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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4년 1월 16일 목요일[(녹)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2014년 1월 16일 목요일[(녹)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본기도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인들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계약 궤를 진영으로 모셔서 승전을 꾀하지만, 오히려 사력을 다한 적들에게 섬멸되고 계약 궤마저 빼앗긴다. 이때 합당하지 않은 모습으로 사제직을 수행한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간절히 청하는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신다. 그는 예수님의 분부를 어긴 가운데 자신의 치유 이야기를 널리 퍼뜨린다(복음).     

 

제1독서 <이스라엘은 크게 패배하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겼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4,1ㄴ-11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 후 미사

주님, 거룩한 잔치에서 천상 진미로 저희를 기르시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의 아들들과 이스라엘군은 계약 궤의 힘으로 적에게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그 궤를 진영으로 옮겨 옵니다. 언뜻 보기에 이는 주님에 대한 신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기대와 달리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군은 섬멸당하고 계약 궤는 적들에게 빼앗깁니다. 또한 엘리의 두 아들도 죽고 그 집안은 몰락합니다.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이보다 앞서 서술되는 ‘엘리의 집안은 망한다.’는 내용의 주님의 말씀(2,27-36)과 엘리의 아들들의 악행(2,22-26)에 관한 내용과 연관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엘리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인들이 계약 궤에 대해 보인 태도는 참된 신앙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것을 ‘수단’으로 여긴 사실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그들 삶의 방식을 주님의 말씀과 계명에 따라 변화시키려는 노력 없이,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그 자체로 경외하는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참된 경건함도 없이, 주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목적과 계획을 성취하는 영험한 도구로 여기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쩌면 주님을 모르고 있는 ‘이방인’보다도 신앙의 참모습과 더욱 동떨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많은 경우에 이러한 교묘한 불신앙의 유혹과 직면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전체의 삶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절반의 삶만을 내어놓으며 그것을 믿음이라고 자족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진짜 관심이 머무는 나머지 절반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격하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반의 인생이 아니라 온전한 삶을 바란다면, 삶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던지는 신앙생활의 용기와 진실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판교 성 프란치스코 성당 유리화

 


 

 

2014-01-16 오전 11:56:49추천수13반대수0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A leper came to him
and kneeling down begged him and sai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Moved with pity, he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the leper, and said to him,
“I do will it. Be made clean.”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and he was made clean.
(Mk.1,40-41)
 
 
 
제1독서 1사무 4,1ㄴ-11
복음 마르 1,40-45
 
 

사실 저는 지금 혼자서 부산에 왔습니다. 서품식 이후 1박 2일로 어디를 훌쩍 다녀올 생각을 했었거든요. 마침 딱 이틀 동안 아무 일도 없는 시간이 있어서 휴가를 내고 이렇게 부산에 혼자 왔습니다. 부산에 와서 특별히 한 것은 없습니다. 그냥 하루 종일 ‘갈맷길’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부산의 대표 걷기 길을 걸었습니다. 어제 하루에 걸은 거리가 거의 20Km 정도 되었으니 꽤 많이 걸었지요? 더군다나 길을 잘못 들어서 뜻하지 않은 산행과 암벽을 타야 하는 고생까지 했습니다. 오늘도 15Km 정도 걸을 예정인데 무릎도 아프고, 발바닥도 아파서 조금 걱정은 됩니다. 그래도 혼자만의 여행의 묘미를 만끽 느끼면서 바쁘고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있었던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일 하나가 생각나네요.

어제 부산 ‘태종대’까지의 걷기 일정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광안리로 이동하려고 버스를 탔습니다. 저는 교통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버스에 올라타면서 교통카드를 인식하는 장치에 카드를 터치했습니다. 그리고 빈 의자가 보여서 얼른 앉으려고 그쪽으로 가는 순간, 기사님의 우렁찬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로 가는 아저씨! 돈 안 내고 타나?”

주위를 둘러보니 뒤로 가는 아저씨는 저 혼자입니다.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지요. 저는 다시 기사님이 계신 자리로 가서 다시 교통카드를 인식기에 댔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더군요. 저는 당연히 되는 줄 알고 자리로 들어가려 했던 것인데, 반응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저로 인해 버스가 늦게 출발했으니) 현금으로 교통비를 지불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수도권에서 사용되는 교통카드는 부산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겨우 부산 교통카드가 전국에 공용으로 사용될 뿐, 다른 지역의 교통카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교통카드는 무조건 전국공용으로만 알고 있었던 저의 무지가 어제와 같은 실수를 만든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반드시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가지고 있는 이상 항상 진리의 길을 걸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모르면서도 아는 채 하는 것, 자신의 뜻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이기심과 잘못된 판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모습이 하나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한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면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는 선교사의 모습을 한 것일까요? 어쩌면 그는 자신의 깨끗해짐을 세상에 알리고자 그렇게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이들의 치유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알렸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행동한 것이지요.

예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말씀을 따르지 못한 것이고,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무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야 하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걸림돌을 치유된 나병환자가 제공한 것이지요.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주님을 드러내는 우리,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기 보다는 주님의 뜻을 펼치는 우리. 이를 위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는데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언제나 열린 눈과 일하는 손을 통해 온다(제레미 테일러).

 
어제 걸었던 코스가 모두 보이는 곳입니다. 암남공원에서 출발 ~ 태종대까지...

 

 
무거운 짐

어제 새벽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읽고 있는 책 2권, 새벽을 열며 묵상 글 작업을 위한 노트북, 그리고 속옷과 세면도구. 이렇게 짐을 싼 가방을 드는 순간, 너무 가벼웠습니다.

‘이 정도면 걷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겠다.’

이러한 생각으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간 뒤, 곧바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1~2시간은 정말로 신나게 걸었습니다. 그런데 2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짐이 무겁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가벼웠던 가방이었는데 왜 이렇게 무거워질까 싶더군요. 그러면서 ‘왜 책을 2권이나 넣었을까? 책만 없었어도 더 가벼워졌을 텐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잠시 뒤에 노트북 때문에 무겁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에는 ‘그냥 여행 중이라서 묵상 글 없다고 공지할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히 가벼운 짐이었는데, 계속해서 짊어지고 걷다보니 점점 무거워집니다. 어쩌면 아무런 짐이 없어도 똑같지 않았을까요? 짐이 있던 없던, 또 무겁든 가볍든, 시간이 지나면서는 점점 무거워지고 힘들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의 세상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남의 짐이 가볍다고 부러움을 표시하기 보다는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할 때,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서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leper: ① 문둥이 ② 나병 환자 ③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전체의 삶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절반의 삶만을 내어놓으며 그것을 믿음이라고 자족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진짜 관심이 머무는 나머지 절반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격하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반의 인생이 아니라 온전한 삶을 바란다면, 삶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던지는 신앙생활의 용기와 진실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출처]매일미사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주님을 드러내는 우리,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기 보다는 주님의 뜻을 펼치는 우리. 이를 위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