립 사건에 연루된 최영경, 정인홍 등 150여 명의 제자를 키워냈다. 그는 일부 보수적 사림파들이 훈척과 결탁하면서 가문과 파벌의 이익을 챙기는 등 변질돼 가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입으로는 맹자와 공자를 논하면서 실제로는 유교적 통치이념의 근간인 민중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백성들의 현실과 체제의 모순을 직시할 것을 요구했다. 남명은 나아가 ‘물이 있어야 배가 떠다닐 수 있듯이 권력은 민중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임금은 쫓겨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민중 중심적인 개혁사상과 실천 태도는 제자들에게 이어진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학문에 개방적이었던 남명은 일찍이 외세의 침입을 예견하고 제작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당시 무력한 관군을 대신해 의병을 일으킨 제자들이 50여 명에 이른다.
지리적 여건상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더욱 개방적이었던 개성 일대의 화담학파 역시 당시 개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이다. 그들 가운데엔 토정 이지함을 비롯해 정여립 역모에 연루돼 죽은 이발과 정개청 등이 있었다. 화담학파는 신분적 개방성이 돋보인다. 공사천(公私賤)이나 서얼의 자식들도 직접 가르치는 등 신분제도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나 명문가 출신의 이지함이 걸인에게 혜택을 베푸는 민중 지향적인 흐름들이 조선중기 사상계에 큰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의 진보적 개혁 세력들은 유교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 개혁의 방향을 찾고자 했다. 그 핵심 사상이 『예기(禮記)』에 언급된 ‘대동(大同)’이다. 정열비이 사용한 ‘대동계’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여립이 즐겨 했다는 ‘천하는 공물’이라는 말도 발견된다. 역대 제왕들이 나라를 사적 소유물처럼 여겼기에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현명한 자를 뽑아서 지도자로 세우고, 천하가 모두의 것이라는 믿음 하에 노약자, 병자, 과부 등도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평등 지향적인 공화주의, 나아가 사회주의적 요소를 지향했다.
16세기 후반 조선 사회에는 정여립과 같이 화합과 평등이 실현되는 대동세상을 위해 개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정여립의 부활을 기다린다.
개혁세력의 거세로 조선은 스스로 자기모순을 치유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3년 뒤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적인 위기를 겪게 된다. 그 후로도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매몰돼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된다. 정여립 사건은 명분과 신분질서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성리학의 흐름이 경직화돼 가는 시점에서 이에 맞서고자 했던 신진 사림들의 고민과 다양한 이론적, 실천적 모색, 현실적 패배를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4백여 년이 흐른 지금 한 개인병원에서 계속되고 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 역사학을 전공하는 정회수씨는 정여립 사건의 진상 규명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고 있다. 정여립 사건으로 동래 정씨 일가는 고향에서 쫓겨나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조상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져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하지만 당시 흔적은 확연히 남아있다. 공덕을 기리는 비석은 동강난 채 쓰러졌다. 평평하던 묘 주변은 봉분을 파헤치면서 흙이 없어져 계단식 지형이 돼 버렸다. 목이 잘려나간 석상은 시멘트로 이어 붙인 자국이 선명하다.
당시 역모사건 수사에 직접 참여한 이항복이 남긴 시는 어느 누구도 억울함을 대변해 줄 수 없는 공포 분위기를 말해준다.
입이 있으되 말할 수 없고
눈물이 쏟아져도
소리내어 울 수가 없네
베개를 어루만지며
두려워서 소리를 삼켜
숨죽여 운다
어느 누가 잘 드는 칼날로
내 슬픈 마음을
도려내 주리
연루자들 대부분이 후대에 명예회복이 이뤄졌지만 정여립 가문만은 예외였다.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그가 속한 문중 전체가 수백 년 동안 족보에서 누락됐다. 정여립이 태어난 완주군 상관면 월암리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지방관리들의 송덕비가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당시 교통의 요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여립이 능지처사된 후 조정에서는 집터를 송두리째 파내고 그것도 모자라 물을 채워 연못으로 만들었다. 풀 한 포기도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징벌이었다. 연못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지명(‘파쏘봉’. ‘파쏘들’ 등. ‘파쏘’란 집터를 파헤쳐 인공연못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논 한가운데 솟아 있는 말 무덤은 정여립이 실수로 죽인 자신의 용마를 애석해 하며 여기에 묻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아직도 보존돼 있고, 조상들의 사당 터에는 절(쌍용사)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당시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정여립이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그것은 또 다른 정여립에 대한 민중들의 염원이었다.
정여립의 개혁사상은 훗날 실학자들에게 이어진다. 16세기 후반의 진보적 사림들이 그랬듯 이들은 다양한 문물을 수용했다. 정약용의 경우 천주학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주자성리학적 이론에서 자유로웠다. 그리고 거중기가 말해주듯 그 핵심에는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인가 하는 실천적 모색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정약용은 무력에 의한 정권교체도 그것이 백성의 뜻이라면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천자란 다중이 뽑아서 된 것이다. 그를 끌어내리는 것도 다중이요, 윗자리에 앉히는 것도 다중이다.” 정여립은 더 나아가 지금의 간접선거 방식과 비슷한 형태를 정치의 본질이라고 역설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임금은 하늘이 낸 것이고 백성은 임금의 것이었던’ 당시 조선 사회의 틀에 안주했지만, 민본주의적 개혁을 주장한 선구자들이 분명 존재했다. 정여립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는 정여립을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으로, 『민약론』을 쓴 루소(1712~1778)와 견줄 만하다. 하지만 루소와 같이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지만 정여립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지식인으로 일신의 영달을 좇지 않고 사회의 모순을 고민했던 정여립, 이제 그는 ‘실패한 반란의 우두머리’가 아닌 민본주의적 개혁을 이끈 선구자적 지식인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동인 인사들 역모 연루로 서인 정권 장악
조선 4대 사화 보다 많은 1천여 명 죽음
정여립의 역모 조작 가능성 높다 학계 주장
정여립(鄭汝立.1546-1589)은 전북 완주군 상관면 월암리에서 전주의 명문으로 꼽히는 동래정씨(東萊鄭氏)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22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의 학유, 예조좌랑, 홍문관수찬 등 벼슬을 지냈다.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자신을 조정에 천거한 이이를 비판한 것이 선조의 진노를 사 관복을 벗은 것으로 돼있다. 결국 낙향한 정여립이 처음에 터를 잡은 곳은 김제시 금산면 동곡마을이다.
이곳은 미륵신앙의 본거지 금산사가 근처에 있고 증산교의 본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강증산이 도를 깨쳤다는 대나무 숲 터 이야기도 전해진다. 30대 중반의 정여립은 이 일대에서 이름난 명당 제비산 자락에 집을 짓는다. 관직을 떠났지만 정여립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멀리서 선비들이 찾아오고 인근 관리들도 그를 방문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천문학과 풍수지리학 등의 책을 읽고 토론하기도 했다.
그는 또 시국을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했다고 전해진다.“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 누구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이 말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위험한 반체제적인 발언이었다.
정여립은 그 뒤 산속의 섬으로 불리는 진안군 죽도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서당을 짓고 학문을 가르쳤다. 그래서 < 죽도선생 > 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또 이곳에서 무예를 가르치고 600여 명을 모아 < 대동계 > 를 조직한다. 1587년 정해왜변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이 도움을 요청하자 정여립은 대동계를 모아 왜구를 격퇴했다.
실록에 의하면 < 정여립은 대동계원을 모아 치밀하게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탄로 나고 조정에서는 즉시 체포령을 내린다. 정여립은 죽도로 도망쳐 그곳에서 자결했다 > 고 기록됐다.
이 사건이 바로 선조 22년(1589)에 일어난 기축옥사다. 기축옥사는 조선조 최대의 옥사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다가 죽거나 사형당한 사람은 1천 명이 넘는다. 조선의 4대 사화에서 죽은 사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이름 높은 학자에서부터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알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도 고문을 받고 숨졌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같은 유명한 승려들도 연루돼 곤욕을 치렀다.
주모자 정여립의 시신은 만조백관이 보는 앞에서 능지처참된다. 그 부모와 자식들도 모두 교수형에 처한다. 조선 전체가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광풍을 몰고 왔다. 날조된 유언비어에 희생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기록을 보면 < 연루자들을 고문했던 의금부는 비명 소리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 고 한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상상을 초월한 갖은 고문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17세기에 쓰인 당쟁에 관한 책 < 동소만록 > 에는 정여립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다고 되어있다. 누군가 치밀한 사전 각본을 만들어 정여립을 죽이고 역모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에 공감하는 학자들이 의외로 많다.
왜구가 전주에 쳐들어 왔을 때 지방관의 요청에 의해 왜구를 물리쳤다면 대동계는 비밀조직이 아니라 공개된 조직이었다는 애기다. 또한 대부분의 연루자들이 후대에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던 점도 지적된다. 진짜 역모를 했다면 명예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 정국은 동인의 주도하에 있었다. 정여립이나 당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동인에 속한 인사들이다. 이들은 역모에 가담할 이유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동인의 유력 인사들이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돼 화를 입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정여립 역모 조작설에는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던 송강 정 철과 송익필이 관계됐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따라서 정여립의 역모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정여립 사건으로 동래정씨 집안은 고향에서 쫓겨나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조상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져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정여립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그가 속한 문중 전체가 수백 년 동안 족보에서 사라졌다. 정여립이 능지처참된 후 조정에서는 그의 집터를 송두리째 파내고 그것도 모자라 물을 채워 연못으로 만들었다. 풀 한 포기라도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 정여립은 누구인가?
◇기축옥사로 희생당한 최영경의 문집인 ‘수우당집’. |
420년 전 기축년 10월2일(양력 11월18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연명으로 황해도 관찰사 한준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내용은 전주를 거점으로 한 정여립의 역모상황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한준은 급히 조정에 이 문서를 올렸고 3정승과 6승지가 참여하는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즉시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고, 의금부 도사가 황급히 황해도와 전라도에 급파되었다.
이 사실을 감지하고 있던 정여립은 전북 진안의 죽도 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모의 주모자인 정여립의 자살. 그러나 그것은 조선중기 사림사회를 뒤흔든 엄청난 회오리의 첫 출발이었을 뿐이었다.
정여립(1546∼1589)의 본관은 동래, 자는 인백이며 전주 출신이다. 첨정을 지낸 희증(希曾)의 아들로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났다.
반대파에 의해 서술되었지만 그의 태몽에는 고려 의종 때 무신란을 일으킨 정중부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왕을 시해한 전 시대의 반역자가 꿈에 나타났다는 것은 정여립의 운명을 미리 점쳐준다.
정여립은 무예나 활쏘기에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또래의 우두머리로 활동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도 두루 능통하였다. 15세 때 이미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고을 일을 맡아 보았는데 당시 아전들은 그의 부친보다 정여립이 업무를 처리할 때 훨씬 부담을 느꼈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강한 개성과 기질은 형제 및 친척과도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나 학문적 자질은 뛰어나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중앙정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예조좌랑, 홍문과 수찬 등의 요직을 거쳤는데 정여립의 순탄한 관로에는 그의 자질을 일찍부터 주목한 이이와 성혼 등 서인의 지지를 받은 인사들의 후원이 컸다. 당시 조선의 정국은 1575년(선조 8년)부터 시작된 붕당정치가 본격화되어가는 시기였다. 따라서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는 인물은 필연적으로 한 당파의 정치노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여립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진 전북 진안 정천면 수동리의 죽도. 진안군청 제공 |
그러나 정여립은 서인의 후원 속에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는 오히려 당시의 집권세력인 동인의 입장에 경도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그의 기질은 동인의 돌격장의 역할을 맡기에 충분하였다.
홍문관 수찬 시절 서인의 핵심인물인 박순·성혼 등을 극렬하게 비판한 후 서인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인 이이를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고 고향인 호남으로 낙향하기에 이른다.
중앙의 정치무대에서는 그의 이름이 지워졌지만 오히려 호남 일대를 중심으로 그의 명망은 보다 높아갔다.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기질, 무예와 병법에 능한 활동가, 학문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 당시 지방사회에서 이만큼 교양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카리스마형 인물은 흔치 않았다. 당연히 그의 명망은 높아갔으며, 인근 지역의 수령들은 다투어 그의 문전을 두드렸다.
정여립의 다재다능한 능력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1589년 전주부윤 남언경의 부탁으로 왜적을 물리쳤을 때이다.
정여립은 무사나 공사 천민의 무리들을 이끌면서 왜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여립의 이러한 자질은 반대세력의 주요한 공격거리가 되기도 했다. 1589년의 고변 때 반대파들은 정여립의 대동계 조직, 무장활동 등의 경력을 지적하고 실제 역모를 계획하였던 위험인물로 부각시켰던 것이다.
#2. 사림(士林)사회에 회오리가 불다
‘연려실기술’에는 정여립의 역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기축년(1589년) 겨울 서(황해도)와 남(전라도)에서 일시에 병사를 일으켜 얼어붙은 강을 건너 성을 직접 쳐들어가 무기고를 불사르고 조운(漕運) 창고를 약탈하며 심복을 도성 요소에 배치한다는 것이 역모의 기본 시나리오였다.
◇조식과 최영경을 배향한 덕천서원 전경. |
이어 자객을 나누어 보내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거짓으로 교지를 꾸며 인근의 수령과 병사(兵使), 수사(水使)를 죽이며 언관을 사주하여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파직시키고 그 틈을 타서 일제히 궐기한다는 것이었다.
정여립이 황해도를 역모의 진원지로 삼은 데 대해서는 이곳이 일찍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정도로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 정여립과 함께 역모에 핵심적으로 참여한 변숭복(안악), 박연령(안악), 지함두(해주) 등은 모두 황해도 출신이었다.
1589년 정여립에 대한 역모 고변으로 기축옥사가 시작되고 주모자 및 연루자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정여립의 자살로 역모의 주창자는 사라졌지만 역모에 참여한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었으며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수사가 시작되면서 이 사건의 파장은 점점 커졌다. 이는 무엇보다 당시 정국이 동인과 서인의 정쟁이 가열화되어 갔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1월8일 서인의 돌격장 정철이 정언신을 대신하여 우의정에 임명되어 위관(委官:수사 책임자)을 맡으면서 사건에 연루된 동인 공격의 선봉에 섰다.
12월12일에는 낙안향교 유생 선홍복이 가혹한 수사를 받자 초사(招辭)에서 이발·이길·백유양 등이 연루되었다고 자백하였고, 12월14일에는 전라도 유생 정암수가 상소문을 올려 한효순·정개청·정언신 등 조정의 대신들이 이 사건에 크게 연루되었음을 주장하였다.
당시 역모 혐의로 상소문이나 공사(供辭)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인물은 대부분 동인으로, 서인들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정국의 전환을 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정국에서 수세에 몰려 있던 서인들이 정여립 역모사건을 동인의 공격에 적극 이용하면서 옥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향토사학자 신정일씨가 최근 펴낸 ‘지워진 이름 정여립’의 표지. 정여립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 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기도 했다. 가람기획 제공 |
동인 강경파인 이발·이길 형제가 처형된 것을 비롯하여 홍가신·허당·김창일 등 수십 명의 관리들이 벼슬을 삭탈당하고 금고됐다. 또한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로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는 자들은 수감됨으로써 정국은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이후에도 남명 조식학파의 핵심인물인 최영경이 길삼봉이라는 무고를 받아 옥중에서 사망하고, 이에 연루된 남명의 문인들이 대대적으로 탄압받는 등 사건의 파장은 사림사회 전체에 휘몰아쳤다.
#3. 조선중기 정치·사상 변화의 분수령
정여립의 학문과 사상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주자성리학의 의리론에 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이를 적극 실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여립의 이러한 학풍과 사상은 16세기를 대표하는 학파 중 남명 조식학파와 화담 서경덕학파의 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정여립과 친밀한 교분을 유지했던 최영경·이발·정개청 등은 남명이나 화담의 문인들로서, 이들이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희생된 것은 이 사건이 조선중기 사상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정통 주자성리학의 학풍과는 거리가 있었던 화담과 남명의 학풍을 계승한 인물들이 기축옥사의 주요 연루자였던 것은 정여립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닌 사상적인 차이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즉 이 사건의 주역인 정여립과 그 연루자들은 성리학의 이론이나 명분론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화담이나 남명학파의 학자들이었다. 기축옥사에서는 주로 성리학 이해에 있어서 절충적 성향이 강하고 보다 탄력적, 실천적인 성향의 계열들이 희생되었다.
역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국왕의 직접 조사를 받은 일부 하층민은 ‘우리는 반역이 아닌 반국(叛國)을 하였습니다. 반국은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한 것입니다’라고 하여 국왕의 쓴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례는 정여립의 사상이 이론보다는 그 구체적인 실천행위, 즉 민생문제의 해결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여립은 스스로가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할 만큼 정통 주자성리학의 입장에서는 일탈한 사상의 소유자였다.
그는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왕촉’이라는 사람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인의 통론은 아니다”라고 하여 경우에 따라 두 임금을 섬길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또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리요”라는 중국 성현 유하혜의 말을 인용하여 세습되는 절대군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무사들을 직접 통솔한 것에서 미뤄 알 수 있듯이 병법과 무예에 대한 자질 또한 특별했다.
이외에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뜻으로, ‘목자는 망하고 전읍은 흥한다(木子亡 奠邑興)’는 동요를 옥판에 새겨서 지리산 석굴에 감추어 놓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여론 조성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당시 정여립 역모사건 수사 책임을 맡은 송강 정철의 초상. 조선 서인세력은 1589년 정여립의 역모 혐의를 기축옥사 등 동인세력에 대한 숙청 등의 기회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
시대를 앞서갔던 정여립의 급진적 사상과 혁명적 발언은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에 의해서 주목되었다. 신채호는 정여립을 가리켜 이미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혁명적인 사상가로 평가하였다.
정여립은 명분론, 성리학의 이론 탐구만을 중심사상으로 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능력이 있는 인재가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에게 보수적인 조선사회는 너무나 큰 장벽으로 다가섰다. ‘천하는 공물’이라고 외쳤지만 그 공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야심이 있을 만큼 정여립이 선택한 길은 결국 ‘역모’라는 극단이었다.
혁명을 꿈꾸었지만 그 혁명은 착수하기도 전에 실패로 끝났고, 정여립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그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기축옥사라는 대참극의 단서를 제공했다.
조선중기의 풍운아 정여립의 죽음과 이로 말미암아 파생된 대참극 기축옥사. 이 사건은 급진적인 지식인이 존재할 수 있는 조선중기의 토양 또한 매우 척박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14)분당 중앙공원의 충신과 청백리-한산 이씨(韓山 李氏) |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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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성곽 자체로도 완벽한 호국의 성지지만, 산성을 둘러싼 주변 마을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역사를 발전시켜 오늘의 번성한 시대를 이뤘다. 산성 주변의 성남, 하남, 광주 일대와 서울의 한강 남쪽 일대는 조선시대에 대규모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실시된 강무(講武)와 국왕의 수렵(狩獵)이 빈번하게 열린 지역이다. 성남의 창곡동이나 하남의 상사창, 하사창, 창우리 등의 지명이 남한산성에서 필요한 물자의 창고가 있었던 사연이 있고, 공군비행장(서울공항)이 있는 지역은 군용 농장인 둔전(屯田)과 탄천목장이 있었다. 그리고 탄천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13만의 대군이 주둔해 조선정부를 압박했고, 탄천 상류 험천에서는 충청감사 정세규가 근왕병을 이끌고 와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 분당 중앙공원 일대는 한산 이씨 집성촌 분당의 중앙공원 일대는 고려 말 학자인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 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돼 있었으며, 250년 이상의 나이테를 가진 느티나무 보호수(지정번호 : 경기성남-10)가 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웅변해 준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8호인 수내동가옥은 조선후기에 건립된 민가의 살림집 가운데 하나다. 원래는 70호 가량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 중 한산 이씨는 30호 가량 됐다. 공원 내에는 지석묘(고인돌)군과 마을 어귀에 있던 큰 느티나무, 연못, 정자 터, 한산 이씨의 산소들이 잘 보존돼 있다.
이장윤(李長潤, 1455~1528)은 봉화현감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증직됐다. 공은 천성이 너그럽고 어질며 겸손하고 후덕해 평생에 말을 빨리 하거나 노여워하는 빛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불쌍히 여기는 일에 힘썼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체로 관리가 된 자는 그 아랫사람이 죄가 있을 때 그대로 두고 생각하면 내 노여움이 풀리는 것이니 갑자기 사람을 상하게 하는 조짐이 없게 해야 한다.”하니 사람들이 격언(格言)이라고 했다. 손자 지함(之涵)은 세상에서 토정선생이라 일컬었고, 증손은 영의정 산해(山海)요, 이조판서 산보(山甫)다. 이 질(李秩, 1473~1560)은 장윤의 첫째 아들로서 상주·울진 등 7개 군의 군수를 역임해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80세가 넘었음에도 뜻과 지혜가 명민(明敏)했으며, 필력(筆力)은 건강했지만 경제적 형편은 어려웠다. 중앙공원의 <봉화공 삼세이하 유사비>에 “제사를 지낼 때면 가난해서 제사를 잘 차리지 못했사오니, 원컨대 자손이 영화롭게 되면 근본에 보답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습니다.”라고 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증(李增, 1525~1600)은 이질의 손자며, 1580년 예조참판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9년 정여립의 난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3등이 되고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다. 예조, 형조, 공조 판서와 의정부의 좌우참찬을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전쟁에 대비하기를 주장했다. 세상을 떠난 뒤 영의정에 추증돼 영원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부조묘(不?廟)’ 사당이 건립됐고, 문집으로는 <북애시고(北崖詩稿)>가 있다. 묘표의 이수는 쌍룡이 연꽃 속 여의주를 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양각했으며, 작은 원 안에 태극문을 새겨놓았다.
이경류(李慶流, 1564~1592)는 평난공신 이증(李增)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 전투에 참전해 상주 북쪽 증연(甑淵)에서 전사했다. 왜적이 크게 집결해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 종사관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2년 후 선조임금이 도원수의 종사관 이경함에게 묻기를, “이경류가 그대의 동생인가?”하니, 경함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 싸움터에서 죽었다고 해 내가 매우 애도했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갑자기 그가 생각나는구나. 누구의 종사였으며 어디서 죽었는가?”하니, 경함이 아뢰기를, “변기(邊璣)의 종사관이었고, 영남에서 전사했습니다.”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윤섬과 박지도 모두 그때 죽었다. 그들은 평일 시종하던 신하들이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슬픔을 금할 길 없다.”했다. 특히 윤섬, 박지, 이경류 ‘3종사(從事)’는 문관으로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주된 임무가 아니었고, 더구나 이경류는 형을 대신해 자원해서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청백리 이병태(李秉泰 ; 1688~1733)의 자는 유안(幼安). 진사 협(浹)의 아들이다. 언관으로서 직무에 충실하여 영조임금이 호랑이 가죽을 내려 주기도 했다. 1727년(영조 3)에 호조참의로 있을 때, 탕평책(蕩平策)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려 파직당했다. 그 이후로는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아 1730년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을 사양해 그해 6월 특별히 그 직은 파해 주었다. 이듬해 승지로 임명됐으나 다시 사퇴하고자 하므로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군수로 좌천됐다. 합천에 부임해 선정을 베풀어 합천의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춘추로 제향했다. 관직에 있을 때나 관직을 떠나서나 항상 강직 결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으니 정조 20년 청백리에 녹선됐다. 몹시 가난해 사는 집은 비바람을 가릴 수도 없었고, 임종한 후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영조에게 아뢰기를, “굶어 죽었다.”고 했다. 청렴결백함이 뛰어나 숙수(菽水=콩과 물, 변변하지 못한 음식)를 이어대지 못했는데도 그의 지조는 변하지 않았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살아서는 청백(淸白)한 지조가 있었고 죽어서는 시체를 염(殮)할 기구가 없었으며, 또 늙은 어미가 굶주림을 면치 못한다.”고 아뢰어, 고(故) 감사 한 지(韓祉)의 전례에 따라 그 어미를 보살펴 주기를 청하자, 임금이 애석하게 여기며 한참 있다가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고 증직하며 장례를 치르게 하라 명했다.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하고 문청(文淸)이란 시호를 내렸다.
홍수원(洪?元·1611~163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서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창하다 중국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삼학사의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1586~1637)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악성종기로 병을 앓아 매우 위태로울 때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대변을 받아내는 등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다. 홍수원의 묘역이 한산 이씨 묘역에 있는 것은 부인이 이확의 딸인 것에 기인한다. 한편 묘소와는 별도로 그의 묘표가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에 아버지 홍익한의 묘석과 함께 보존돼 있는데, 묘표가 이렇게 평택시에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알 수 없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15편에서는 ‘늘푸른 소나무/송산 조견 선생’에 대해 소개됩니다.> |
■ 한산이씨 묘역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있는 조선시대 묘역.
1989년 12월 29일 경기도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한산이씨 종친회가 소유하고 있다. 고려 말 학자 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이씨의 묘역이다.
신도시 개발지역인 분당지구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체 규모는 87,000여 평으로 해발고도 약 70m의 영장산(靈長山) 일대에 조성되어 있다. 동․서․북쪽에 한산이씨 묘역임을 알리는 한산이씨묘산입수비(韓山李氏墓山入首碑)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2기는 중앙공원을 조성하면서 공원으로 이전하였다.
정남쪽에는 이지함의 조부(祖父)로 봉화현감(奉化縣監)을 지낸 이장윤(李長潤)을 비롯하여 이질(李秩), 이지숙(李之菽), 이증(李增), 이확(李穫), 이집(李潗), 이정(李程) 등의 묘역이 있다.
남동쪽에는 이증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경류(李慶流), 이경류의 애마(愛馬), 이증의 손자인 이정룡(李廷龍) 등의 묘역이 있다. 남서쪽에는 이오(李奧), 이원(李垣), 이한(李漢), 이병건(李秉健) 등의 묘역이 있다.
남서쪽 중앙공원 입구 쪽에는 1722년(경종 2)에 이장윤, 이질, 이지숙의 유사(遺事)를 기록하여 건립한 한산이씨삼세이하유사비(韓山李氏三世以下遺事碑)가 있다.
비문(碑文)은 후손 이병연이 지었고 크기는 높이 198cm, 너비 80cm이다. 그밖에 이증의 신도비(1695), 이정룡의 신도비(1728), 이경류의 정각비(旌閣碑:1727)가 있다.
한산이씨의 세장지(世葬地:대대로 묘를 쓰고 있는 땅)이자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내려준 땅)로서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오랫동안 조성되어왔기 때문에 묘제(墓制) 및 석물(石物) 양식 연구에 중요하다.
송파의 역사속 인물 - 홍익한
- 1586(선조 19)~1637(인조 15)
- 오달제·윤집과 더불어 이른바 “병자 삼학사”의 한 사람.
- 본관은 남양, 자는 백승, 호는 화포·운옹·찬성 숙의 현손으로, 진사 이성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김림의 딸이며, 백부인 교위 대성에게 입양되었다.
- 이정구의 문인이다.
-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서를 거쳐, 1635년 성균관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상소하여 제호를 참칭한 죄를 문책하고 그 사신들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이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미처 강화로 피난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최명길 등의 화의론을 극구 반대하였는데, 이 난으로 그의 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적의 칼에 죽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적에게 붙들렸으나 몸을 깨끗이 보존하고자 자결하였으며,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이 살아 남았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되었는데, 조약이 거론될 때, 김상헌·오달제·김집 등과 척화를 주장하였다.
강화체결 이후 조정의 권유로 청군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평양부서윤으로 나갔으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운집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그곳에 붙들려갔어도 문초하던 청장 용골대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사람 뿐이다.” 하였고,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를 비롯한 삼학사가 살해된 정확한 날짜도 모르고 오래도록 감추어져 오다가 효종 때에 홍익한에게 도승지, 윤집에 부제학, 오달제에 좌승지를 추증하게 하였고, 숙종 19년(1663)에는 삼학사에게 영의정이 추증되어 그 절개를 기리게 되었다.
광주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잠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 평양의 서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이 있다.
시호는 충정이다.
(이 글은 송파구청의 홈피에서 그대로 인용한 글입니다)
[출처] 송파의 역사속 인물 - 홍익한|작성자 잠실지기
조회 42 추천 0 2006.09.2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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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은 1586년 팽성읍 함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훈구세력 중에서도 명문가에 속했다. 고조부 홍숙은 중종 때의 공신(功臣)으로 도승지와 좌찬성을 지냈으며, 조부와 생부도 공신의 후손으로 관직에 올랐다. 홍익한의 선대들은 유력한 훈구파였음에도 일찍부터 사림파와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칭송받던 월사 이정구에게 수학(修學)할 수 있었던 것도 선대의 인연 때문이었다.
홍익한은 30세의 늦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성균관 생원으로 6년을 공부하여 광해군 13년(1621)에는 알성시에도 급제하였다. 사마시에서는 장원을 하였고 알성시에서도 합격하였으니 뛰어난 수재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때는 홍익한이 뜻을 펼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집권세력은 북인들이었고, 그가 속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과 인목대비 문제로 집권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다. 홍익한이 알성시에 급제하고도 취소당했던 것도 시대상황과 관련 있을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출세길…요직 두루 거쳐
1623년 서인(西人) 일부세력이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반정은 정권욕에 불타고 있던 서인(西人)이 왕을 갈아치운 명분 없는 쿠데타였다. 쿠데타는 집권세력 내에서도 비판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민심의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북인정권에서 파방을 당했던 홍익한에게 반정은 출세의 기회였다. 인조 즉위년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피난한 인조는 충청도 선비들을 대상으로 과거(科擧)를 실시하였다. 민심안정용으로 치러진 공주행제정시문과에서 홍익한은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홍익한의 관직생활은 순탄하였다. 청요직(淸要職)이었던 삼사에 기용되어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고, 정승을 지낸 스승 이정구도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다. 홍익한이 관직에 진출한 무렵 국외정세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서인들이 사대의 의리로 맺어진 혈맹국가라고 떠받들던 명나라는 국운이 기울대로 기울었으며, 여진족이 세운 청(淸)은 중국본토를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집권서인세력은 잃어버린 10년 운운했던 현 정권처럼 광해군과 북인 정치를 의리도 없고 명분도 상실한 잃어버린 15년이라고 주장하며 반청(反淸)의 기치만 높였다. 홍익한도 친명반청(親明反淸)은 포기할 수 없는 대의(大義)로 인식하였다. 그는 조선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버리고 오랑캐인 청을 받드는 것은 금수(禽獸)만도 못한 행동이라고 주장하였다.
인조15년(1636)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고 항명대의를 세우라는 홍익한의 상소는 파란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군사를 국경부근으로 이동시키며 압박하였고, 최명길과 김류 등은 사직보존을 위해 홍익한을 청나라로 압송하자고 주장하였다. 명분을 앞세운 척화파와 현실론을 주장하는 주화파 사이의 논쟁은 피난지 남한산성까지 이어졌다.
항전 초기에는 원칙론을 주장하는 척화파가 분위기를 이끌었다. 척화(斥和)는 광해군의 실리외교노선을 부인하고 집권한 서인 주류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항전이 40일을 넘어가고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세자와 대군들이 포로로 잡히자 사태가 급변하였다. 인조는 청의 굴욕적인 항복요구를 받아들였다. 홍익한은 윤집, 오달제와 함께 여러 척화파를 대신하여 청나라에 압송되었다. 압송된 처지였지만 홍익한은 친명(親明)의 대의(大義)를 굽히지 않았다. 삼학사 가운데서 홍익한이 가장 먼저 참살을 당했던 것은 끝까지 강경했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청 주장하다 청나라로 압송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홍익한의 집은 강화도에 있었다. 남한산성과 함께 또 다른 항전지였던 강화도가 함락되자 홍익한의 가족들도 화를 면치 못하였다. 둘째 부인 허씨를 보호하려다 아들 홍수원은 칼에 맞아 죽었고, 허씨 부인은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것을 본 홍수원의 처도 혀를 깨물어 죽어버렸다. 다행히 평택 본가에는 어머니와 자녀들이 남아 있어서 처형소식을 듣고 의복으로 허장(虛葬)을 하였고,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묘비를 찬(撰)하여 뜻을 기렸다.
성리학적 논리에 충실하였고 서인 주류였던 척화파를 대표하여 죽었지만 조정은 청나라의 눈치만 볼 뿐 존숭(尊崇)을 꺼렸다. 심지어 포로로 잡혀가는 삼학사의 손을 잡고 가족과 후손들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였던 인조마저도 자신의 안위만 살필 뿐이었다. 인조가 취한 유일한 조처가 평택현(팽성읍)에 거주하고 있었던 노모에게 월름(월급)을 지급한 것이었다. 북벌을 준비하며 숭명반청의 기치를 높였던 효종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남인 영수 허적은 ‘나라에 이로운지 해로운지도 생각하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려 과격한 주장만 하였다’고 폄하하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살아남은 아들과 후손들이 일찍 죽고 가세마저 기울면서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효종 때 증직이 이뤄졌다. 현종 때에는 후손들에게 벼슬과 경제적 지원이 내려졌으며, 숙종 때에야 충정이라는 시호가 하사되고 부인과 아들, 며느리에게 효열정문이 내려졌다. 홍익한을 비롯한 삼학사가 크게 존숭되게 된 것은 송시열의 공이 컸다. 송시열은 홍익한의 묘비를 찬(撰)하였을 뿐 아니라 나중에 삼학사전을 지어 홍익한을 충절의 상징을 격상시켰다. 숙종13년에는 숭명반청의 대의를 지키고 군신의 의리를 드러낸 인물이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함정리에 포의사가 건립되었고 손자 홍우석에게는 증직의 은사가 내려졌다. 이 같은 송시열의 평가 덕에 영조 이후 200년 동안 홍익한은 충절의 상징처럼 떠받들어졌다.
조선후기 200년 넘는 세월동안 충렬의 상징으로 존숭되었던 홍익한은 현대사회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실존마저 불분명한 임팔급의 묘까지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 마당에 홍익한의 사당 포의사를 복원하자는 후손들조차 없다. 그것은 충(忠)이라는 봉건적 이데올로기가 민주주의와 상충된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고, 척화(斥和)의 입장이 지나치게 사대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
▲ 김 해 규한광중학교 교사평택지역사연구가
[성남사람들(2)- 분당중앙공원 한산이씨 묘역]
어제 쓴 [성남사람들(2)의 연장]이다...^-^
중앙공원 한산이씨 묘역에 26여명의 인물이 있다고 하는데...
어제 세조의 정난공신 '이계전'의 손자 '이장연'의 묘를 시작으로 후손들이 세거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손자인 토정 이지함이 할아버지 '이장연'의 묘자리를 잡는데 영향을 끼쳤을 것 이며...
중앙공원의 <봉화군삼세이하유사비>는 '이장연과 그의 아들 '이질', 손자 '이지숙'의 비가 세워진 것 이다...^-^
또한 토정은 목은 이색의 7대손인데...12손 '이병태'는 정조 때 청백리로 선정되었고...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된 후 벼슬을 즐기지 않아 경상관찰사, 승지 부임을 사양하는 바람에 합천군수로 좌천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합천군민이 생사당을 세워 춘추에 제향한다는 사실까지 공부했다...ㅎㅎ...^-^
오늘은 아천군 '이증'과 그의 아들 '이경류'와 말무덤에 대하여 공부하고자 한다...ㅎㅎ...^-^
이 증(李增, 1525~1600)은 이질의 손자며, 이지숙의 차남으로...1589년 정여립의 난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3등이 되고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다. 예조, 형조, 공조 판서와 의정부의 좌우참찬을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전쟁에 대비하기를 주장했다. 세상을 떠난 뒤 영의정에 추증돼 영원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부조묘(不?廟)’ 사당이 건립됐고, 문집으로는 <북애시고(北崖詩稿)>가 있다. 묘표의 이수는 쌍룡이 연꽃 속 여의주를 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양각했으며, 작은 원 안에 태극문을 새겨놓았다.
이경류(李慶流, 1564~1592)는 평난공신 이증(李增)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 전투에 참전해 상주 북쪽 증연(甑淵)에서 전사했다. 왜적이 크게 집결해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 종사관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특히 윤섬, 박지, 이경류 ‘3종사(從事)’는 문관으로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주된 임무가 아니었고, 더구나 이경류는 형을 대신해 자원해서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그러나 고향집에서는 이경류의 말이 피 묻은 옷과 유서를 물고 집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그가 전사한 것을 알게 됐다. 말은 상주에서 성남까지 500리 길을 달려와 주인의 소식을 전한 뒤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다가 죽고 말았다. 특히 윤섬, 박지, 이경류 ‘3종사(從事)’는 문관으로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주된 임무가 아니었고, 더구나 이경류는 형을 대신해 자원해서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이경류는 사후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됐고, 상주의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에 제향됐다. 1727년(영조 3) 정려비가 세워졌고, 이경류 묘역 아래에는 충직한 말의 무덤이 있다.
<봉화군삼세이하유사비> 옆에 <이증 신도비(1695년-숙종 21)/ 이경류 정려비(1727년-영조 3)/ 이정룡 신도비(1728년-영조 4)>가 있다 .
아천군 '이증'은 정여립의 난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3등, 아천군에 봉해졌고...세상을 떠난 뒤 영의정에 추증돼 '부조묘'사당이 건립된 분이고...
'이경류'는 평난공신 '이증'의 4남으로 임진왜란 때 상주 북쪽 증연에서 전사했는데...이경류의 말이 피 묻은 옷과 유서를 물고 상주에서 성남까지 500리 길을 달려와 주인의 소식을 전한 뒤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경류는 사후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됐고, 상주의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에 제향됐다. 1727년(영조 3) 정려비가 세워졌고, 이경류 묘역 아래에는 충직한 말의 무덤이 있다.
'이정룡'은 이경류의 손자로 목은 이색의 14대 손으로...김제군수를 역임한 분이다...^-^
홍수원의 묘역이 한산 이씨 묘역에 있는 것은 부인이 이확의 딸인 것에 기인한다....홍익한의 묘와 홍수원의 묘표는 고향 평택에 있다...^-^
홍수원(洪?元·1611~163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서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창하다 중국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삼학사의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1586~1637)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악성종기로 병을 앓아 매우 위태로울 때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대변을 받아내는 등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다.
'홍익한'은 효종 때 증직이 이뤄졌다. 현종 때에는 후손들에게 벼슬과 경제적 지원이 내려졌으며, 숙종 때에야 충정이라는 시호가 하사되고 부인과 아들, 며느리에게 효열정문이 내려졌다. 홍익한을 비롯한 삼학사가 크게 존숭되게 된 것은 송시열의 공이 컸다. 송시열은 홍익한의 묘비를 찬(撰)하였을 뿐 아니라 나중에 삼학사전을 지어 홍익한을 충절의 상징을 격상시켰다. 숙종13년에는 숭명반청의 대의를 지키고 군신의 의리를 드러낸 인물이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함정리에 포의사가 건립되었고 손자 홍우석에게는 증직의 은사가 내려졌다. 이 같은 송시열의 평가 덕에 영조 이후 200년 동안 홍익한은 충절의 상징처럼 떠받들어졌다.
(사족) '이증'이 정여립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평난공신, 아천군에 봉해지고 '부조묘'사당이 건립되므로...'정여립 모반사건'에 대하여 공부하였고...
말무덤으로 유명한 '이경류'는 이증의 4남으로 상주의 '충신의사단'에 제향되고...'정려비'가 세워진 내용을 공부했다...ㅎㅎ...^-^
'홍익한'은 사후 송시열의 평가로 숙종 때 충정이라는 시호와 부인과 아들, 며느리에게 효열정문이 내려졌고...충절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졌다...ㅎㅎ...^-^
머리에 쥐나므로 일단 여기까지만 공부하자...ㅎㅎ...^-^
- 2013년 12월13일 금요일...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에...수산나 -
이증 묘표
이증 묘표 이수의 태극문
"묘표의 이수는 쌍룡이 연꽃 속 여의주를 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양각했으며, 작은 원 안에 태극문을 새겨놓았다."
이증 묘
이증 신도비와 한산이씨삼세유사비(韓山李氏三世遺事碑)
이정용 묘표
이정용 묘
이정용 신도비와 이경류 정려비
분당 중앙공원 이정룡신도비와 이경류정려비
분당 중앙공원 이정룡신도비와 이경류정려비 안내문
분당 중앙공원 이증신도비와 한산이씨삼세유사비
분당 중앙공원 이증신도비와 한산이씨삼세유사비 안내문
분당 중앙공원 눈 오는 날...'이정룡신도비와 이경류정려비/이증신도비와 한산이씨삼세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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