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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성남학아카데미 강의-이덕무의 「청령국지(蜻蛉國志)」(2014.2.21.금)/노란띠좀잠자리 8장

 [성남학아카데미 강의-이덕무의 「청령국지(蜻蛉國志)」]

 

오늘은 서현문화의 집에서 매주 목요일 10시~12시에 실시하는 성남학아카데미 강의를 들었다...^-^ 

주제는 성남 인물로서 실학사대가-사가시인(四家詩人) '이덕무' 이고...강사는 이웅재 박사님 이다...^-^

'이덕무'는 전주이씨로...계축년 (1793) 1월25일 향년 53세...정조대왕 때 별세했는데...묘가 성남시 판교 대장동 부근에 있다는데...찾지를 못했다고 한다...^-^

 

이덕무는 연암 '박지원'의 4대 제자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함께 백탑파에 속한 사람이다...^-^

백탑은 현재 종로 파고다 공원에 있는 탑 이다...^-^

이들 4명 중 이서구만 정실자손이고 모두 서출이어서... 과거시험에 문과는 못 보고...'무과와 잡과'만 볼 수 있었다...ㅠㅠ...^-^

 

오늘 강의는 박지원의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중 「형암행장」에 나온 글을 교재로 하여 공부했다...ㅎㅎ...^-^

형암은 이덕무의 호이며...행장은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야기를 쓴 글인데... 연암 박지원이 그의 제자 '이덕무'에 대하여 쓴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ㅎㅎ...^-^

 

이덕무의 저서로는 〈영처시고 嬰處詩稿〉·〈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기년아람 紀年兒覽〉·〈사소절 士小節〉·〈영처문고 嬰處文稿〉·〈청비록 淸脾錄〉·〈뇌뢰낙락서 磊磊落落書〉·〈영처잡고 嬰處雜稿〉·〈관독일기 觀讀日記〉·〈앙엽기 盎葉記〉·〈입연기 入燕記〉·〈열상방언 洌上方言〉·〈예기고 禮記考〉·〈편찬잡고 編纂雜稿〉·〈협주기 峽舟記〉·〈천애지기서 天涯知己書〉·〈한죽당수필 寒竹堂隨筆〉 등이 있다.....

 

정약용이 활약했던 정조대왕 시기에는  백과전서적 지식 경영이 크게 성행했다. 주제와 목표만 정해지면 이들은 모든 정보를 조직화 하고 편집해냈다. 일본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덕무는 각종 서적에서 정보를 모아 일본입문서인 ‘청령국지(蜻蛉國志)’를 펴냈다.

 ‘청령국지(蜻蛉國志)’는 일명 청정국지(蜻蜓國志)라고도 하는데... 일본(日本)에 관한 기록으로, 세계도(世系圖)·성씨(姓氏)·직관(職官)·인물(人物)·예문(藝文)·여지(輿地)·풍속(風俗) 등이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를 보면 신무 31년 조에 “나라의 형상을 두루 바라보고서 ‘훌륭한 나라를 얻었구나!……청령[蜻蛉,(잠자리) - 일본 고훈(古訓)은 ‘아끼즈’]가 교미(交尾)한 듯하구나!’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지형이 잠자리가 교미하는 모양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을 대하고 가만히 일본의 지도를 보니, 그랬다. 교미하고 있는 잠자리, 그것도 아래쪽에서 하트 모양의 독특한 짝짓기를 하고 있는 자세였다. 그래서 일본은 청령국(蜻蛉國)이라 불렸다.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청령국지(蜻蛉國志)의 인물(人物) 조를 보자. 여기에는 이덕무의 일본인들에 대한 인물평이 나오고 있다.

 

“총명하되 식견이 편협하고, 예민하되 기상이 작으며, 능히 겸손하되 남에게 양보하지 못하고, 능히 은혜를 베풀되 남을 포용하지 못한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며, 가까운 사람을 반기고 먼 사람에게 소홀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은 일본이다. 그렇다면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분단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우리나라가 분단이 되어서 그 끔찍한 6·25를 겪고 아직도 분단국으로 남아 있다. 조선일보(2014.1.22.)에 의하면, 세균전 관련 생체 실험을 실시했던 731부대의 관련 자료를 넘겨받은 미국이 731부대를 주도했던 이시이를 전범에서 면책시켜 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일련의 조치가 우리나라를 분단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미국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커다란 부담으로 여기기도 했을 것이다.

 

731부대 간부 23명이 교토대서 무더기로 박사학위 받은 일이나, 아베 총리가 마쓰시마의 항공자위대 기지에서 731이라는 숫자가 쓰인 자위대의 훈련기의 조종석에 앉아 있는 사진을 보란 듯이 공개한 행태 들은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의 일본은 잠자리의 유충인 학배기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학배기는 주위에 있는 올챙이, 장구벌레, 심지어는 동족 잠자리의 유충 따위를 마구 잡아먹고 산다. 그러나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면 잠자리의 유충 학배기는 거꾸로 개구리에게 잡아먹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개구리’에 해당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천주교 부산교구 교리성당(http://gyori.catb.kr)의 ‘열린 게시판’을 보면, 중국은 “땅바닥에 엎드린 거대한 두꺼비 형태”라고 한다. 두꺼비는 개구리목에 속하는 양서류로 개구리와 그 형태가 비슷하다. 그런데 실은 두꺼비가 더 무서운 존재이다. 개구리는 물 밖에 오래 있으면 말라 죽을 수도 있지만 두꺼비는 피부가 두꺼워서 더위에도 강할 뿐 아니라, 피부에 독까지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두꺼비는 먹이(잠자리 등)를 만나면, 그 먹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기회를 엿보다가 날름 혓바닥을 내밀어서 잡아먹는 것이다.(Nate 지식 참조)

 

일본이여, 정신을 차릴지어다....ㅎㅎ...^-^

 

- 2014년 2월20일 목요일...오후 7시...수산나 -

 

 

 

 이덕무 [李德懋]조선 실학자 | 브리태니커

1741(영조 17) 서울~ 1793(정조 17).

 

                       

조선 후기의 실학자.

규장각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서적을 정리·교감했고,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본관은 전주.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형암(炯庵)·영처(嬰處)·동방일사(東方一士).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이다. 서자로 태어났다. 어려서 병약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총명하여 가학(家學)으로 문리(文理)를 터득했다.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 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문명을 중국에까지 떨쳤다. 이후 박지원(朴趾源)·박제가·홍대용(洪大容)·서이수(徐理修)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서건학(徐乾學) 등 중국 고증학파의 학문에 심취하여, 당대의 고증학자였던 이만운(李萬運)에게 지도를 받았다.

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청의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그곳의 산천·도리(道理)·궁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함께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그의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 박제가·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外閣檢書官)이 되었다. 근면하고 시문에 능했던 그는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여 1781년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이 되었으며, 사도시주부·사근도찰방·광흥창주부·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그는 규장각의 도서편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전회통〉·〈규장전운 奎章全韻〉·〈기전고 箕田攷〉·〈도서집성〉·〈국조보감〉·〈규장각지〉·〈홍문관지〉·〈검서청기 檢書廳記〉·〈시관소전 詩觀小傳〉·〈송사전 宋史筌〉 등을 정리·교감했다. 1793년 병사했는데, 정조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유고집인 〈아정유고 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렸다. 서화(書畵)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영처시고 嬰處詩稿〉·〈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기년아람 紀年兒覽〉·〈사소절 士小節〉·〈영처문고 嬰處文稿〉·〈청비록 淸脾錄〉·〈뇌뢰낙락서 磊磊落落書〉·〈영처잡고 嬰處雜稿〉·〈관독일기 觀讀日記〉·〈앙엽기 盎葉記〉·〈입연기 入燕記〉·〈열상방언 洌上方言〉·〈예기고 禮記考〉·〈편찬잡고 編纂雜稿〉·〈협주기 峽舟記〉·〈천애지기서 天涯知己書〉·〈한죽당수필 寒竹堂隨筆〉 등이 있다.

 

 

 [정조 때의 다산 정약용 등의 실학]

 

정조 때 일이다.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 현륭원에 해마다 나무 심은 장부가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데도, 정작 심은 나무가 몇 그루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답답해진 정조는 정약용에게 그 많은 문서를 일일이 점검하여 1권을 넘지 않게 간추려 올 것을 명했다. 다산은 물러나와 심은 시기와 장소 별로 구분하여 가로 12칸, 세로 8칸의 도표로 만들어 129,712 그루의 나무를 단 한 장의 보고서로 압축해 임금께 올렸다.

 
내가 아는 한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 최고의 편집자요, 지식 경영의 귀재다. 그는 적어도 정보를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40세에서 57세까지 18년간의 강진 유배 생활 중에 500여권의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탁월한 편집 역량 때문이다.
 
‘목민심서’만 해도 그렇다. 이 책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25사와 역대 문집 등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의 일과 관련된 사례를 가려 뽑고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역대 문헌에서 추려낸 내용의 양이 우선 엄청나다. 전체 목차를 보면 부임에서 이임까지의 단계를 12항목으로 나누어 사례를 정리했다. 물론 이 엄청난 작업을 그 혼자 한 것은 아니다. 강진의 제자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1차 자료를 선별해 베껴 쓰고 분류했다. 다산은 이 모든 작업을 진두지휘한 총 기획자요 편집자였다. 그의 손을 한번 거치면 서 말 구슬이 단번에 한 꿰미로 꿰어졌다.
 
다산은 6남3녀를 낳아 4남2녀를 대부분 마마로 잃었다. 그는 이 기막힌 심정을 담아 ‘마과회통(麻科會通)’을 편집했다. 모두 63종의 의서(醫書)에서 천연두 관련 내용만 추려내, 예방법과 치료법을 내용별로 정리한 것이다. 분류 방식은 ‘목민심서’와 다를 것이 없다. 예방법과 초기 증세, 유사 증세, 진단과 처방, 속방(俗方) 등을 항목별로 정리하고, 부록에서는 제너의 종두법을 소개했다. 병에 대해 잘 몰라 여러 자식을 속수무책으로 떠나 보낸 절통한 심정이 행간에서 묻어난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부모들이 겪지 않게 하려는 거룩한 마음까지 담겨 있다. 다산의 다른 저술인 ‘경세유표’ ‘흠흠신서’와 지리서인 ‘아방강역고’와 ‘대동수경’ 등 대부분의 저술도 모두 기존 정보들을 검색하고 재배열해서 여기에 자신의 견해를 종합하여 편집한 것들이다.
 
그에게서 훈련 받은 제자들도 훌륭한 편집자요 학자로 성장했다. 다산이 우리나라의 속담을 분류하여 ‘이담속찬(耳談續纂)’을 펴내자, 이강회(李綱會)는 이를 보충해 ‘방언보(方言補)’를 썼다. 정약전이 미완성 필사본으로 남긴 ‘현산어보’는 그 후 다산이 이청(李)을 시켜 수많은 문헌 자료를 찾아 보충하여 완성했다. 엄밀히 말해 ‘현산어보’는 정약전과 이청의 공저다.
 
최근 신안군 우이도에서 필사본으로 발견된 이강회의 ‘유암총서(柳菴叢書)’에는 당시 현안이었던 배와 수레의 제도와 개선방안에 관한 분석적 논문들이 실려 있다. 논문을 쓴 이들 모두 스승의 구술을 받아 적고, 문헌을 뒤져 관련정보를 찾아내던 강진 시절의 제자들이다. 강진 시절의 모든 성과는 이런 시스템이 만들어낸 집체 작업의 결과다.
 
서유구(徐有?)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모두 16항목으로 나눠진 백과전서적 농서(農書)다. 채소 화훼 재배에서 음식조절방법, 의약과 의례, 선비의 취미생활, 주거와 경제활동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내용이 총망라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18세기적 웰빙 교과서다. 한 사람이 취급한 정보의 양치고는 너무 엄청나 경이롭다 못해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다.
 
이 시기에는 이렇듯 백과전서적 지식 경영이 크게 성행했다. 주제와 목표만 정해지면 이들은 모든 정보를 조직화 하고 편집해냈다. 일본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덕무는 각종 서적에서 정보를 모아 일본입문서인 ‘청령국지(蜻蛉國志)’를 펴냈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정리한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무려 148종의 국내외 무예서를 참고해서 편집한 종합무예 교과서다. 무예를 몰랐던 이덕무와 박제가가 서얼인 장용영(壯勇營) 군관 백동수(白東修)와 함께 각종 무기의 운용동작과 실기자세를 도해하여 펴냈다. 도화서(圖畵署)의 화공들이 동원된 비주얼한 도판 자료는 전통 무예의 복식과 동작의 현대적 복원과 재현이 가능했을 정도로 치밀하고 꼼꼼했다.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정보량의 폭발적 증가를 꼽지 않을 수가 없다. 제한된 정보가 독점적으로 유지되던 이전 시기와 달리, 중국에서 쏟아져 들어온 백과전서류의 전집들과 총서류의 저작들은 정보의 독점적 권위를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이런 총서들은 한 질이 수백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했다. 만권루(萬卷樓)의 장서가들이 연이어 등장했고, 서적유통이 활성화되었다.
 
18세기는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질이 문제가 되는 시대였다. 산만하고 무질서한 정보들이 우수한 편집자의 솜씨를 거쳐 새로운 저작으로 재탄생했다.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졌다. 일상의 허접스러운 놀이나 풍습, 시정(市井)의 이야기도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편집되었다. 모든 지식이 편집되고, 재배열되었다.
 
편집된 내용의 층위도 다채로웠다. 앵무새나 비둘기, 담배와 같은 개인적인 취미의 차원부터, 천연두나 수레나 배의 제도, 무예실기 등 사회 현안이나 민생 또는 국가와 관련된 유용한 정보 분야까지 확장되어갔다. 다룬 층위는 달라도 지식과 정보를 재배열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내던 편집의 원리는 한결같았다.


 

 

(수필문학 3월호 권두수필)

                    교미하고 있는 잠자리여, 정신을 차릴지어다

 

 

                                                                                                                   이 웅 재(수필문학 추천작가회 회장)

 

 

3월이다. 3월은 시작의 달, 봄이 시작되고 새 학기가 시작된다. 시작이란 무한한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희망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 가능성이란 끝이 없다. 무한하다. 그래서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벅차다. 설렘이 동반되는 연유이다. 95년 전 우리는 그 가능성을 바라고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광복이 되었고, 독립이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아프다. 동족상잔이라는 6·25동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휴전이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 아니다. 왜 우리가 그러한 비참한 역사를 맞이해야 했던가?

일본, 일본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은 일본이다. 그렇다면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분단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우리나라가 분단이 되어서 그 끔찍한 6·25를 겪고 아직도 분단국으로 남아 있다. 조선일보(2014.1.22.)에 의하면, 세균전 관련 생체 실험을 실시했던 731부대의 관련 자료를 넘겨받은 미국이 731부대를 주도했던 이시이를 전범에서 면책시켜 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일련의 조치가 우리나라를 분단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미국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커다란 부담으로 여기기도 했을 것이다.

731부대 간부 23명이 교토대서 무더기로 박사학위 받은 일이나, 아베 총리가 마쓰시마의 항공자위대 기지에서 731이라는 숫자가 쓰인 자위대의 훈련기의 조종석에 앉아 있는 사진을 보란 듯이 공개한 행태 들은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최근 일본의 행보는 이것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작년 9월 수많은 징용 한국인이 희생된 강제노역 탄광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키로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일본은, 최근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원의 유서까지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이러한 일본 정치인들의 망동으로 인하여 최근 일본에선 ‘가미카제’를 다룬 소설과 영화 ‘영원의 제로’가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고도 한다. ‘대동아전쟁, 인종평등 200년 앞당겼다’고 주장한 극우 다모가미가,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61만 표를 얻어서 당선되었다는 기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도록 만들어주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현상은 특히 20대의 젊은 층에서 두드러지고 있다고 하니,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 하겠다.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는 주장이나 위안부 문제 등은 오히려 고전적인 주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저들은 독도를 죽도라고 한다. 독도에는 대나무가 없는데도 말이다.

일본은 과연 어떠한 나라인가? 『일본서기』를 보면 신무 31년 조에 “나라의 형상을 두루 바라보고서 ‘훌륭한 나라를 얻었구나!……잠자리[蜻蛉, 일본 고훈(古訓)은 ‘아끼즈’]가 교미(交尾)한 듯하구나!’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지형이 잠자리가 교미하는 모양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을 대하고 가만히 일본의 지도를 보니, 그랬다. 교미하고 있는 잠자리, 그것도 아래쪽에서 하트 모양의 독특한 짝짓기를 하고 있는 자세였다. 그래서 일본은 청령국(蜻蛉國)이라 불렸다.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청령국지(蜻蛉國志)의 인물(人物) 조를 보자. 여기에는 이덕무의 일본인들에 대한 인물평이 나오고 있다.

“총명하되 식견이 편협하고, 예민하되 기상이 작으며, 능히 겸손하되 남에게 양보하지 못하고, 능히 은혜를 베풀되 남을 포용하지 못한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며, 가까운 사람을 반기고 먼 사람에게 소홀하며…….”

정확하다. 일본인들의 특성을 어찌 그리 실감 있게 설명하였을까? 필자는 1995년 일본의 Toppan[凸版] 인쇄박물관[Printing Museum, Tokyo]을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인쇄박물관에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 우리나라의 『직지심경』에 대한 전시물이나 설명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통역을 맡은 분에게 확인요청까지도 하여 보았지만, 박물관 관계자는 그런 건 모르겠단다. 한국과 관련된 전시물로서는 『훈민정음』 복제본 하나밖에는 보지 못했다. 『용비어천가』도 없었다. 편협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다시 『조선일보』(2014.2.5., A16면)의 기사를 보자.

“지난달 16일 일본 지방의원 13명이 미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찾아가 소녀상 앞에서 ‘일본군위안부는 급여를 잘 받았던 매춘부였다’며 시위를 벌이고 시 당국자와 면담을 요청했다. 글렌데일은 해외에선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소녀상을 설치한 곳이다.”

이러한 그들에게 ‘포용성’을 바라는 것은 헛된 망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교미하고 있는 잠자리여, 정신을 차릴지어다! 지금의 일본은 잠자리의 유충인 학배기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학배기는 주위에 있는 올챙이, 장구벌레, 심지어는 동족 잠자리의 유충 따위를 마구 잡아먹고 산다. 그러나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면 잠자리의 유충 학배기는 거꾸로 개구리에게 잡아먹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개구리’에 해당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천주교 부산교구 교리성당(http://gyori.catb.kr)의 ‘열린 게시판’을 보면, 중국은 “땅바닥에 엎드린 거대한 두꺼비 형태”라고 한다. 두꺼비는 개구리목에 속하는 양서류로 개구리와 그 형태가 비슷하다. 그런데 실은 두꺼비가 더 무서운 존재이다. 개구리는 물 밖에 오래 있으면 말라 죽을 수도 있지만 두꺼비는 피부가 두꺼워서 더위에도 강할 뿐 아니라, 피부에 독까지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두꺼비는 먹이(잠자리 등)를 만나면, 그 먹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기회를 엿보다가 날름 혓바닥을 내밀어서 잡아먹는 것이다.(Nate 지식 참조)

일본이여, 정신을 차릴지어다. 만세 함성이 터지던 3월을 맞으며 충정 어린 조언을 하는 바이다. (2014.2.15. 원고지 15매)

 

 

#(권두수필)교미하고 있는 잠자리여, 정신을 차릴지어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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