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사람들]-둔촌 이집과 한산이시 묘역
오늘 매주 목요일 참석하는 서현문화의 집-성남학아카데미 강의를 들었다...^-^
한춘섭 성남문화원장이 강의하는 '성남사람들(2)' 이다...^-^
성남인물지에 830명의 성남사람들이 수록되어 있고...이 중 추앙 받을 분이 10명인데...오늘 6분을 강의한다고 하셨다...^-^
6분에 대한 소제목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큰 어른 둔촌 이집
2. 한산이씨의 성남 세거와 중앙공원
3. 문정공 한계희와 율동
4. 백헌 이경석 정치가 행적
5. 전주 이씨 '이수'의 인품
6. 풍상군 이종린(왕손의 덕행 품계)
문정공 '한계희'님을 빼면 모두 이씨 이다...헷(?)갈리기 쉬우므로 보다 잘~ 기억하기 위해 정리하고자 한다...ㅎㅎ...^-^
1. 큰 어른 둔촌 이집(1327~1387)은 '광주이씨' 이고...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과 교유하며... 고려말에 살았던 분으로 조선이 건국(1392) 하기 전인 1387년에 별세하신 분이다...둔촌은 곧고 지절이 있는 선비로, 효자이며, 신의를 지키는 의리있는 인물의 표상이다...^-^
고려 말 '신돈'의 독재권력을 강력하게 비판하여 목숨이 위태롭게 되어 피신생활을 하는 중의 에피소드(?)가 많다...ㅎㅎ...^-^
둔촌이 부친과 땅굴을 파고 1년간 살았던 곳이 현재의 송파구 '둔촌동' 이고...
경북 영천에 있는 친구 '최원도'의 집에 부친과 함께 아무도 모르게 피신하였다가...계집종 연아에게 들키고 말았는데...그녀는 자살을 택하여 비밀을 지켰다고 한다.
부친은 피신 중에 친구 '최원도'의 집에서 별세하므로...묘자리를 경북 영천에 쓰게 되었는데...6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음력 10월10일 두 가문이 함께 묘제를 지낸다고 한다...^-^
둔촌은 효자로 유명한데...그에 관한 전설이 남한산성의 '국청사' 우물이라고 한다...등창을 앓는 부친을 위해 국청사에서 백일기도를 하는 마지막 날에 샘물이 흐르는 곳을 보니 금붕어가 있어서 집에 가지고 와서 기르게 되었는데...부친이 밤에 잠을 자던 중 목이 말라 금붕어가 들어있는 물을 마시게 되었는데...아침에 부친이 종기가 확~ 터지고 시원해지면서 등창이 나았다고 한다...그 후로 병이 낳는 샘물로 알려진 것이 국청사 우물이다...^-^
현종 10년(1669)에 광주 암사동에 '구암서원'을 세우고 춘추로 제향을 모셨고...숙종 때 '구암서원'이라는 현판이 하사되었지만...현재는 폐지된 서원이고 복원이 되지 않았다...^-^
성남시 하대원동에 둔촌의 묘와 사당이 있고...상대원동의 '공단대로'를 6년전에 '둔촌대로'로 변경하였다...둔촌의 모친 묘는 하남에 있고...
탄천 '이지직'은 둔촌의 장남인데...세종 때 '청백리'에 뽑혔으며...단대소공원에 묘가 있다고 한다...^-^
2. 한산이씨의 성남세거와 중앙공원
목은 이색의 한산이씨 가문은 고려 말까지 충남 서천 한산의 향리로서 대대로 호장을 이어온 토성이다...^-^
중앙공원에 있는 한산 이씨 묘역은 토정 이지함의 조부인 이장윤 등의 묘가를 비롯해 정남향과 남서향으로 이씨 종친회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수내동 가옥도 바로 이 공원 안에 있다....^-^
토정 이지함의 가계는 이색의 3자 이종선의 셋째 아들인 이계전을 파조로 하는 문열공파에 속한다...즉 토정은 이곡-이색-이종선-이계전으로 이어지는 이색의 7세손이다...한편 이종선의 장자 이계주(李季疇)의 아들이 사육신으로 유명한 이개(李塏)이다. 이계전과 이개는 숙질 간으로 정치적인 운명을 달리하여 이계전은 세조를 도와 공신이 되고 조카인 이개는 사육신으로 멸문지화를 당한다....ㅠㅠ...^-^
이계전은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의 정난공신 1등에 오르고, 다시 세조 즉위에도 공을 세워 좌익공신 2등에 오른다....^-^
세조공신이었던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이 대사성 '이우'이고...'이우'의 장남 '이장윤'이 별세하자...손자 토정 이지함이 영장산에 묘를 쓰고 후손이 세거하여 한산 이씨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중앙공원 내에 있는 한산이씨 묘역일대가 경기도 지정 지방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되어있고, 한원군(韓原君) 이장윤(李長潤), 그의 아들 한성군(韓城君) 이질(李秩)과 그의 손자 한평군(韓平君) 이지숙(李之菽) 등 3인의 유사(遺事)를 적은「삼세유사비(三世遺事碑)」가 세워 전해지고 있다.
정조 20년 청백리로 녹선된 이병태(1688~1733)는 목은 이색의 12대손으로 숙종~영조 때 사람이다...수내동이라는 이름은 이병태가 벼슬을 물러나 이 일대에 숲을 가꾸면서 붙은 지명이라고 한다...이병태는 영조 때 1730년 경상도 관찰사를 배수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을 사양하였다. 이듬해 승지로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퇴하였다. 이 일로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군수로 좌천되었다. 합천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합천의 군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봄과 가을에 제향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나 관직을 떠나서나 항상 강직 결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아 청백리(淸白吏)에 뽑히기도 하였다. 너무 가난하였기에 임종한 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영조에게 굶어 죽었다고 아뢸 정도였다. 또한 죽은 뒤에도 장례치를 비용이 없어 감사 한지(韓祉)가 왕에게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부의를 요청하기도 하였다....시호는 '문청'...중앙공원 내에 묘소가 있다...^-^
중앙공원에는 약 26명의 한산이씨 묘역이 조성되어있다고 하는데...알려고 하니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피곤하므로...다음에 도전해야겠다...ㅎㅎㅎ...^-^
이색의 장자 이계주의 아들 '이개'는 사육신으로 멸문지화 당하고...삼자 이계전은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 1등...좌익공신 2등에 오르고...숙질간에 극과극을 다루는 이야기에 심취...^-^
이계전의 아들이 '이우'...'이우'의 장남이 '이장윤'...이장윤의 손자가 토정 이지함...토정은 이색의 7대손...ㅎㅎ...^-^
토정 이지함의 조카(형 이지번의 아들)가 선조 대... 대북의 영수 이산해. 이산보...ㅎㅎ...^-^
토정의 할아버지 이장윤의 묘를 영장산 현 중앙공원에 쓰고 후손이 세거하기 시작하면서 한산이씨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한참 내려가 이색의 12대손 '이병태'가 정조 20년에 청백리로 뽑혔는데...숙종~영조 때 사람인데...사후 '청백리'로 선정된 것이다...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고...이후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아 경상도 관찰사 부임 사양, 승지 부임 사양으로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군수로 좌천되었다는 스토리...그러나 선정을 베풀어 합천군민이 생사당을 세워 춘추에 제향한다는 반전 스토리...ㅎㅎ...^-^
공부하느라 머리에서 쥐가 나는 듯 하다...ㅎㅎ...^-^
- 2013년 12월12일 목요일...수산나 -
분당 중앙공원..한산이씨묘역과 사당 '숭모재'
[토정 이지함과 중앙공원 한산이씨 묘역]
한산 이씨는 이색의 손자대에 13개파로 분파하는데, 이 가운데 토정의 가계는 이색의 3자 이종선의 셋째 아들인 이계전(李季甸)을 파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에 속한다. 한편 이종선의 장자 이계주(李季疇)의 아들이 사육신으로 유명한 이개(李塏)이다. 이계전과 이개는 숙질 간으로 정치적인 운명을 달리하여 이계전은 세조를 도와 공신이 되고 조카인 이개는 사육신으로 멸문지화를 당한다.
토정은 이곡-이색-이종선-이계전으로 이어지는 이색의 7세손이다. 토정의 형인 성암 이지번(省菴 李之蕃·1508~1575)의 아들이 선조대 대북파의 영수였던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1538~1609)이다.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은 바로 이산해의 사위로, 이산해의 직계는 이산해-이경전-이구로 이어지면서 모두 문과 급제했다. 이후 19세기 말 고종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순국의사로 유명한 수당 이남규(李南珪·1855~1907)로 이어지면서 13대 동안 문과 급제자 7인, 사마시 입격자 12인을 배출하면서 기호남인의 명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한편 형과 달리 토정의 자녀는 장자가 요절하고, 이후 세 아들인 산두는 벼슬이 없었고, 산후는 요절하고, 산룡은 후손이 없는 무후였다.
토정은 스승인 화담 서경덕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화담 서경덕(1489~1546)의 학풍은 북송대 장재와 소옹의 성리학풍을 수용하고 역학의 상수학(象數學)을 강조한 것으로 토정비결은 주역에 바탕한 상수학의 성과가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실천을 강조하며 절충적이고 개방적인 학문을 지향하였다.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국부의 증대와 민생의 실리를 중시했는데, 그 실천적인 인물이 바로 토정이었다. 토정은 서울 마포 강변 흙집에서 정자를 짓고, 스스로를‘토정’이라 하고,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한 삶을 개선하려고 상공업이나 수공업 등을 중시한 인물이다. 백성이 모두 잘 사는 사회를 염원했던 토정의 마음처럼 올해 정치인들의 토정비결 신수괘가 모든 국민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메시지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이장윤(李長潤)
●생몰 연대1455년(세조1)~1528(중종22)
●활동 분야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한산(韓山)
●자 수연(晬然)
●호
이색(李穡)의 4세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를 역임하고 세조공신이었던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이다. 문과를 거쳐 대사성을 역임한 이우(李堣)의 장남이다. 부인은 숙인(淑人) 고령박씨(高靈朴氏)로 현감을 역임한 박인효(朴仁孝)의 딸인데, 판서 박만(朴蔓)의 증손녀이다. 네 아들 중 장자는 한성군(韓城君) 이질(李秩)이요, 다음은 현령(縣令) 이치(李穉), 그다음은 현감(縣監) 이온(李穩), 부호군(副護軍) 이정(李程)이다. 손자는 이지함(李之菡)으로, 세상에서 토정선생(土亭先生)이라 일컬었고, 증손은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산보(李山甫)이다.
성종(成宗)20년(1469) 5월 18일 공신(功臣)의 적장자(嫡長子)들을 서용(敍用)하라는 명(命)이 있었는데 14명의 적장자명단(嫡長子名單)속에 이장윤(李長潤)도 포함(包含)되어 있었다. 이로 인한 음보(蔭補)로 서사(筮仕)로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가 되었다. 성종(成宗)23년 7월 26일에늠 정3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인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충청도 이산(尼山), 노성(魯城)과 경상도 봉화현감(奉化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지 의금부사(知 義禁府事)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에 증직되고, 한원군(韓原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분당 수내동(수내동 1-2번지) 중앙공원내 한산이씨 묘역 내에 정부인(貞夫人) 고령박씨(高靈朴氏)와 간좌(艮坐)에 합폄(合窆)이다.
중앙공원 내에 있는 한산이씨 묘역일대가 경기도 지정 지방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되어있고, 그의 아들 한성군(韓城君) 이질(李秩)과 그의 손자 한평군(韓平君) 이지숙(李之菽) 등 3인의 유사(遺事)를 적은「삼세유사비(三世遺事碑)」가 세워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 『경기문화재대관』
• 『분당지구 문화유적 종합학술조사보고서』
• 『경기금석대관(京畿金石大觀』
• 성남문화원『성남문화연구(城南文化硏究) 1』성남문화원, 1994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 성남시사편찬위원회.『성남시사』.2004
• 한국학중앙연구원『디지털성남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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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년(영조 3) 예조참의와 호조참의를 거쳤고, 1730년 경상도 관찰사를 배수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을 사양하였다. 이듬해 승지로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퇴하였다. 이 일로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군수로 좌천되었다. 합천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합천의 군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봄과 가을에 제향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나 관직을 떠나서나 항상 강직 결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아 청백리(淸白吏)에 뽑히기도 하였다. 너무 가난하였기에 임종한 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영조에게 굶어 죽었다고 아뢸 정도였다. 또한 죽은 뒤에도 장례치를 비용이 없어 감사 한지(韓祉)가 왕에게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부의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중앙공원 한산이씨 묘역 Life
2004/09/20 22:35
http://blog.naver.com/patra5/5937638
분당의 중앙공원은 원래 조선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 조성된 한산이씨 세장산 묘역이다. 고려말 성리학의 태두 목은 이색의 후손들 묘역인 이 곳은 그 옛날 나라에서 공신에게 내린 사패지이다.
워낙 막강한 집안이라서 이들 묘를 이장하게 하고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타협책으로 신도시를 건설하되 이 묘역은 공원으로 개발하기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앙공원 내에 있는 한산이씨 묘역은 경기도 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장산 줄기 이진봉 내룡의 중앙인 정남향 묘역에는 토정 이지함의 조부로 봉화현감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한원군 이장윤을 비롯한 한성군 이질, 부호군 이정, 한평군 이지숙, 주사직 이지환, 아천부원군 이증, 황해도관찰사 이집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동남향에는 이증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상주 전투에서 순절한 충신 이경류와 증정부인 횡성조씨의 묘 및 이경류의 애마총이 있다.
동북향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백리로 녹선된 문청공 이병태의 묘와 삼품산소가 있는데, 이 삼품산소는 이협의 묘를 중심으로 삼대묘가 품(品)자형으로 배열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서쪽에는 종친부전부 이원, 부평부사 이오 및 처사 이한, 호조정랑 이병건, 군자감정 이산중의 묘가 있다.
남서향으로는 이장윤, 이질, 이지숙 삼대의 유사를 기록한 한산이씨 삼세유사비를 비롯하여 이증 신도비, 이경류 정려비, 이정룡 신도비가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다.
이밖에도 묘역 내에는 한산 이씨 세장산비가 동, 서, 남, 북쪽 산자락에 세워져 있었는데, 현재는 팔각정 하단의 등산로변으로 옮겨져 있으며, 한산이씨 묘산입수비는 사면비라고도 하는데, 묘역의 사방에 각각 4기가 서 있다.
원래 수내동 일원의 임야와 전답, 주거지 등은 대부분이 한산이씨 문중 소유였는데, 신도시 개발계획에 따라 수용되어 세장산 묘역은 문화재 보존지역으로 한산이씨 수내동 가옥은 조선시대 고가로 경기도 문화재 자료 78호로 지정되어 경기지역 살림집의 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밖의 임야와 주거지는 시민 휴식공원과 공연장 등 문화감상 공간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묘역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이색의 4대손인 이장윤과 그 후손이 묻힌 한산이씨 묘역으로써 너멋말이란 한산이씨 집성촌의 뒷산이었던 영장산 일대에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임금이 신하또는 종친에게 내리는 사패지 이다. 이증은 정여립의 모반을 다스려 공을 세웠고 좌잠찬에 이으렀으며, 이경류는 임진왜란때 상주전투에서 순결하였고 사망후에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묘는 주로 부인과 합장되어 있고 조선조 삼학사중의 한사람인 홍익한의 아들 홍수원의 묘가 부인 한산씨와 합장되어 있고 이 경류의 애마 무덤이 함께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묘역은 16세기 초부터 18세기 초까지 오랜기간동안 조성되어 왔기 때문에 묘제 및 석물 양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의미있는 곳이다.
문 화 재 명- 한산이씨묘역
지 정 번 호 -경기도기념물 제116호
소 재 지-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1-2
지정년월일 -1989. 12. 29
보 호 구 역 - 11,630㎡
규 모(격)- 일원
소 유 자 - 한산이씨 한평군파종회
관 리 자- 한산이씨 한평군파종회
명예관리인- 이승대
자매결연단체- 내정동 부녀회
이 묘역은 고려말 성리학의 거두 목은 이색의 후손인 한산이씨묘역으로 조선중기 부터 후기까지 조성되었다.
묘역은 영장산일대에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사패지 로서 동,서,북쪽에 한산이씨 묘역을 알리는 표석이 건립되어 있었으나, 그중 2기는 중앙공원내로 이전되었다.
정남향 묘역에는 토정 이지함의 조부로 봉화현감을 지낸 한원군 이장윤의묘를 비롯한 한성군 이질, 한평군 이지숙, 아천군 이증의 묘가 위치해 있고, 동남향에는 아천군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 이경류와 정부인 횡성조씨, 이경류의 애마총 그리고 김제군수 이정용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또 남서향으로는 이장윤, 이질, 이지숙의 유사를 기록한 한산이씨삼세이하유사비를 비롯하여 이증신도비, 이정용신도비, 이경류정려비가 위치해 있다. 삼세이하유사비는 1722년(정종 2)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후손 이병연이 지었고, 규모는 80 * 26 * 198cm이다. 이증은 자는 가겸, 호는 북애로 1589년(선조 22) 대사간으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다스려 평난공신 3등에 올랐고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신도비는 1695년(숙종 21)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이진휴 가 썼으며 윤덕준이 전액을 하였으며 규모는 83 * 38 * 218cm이다. 이경류는 자는 장원 호는 반금으로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정려비는 1727년(영조 3) 건립되었다.
규모는 정려현액이 72 * 46 * 9cm이고 비신은 34 * 34 * 176cm이다. 이정룡은 자가 몽향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신도비는 1728년(영조 4) 건립되었는데 이의현이 짓고 전진상이 썼으며 홍현보가 전액을 하였고 규모는 87*31*213cm이다.
(14)분당 중앙공원의 충신과 청백리-한산 이씨(韓山 李氏) |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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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성곽 자체로도 완벽한 호국의 성지지만, 산성을 둘러싼 주변 마을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역사를 발전시켜 오늘의 번성한 시대를 이뤘다. 산성 주변의 성남, 하남, 광주 일대와 서울의 한강 남쪽 일대는 조선시대에 대규모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실시된 강무(講武)와 국왕의 수렵(狩獵)이 빈번하게 열린 지역이다. 성남의 창곡동이나 하남의 상사창, 하사창, 창우리 등의 지명이 남한산성에서 필요한 물자의 창고가 있었던 사연이 있고, 공군비행장(서울공항)이 있는 지역은 군용 농장인 둔전(屯田)과 탄천목장이 있었다. 그리고 탄천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13만의 대군이 주둔해 조선정부를 압박했고, 탄천 상류 험천에서는 충청감사 정세규가 근왕병을 이끌고 와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 분당 중앙공원 일대는 한산 이씨 집성촌 분당의 중앙공원 일대는 고려 말 학자인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 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돼 있었으며, 250년 이상의 나이테를 가진 느티나무 보호수(지정번호 : 경기성남-10)가 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웅변해 준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8호인 수내동가옥은 조선후기에 건립된 민가의 살림집 가운데 하나다. 원래는 70호 가량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 중 한산 이씨는 30호 가량 됐다. 공원 내에는 지석묘(고인돌)군과 마을 어귀에 있던 큰 느티나무, 연못, 정자 터, 한산 이씨의 산소들이 잘 보존돼 있다.
이장윤(李長潤, 1455~1528)은 봉화현감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증직됐다. 공은 천성이 너그럽고 어질며 겸손하고 후덕해 평생에 말을 빨리 하거나 노여워하는 빛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불쌍히 여기는 일에 힘썼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체로 관리가 된 자는 그 아랫사람이 죄가 있을 때 그대로 두고 생각하면 내 노여움이 풀리는 것이니 갑자기 사람을 상하게 하는 조짐이 없게 해야 한다.”하니 사람들이 격언(格言)이라고 했다. 손자 지함(之涵)은 세상에서 토정선생이라 일컬었고, 증손은 영의정 산해(山海)요, 이조판서 산보(山甫)다. 이 질(李秩, 1473~1560)은 장윤의 첫째 아들로서 상주·울진 등 7개 군의 군수를 역임해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80세가 넘었음에도 뜻과 지혜가 명민(明敏)했으며, 필력(筆力)은 건강했지만 경제적 형편은 어려웠다. 중앙공원의 <봉화공 삼세이하 유사비>에 “제사를 지낼 때면 가난해서 제사를 잘 차리지 못했사오니, 원컨대 자손이 영화롭게 되면 근본에 보답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습니다.”라고 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증(李增, 1525~1600)은 이질의 손자며, 1580년 예조참판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9년 정여립의 난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3등이 되고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다. 예조, 형조, 공조 판서와 의정부의 좌우참찬을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전쟁에 대비하기를 주장했다. 세상을 떠난 뒤 영의정에 추증돼 영원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부조묘(不?廟)’ 사당이 건립됐고, 문집으로는 <북애시고(北崖詩稿)>가 있다. 묘표의 이수는 쌍룡이 연꽃 속 여의주를 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양각했으며, 작은 원 안에 태극문을 새겨놓았다.
이경류(李慶流, 1564~1592)는 평난공신 이증(李增)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 전투에 참전해 상주 북쪽 증연(甑淵)에서 전사했다. 왜적이 크게 집결해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 종사관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2년 후 선조임금이 도원수의 종사관 이경함에게 묻기를, “이경류가 그대의 동생인가?”하니, 경함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 싸움터에서 죽었다고 해 내가 매우 애도했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갑자기 그가 생각나는구나. 누구의 종사였으며 어디서 죽었는가?”하니, 경함이 아뢰기를, “변기(邊璣)의 종사관이었고, 영남에서 전사했습니다.”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윤섬과 박지도 모두 그때 죽었다. 그들은 평일 시종하던 신하들이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슬픔을 금할 길 없다.”했다. 특히 윤섬, 박지, 이경류 ‘3종사(從事)’는 문관으로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주된 임무가 아니었고, 더구나 이경류는 형을 대신해 자원해서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청백리 이병태(李秉泰 ; 1688~1733)의 자는 유안(幼安). 진사 협(浹)의 아들이다. 언관으로서 직무에 충실하여 영조임금이 호랑이 가죽을 내려 주기도 했다. 1727년(영조 3)에 호조참의로 있을 때, 탕평책(蕩平策)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려 파직당했다. 그 이후로는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아 1730년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을 사양해 그해 6월 특별히 그 직은 파해 주었다. 이듬해 승지로 임명됐으나 다시 사퇴하고자 하므로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군수로 좌천됐다. 합천에 부임해 선정을 베풀어 합천의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춘추로 제향했다. 관직에 있을 때나 관직을 떠나서나 항상 강직 결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으니 정조 20년 청백리에 녹선됐다. 몹시 가난해 사는 집은 비바람을 가릴 수도 없었고, 임종한 후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영조에게 아뢰기를, “굶어 죽었다.”고 했다. 청렴결백함이 뛰어나 숙수(菽水=콩과 물, 변변하지 못한 음식)를 이어대지 못했는데도 그의 지조는 변하지 않았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살아서는 청백(淸白)한 지조가 있었고 죽어서는 시체를 염(殮)할 기구가 없었으며, 또 늙은 어미가 굶주림을 면치 못한다.”고 아뢰어, 고(故) 감사 한 지(韓祉)의 전례에 따라 그 어미를 보살펴 주기를 청하자, 임금이 애석하게 여기며 한참 있다가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고 증직하며 장례를 치르게 하라 명했다.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하고 문청(文淸)이란 시호를 내렸다.
홍수원(洪?元·1611~163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서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창하다 중국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삼학사의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1586~1637)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악성종기로 병을 앓아 매우 위태로울 때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대변을 받아내는 등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다. 홍수원의 묘역이 한산 이씨 묘역에 있는 것은 부인이 이확의 딸인 것에 기인한다. 한편 묘소와는 별도로 그의 묘표가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에 아버지 홍익한의 묘석과 함께 보존돼 있는데, 묘표가 이렇게 평택시에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알 수 없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15편에서는 ‘늘푸른 소나무/송산 조견 선생’에 대해 소개됩니다.> |
이지직(李之直.1354.공민왕 3~1419.세종 1)
고려 말과 조선 초 성남 지역 출신의 문신·유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평(伯平), 호는 탄천(炭川)이다. 이당(李唐)의 손자이며,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둔촌 이집(李集)의 아들이다.
1380년(우와 6) 문과에 전구서승(典廐署丞)으로 2등으로 급제하여 한림원학사에 제수되고, 경승부소감으로 옮겼다가 평창·충주·청주의 현령을 차례로 역임한 후 강원도관찰사와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1398년(태조 7) 보문각직제학 재임 시 소도의 변란이 있자, 이를 극렬히 간하다 화를 입었다.
이때 태종 이방원과 변춘정(卞春亭)이 그를 강력히 변호하여 금고(禁錮)의 처벌만 받게 되었다. 이후 광주(廣州)의 탄천(炭川)에 은거하며 독서를 일삼았는데, 배우러 오는 사람이 모두 ‘탄천선생’이라 하였다. 1419년(세종 1) 태종의 유명에 따라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이지직의 묘는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3-1에 있다.
세종 때 청백리에 녹선 되고, 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운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지직 묘소】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태조사 부근의 이극돈 묘역 왼쪽의 나지막한 능선에 남향(南向)하여 있다. 방형(方形)의 봉분은 뒷면에 두 단의 높은 토축활개를 마련하였다. 봉분의 앞면 하단에는 높이 34㎝, 너비 190㎝의 장대석 두 매로 호석을 두르고 았다. 봉분의 크기는 높이 130㎝, 전후 3.8m, 좌우 5.4m이다. 또한 지직의 묘역 바로 위에는 배정경부인경주이씨(配貞敬夫人慶州李氏)의 묘가 있다.
묘소에는 봉분 중앙에 혼유석, 상석, 장명등, 사각 향로석과 상석 좌우로 묘표, 팔각 망주석, 복두의 문인석을 한 쌍씩 배치하였다. 또한 차양석을 계체석 상하로 두 개씩 배치하였다. 옛 석물은 봉분 우측의 묘표와 문인석뿐이다. 문인석은 좌우가 높이 155㎝에 얼굴 부분 42㎝의 소형이며, 복두(幞頭)로 통비형에 눈, 코, 입 등은 마모되었고 눈을 치켜 뜨고 있다. 기타 의문표시는 희미하다. 이극돈 묘역의 문인석과 마찬가지로 턱에 턱수염의 표현이 있다.
묘표는 봉분 좌우측에 각 1기씩 세워져 있다. 오른쪽의 원래 묘표는 백색화강암제의 비좌와 비신의 월두형이다. 비신의 비문은 전·후 양 면에 있으며, 앞면에는 세로 세 줄로 ‘贈議政府領議政行刑曺右參議寶文閣直提學李公諱之直之墓 貞敬夫人慶州李氏之墓’(증의정부영의정행형조우참의보문각직제학이공휘지직지묘 정경부인경주이씨지묘)의 비문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墓碣上下而上是夫人墓玄乙未十月立’(묘갈상하이상시부인묘현을미십월립)의 비문이 있다. 건립연대는 1653년(효종 4)이다.
봉분 좌측의 묘표는 백색화강암제의 비좌와 오석의 비신 및 운학문(雲鶴紋)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신의 비문은 전·후·좌(前·後·左) 3면에 있으며, 앞면에는 세로 세 줄로 ‘贈議政府領議政行刑曹右參議寶文閣直提學廣州李公直之墓 貞敬夫人慶州李氏墓 在上’(증의정부영의정행형조우참의보문각직제학광주이공직지묘 정경부인경주이씨묘 재상)의 비문이 있다. 비문은 20대손 이채진(李埰鎭)이 서하였다. 후면의 음기는 10대손 通訓大夫行禮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休徵(통훈대부행례조정랑겸춘추관기주관 휴징) 이 찬하였으며, 건립연대는 1984년이다.
(성남시 이지직 묘)
(성남시 이지직 묘)
[출처] 조선 초 유학자 이지직(李之直)|작성자 재봉틀
이지직의 할아버지인 이당(李唐)이 국자감(國子監) 생원이 된 후 광주(廣州)이씨 가문은 급속히 번창했다. 광주의 아전으로 있던 이당이 가문을 일으키게 된 과정은 설화로 전해 내려온다.
즉 고려 말에 광주고을의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걸터앉아 있었다.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아전인 이당이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있던 터라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원님은 벙어리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였다.
고을 원님의 사위가 된 이당은 슬하에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그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 이집 선생으로 고려 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 이집은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몽주 등과 깊이 사귀었는데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을 논박하였다가 포살령을 받고 친구 최원도가 있는 영천으로 피신하였다.
같은 시기에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최원도는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낙향 하여 영천에 살고 있었다. 이집은 늙은 아버지 이당을 업고 영천까지 가서 최원도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3년 동안 숨어 살던 이집은 신돈이 죽은 후 다시 광주로 돌아와 살게 되었다. 하지만 연로한 아버지 이당은 영천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 묘를 쓰게 되었다. 이집이 경상도 영천에 머물렀던 것은 영천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가 증명하고 있다.
이집의 세 아들은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큰아들인 이지직(李之直)은 형조참의를 지냈고 태종 때 청백리에 선정되었으며, 둘째 이지강(李之剛)은 좌참찬을, 셋째 이지유(李之柔)는 사간을 지냈다. 또 이지직의 아들 이장손(李長孫)은 사인(舍人)을 지냈고, 이인손(李仁孫)은 세조 때 우의정에 이르고, 이예손(李禮孫)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그 중 이인손의 다섯 아들이 조정에 중용되었는데, 큰아들 이극배는 영의정과 광릉부원군에, 둘째 이극감은 형조판서 광성군에, 셋째 이극중은 광천군에, 넷째 이극돈은 이조판서 광원군에, 다섯째 이극균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세계일보 20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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