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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성남사람들(3)-문정공 한계희(2013.12.14(토)-율동공원 2장

(16) 성인에 가까웠던 문정공 한계희 선생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2009년 07월 27일 (월)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율동 자연공원에 위치한 문정공 한계희 유택은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84호이며, 최근 조각공원과 사당이 건립돼 있다.


한계희(韓繼禧, 1423~1482)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순(子順),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몸을 삼가서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의 손자이고 함길도 관찰출척사(咸吉道 觀察黜陟使)를 지낸 청산군 혜(淸山君 惠)의 셋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기가 보통 사람과 달랐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잠자고 쉬는 것을 잊기까지 해 마침내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게 됐다. 이때에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었는데, 그의 어짊을 알고서 문종(文宗)에게 아뢰기를, “한계희는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독실해 이 세상에 견줄 만한 이가 없습니다.”했다.

 

  
 

 # 세조의 애총

1447년 식년문과에 급제, 집현전 정자(正字)에 선임된 뒤 여러 번 승진해 수찬(修撰)이 됐다. 잠저 시절부터 그의 학덕을 인정해 온 세조가 1455년 즉위하면서 특별한 신임을 받아 세자(德宗)에게 경학을 가르쳤고, 세자가 병으로 위독했을 때에는 세자의 간호와 약의 처방에 대해 임금이 한계희와 의논했다. 세자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해양대군(海陽大君:예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다시 왕명으로 세자를 가르쳤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1465년 이조판서에 올랐다. 1468년 세조가 병이 위독해 급히 불러 침실에 들어가니 이때 예종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세조가 한계희를 시켜 예종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내가 평일에 글을 지어서 조훈 조장(祖訓條章)과 같이 너에게 내려 주려고 했는데, 지금은 이미 할 수가 없으니, 그 대강만 간략히 말하겠다. 너는 마땅히 마음을 가다듬고 똑똑히 들어서 공경히 받들고 게을리 하지 말라. 첫째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섬길 것(敬天事神)이며, 둘째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기를 생각할 것(先思孝)이며, 세째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할 것(節用愛民)이니, 나의 말은 이것뿐이다.”하고, 이어서 한계희에게 내선(內禪)할 뜻을 말했다.


한계희가 아뢰기를, “이것은 대사이니, 성상의 생각을 신중히 하시고, 원컨대 안정을 하시며 조리하소서.”하니, 임금이 재차 소리를 지르며 재촉했다. 한계희가 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지고, 병세 또한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을 알고 즉시 아뢰기를, “매우 좋습니다.”했다. 임금이 명해 대보(大寶)를 가져오게 해  한계희가 보(寶)를 받들고 꿇어앉자 임금이 친히 예종에게 전하고, 또 명해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가져오게 해 한계희가 또 받들어 올리니, 임금이 한계희에게 명해 입히게 했다. 한계희가 예종에게 배례(拜禮)를 드리도록 청하고, 곧 인도해 나와 수강궁(壽康宮)의 문(門)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이튿날 세조가 승하(昇遐)하니, 한계희가 통곡해 물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것이 10여 일이었다.

 

예종이 즉위한 1468년 10월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결했다. 처음에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 도총관이 되고 남이가 병조판서가 되니 한계희가 비밀히 아뢰기를, “귀성군 이준은 종실이므로 금병(禁兵)을 맡는 것이 옳지 아니하고, 남이는 거칠고 사나와서 병권(兵權)을 주어서는 안됩니다.”해 세조가 가납(嘉納)해 그날로 모두 파(罷)했다. 남이가 과연 역적질을 꾀해 복주(伏誅)되고, 공을 논하기에 이르자,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내려 주고, 서평군(西平君)에 봉했다. 뒤에 귀성군 이준이 폐출(廢黜)돼 죽으니 사람들이 ‘선견이 있다.’고 말했다.

 

  
 

 # 당태종의 비서 우세남과 비견

세종 임금이 집현전 장서각(藏書閣)을 세우고 중국 등 사방 각처에서 양서를 수집해 비치하니 “공이 빠짐없이 다 읽고 널리 보고 기억해 포부가 컸으므로 사람들이 탄복하고 그를 당태종(唐太宗)의 비서 우세남(秘書 虞世南)과 같다 해 세남비서(世南秘書)에 비유했다.”고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전해온다. 인재가 아쉬웠던 세조 임금은 한계희가 모친의 초상을 당했을 때에도 불러서 써야 했을 정도였고, 그가 일찍이 병에 걸려서 거의 죽게 됐을 때 세조가 손수 기도문을 써서 빌었더니, 병이 나았으므로 불러 들여서 이르기를, “경의 병에 대해 걱정이 깊으므로 심지어는 경의 성명마저 듣기가 싫더니, 오늘 경을 만나 볼 줄은 몰랐다.”고 했다.

 

한계희는 봉록으로 받는 수입으로 종족 중에 외로운 자와 홀어미 된 이들을 돌봐 주었으므로 몹시 가난해 아침저녁을 거친 음식으로 때웠으며 늙어서 더욱 가난이 심했다. 형 계미가 민망히 여겨 때로 구휼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어느 날 한명회의 집에서 문회(門會)를 열었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서평이 나이가 이미 들었는데도 생활이 너무 검소하고 차림새가 초라해 보기 민망하니 어찌 조처할 방법을 생각지 않으리오.”했더니, 명회가 말하기를, “이건 나의 책임이오.”하고는 곧 지필을 가져다가 문권 한 부를 작성하되 친족으로 그 자리에 있던 이의 이름을 열거하고 위에는 공의 청덕(淸德)을 서술하고 다음에는 문중에서 그를 받들지 못했던 과오를 서술해 곧 흥인문(興仁門=동대문) 밖 고암(鼓岩) 아래에 있는 벼논 열섬지기를 마련해 바쳤더니 공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명회 이하 친척이 모두 일어나 함께 절하며 찬성하니 형세가 중지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른 것을 알고서 비로소 받았으나, 그 땅에서 나는 곡식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편안하게 했으므로 마을 이름을 ‘안암(安岩)’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젊어서 집현전에 있을 때 동료들이 서로 말하기를, “성인(聖人)을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으나, 한공과 같은 이가 거의 가깝지 않겠는가?”했다. 집현전에 있는 동안 동료들이 매우 경외(敬畏), 온 좌중이 웃으며 농지거리를 한창 하다가도 공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보면 곧 조용히 하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세조가 등용해 이조판서를 삼으니, 인물을 뽑는 것이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한 데에서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시비를 걸지 못했다. 세조가 일찍이 신하들을 평해 말하기를, “내게 제일의 신하 셋이 있는데, 한계희(韓繼禧)는 미묘(微妙)함이 제일이고, 노사신(盧思愼)은 활달(豁達)함이 제일이고, 강희맹은 강명(剛明)함이 제일이다.”했다. 한계희를 대우하는 것이 매우 친닐(親?)하더라도 항상 벼슬을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그가 추천한 자가 서로 이어서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이르기까지 했는데, 반드시 말하기를, “서평(西平)이 있는데 우리가 자리를 차지했으니,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했다. 한계희는 성격이 또한 청렴하고 검소해 산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일찍이 아내를 여의고 홀로 살아 자녀가 여럿이 있는데도 혼수를 제대로 장만하지 못할 정도여서 세조가 서거에 임박해 정희 왕후(貞熹王后)에게 부탁해 자부의 장구(粧具)를 갖추어 내려 주었으니, 그가 임금의 대우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성종이 즉위한 후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고 세종대왕의 영릉(英陵) 보호사찰로 신륵사(神勒寺)를 중창해 보은사(報恩寺)로 개명하는 데 도제조로 참여하고, <경국대전> 찬술, <의방유취(醫方類聚)> 30질(帙)의 활자본 간행을 주관했다. 1470년 <낙산사기(落山寺記)>를 지었으며 이후 간경사업의 중심이 돼 <능엄경(楞嚴經)>, <법화경 육조해(法華經 六祖解)>, <금강경 삼가해(金剛經 三家解)> 등 불경의 간행과 보급에 진력했는데, 세상을 떠난 후에 사신(史臣)의 비판을 받았으니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불교를 비난하고 억제하는 풍조에 연유한 것이었다.

 

 # 극구 사양하다 받은 태실 옆 사패지

성종은 공의 청백리 지정을 권유했으나 받지 않았으며, 공에게 사패지를 내리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고 서평군의 봉작도 사양했으나 가납(可納)되지 않았다. 성종의 끈질긴 사패지 하문으로 말년에서야 굳이 묻힐 자리를 주신다면 대왕의 태실 옆 한 자리를 주심이 어떻겠느냐고 말하니 성종은 쾌히 응낙하고 태실을 광주군 태전리로 옮기고 율리(栗里 : 현 성남시 율동) 일대를 사패지로 내려주어 현재의 자리에 묻힐 수 있었다. 성종 10년 의정부 좌찬성이 돼 성종이 선정치민(善政治民)하는 데 정치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평생에 병이 많아서 휴가를 내려 준 것이 반을 차지했으므로, 마침내 태석(台席=재상의 지위)에 오르지 못해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성종 13년(1482) 윤 8월 19일 향년 60세로 졸하니 조회를 사흘간 폐하고 극진한 예우로 장사토록 하고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시 문정공(贈 大匡補國 崇錄大夫 議政府 領議政 諡 文靖公)의 시호를 내렸다.


한계희는 타고난 품성이 분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온 집안이 초라했으며, 좌우에는 도서뿐이었다. 검소하고 간결하며, 겉으로는 온화하고 속으로는 꿋꿋했다. 비록 처자를 대할 적에도 게으른 용모를 보이지 않았고, 일을 당해 매우 급한 경우라도 말을 빨리 하고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여러 임금을 모시면서 총우(寵遇)를 받았어도 삼가고 조심해 과실이 없었고, 임금의 물음이 있을 때마다 경서를 인용하고 고사에 의거, 구차하게 임금의 뜻에 맞게 처신하지 않았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17편에서는 ‘문화유적지 율동공원의 역사’에 대해 소개합니다.>

 

 

[성남사람들(3)-문정공 한계희]

 

한계희(韓繼禧, 1423~1482)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순(子順),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몸을 삼가서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의 손자이고 함길도 관찰출척사(咸吉道 觀察黜陟使)를 지낸 청산군 혜(淸山君 惠)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 창녕성씨는 동지중추부사 성달생(시호 양혜공)의 따님인데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의 친 고모다.

 

세종 2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보임되었다 집현전 정자로 옮겼고, 세종이 장서각을 짓고 수만권의 책을 비치하였는데 그 많은 책을 다 읽고 머릿속에 넣고 다녀서 당태종의 비서 우세남과 같다고 하여 세남비서, 해동비서라는 별칭이 주어졌으며, 조선에서는 걸어다니는 비서라 불렸다.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 문종에게 아뢰기를 "한계희를 중히 쓰십시오. 그는 학문이 당대에 최고일 뿐만 아니라 몸을 낮출 줄 아는 현달한 문사입니다."라고 추천할 정도였고, 집현전 최장수 학자인데 집현전 학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평가하였다는 것이 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6대 임금을 섬기면서 경국대전, 잠서언해, 의방유취, 주역언해 등 수많은 경전을 언해하여 한글 보급에 최고 공로자로 평가 된다.

세 차례에 걸쳐 공신록에 녹권되어 서평군으로 봉군되었고 덕종, 예종과 성종의 세자사부로서 선정, 치민 왕도의 치법과 강병부국의 기틀과 학문을 숭상하는 사회풍조를 이끌었으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항상 근검하기로 소문이 났다.

 

한계희는 봉록으로 받는 수입으로 종족 중에 외로운 자와 홀어미 된 이들을 돌봐 주었으므로 몹시 가난해 아침저녁을 거친 음식으로 때웠으며 늙어서 더욱 가난이 심했다. 형 계미가 민망히 여겨 때로 구휼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어느 날 한명회의 집에서 문회(門會)를 열었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서평이 나이가 이미 들었는데도 생활이 너무 검소하고 차림새가 초라해 보기 민망하니 어찌 조처할 방법을 생각지 않으리오.”했더니, 명회가 말하기를, “이건 나의 책임이오.”하고는 곧 지필을 가져다가 문권 한 부를 작성하되 친족으로 그 자리에 있던 이의 이름을 열거하고 위에는 공의 청덕(淸德)을 서술하고 다음에는 문중에서 그를 받들지 못했던 과오를 서술해 곧 흥인문(興仁門=동대문) 밖 고암(鼓岩) 아래에 있는 벼논 열섬지기를 마련해 바쳤더니 공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명회 이하 친척이 모두 일어나 함께 절하며 찬성하니 형세가 중지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른 것을 알고서 비로소 받았으나, 그 땅에서 나는 곡식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편안하게 했으므로 마을 이름을 ‘안암(安岩)’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 극구 사양하다 받은 태실 옆 사패지

성종은 공의 청백리 지정을 권유했으나 받지 않았으며, 공에게 사패지를 내리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고 서평군의 봉작도 사양했으나 가납(可納)되지 않았다. 성종의 끈질긴 사패지 하문으로 말년에서야 굳이 묻힐 자리를 주신다면 대왕의 태실 옆 한 자리를 주심이 어떻겠느냐고 말하니 성종은 쾌히 응낙하고 태실을 광주군 태전리로 옮기고 율리(栗里 : 현 성남시 율동) 일대를 사패지로 내려주어 현재의 자리에 묻힐 수 있었다. 성종 10년 의정부 좌찬성이 돼 성종이 선정치민(善政治民)하는 데 정치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평생에 병이 많아서 휴가를 내려 준 것이 반을 차지했으므로, 마침내 태석(台席=재상의 지위)에 오르지 못해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성종 13년(1482) 윤 8월 19일 향년 60세로 졸하니 조회를 사흘간 폐하고 극진한 예우로 장사토록 하고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시 문정공(贈 大匡補國 崇錄大夫 議政府 領議政 諡 文靖公)의 시호를 내렸다.

 

신도비는 달성군 서거정이 비문을 짓고 당대 명필인 안 침이 썼다. 신도비는 큰 아들 '한사문'의 신도비와 막내 아들 '한사개'의 묘비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84호로 지정되었는데...'사개'의 묘비는 운문속에 '전일(前日)후월(後月)'의 특이한 형태이다...묘소 입구에는 사당인 문정사와 재실인 영모재가 있다.

 

♣이규태가 청백의 증발시대라는 기고문에서 아침은 서숙(粟)밥으로 하고 점심은 황경나무 껍질을 시는 것으로 대체하고 저녁은 서숙(粟)죽으로 영면한 청빈의 표상으로 정리하였다...^-^

 

빈둥- 2013년 12월14일 토요일...수산나 -

 

 

 

 

율동공원 1

 

 

율동공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