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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4년 1월 4일 토요일[(백) 주님 공현 전 토요일]복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2014년 1월 4일 토요일[(백) 주님 공현 전 토요일]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에게 속한 사람은 분명히 구분된다. 죄를 짓는 이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이며, 하느님에게서 나온 이는 죄를 짓지 않으며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제1독서).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들은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그분께 머문다. 이렇게 인격 깊이 예수님을 체험한 둘 가운데 하나인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한다(복음).

 

 

제1독서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7-10
복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구분하고 판단하는 행위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릅니다. 신중함을 미덕으로 배운 우리는 되도록 중립적 위치에 오래 머물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한 가지를 선택함으로써 다른 한 가지를 잃는 것이 싫은 마음은 인지상정이어서 우리는 자주 결단보다는 미련을 가지고 삽니다.
어쩌면 선과 악을 쉽게 구분하려 하지 않고 판단을 멈춘 채 ‘괄호 치는’ 태도야말로 원숙한 삶의 지혜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는 섣불리 내린 잘못된 판단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또한 큰마음 먹고 내린 정의로운 판단으로 말미암아 손해를 보거나 곤란한 처지에 놓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중하고 서두르지 않는 덕목은 분명 인생살이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신중함이 그저 처세술이나 갈등을 회피하는 이기적인 마음과 무책임을 근사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요한 1서의 말씀은 모든 ‘삶의 기술’의 밑바탕에는 의로움을 향한 근본적 선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러 줍니다. 우아하고 능숙하게 인생의 항해를 하고 있다고 마냥 자랑할 일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의로운 일을 실천하고 형제를 사랑하겠다는 확고하고 단호한 결심이 결여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미지근한 타협의 일상에 안주하지 않고 삶의 근본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원천은, 오늘 복음이 보여 주듯 예수님과의 깊은 인격적 체험입니다. 그러한 체험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다지는 사랑의 결단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지혜일 것입니다.     

 

 

중린동 약현성당...'성가정상 목수일 재연' 보이는 풍경

 

 


 

2014-01-04 오전 7:54:50추천수13반대수0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Rabbi, where are you staying?’
Jesus said, ‘Come and see’
(Jn.1,38-39)
 
 
제1독서 1요한 3,7-10
복음 요한 1,35-42
 

저는 어제 작은 차량 사고가 있었습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서 나오면서 좌회전을 하는데, 글쎄 직진하는 차를 보지 못하고 접촉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운전수에게 “왜 이렇게 급하게 나오셨어요?”라는 원망의 말을 먼저 던졌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저의 첫 마디는 원망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안녕을 물었어야 했지요. 더군다나 직진하는 차가 우선이고, 당연히 주위를 살피고 좌회전을 조심스럽게 했어야 하는데 얼핏 보고서 그냥 좌회전을 해버렸으니 저의 잘못이 당연히 더 크지요. 하지만 제가 아닌 상대방의 잘못부터 따지고 들려는 부끄러운 제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접촉사고에서 100% 과실이란 없다고 하지요. 또 제 차량에 달려 있는 블랙박스에 찍혀 있는 동영상을 보고 보험사 직원도 제 과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처음에 보였던 저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제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솔직히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매일 기도와 묵상을 하고 또 이렇게 새벽마다 묵상 글을 쓰면서도, 정작 위기의 순간 그리고 급박한 상황에서는 나만의 기준을 내세워 다른 사람에게 원망의 말을 쏟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 산다는 것이 아직도 멀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동시에 주님을 뜻을 따르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깨달음을 작은 접촉 사고를 통해 주신 주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직접 끌고 다니면서 어거해라, 저거해라 하지도 않으십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따르는 요한의 두 제자를 향해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와서 보아라.”면서 우리들이 직접 느끼고 체험하도록 하십니다. 문제는 무엇이든 내 뜻대로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이 마음 때문에 주님의 뜻에 맞춰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또 내가 원하는 것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와서 본’ 사람들은 주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시몬 베드로를 보십시오. 와서 보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가자,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사명을 받게 됩니다. 바로 ‘케파’, 교회의 반석이 되는 사명을 받게 됩니다.

우리 역시 주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사명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기준’에만 머무르는 이기심과 교만에 가득 차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 앞으로 가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나의 소중한 사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허리 숙여 상처와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다(데이비드 홉킨스).

 
이스라엘의 베드로 수위권 성당 앞의 동상

 

 
어려움과 고난을 받을 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 얻게 되는 실망과 좌절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 얻게 된 실망과 좌절을 통해 분명히 발전하게 됩니다.

저 역시 어제 많이 깨달았지요. 운전을 조심하게 하지 않았음을 말이지요. 대형 면허도 가지고 있고, 또 오랫동안 운전을 하면서 운전 못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저입니다. 그런데 어제는 초보 운전자처럼 주위를 살피지 않고 들어가 사고가 났지요. 이렇게 안일한 마음을 주의하라고 아주 작은 사고가 났던 것 같습니다. 더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다보니 이 사고도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어려움 속에서 불평불만을 외친다고 해서 바뀌어 지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어떤 깨달음을 발견할 때 분명히 나의 소중한 발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내가 해야 할 모습은 분명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나를 발전시킬 소중한 선물을 찾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이며, 희망이며, 사랑입니다. 즉, 주님의 뜻에 맞게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며, 나를 항상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희망과 이 모든 길에서 보여주는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소풍 가서 찾았던 ‘보물찾기’를 떠올리면서, 내 삶에 숨겨 놓으신 주님의 보물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용기와 희망과 사랑을 간직하면서 말이지요....

 

 

 신중하고 서두르지 않는 덕목은 분명 인생살이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신중함이 그저 처세술이나 갈등을 회피하는 이기적인 마음과 무책임을 근사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요한 1서의 말씀은 모든 ‘삶의 기술’의 밑바탕에는 의로움을 향한 근본적 선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러 줍니다. [출처]매일미사

 

말에 대한 십계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 "미안해"라는 말로 마음을 넓고 깊게 하라.

2. "고마워"라는 말로 겸손한 인격의 탑을 쌓아라.

3. "사랑해"라는 말로 매일을 따스하게 하라.

4. "잘했어"라는 말로 제자리를 찾게 하라.

5. "내가 잘못했어"라는 말로 화해와 평화를 이루라.

6. "우리는"이라는 말로 하나 되게 하라.

7. "친구여"라는 말로 우정을 키워라.

8. "네 생각은 어때?"라는 말로 상대를 성장 시켜라.

9. "첫 마음으로 살아가자"라는 말로 언제든 새로워져라.

10. "행복해"라는 말로 따뜻하게 힘을 주라.

 

''을 늘려서 발음하면 '마알'이 됩니다. 이를 풀이하면 '마음의 알갱이'란 뜻이 됩니다. 말은 마음의 알갱이에서 나옵니다. 말이란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곱게 쓰는 사람은 마음을 곱게 쓰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을 험하게 쓰는 사람은 마음을 험하게 쓰는 사람입니다. 말에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옛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거나 "말이 씨가 된다."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말씀으로 희망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출처]조재형 작성 묵상글

 

어떤이는 “말(馬)은 말꼬리 잡으면 싫어하고, 말이 많은 것을 싫어하고. 말을 너무 자주 바꾸어도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기왕이면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 사랑스럽고 복이 되어주는 말을 많이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청마의 해’라고 호들갑떨지 말고 맞갖은 말, 맞갖은 삶이 이어지는 가운데 행복한 한 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반신부의 복음 묵상

어쩌면 우리들도 누군가가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 가는 통로에 불과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누군가 더 큰 사랑으로 가기 위해 나를 버린다면 나는 기꺼이 그 사람을 보내주어야 합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께로 가는 제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요한 3,29)[출처]요셉신부님의 매일복음 묵상

 

 

부처

 

2014년 1월 4일 토요일[(백)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오늘의 복음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어쩌면 우리들도 누군가가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 가는 통로에 불과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누군가 더 큰 사랑으로 가기 위해 나를 버린다면 나는 기꺼이 그 사람을 보내주어야 합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께로 가는 제자들을 보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요한 1서의 말씀은 모든 ‘삶의 기술’의 밑바탕에는 의로움을 향한 근본적 선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러 줍니다.

우아하고 능숙하게 인생의 항해를 하고 있다고 마냥 자랑할 일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의로운 일을 실천하고 형제를 사랑하겠다는 확고하고 단호한 결심이 결여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미지근한 타협의 일상에 안주하지 않고 삶의 근본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원천은, 오늘 복음이 보여 주듯 예수님과의 깊은 인격적 체험입니다.

그러한 체험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다지는 사랑의 결단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지혜일 것입니다.

 

 신중하고 서두르지 않는 덕목은 분명 인생살이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신중함이 그저 처세술이나 갈등을 회피하는 이기적인 마음과 무책임을 근사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청마의 해’라고 호들갑떨지 말고 맞갖은 말, 맞갖은 삶이 이어지는 가운데 행복한 한 해 되기 바랍니다.

어떤이는 “말(馬)은 말꼬리 잡으면 싫어하고, 말이 많은 것을 싫어하고. 말을 너무 자주 바꾸어도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기왕이면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 사랑스럽고 복이 되어주는 말을 많이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말에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옛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거나 "말이 씨가 된다."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말씀으로 희망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말에 대한 십계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 "미안해"라는 말로 마음을 넓고 깊게 하라.

2. "고마워"라는 말로 겸손한 인격의 탑을 쌓아라.

3. "사랑해"라는 말로 매일을 따스하게 하라.

4. "잘했어"라는 말로 제자리를 찾게 하라.

5. "내가 잘못했어"라는 말로 화해와 평화를 이루라.

6. "우리는"이라는 말로 하나 되게 하라.

7. "친구여"라는 말로 우정을 키워라.

8. "네 생각은 어때?"라는 말로 상대를 성장 시켜라.

9. "첫 마음으로 살아가자"라는 말로 언제든 새로워져라.

10. "행복해"라는 말로 따뜻하게 힘을 주라.

 

예수님과의 깊은 인격적 체험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다지는 사랑의 결단으로...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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