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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 /국립중앙박물관 말채나무 등 6장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 500주기 맞아 행적 재조명 활발

 

동아일보/입력 2012-12-31 03:00:00 수정 2012-12-31 03:46:01

‘공주의 아들’ 중종반정 공 세워 가문 재건
아버지 정종 역모로 처형 뒤 세조가 궁궐로 불러들여 돌봐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 지극… 고모 ‘기별부인’ 정씨 사랑도 각별


1508년 발행된 ‘정미수 공신사패교지(功臣賜牌敎旨)’. 중종반정에 참여해 3등 정국공신에 녹훈된 정미수에게 중종이 노비를 하사한 문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공주의 아들’ 정미수(鄭眉壽·1455∼1512)가 주목받고 있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해주 정씨 대종가의 고문헌 1400여 점을 번역해 연구한 결과가 잇달아 공개되면서 핵심에 위치한 그의 존재가 부각되고 있다. 마침 올해는 그의 500주기였다.

정미수는 지난해 방송된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의 중심인물인 경혜공주(홍수현 분)와 영양위 정종(鄭悰·이민우 분)의 아들이다. 경혜공주는 문종의 외동딸이자 단종의 누이였고, 정종은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다가 발각돼 전라도 광주로 유배됐다가 능지처참됐다. 아버지의 귀양지에서 태어난 정미수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세조는 7세이던 그와 경혜공주를 궁궐로 불러들이고 그를 불쌍히 여겨 눈썹이 세도록 오래 살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미수는 세조비 정희왕후 아래서 자랐고, 세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혜공주에게 노비와 재산을 하사했다. 정미수는 대역죄인의 아들이었기에 관직에 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세조와 정희왕후의 도움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박병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는 “정치적 정당성은 물론이고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유교적 가치관, 전래의 왕실 신앙인 불교적 가치관에 비춰볼 때 경혜공주의 삶을 온전히 하는 것은 세조의 죄의식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이었다”며 “형(문종)의 유일한 혈육을 보전해야 한다는 인간적 이유도 절실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종실록’에는 그가 말년의 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들 정미수는 나이 16세로 공주가 병이 위독해지면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고, 옷은 띠를 풀지 않았으며, 똥을 맛보기까지 하면서 병을 보살폈다.”

경혜공주는 죽기 3일 전인 1473년 음력 12월 27일 유일한 혈육 정미수(당시 18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분재기(分財記)를 남겼다. 그를 아껴 재산을 물려준 조선왕실의 여인은 경혜공주뿐만이 아니었다. 고모와 외숙모의 사랑도 담뿍 받았다.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 등장하는 정종(왼쪽·이민우)과 경혜공주(홍수현)가 정미수의 부모다. 아버지의 귀양지에서 태어난 정미수는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동아일보DB

 

그의 고모는 세종대왕의 여덟 번째 아들 영응대군과 이혼한 뒤 기별부인(棄別婦人)을 자처한 춘성부부인 정씨다. 1494년 자식이 없던 정씨는 친정조카 정미수(당시 39세)에게 자신의 제사를 부탁하며 노비와 논밭을 상속했다. 그의 외숙모는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다. 정미수는 성종 조에 역시 자식이 없는 정순왕후의 시양자(侍養子)가 되기를 자청해 윤허를 받았다. 정순왕후는 정미수보다 9년을 더 살고 81세에 숨을 거두면서 노비와 재산을 정미수의 양자 정승휴에게 물려줬다. 정미수와 정경부인 전의 이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어 육촌아우 정수경의 아들 정승휴를 양자로 들였는데 그는 훗날 중종의 사돈이 된다.

‘연산군일기’에는 정미수의 됨됨이를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미수는 문종의 외손으로 용모가 풍만하고 아름다우며, 행동거지가 한가롭고 정중하여 바라만 보아도 곧 그가 왕손임을 알 수 있다. 젊어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성취하지 못하고 문사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였는데, 달통하고 민첩하며 숙련하여 벼슬을 하여도 그르친 일이 없으므로 높은 관작에 이르게 되었다.”

1506년 51세의 정미수는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에 참여해 정국공신이 되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책봉되면서 해주 정씨 가문을 재건했다. 그 밑바탕에는 조선왕실 비운의 여인들의 내리사랑이 숨어있었다.

박 교수는 “정미수는 문종의 외손자이자 중종반정의 공신으로서 조선 초기 훈구세력의 특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며 “현재 학계에서 사림파 인물에 비해 훈구파 인물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해주 정씨 고문서를 통해 훈구파 인물 연구가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해주 정씨 집안의 고문헌을 해석한 내용을 담은 ‘충(忠)을 다하고 덕(德)을 쌓다’를 ‘명가의 고문서’ 시리즈로 최근 펴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공주의 남자’ 경혜공주, 숨질 때까지 공주였다

 

동아일보/ 입력 2012-07-25 03:00:00 수정 2012-07-25 15:54:00

재산상속문서 ‘분재기’ 해주 정씨 대종가 자료서 발견
남편은 모반죄로 처형… 노비 전락說 사실무근 확인


문종의 딸로 남편인 영양위 정종(鄭悰)과 동생 단종을 비명에 잃은 경혜공주(1436∼1473)가 죽기 직전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작성한 분재기(分財記·나눠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가 발견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최근 해주 정씨 대종가에서 제공받은 고문서 1300여 점을 정리하면서 ‘경혜공주인(敬惠公主印)’이라는 붉은색 도장이 찍힌 분재기를 확인했다고 24일 밝혔다. 해주 정씨 대종가는 지난해 방영된 KBS2 드라마 ‘공주의 남자’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정종의 종가다.

가로 66cm, 세로 70.5cm인 이 분재기에는 경혜공주가 죽기 3일 전인 1473년 음력 12월 27일 유일한 혈육인 아들 정미수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 공주가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 목록을 작성해 인장을 찍은 고문서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중연은 밝혔다.

경혜공주는 분재기에서 “내가 불행히 병이 들어 유일한 아들인 미수가 아직 혼인도 못했는데 지금 홀연히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며 “노비는 갑작스러운 사이에 낱낱이 기록해 줄 겨를이 없어 정선방(貞善坊·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8방 중의 하나)에 있는 하사받은 가사(家舍·집)와 통진(지금의 경기 김포)에 있는 밭과 땅을 먼저 허락해 준다”고 썼다. 경혜공주는 또 정선방에 있는 집은 자기가 죽은 뒤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자손에게 전하며 오래 지니고 살라고 당부했다. 문서에는 문종의 서녀인 경숙옹주의 남편 반성위 강자순 등 증인 3명의 수결(手決·서명 또는 사인)도 있다.

이번에 발견된 분재기를 통해 경혜공주가 죽을 때까지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조선후기 일부 문집이나 야사에는 경혜공주가 남편 정종이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돼 모반대역죄로 능지처참된 뒤 순천이나 장흥의 관비(官婢)가 됐다는 기록이 있어 지금까지 경혜공주의 신분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다.
[출처]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국립중앙박물관 말채나무 1

 

국립중앙박물관 말채나무 2...안내문

 

국립중앙박물관 말채나무 3

 

국립중앙박물관 말채나무 4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정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정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