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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성남사람들(4)-백헌 이경석(인조의 3배9고두/치욕의 삼전도비/신도비의 기구한 사연)(2013.12.14.토)

 

조선의 인조가 오랑캐 청에 치욕의 항복을 하다.

한강이야기 2013/07/15 19:26 Posted by 조영희

 

 

정묘년 (1637) 1월 30일
한강가 삼전도 모래벌판엔 강한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삼전도 모래벌판에 마련된 수항단(受降壇)아래서는
조선 왕 인조가 항복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청나라의 왕 홍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화도에서 포로로 잡혀온 세자를 비롯한 중전과
세자빈등도 인조와 함께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통곡을 하고 있었다.
도성을 출발하였다는 홍타시는
한나절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부복하라! 황제 폐하 드신다."
이윽고 청나라 홍타시가 나타났다.
인조는 길라잡의 외침에 따라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대신들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곳저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홍람백황의 깃발이 나부끼며
대오를 맞춘 청나라 기병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일정한 소리를 내어 진군해오는
그들의 표정 속에는
 점령군의 오만함이 배어있었다.
"각군은 각자의 위치를 지켜라!"
홍타시를 호위하며 앞장 서 들어오던 마부태가 명령을 하자
홍람백황의 기병들은 대오를 벌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홍기군은 남쪽으로 남기군은 동쪽 백기군은 서쪽
그리고 황기군은 홍타시를 호위하며
북쪽에 마련된 수항단을 향해 진군했다.

수항단의 맨 위층에는 황금장막과 우산이 쳐 있었고
홍보석으로 꾸민 화려한 보좌가 남면(南面)을 한 채 한 가운데 놓여있었다.
마부태를 호위를 받은 홍타시가 홍보석의 의자에 앉자
대기하고 있던 용골대는 항복의식이 시작됨을 알렸다. 
"원래 항복 예식을 행할 때는
항자(降者)는 상복을 입고 삼껍질을 머리에 두르며
팔은 뒤로 얽어맨 채 입에는 구술을 물고
수레에 상여를 실어 죽은 형세를 하여야 한다.
하지만 황제께서는 조선의 왕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3배9고두의 간단한 예로 의식을 거행한 다음
소를 잡아 피를 내어 이를 같이 마심으로써 군신간에 맹세를 하게 하셨다."
순간 무릎을 꿇고 부복했던 백관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왔지만
이들의 소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제부터 3배9고두의 의식을 거행하겠소.
조선 왕은 앞으로 나서서 한 계단 오를 때마다 고두의 예를 행하시고
중간층에 오른 다음에는 삼 배를 올리시요."
인조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순간 수항단 꼭대기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왔다.
"조선 왕은 다시 자리에 앉으시요.
항복한 사람이 감히 불손하게 황제 앞에서 어떻게 고개를 든다 말이요."
홍타시 곁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던 마부태가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인조는 그 소리에 움찔하고는 다시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조선 왕은 고개를 숙이고 수항단의 첫 계단 앞에 서시오."
다시한번 용골대가 명령하자 곤룡포를 벗고
여진식의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인조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수항단의 첫 계단 앞에 섰다.

"고두라 함은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두 손을 땅에 대고
엉덩이를 발꿈치에 붙이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히는 인사법이오.
조선 왕은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고두를 하고 오르시오."
수항단은 세층으로 마련되었다.
그 한 층은 아홉 개의 계단 위에 마련되었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
인조가 중간에 오르기 위해서는 아홉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인조는 결국 아홉번의 고두를 해야하는 것이다.
인조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였고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땅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백관들 속에서는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나왔다.

"어서 행하지 않고 무얼 하시오."
다시한번 맨 위층에서 마부태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인조는 드디어 결심한 듯 첫 계단을 오른 다음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땅에 대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일어섰다.
"다시 하시오.
고두라 함은 머리가 땅에 완전히 닿아야 하는 것이오."
역시 마부태였다.
인조는 온갖 수치를 감내하듯 잠시 머뭇거리다
차가운 돌계단에 무릎을 뚫은 다음 두 손을 땅에 대고
이마가 땅에 닫도록 머리를 숙였다.
순간 '쿵'하는 소리가 나며
인조의 머리가 차가운 돌계단에 부딪쳤다.
한 칸을 올랐다.다시 한번 인조는 무릎을 꿇고 고두을 올렸다.
'쿵'
내린 눈이 얼어 붙어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고 단단하여
인조의 머리가 부딪치자 이마에서는
한 줄기 피가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이 광경을 목도하고 있던 태자와
대군 신하들은 통곡을 하며 몸을 떨며 슬퍼했다.
한칸 또 한칸 올라설 때마다
돌계단에 부딪친 인조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이제 그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다.
흘러 내리던 핏줄기는 눈물과 어울어져 차가운 날씨에
곧장 얼어 붙어 인조의 얼굴에 고드럼처럼 맺혔다.
마침내 아홉칸에 올라선 인조는
자신의 비참해진 몰골을 보이기 싫어
땅에 고개를 숙였다.

"조선 왕은 이제 황제 폐하께 삼배를 올리시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청나라 황제 홍타시에게 항복한다.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청나라 황제 홍타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찌는 굴욕의 항복 협정을 맺고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지금으로부터 374년 전 우리 슬픈 굴욕의 역사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치욕의 삼전도비문

한강이야기 2013/07/15 22:09 Posted by 조영희

 

 

청나라는 조선에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찬양하는'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삼전도 현장에 건립할 것을 요청한다. 문제는 비문을 찬술하는 작업이다.
비변사에서는 찬술할 인물로 이경석 장유 이경전 조희일 등 네명을 인조에 극비리에 천거한다.

인조실록은 인조15년(1637) 11월 25일 기사를 살폈다.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
서로 꺼리는 일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경전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나머지 3명이 모두 글을 지어 인조에 올린다.

인조는 이 글쓰기에 가장 싫어하였던 이경석을 조용히 불러 간곡히 부탁한다.
중국 춘추시대의 월나라 제2대 왕인 구천(句踐)이 오나라에서 치욕을 참고 신첩 노릇을 하면서
와신상담하다가 끝내 부차(夫差) 에게 당한 치욕을 갚았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상제의 법칙만이 위엄과 덕을 함께 펴도다. 황제께서 동을 정벌하시니 그 군사 10만이로다.'
그는 이런 문구로 가득찬 비문을 짓고만다.
이경석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일이며,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니 오늘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일을 더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이다"라고 하면서 인조는 간곡하게 비문의 찬술을 부탁하였다.
이경석은 자신의 명예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비문을 짖게 되었다.

 

인조실록은 인조16년 2월 8일
<장유와 이경석이 지어 청나라에 보낸 삼전도 비문>기사를 옮긴다.
장유(張維)와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청나라에 들여보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택하게 하였다.
범문정(范文程) 등이 그 글을 보고,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경석이 지은 글은 쓸 만하나 다만 중간에 첨가해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지어 쓰라고 하였다.

상이 경석에게 명하여 고치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청(大淸) 숭덕(崇德)1447) 원년1448)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 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1449)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1450) 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 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도(江都)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從官)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三田渡)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 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직 황제가 그것을 본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년토록 우리 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백헌 이경석의 신도비의 기구한 사연

한강이야기 2013/07/17 08:02 Posted by 조영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끼고 의왕으로 가는 옛길을 따라가면
청계산 자락  길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 16~18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84호 이경석선생묘를 만난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하나는 1754년에 세워진 원래의 비이다. 글자가 모두 깍여 보이지 않는다.
땅 속에 훼손당한채 300년동이나 묻혀 있던 비다.현재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후손들이 땅속에서 파내어 다시 세운 원래의 비다.원래의 비문을 다시 새겨 세운 새로운 신도비다.

 

 

원래 이경석의 신도비의 비문은 서계 박세당이 짓는다.
"노성인(老成人)의 귀중함이 이와 같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노성인을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불상(不祥)함이 막대하도다.
불상한 짓을 감히 한다면 또한 반드시 불상한 응보가 따를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도이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우암 송시열을 노성인(老成人)을 모욕한 불상한 무리로 규정한다.
당시 사림의 영수 송시열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그는 인조를 대신해서 신하로서 삼전도비문 찬술이 부득이했음을 강조하여 이경석을 두둔했다.
마지막으로 송시열에 대해 한마디 말을 더 추가했으니,
그것은 바로 은의를 저버린 배은자(背恩者)라는 표현이었다.
그는『서계집』권22, 「영의정백헌이공신도비명(領議政白獻李公神道碑銘)」)에서
결국 박세당은 이경석을 군자로 칭송한 반면 송시열을 소인(小人),
불선자(不善者)로 단정함으로서 이듬해에 큰 화를 초래하게 된다.

그는 비명(碑銘) 마지막에 송시열에게 올빼미를,
이경석에게 봉황을 비유하면서 이경석을 군자라고 칭송했다.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군자(君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  /     
나의 명문(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
노론은 박세당이 송시열을 모욕하였다며 분노하였다.
 

1703년 봄에 성균관 유생들은 박세당을 배척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유생의 배후에는 박세당을 제거하려는 김창협, 김창흡 등 노론(老論)의 핵심부가 있었다.
 그는 당시 송시열계 당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어 삭탈관직을 당하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경석의 신도비는 50여년 뒤인 영조 30년(1754)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겨우 세웠다.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쪽에서 신도비를 깍아내 훼손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신도비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경석은 집에서 효도하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일찍부터 문망(文望)을 지녔었는데 드디어 정승에 올랐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늙도록 게을러지지 않았으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마음 쓰는 것이 지나쳤고
친지나 당류를 위하여 상의 은혜를 구하되
구차한 짓도 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평하였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 9월 23일 이경석의 졸기이다.

 

 

이경석은 정종의 왕자 덕천군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동지충추부사를 지낸 이유간이다.
할아버지는 지붕유설의 저자로 유명한 지붕 이수광이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문인으로 19세에 진사가 되고
21살에 중광별시에 합격하였다.
인목대비 폐비상소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합격이 모두 취소되었다.

그는 인조반정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뛰어난 학식과 온화한 성품을 바탕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인조 19년(1641) 소현세자의 스승이 되어 심양으로 가서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서 병자호란 포로 석방에 많은 힘을 쏟았다.

잠시 귀국한 뒤 인조 20년(1642) 심양으로 돌아가다 한 사건을 만난다.
명나라의 선박이 선천에 정박하였던 사실이 청나라에 뒤늦게 알려졌다.
청나라가 나서 수사에 나섰다. 이경석이 왕을 대신해서 청나라에 설득했다.
“명나라의 잠상(潛商)이 우연히 정박한 것이다.
조선의 조정과는 무관한 일이다.”
청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경석을 만주 봉황성 등에 구금했다.
그는 8개월 만에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永不敍用)는 조건으로
겨우 석방되어 귀국했다.
 “이제 살아서 돌아오긴 하였으나 복명하지 못하며
다시 용안을 뵙는다는 것도 기약할 수 없으니,
신의 죄과가 더욱 무겁습니다. …
종이를 앞에 대하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조실록> 20년 12월17일)라는 글은 그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선조실록> 개수(改修) 작업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을 했다.
인조 23년(1645) 영불서용 조처가 풀림에 따라 이조판서로 임용되었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같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해
한때는 그들의 주인으로 불렸다.

 

 

효종 1년(1650) 산림의 공세로 권력을 빼앗긴 김자점(金自點)이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북벌 계획을 밀고했다.
청나라 사문사(査問使) 6명이 조사차 의주로 나왔다.
북벌 계획이 밝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효종이 밤새 자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대부 집안에서 이삿짐을 싸는 등 인심이 흉흉할 때 나선 인물이 이경석이었다.
이경석이 “저들이 만일 무리한 일로 힐책할 경우 신이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몸 하나를 아끼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효종은
“경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간절하다 할 만하다”
(<효종실록> 1년 2월8일)라고 칭찬했다. 

 


청천강을 건너며 지은 그의 시다.
  “한밤에 충신한 마음으로 강을 건너니/
이 마음 오직 귀신만 알 뿐이로다”(半夜直將忠信涉/ 此心惟有鬼神知)
 청나라 사신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이경석을 ‘대국을 속인 죄’로
몰아 극형에 처하려 했다. 효종이 그의 구명을 간청하며 막대한 뇌물을
전달한 덕분에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의주의 백마산성에 갇혀 앞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이경석은 다시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투옥 1년 만에 석방되었다.
귀국길에 사민(士民)들이 길가에 몰려들어 환호했다는 데서 그의 신망을 알 수 있다.

귀국 뒤 이경석은 광주(廣州)에 은거하고 금강산 유람을 하는 등
정사에서는 한발 떨어져 지냈으나 효종이 자문하면 정성껏 도왔다.
효종 6년(1655) 청나라 사신이 이경석이 서울에 있는 것을 질책함에 따라
아들의 임지인 안협(安峽)으로 피했다가 철원으로 이주하는 등 다시 시골을 전전했으나
효종은 그의 건의는 무조건 들어줄 정도로 그를 높였다.

74살이었던 현종 9년(1668)에는 궤장잔치가 내려졌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이후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듬해 현종은 온양 온천에 거동하면서 이경석을 유도(留都)대신으로 삼았다.
국왕이 없는 서울을 맡길 정도로 신임한다는 뜻이었다.
이때 온양 행궁에 있는 현종에게 올린 상소가 뜻밖에도 송시열과 분쟁이 되면서
그는 시비에 휩싸인다.
“지난날 조정에는 급히 물러나려는 신하들이 이어지더니,
오늘날 행궁에는 달려가 문안한 신하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군부가 병이 있어 궁을 떠나 멀리 초야에 있으면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었거나 먼 곳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된 것입니다.”(<현종실록> 10년 4월3일)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아녀자들을 데려오려면 속환이라 하여 돈을 치러야 했다.
이 또한 돌아온 아녀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환향녀들이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다시 순결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들이 모두 도성에 들어오기전에 홍제천에서 몸을 씼씻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에게 사대부들은 죽음을 강요하였다.
척화론자들은 재가한 여자의 자식들이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식들마저도 관직에 등용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경석은 이 주장에 대해서도 여자의 재가와
포로로 끌려간 일은 경우가 다르다며 임금을 설득했다.
유교가 조선의 바탕이념이었다.
현실적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백성들에게는 맞지 않는 사상이다.
나라가 백성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도리나 의리 등만을 따지는 것으로 정말 말이 안 된다.
그 당시에 이경석은 그가 천거한 송시열에 의해서 개도 그가 남긴 밥은 먹지 않을 것이라는 등 철저하게 오랑캐를 섬겨 자신의 이익을 챙긴 사람으로 후대에까지 손가락질을 받았다.

 

[성남사람들(4)]

 

2013년 12월12일 목요일 서현문화의 집-성남학아카데미 강좌에서 한춘섭 성남문화원장의 '성남사람들' 주제로 강의가 있었다...^-^

강의 후 미진한 것을 복습하는데.....

 

빈둥첫째 날은 둔촌 이집에 관한 것을 복습했다...둔촌 이집은 광주이씨로서 고려말 학자인데 전설이 많다...ㅎㅎ...^-^

부친은 광주 아전인 '이당'인데...원님이 낮잠을 자는 중, 나무에 누런 용 한마리가 걸터앉는 꿈을 꾸고나서 기이하여 나가보니...아전인 '이당'이 나무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던 터라...대~단한 인재(?)로 생각하여 원님의 벙어리딸과 결혼을 시켰다는 전설이 내려온다...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아들 다섯이 모두 과거급제하였고...이중 둘째가 둔촌 이집이다...그가 살던 집 근처가 지금 강동구 둔촌동이라고 한다...^-^

 

둔촌 이집에 관한 전설 또 하나는 남한산성 국청사 우물에 관한 전설이다... 부친이 등창을 심히 않아 백일기도를 했는데...백일째 되는 날 꿈에 신선이 나타났고...그곳을 찾아가 바위 틈을 보니 금붕어가 있어 집에 가져와 길렀는데...밤에 자다가 목이 마른 부친이 금붕어가 든 물을 마시니 고름이 터지고 등이 시원해지면서 낫게되었고...병 고치는 샘물이 된 것이 국청사 우물이라고  한다...ㅎㅎ...^-^

 

둔촌 이집이 고려말 신돈을 강력하게 비판하다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 늙은 부친 '이당'을 업고 경북 영천의 친구 '최원도' 집에 몰래 피신하여 살게 되었는데...이 사실을 계집종 연아에게 들키게 되어 함구하라고 주인이 명령을 내렸는데...계집종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는 또 하나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또한 부친 이당이 피신 중 별세하므로 '이당'의 묘가 경북 영천에 있어...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음력 10월10일이면 두 집안이 함께 묘제를 지내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고 한다....ㅎㅎ...경북 영천에 둔촌의 부친 묘, 성남시 하대원동에는 둔촌 이집의 묘와 사당, 하남에 둔촌의 모친 묘가 있고...단대소공원에는 둔촌의 아들 탄천 '이지직'의 묘가  있다...탄천 '이지직'은 세종 때 청백리로 녹선 되었다...ㅎㅎ...^-^

 

강동구 암사동에 있는 구암서원은 현종 10년(1669)에 설립되었는데...둔촌이 춘추로 제향되었고...숙종 때 현판이 하사된 서원인데...지금은 폐지되었지만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다...검은콩은 둔촌 이집이 중국 심양에서 씨를 받아와 보급시킨 것이므로...성남문화원에서는 18년째 심양에서 '둔촌문화제'를 실시하고 있다...성남시 상대원동의 옛 '공단대로' 명칭을 지금은 '둔촌대로'로 바꾸어 부르면서... 둔촌 이집의 정신...즉 곧고 지절 있는 기개, 지극한 효행, 신의를 지키는 선비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ㅎㅎ...^-^

 

빈둥둘째 날은 중앙공원 한산이씨 묘역에 관한 것을 복습했다...26명의 묘가 있으므로 관계된 스토리(?)를 공부하느라고 머리에서 쥐가 났다...ㅎㅎ...^-^

중앙공원의 한산이씨 묘역은 목은 이색의 삼자 '이계전'을 파조로 하는 문열공파에 속한다...목은 이색의 장자 '이계주'의 아들이 사육신으로 유명한 '이개'로 멸문지화를 당하지만...'이계전'은 세조의 계유정난을 도와 정난공신 1등이 되므로...숙질간에 극과 극의 운명을 달리한다...ㅠㅠ...^-^

 

목은 이색- 이종선(3자)- 문열공 이계전(3자)-대사성 '이우'-봉화현감 '이장윤'-이지번/토정 이지함(2자)...ㅎㅎ...^-^

 

분당 중앙공원은 봉화현감 이장윤이 별세하였을 때 손자 토정 이지함이 이곳에 묘자리를 쓰고...후손이 세거햐면서 한산이씨 집성촌을 이루게 된 것이다...ㅎㅎ...^-^

한산이씨삼세유사비는 봉화현감 '이장윤-아들 '이질'- 손자 '이지숙' 의 비이다...ㅎㅎ...^-^

 

이색의 12대손 '이병태'가 정조 20년에 청백리로 뽑혔는데...숙종~영조 때 사람인데...사후 '청백리'로 선정된 것이다...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고...이후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아 경상도 관찰사 부임 사양, 승지 부임 사양으로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군수로 좌천되었다는 스토리...그러나 선정을 베풀어 합천군민이 생사당을 세워 춘추에 제향한다는 반전 스토리...ㅎㅎ...^-^

 

<봉화군삼세이하유사비> 옆에 <이증 신도비(1695년-숙종 21)/ 이경류 정려비(1727년-영조 3)/ 이정룡 신도비(1728년-영조 4)>가 있다 .
아천군 '이증'은 이지숙의 차남으로 정여립의 난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3등, 아천군에 봉해졌고...세상을 떠난 뒤 영의정에 추증돼 '부조묘'사당이 건립된 분이고......

'이경류'는 평난공신 '이증'의 4남으로 임진왜란 때 상주 북쪽 증연에서 전사했는데...이경류의 말이 피 묻은 옷과 유서를 물고 상주에서 성남까지 500리 길을 달려와 주인의 소식을 전한 뒤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경류는 사후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됐고, 상주의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에 제향됐다. 1727년(영조 3) 정려비가 세워졌고, 이경류 묘역 아래에는 충직한 말의 무덤이 있다.

'이정룡'은 이경류의 손자로 목은 이색의 14대 손으로...김제군수를 역임한 분이다...^-^

 

홍수원의 묘역이 한산 이씨 묘역에 있는 것은 부인이 이확의 딸인 것에 기인한다....홍익한의 묘와 홍수원의 묘표는 고향 평택에 있다...^-^

'홍익한'은 삼학사의 한 사람인데...사후 송시열의 평가로 숙종 때 충정이라는 시호와 부인과 아들, 며느리에게 효열정문이 내려졌고...충절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졌다...ㅎㅎ...^-^

 

빈둥세째날은 문정공 '한계희'와 율동공원을 복습했는데...피곤하므로...생략하고.....

 

빈둥네째날인 오늘은 전주이씨 백헌 이경석을 복습하는데.....

인터넷으로 검색하니...<인조의 3배9고두/치욕의 삼전도비/신도비의 기구한 사연>등이 줄줄이 나온다...ㅎㅎ...^-^

피곤하므로...ㅎㅎ...강의 중에 필기한 것만을 타자칠 생각이다...ㅎㅎ...^-^

 

백헌 이경석은 정종대왕 후예...

1617년 문과 급제 취소되었는데 이유는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했기 때문...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 급제...승문원에 들어감...

1624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공주로 피신할 때 모심

청나라 승전을 기념하는 '삼전도' 비문 지음...청에 가서 소현세자 보필...심양에 억류되었던 김상헌, 박연, 조한영 등 귀국하게 함.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밝히라는 청제의 명령을 어겼다하여 봉황성에 구금(8개월간)...

요종 때 송시열과 사이가 멀어져 삼전도 비문 비판 받아 신도비 훼손되기도 함...위에 관련 글이 복사되어 있음(신도비의 기구한 사연)...ㅎㅎ...^-^

 

현종이 70세 넘어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궤장과 지팡이 하사...사궤장연회도첩과 함께 보물 제930호...현 경기도박물관 보관...^-^

「백헌집」문집- 시 5,000수, 문장 800수...

남원의 '방산서원' 등에 제향

 

 

- 2013년 12월14일 토요일...수산나 -

 

궤장과 지팡이(보물 제930호)...경기도박물관

 

 

궤장과 지팡이(보물 제930호) 안내문...경기도박물관

 

사궤장연회도첩(보물 제930호)...경기도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