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학아카데미 강의 주제- 복정동에 살았던 개화사상가 '강위(姜瑋)']
서현문화의 집에서 운영하는 성남학아카데미 강좌를 오늘 수강했다...^-^
강사는 성남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이신 '서굉일 박사' 이시다....^-^
강의 주제는 갑오개혁 120주년과 성남의 개화사상가 '강위(姜瑋):1820~1884'이다...^-^
올해가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난지 120주년이 되는 갑오년 '청마해' 이므로 의미있는 배움이라는 생각이 든다...ㅎㅎ...^-^
개항에서 갑오개혁까지 구한말 어지럽고(?) 혼란했던 시기를 ...
내가 사는 성남시 복정동에 사셨던 개화사상가 '강위(姜瑋)'를 함께 공부하므로서 그 시대의 질곡있는 삶을 보다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ㅠㅠ...^-^
1. 생애 초반기
개화사상가 '강위(姜瑋:1820~1884)'는 광주부 세촌면 복정리 안골 무반집안의 가계로...신분상의 제약으로 문신이 될 수 없었다...ㅠㅠ...^-^
병약하여 11살이 되어서야 서당에 나아가 공부했으며, 14살에 한성에 있는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집에 기숙하면서 그의 손자인 정건조(鄭健朝)외 함께 수학 하였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뒷날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건조(鄭健朝:1823~1882)와는 일생의 지기로서 왕래하였다...정건조가 강위보다 2년 먼저 별세...ㅎㅎ...^-^
2. 수학 청년기
24세가 되는 1843년(헌종9)에 가업인 무과를 포기한 뒤에는 정건조(鄭健朝)의 극력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성리학적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고증학자 민노행(閔盧行:1777~1848)의 문하에서 4년간 경학을 공부하고, 민노행이 사망하자 그의 유촉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1782~1856)를 찾아가 5년 남짓 시사사하였다...^-^
그런데, 민노행(閔盧行)과 김정희(金正喜)는 청대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자기대로의 학문체계를 수립한 실학자...북학파 [
3. 방랑생활과 구한말 시인이자 금석학자
1851년(철종 2년) 스승 김정희가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북청으로 유배되자 그를 따라가 시중, 수발을 들었다. 그는 시인이자 금석학자다. 김정희, 오경석과 함께 조선 후기에 금석문을 연구하였다.1854년(철종 5년) 김정희가 유배에서 석방, 북청 귀양지에서 풀려나자 김정희를 하직하고 방랑생활로 들어갔다.
그는 오경석, 최한기, 유대치, 김정호, 박규수, 이동인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밖에 강화도를 방문하여 하곡 정제두의 문인들과도 교류하며 양명학을 접하기도 하였다. 또 선불교 사상에도 심취하기도 했다. 이건창이 쓴 그의 묘지며요에 의하면 "곳곳을 유랑하며 선불교와 병법, 음양법 등을 공부하였다"한다. 1856년 김정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만사를 지어 그를 추모하였다.
“ | 세상에는 우리 스승(추사)은 소동파에 비기네. 신기(神技)는 비록 그만 못하지만 품격은 훨씬 나으리. 과천의 눈과 청계의 언덕에서 세 번 소리치고 가셨으니 호호탕탕 산하로다. | ” |
— 강위가 쓴 김정희 제문 |
강위가 이름을 떨친 것은 시인으로서가 먼저였다. 추사를 떠난 이후 방랑생활을 하며 많은 시를 남겼고, 그의 문집은 대부분 시문이었을 정도로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이후 고종 초기의 무신 신헌(申櫶)의 식객이 되었으며, 신헌 가의 식객생활 외에 전국을 유랑하였다. 강화도 방문 시 만난 영재 이건창은 한때 그의 문하에 출입하며 시와 서화를 배웠다.
강위는 평생 집 하나 없이 떠돌아다니던 시인이지만, 가을 소리를 듣기 위해 상상 속에 집 하나를 세우고 자신의 호를 청추각이라 할 정도로 마음은 언제나 넉넉하였다. 그러나 한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에 고뇌하기도 했다. 영재 이건창은 항상 월사매를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곤 하였다.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이건 창의 사랑채는 강위(姜瑋), 여규형(呂圭亨), 정만조(鄭萬朝), 김택영(金澤榮) 등이 출입하면서 시회를 열던 곳이었고, 자연스럽게 월사매에 대한 명성이 퍼져 나갔다.
그의 방랑생활을 밑받침 해준 것은 시인으로서의 명성이었다...^-^
원래 그는 고심하며 시를 짓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시고(詩稿)를 다시 다듬고 고치는 일도 거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시인이었고....
개성이 뚜렷하고 관습적 표현을 극력 배격한 참신한 시편들은 그를 당대 제일의 시인으로 꼽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실제로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매천(梅泉) 황현(黃玹)' 등과 함께 구한말 3대 시인으로 불렸다..^-^
영재 이건창을 포함해서 4대 시인으로도 부른다. 김삿갓 등과 함께 조선의 방랑 시인의 한 사람으로도 꼽힌다....^-^
4. 삼정의 문란에 대한 대책-「의삼정구폐책(擬三政毬弊策)」
그러던 그는 40대에 접어든 1862년(철종 13) 3월 무주에 머물던 강위는 임술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그는 난민에게 감금을 당하여 격문을 기초할 것을 강요 받았으나 요구를 거절하여 집이 불타는 화를 입고 간신히 서울로 상경하였다. 이때 친구인 정건조는 그에게 책론을 쓸 것을 거듭 권유하다 거절당하자 감금한채 억지로 쓰게 하였다. 한달여의 감금생활을 하면서 강위가 쓴 글이 3만여자에 달하는 「의삼정구폐책(擬三政毬弊策)」이다...적대적인 쌍방 양쪽에 감금되어 '격문/책문'을 쓰라는 압력을 받았네요...ㅠㅠ...^-^
삼정의 폐단에 대한 시무책인「의삼정구폐책(擬三政毬弊策)」내용은 전정, 군정, 환곡에 대한 혁신적인 개혁인데 너무 혁신적이라 정건조가 조정에 제출하는 데 난색을 표하자 바로 불살라 버렸다...ㅠㅠ...한달여나 감금당하여 썼는데...한줌의 재로 변한 '3만여자여!'...ㅠㅠ...^-^
“ | 백성들은 아침 저녁거리도 없으며 나라에서는 1년 저축도 없습니다. 임금은 마음을 졸이고 모든 신하들은 오로지 탄식만 하고 있지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관아의 관리들은 농간을 부리고 서울의 관료들은 세력을 믿고 날뛰고 시골양반들은 말을 둘러대고 토호들은 위엄을 부립니다. | ” |
그러나 정건조는 보관하고 있던 초안을 수습하여 몇년 후 강위에게 가져와 다시 서문을 받아와, 후일 《의삼정규폐책》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5. 병인양요로 국제정세에 관심-<청권설민보증수강방소>
한편 실학자인 그가 개화사상가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병인양요 때문 이다.
1866년(고종 3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평양 군민(軍民)들이 반격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고, 선박 2척이 한강 양화진에 까지 올라오는 병인양요가 발생 했다. 이때 '강위'는 총융사 신헌(申櫶)을 대신하여 강화도에서 양화진에 이르는 예상 침입로를 답사한 후 상세한 방어책을 담은 <청권설민보증수강방소>를 썼다...^-^
6. 2번의 연행사길 동행과 개화사상가 전환
1873년(고종 10년) 12월 친구 정건조가 청나라에 동지사로 파견되자 청나라 사행길의 수행원으로 북경, 천진을 방문하고,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
1874년 10월 이전의 문하생이었던 영재 이건창이 청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파견되자 그도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이후 실학자에서 적극적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개화 사상가로 전환하였다. 오경석 등 역관 및 중인들과 친숙하여 해외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두 번의 사행길을 통해 그는 서구에 발달된 문명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가 닥쳤다고 경고하였다.
1875년(고종 12년) 5월 귀국하였다. 이후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이동인 등과 함께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조정에 진출한 문하생 김윤식, 김홍집 등에게도 개항의 필요성을 꾸준히 역설, 설득하였다.
7. 강화도 조약 체결을 막후에서 보좌-「대상환재박상공규수서」
1875년 9월 강화도 사건(일명 운요호 사건) 후의 강화도 담판에서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876년 일본의 조약 체결 요구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 전권대신 신헌(申櫶)을 막후에서 보좌하였다. 조약이 체결될 당시 그는 필담(筆談)을 책임맡았다. 16일간의 회담 과정에서 강위는 박규수와 긴밀하게 서신을 왕래하며 마침내 조약을 성사시켰다.그는 조약체결을 즈음해서 「대상환재박상공규수서」「심행잡기」「의소」등의 글을 남겼는데, 그가 강화도 현지에서 정세를 판단하여 중앙의 박규수에게 전달하고 그와 긴밀하게 의견을 나누면서 안팎의 난제를 해결하였음을 알 수 있다
8. 2번의 일본 사행길 참여
1880년(고종 17년) 7월 문인이었던 김홍집이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로 파견되어 일본에 갈 때 수신사 서기(書記)의 직함을 받고 수행하였으며, 그해 9월에 귀국하였다. 이때 김홍집은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가져왔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의 외교정책을 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882년(고종 19년) 3월 김옥균, 서광범(徐光範) 등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 선공감가감역관에 임명되어 신사유람단 서기의 직함을 받고, 제자인 변수(邊燧)와 함께 이들을 수행, 일본을 다녀왔다.
강위는 김옥균과 서광범의 일본 사행과 뒤이어질 서양 여행 계획을 접하고, 당시 60이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각서를 쓰고 따라나섰다. 김옥균은 "노옹(老翁)이 함께 가기를 빌었으나, 혹 어려움을 만나 후회할까 두려워서 허락치 않았다. 이에 시를 지어 맹세하면서 진심으로 토로했다."고 한다. 김옥균은 특히 그를 예우해고, 그 역시 김옥균의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왔다. 강위는 고환당수초의 첫 머리에 "아아! 나는 문지도 비천하고 지질도 용렬하건만 젊어서의 독서로 약간 이름이 났었기에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그릇 알려지게 되었도다. 그 가운데서도 시독 김옥균 대인은 나를 특별히 예대해 주었기 때문에 항상 감격스러운 마음 품고 그 분을 위하여 힘 자라는 데까지 봉사하기를 원했다."라고 썼다.
1882년 6월 그는 도일한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등과 함께 흥아회의 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때 이들은 유럽과 아메리카 등을 방문, 견학하였으나, 그해 6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정부의 소환 요청에 따라 모두 서둘러 귀국하였다. 그러나 강위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일행과 헤어져 혼자 청나라로 건너가 베이징, 상하이에서 청나라의 개항론자들과 교유하고 열차, 화포 등을 관람한 뒤 그해 9월말 귀국하였다.
9.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域旬報)》를 간행- 국한문 혼용에 많은 공을 세우다
일본을 다녀온 직후 그는 고종에게 언로의 확대를 위해 신문의 발행과 보급을 누차 상주, 건의하였다. 언론의 보급을 통해 사서들에게도 정사의 운영, 권간들의 농간을 알게 하여 진충보국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3년(고종 20) 박영선(朴永善)과 함께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를 초빙하여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域旬報)》를 간행하였으며, 국한문이 혼용된 가사체를 연구하여 86년 《한성순보》를 《한성주보(漢域週報)》로 고친 뒤 국한문 혼용에 많은 공을 세웠다....
통리아문의 주사로서 우정사업과 순보 발행에 관여한 정만조 역시 강위의 문하였다. 정만조는 강위 사후 시집인 고환당수초를 편집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0. 사후와 저서
저서로는 《동문자모분해 (東文字母分解)》, 《손무자주평 (孫武子注評)》, 《경위합벽 (經緯合璧)》, 《용학해 (庸學解)》《고환당집》 등이 있다.
1884년(고종 20년) 4월 5일 경기도 광주 세촌면(현, 성남시 중원구 복정동)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1. 평가
실학에서 개화파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해당되는 인물로 평가된다. "이기와 강위 등은 실학사상과 근대변혁사상의 연결고리로 주목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실학파가 사실상 해체된 후 박제가에서 김정희로 이어지는 북학사상을 근대 개화파에 연계해준 선각자 가운데의 한 사람이다."라는 평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체제의 변혁을 도모한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가 난민이 요구하는 격문을 써주지 않은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는 한계를 보인다는 평도 있다.
- 2014년 2월6일 목요일...수산나 -
(참고)
◈정주학(程朱學)~중국
◈북학파 [
◈진주민란[晉州民亂]~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고종 3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평양 군민(軍民)들이 반격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병인양요~
1. 원인: 천주교를 금하면서 프랑스 선교사를 포함한 수천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한 사건 2. 과정: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여 문화재를 빼앗아감 3.결과: 양헌수의 군대가 삼림성에서 물리침
◈신미양요~ 18
◈육교시사
1870년(고종 7년) 봄 그는 중인, 향리를 포함한 위항문인과 위항시인, 작가 모임인 육교시사(六橋詩社)를 조직하였다. 단체의 명칭이 된 육교는 한성부 청계천 하류로부터 여섯째 다리인 광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 곳 주위에는 의관(醫官), 역관(譯官), 중인 등의 집단적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중인, 의관, 역관, 서자와 양반,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의 문인, 시인들이 참여하였다.
참가동인은 회장인 강위와 그의 친구 변진환(邊晉桓)을 비롯하여 오경석, 백춘배(白春培), 김재옥(金在玉), 이명선(李鳴善), 성혜영(成蕙永), 배전(裵㙉), 이용백(李容白), 박승혁, 유영표(劉英杓) 등이었는데, 이들은 특정한 모임 장소를 가지지 않고 동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시회를 개최하였다. 그 중에서도 모임이 자주 열리던 곳은 변진환의 별장인 해당루(海棠樓)였는데, 모임에서 나온 작품들을 모은 모음집 《해당루상원첩 (海棠樓上元帖)》을 남겼다. 강위 육교시사에서 읊은 시를 모아 《육교연음집 (六橋聯吟集)》이라는 시집으로 엮어 출간하였다.
육교시사에는 역관이 많아서 그들이 중국이나 일본에 갈 때마다 송별회가 열렸는데, 추사 문하의 동문인 김석준이 중국으로 갈 때에는 강위가 홍약관에 찾아가 시를 지어주며 전송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벼슬까지 했던 이원긍(李源兢)도 육교시사에 자주 드나들었다. 양반인 이원긍이 아들 이능화에게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을 배우게 하여 국학자로 활동하게 한 것은 이 시절에 역관들과 가깝게 지내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강위~그 뒤 연행사(燕行使)를 따라가 청(淸)나라의 문인들과 교류하였으며 뒤에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을 수행하여 일본을 다녀왔고, 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될 때 글을 써서 의사를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다. 83년(고종 20) 박영선(朴永善)과 함께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를 초빙하여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域旬報)》를 간행하였으며, 국한문이 혼용된 가사체를 연구하여 86년 《한성순보》를 《한성주보(漢域週報)》로 고친 뒤 국한문 혼용에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과 함께 구한말 3대 시인으로 불리며, 특히 비분 강개가 서린 격조 높은 율시(律詩)를 잘 썼다. 이건창(李建昌)·황현의 시풍에 영향을 주었고 벼슬은 감역(監役)을 지냈다. 저서에 《동문자모분해(東文字母分解)》 《용학해(庸學解)》 《손무자주평(孫武子註評)》 《고환당집》 등이 있다
[출처] 강위 (姜瑋 1820∼1884(순조 20∼고종 21)) |작성자 leebc642
◈ 1882년(고종 19년) 3월 김옥균, 서광범(徐光範) 등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 이들이 탄 배가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고 있었는데, 김옥균은 강위에게 아들 강요선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그 편지에 조정에서 강위에게 선공감가감역의 벼슬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 | 우리 가문이 변(기묘사화)를 맞은 이래 무과에만 응해 왔었는데, 유문의 벼슬자리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지극히 감격스럽고 황송하여 눈물이 돌았다. | ” |
— 속동유초 |
◈지방에서 발전하여 세력이 커진 선비들... 사림파...
훈구파는 이를 못마땅 하게 생각하고 4가지 사화를 이르킨다.
그것이 바로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이다.
지금부터 일으킨 이유, 배경,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1*무오사화
무오사화는 최초의 사화이며, 1498년에 일어났다.
이는 사림파의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쓰면서부터 발단이 된다.
당시의 왕은 연산군이였다.
조의제문은 세조를 비판하는 글이었는데, 유자광을 비롯한 훈구파들이 알아차려
연산군에게 알렸다.
연산군은 반역죄라고 하며 김종직의 제자들을 죽이고,
훈구파들은 이미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다시한번 파해쳐 죽이는 사건...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사림파를 없애기 위해 한 사화...
무오사화이다...
2*갑자사화
2번째 사화도 연산군때 일어났는데, 무오사화가 일어난지 6년뒤인 1504년에 폐비 윤씨가 사약을 먹고 죽은 일을 말해주면서 연산군은 윤씨를 폐비시키는데 찬성한 신하들을
모두 죽인다..
원래 사림파를 죽이기 위한것이였는데, 이에 훈구파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산군은 훈구파의 막대한 재산을 빼앗기 위하여 제거하려고 한 것이였다.
이를 갑자사화라고한다.
ps.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3*기묘사화.
세번째 사화.. 기묘사화 이는 기묘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기묘사화.. 1519년에 일어났다.
중종반정을 한 세력들은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진압하기위해 등장한 조광조가 이들을 진정시키고 공신자격을 빼앗았다.
훈구파는 이에 분노하고 나뭇잎에 꿀을바른다.
그리고 애벌래들이 그것을 먹는데, 써진글이 주초위왕이라고 한다.
이는 중종에게 알려지며 조광조와 그를 따른사람들이 처형된다.
이를 기묘사화라고한다.
ps. 주초위왕은 走肖僞王 이라는 한자인데 주와 초를 합치면 조(趙)씨가 왕이된다는 뜻이다.
4*을사사화
이제 마지막 사화인데 이도 을사년에일어나서 을사사화인데 1545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일어난다.
명종은 나이가 어렸는데,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형원.. 그리고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의 대립때문에 시작된다.
그래서 싸우게 되는데 윤임을 지지하던 사림파들이 많이 죽는다.
Tip. 사림파는 4번의 사화를 겪고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정치에 나가지 못하다가. 선조때부터 다시 정치에 나갔다.
[출처]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작성자 송이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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