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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걸어잠그고 고독의 길 걷는 이들-[봉쇄수도원·무문관](2015.1.9.금)/문경새재 조곡관(영남 제2관문) 5장

 

종교, 아 그래?
스스로 걸어잠그고 고독의 길 걷는 이들

 

입력 : 2015.01.09 03:05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봉쇄수도원·무문관

수녀들의 성가(聖歌) 합창은 소름 돋을 듯 청아한데 정작 소리 주인이 안 보였다. '녹음을 트나?' 싶었지만, 그들은 분명 같은 공간 안에 '숨어' 있었다. 'ㄱ' 자 모양 성당의 신자석에선 꼭짓점에 있는 제대(祭臺)만 보이고 90도 꺾은 쪽 수도자석이 보이지 않은 것. 함께 미사를 올리면서도 수도자들은 속세 사람들과 눈빛도 섞지 못하는 곳, 봉쇄(封鎖)수도원이다. 지난 2005년 찾았던 경기 양평의 성(聖)클라라수도원 풍경은 그랬다.

봉쇄선을 한 번 넘어가면 죽어서도 안 나오는 곳, 피붙이라도 창살을 사이에 두고서야 '면회'할 수 있는 곳. 이들이 스스로 봉쇄하는 까닭은 하느님과 1대1로 독대(獨對)하기 위해서다. 생활은 기도와 침묵에 초점이 맞춰 있다. 하루 2~3시간 '공동 휴식' 외에는 독방(獨房)과 식사·작업 때도 침묵 또 침묵한다. 가르멜여자수도원 8곳, 성클라라수도회 6곳 등 전국 20곳 280여(2013년 말 현재) 남녀 수도자가 오늘도 정적(靜寂) 속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종교, 아 그래?] 스스로 걸어잠그고 고독의 길 걷는 이들

가톨릭에 봉쇄수도원이 있다면 불교엔 '무문관(無門關)'이 있다. 봉쇄수도원은 안에서, 무문관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0년까지 작정하고 들어가는 무문관에서 세상과의 통로는 하루 한 번 열리는 가로세로 30㎝ 남짓 '밥 구멍' 하나뿐.

설악산 백담사 무금선원 무문관과 계룡산 대자암 무문관 등은 작은 방에 소형 냉장고,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이불 한 채 그리고 좌복(방석) 한 개가 있다. "'生死必打破(생사 문제를 타파하겠노라)"며 자청(自請)한 독방 수감(?) 생활, 자신과 '화두(話頭)'뿐이다. 가끔 심신 탈진한 스님이 실려나간다. 그럼 바로 다음 대기자가 들어가고 또 밖에서 자물쇠를 채운다.

교황들이 봉쇄수도원에 기도를 부탁하고, 불교에서 무문관 선승(禪僧)들을 '에너지원(源)'이라 부르는 것은 절대 고독 속 수행과 기도의 힘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노망이 들어 무문관에 있습니다. 금족(禁足) 생활을 하기 때문에 전화 못 받습니다." 한 달 전 동안거(冬安居) 직전, 설악산 신흥사 조실(祖室) 오현 스님은 지인들에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늘 "떨어진 중, 낙승(落僧)"을 자처하던 그는 자신이 만든 무금선원 무문관에 스스로 들어간 것이다. 유난히 추운 엄동설한, 문 없는 방에선 수행과 기도가 더 뜨겁게 익어간다.

(요점)

봉쇄수도원~ 봉쇄선을 한 번 넘어가면 죽어서도 안 나오는 곳, 피붙이라도 창살을 사이에 두고서야 '면회'할 수 있는 곳. 이들이 스스로 봉쇄하는 까닭은 하느님과 1대1로 독대(獨對)하기 위해서다. 생활은 기도와 침묵에 초점이 맞춰 있다. 하루 2~3시간 '공동 휴식' 외에는 독방(獨房)과 식사·작업 때도 침묵 또 침묵한다. 가르멜여자수도원 8곳, 성클라라수도회 6곳 등 전국 20곳 280여(2013년 말 현재) 남녀 수도자가 오늘도 정적(靜寂) 속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무문관~ 가톨릭에 봉쇄수도원이 있다면 불교엔 '무문관(無門關)'이 있다. 봉쇄수도원은 안에서, 무문관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0년까지 작정하고 들어가는 무문관에서 세상과의 통로는 하루 한 번 열리는 가로세로 30㎝ 남짓 '밥 구멍' 하나뿐.

교황들이 봉쇄수도원에 기도를 부탁하고, 불교에서 무문관 선승(禪僧)들을 '에너지원(源)'이라 부르는 것은 절대 고독 속 수행과 기도의 힘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고은의 편지] 시간은 누구의 시간인가

[중앙일보] 입력 2015.01.09 00:07 / 수정 2015.01.09 03:29

 

 

산석(山夕)에게.

 이런 문문한 글월을 자네한테 보내는 일이 처음이네. 너무 늦은 처음이겠네.

 불현듯이 이 새해 벽두에 자네 생각이 난 것은 그동안의 무미건조한 내 무심을 뉘우친 나머지이기도 할 것이네.

 하지만 자주 너나들이로 만난다 해서 그것이 삶의 논밭을 기름지게 한다는 법도 따로 없을 것이네.

 동네 개들이 처음에 만날 때는 서로 으르렁대다가도 조금 뒤에는 어제 오늘 내일 없이 그냥 심드렁한 일상이고 말지 않던가.

 지난해나 지지난해나 이른바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여기서 만나고 저기서 만나는 허울 좋은 의제 운운으로 합의한 번드르르한 사항들은 다 오락의 수준 아니던가.

 이런 만남의 소비행위보다는 한평생 합계로 따져보아도 대여섯 차례뿐인 이 지상에서의 해후(邂逅)야말로 만남의 철리(哲理)가 새삼 넘쳐날 것이네.

 몇 해 만에, 몇 10년 만에 자네와 내가 만나는 자리에서 그 이론의 여지없는 환희의 취흥이 일어나는 것도 오랜 두절 때문인지 모를 일 아니겠는가.

 언젠가 자네더러 ‘우리 한번 사무치자!’라고 지껄인 적이 있었네. 그런 둘 사이의 주술(呪術)이 있어야겠네.

 내가 알고 지내는 오랜 인연의 벗 하나가 있네. 지난날 중학교 시절 기차통학을 했는데 그 기차 꽁지 난간을 한 손으로 잡고 장난질을 하다가 추락사고를 냈어. 즉사했어. 그런데 유체이탈로 자신의 혼백이 공중부양하는 중에 필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철로에 죽어있는 자신의 몸과 거기 모여든 사람들이 보였다네.

 그래서 저 아래 내 몸뚱이한테 내려가야지 하고 버둥댄 끝에 다시 자신의 피범벅 몸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의식이 돌아온 것이었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야속한 생존 진행이야말로 우리네 심신에 치명적인 유체이탈인 자아상실을 초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만남이란 것이 지극히 사무적이거나 이 물품, 저 물품의 거래관계거나 한 현실도 삶의 숭고성과는 먼 노릇이 아닌가.

 세월은 백대(百代)의 길손이라 노래한 저 고대의 길손 이백(李白)은 나에게는 당대의 근친(近親) 이백이기도 하네.

 한 해를 아픔으로 여의고 한 해를 또 다른 아픔으로 낳은 우리들의 새해 안부로 자네의 자취나 내 자취의 공간을 지나가는 이 시간의 동정(動靜)에 잠겨보고자 하는 까닭이 여기 있네.

 이런 감회로도 나 역시 시간에 어김없이 종속된 것을 드러내기도 하겠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 절정을 체험할 때가 있네. 가령 60여 년의 남북이산가족 상봉의 한동안에는 거기에 시간 따위가 끼어들 수 없는 ‘시간의 비경(秘境)’이 왜 없겠는가.

 아니, 한 쌍 연인의 밀회야말로 시간이고 뭐고 전혀 끼어들 수 없지 않은가.

 한 물리학자가 그의 이론을 설명할 때 행복은 같은 시간을 짧게 만들고 불행은 길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류의 정착시대 이래, 시간을 깨달은 이래 시간을 인간의 것으로 삼아온 지 오래이네. 지난 세기 상반기 ‘존재와 시간’이 탐구되었고 그 뒤로도 더 많은 시간의 해체탐구가 이어지고 있네.

 저 고대 인도의 숱한 사상 밀림을 대충 요약할 때 13대 사상으로 말하더군. 그 가운데에서 ‘시도(時道)’는 시간이 만물의 근본이고 그 만물에는 상주불변의 본체가 들어있다고 했더군.

 이것은 만물의 근원이 물이다, 불이다, 바람이다, 수(數)다 하는 그리스 자연철학과도 어금버금이겠네.

 불교는 이런 것들을 한갓 외도(外道)하고 낮추는 한편 저 우주적인 시간의 그 무시간적인 겁(劫)의 세계로부터 극소 찰나에 걸친 초시간, 초공간을 끝도 없이 드넓히고 좁히고 있네.

 이런 시간들은 기원전이다 기원이다 하는 서구 중세 시대 구분이나 그 밖의 연월일 따위로는 도저히 어림잡을 수 없네. 이른바 개자겁(芥子劫) 반석겁(盤石劫) 삼천진겁(三千塵劫)은 또 무엇인가. 5000만억 나유타 이승지겁의 삼천대천세계를 부수고 부수어 티끌을 만드는 그 시간의 무한대를 누가 시간이라 하겠는가.

 이런 판국에서 우리는 시간의 의미를 꾀죄죄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네. 우주의 한 점이라 할 이 태양계의 푸른 행성 위에서 그것을 회색행성으로 만들어가며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명영역을 탈취하는 문명 속에서 시간은 그 욕망의 도구가 되고 말았네.

 이렇게 우리가 1년이나 2월이나 3일이나 4시나 4시 반 없이 살 수 있겠는가. 이런 생존의 절대시간을 소유함으로써 그 시간의 태초 광겁의 공공성을 도리어 백일몽으로 여기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네와의 만남도 비애의 만남이기 십상이겠네.

 우리가 이어오는 현대야말로 시간을 모독하고 시간을 자아의 맹목으로 채우는 어리석음에서 얼마나 벗어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만남이라는 정신의 최고 형태인 위대한 공감이 가능하겠는가.

 시간의 간극은 우주의 어디에만 있지 않네. 우리들의 팍팍한 무정세월이도 있네. 이런 간극 사이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아슬아슬한 가치는 우애 이것 아닌가. 우애야말로 이 지상 최상의 정치이자 시 아닌가.

 자네의 휑한 눈의 적광(寂光)이 사뭇 그립네.

고 은 시인

 

 

[기도의 힘]

 

오늘 중앙일보에서 [고은의 편지] '시간은 누구의 시간인가'를 읽었다...

사람은 누구나 보고싶은대로 보고...듣고싶은대로 듣는다는 말 처럼...

'유체 이탈'이라는 어휘에 귀가 번쩍 뜨이면서 박스 속 내용이 쉽게 읽히고 기억에 남는다....ㅋㅋ... 

다른 부문은 솔직히 말해 조~금 어렵다...ㅠㅠ...

내가 알고 지내는 오랜 인연의 벗 하나가 있네. 지난날 중학교 시절 기차통학을 했는데 그 기차 꽁지 난간을 한 손으로 잡고 장난질을 하다가 추락사고를 냈어. 즉사했어. 그런데 유체이탈로 자신의 혼백이 공중부양하는 중에 필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철로에 죽어있는 자신의 몸과 거기 모여든 사람들이 보였다네.
그래서 저 아래 내 몸뚱이한테 내려가야지 하고 버둥댄 끝에 다시 자신의 피범벅 몸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의식이 돌아온 것이었네.

 

 

얼마전 평화방송에서 황창연 신부의 [죽음껴안기] 강론을 들은 내용과 흡사하므로 급 관심이 생긴 듯 하다...ㅋㅋ...

그 내용인즉...

1970년대 이후 미국은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 '천오백만명'에 대한 자료를 조사했다... 

심폐소생술이 발달하여 급격하게 소생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죽은 사람 중 5%가 소생한다....삼성 이건희 회장도 심폐소생술로 살아났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있다...

영혼이 빠져나와 죽은 본인의 육신을 보는데, 하나도 안~ 슬프다.

영혼이 잠시 머물다가 빠른 속도로 터널을 빠져나가다가, 그 끝에서 빛을 느끼는데... 평화, 사랑, 행복 등을 느낀다...

빛 속에서 한순간 자기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부끄러워서 못 본다고 한다...

빛나는 형제들, 친척들, 아름다운 꽃들, 나무들, 아름다운 음악과 향기를 10~15% 사람이 본다고 한다....

그 속에서 오고 싶지 않은데, 싱갱이를 하다가 지상에 오는데...이 때 의식이 돌아와서 살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유체 이탈...영혼이 육신을 빠져나와....터널을 거쳐 하늘나라로 간다는 공식(?)이다...

영혼이 있다는 것을 증거해주는 사회의 시스템 중 하나가...<봉쇄수도원 / 무문관>이 아닐까 싶다.....

 

 봉쇄수도원이란?

봉쇄선을 한 번 넘어가면 죽어서도 안 나오는 곳, 피붙이라도 창살을 사이에 두고서야 '면회'할 수 있는 곳....

이들이 스스로 봉쇄하는 까닭은 하느님과 1대1로 독대(獨對)하기 위해서다.

생활은 기도와 침묵에 초점이 맞춰 있다. 하루 2~3시간 '공동 휴식' 외에는 독방(獨房)과 식사·작업 때도 침묵 또 침묵한다.

가르멜여자수도원 8곳, 성클라라수도회 6곳 등 전국 20곳 280여(2013년 말 현재) 남녀 수도자가 오늘도 정적(靜寂) 속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무문관이란?

가톨릭에 봉쇄수도원이 있다면 불교엔 '무문관(無門關)'이 있다. 봉쇄수도원은 안에서, 무문관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0년까지 작정하고 들어가는 무문관에서 세상과의 통로는 하루 한 번 열리는 가로세로 30㎝ 남짓 '밥 구멍' 하나뿐.

"'生死必打破(생사 문제를 타파하겠노라)"며 자청(自請)한 독방 수감(?) 생활, 자신과 '화두(話頭)'뿐이다.

교황들이 봉쇄수도원에 기도를 부탁하고,

불교에서 무문관 선승(禪僧)들을 '에너지원(源)'이라 부르는 것은

절대 고독 속 수행과 기도의 힘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에너지원(源)'이라 부르는 기도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나는 가름할 수가 없다...ㅠㅠ...

그렇지만 절대적인 기도의 힘을 믿는 이런 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여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기도의 힘이 대단하리라 유추해본다...ㅠㅠ...

 

내 육체 속에 깃든 내 영혼...죽을 때 빠져나가는 내 영혼...그래서 본향인 하늘나라로 갈 내 영혼...

반드시 천국으로 가야되겠지...ㅎㅎ...기도 많이 해야 되겠다...ㅎㅎ...

 

(사족~ 황창연 신부 강론에 의하면...천국이 있다고 믿는 미국인이 80%...터어키 사람은 95%...한국사람은 49% 뿐이 안된다고 한다.

유독 한국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는 문화라고 한다...ㅠㅠ...)

 

 

- 2015년 1월9일 금요일...오후 6시...수산나 -

 

 

 

문경새재 조곡관(영남 제2관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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