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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사람]싱가포르 리콴유 (李光耀) 총리

 

싱기포르 리쾅유 (李光耀) 총리
작성자    김근식(alkim5533)  쪽지 조회수 225 번  호   84379
작성일   2015-03-30 오전 11:54:59 추천수 1 반대수 0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싱가포르  리쾅유 (李光耀) 총리

             싱가포르  리쾅유 전 총리의 할아버지가 그를 영국에 유학 보내면서

             You  must  come  back  an  equal  to  the  whie  people 이라고 했다. 영국 사람이 되어서

             돌아 오라는 뜻이다.

             You  must  come  back as  an  equal  to  the  white  people 이라고 하지 않았다.

             영국 사람 같이 되어서 돌아 오라고 하지 않았다. 영국 사람 같이 되어서 돌아 오는 것과

             영국 사람이 되어서 돌아 오는 것과는 천지의 차이다.

             리광유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철저히 지켰다. 그는 후에 싱가포르의 총리가 되엇다 그리고

             그는 영국 사람 처럼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영국 사람이 다스렸다. 그는 철저히 다스렸다.

             담배 꽁초 버리는 것도 철저히 지켰다. 시민들의 불평은 컷다. 그때는 불평들을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세계적 위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서소문 포럼] 싱가포르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입력 2015.04.02 00:05 / 수정 2015.04.02 00:18

 

 

채인택
논설위원
지난주 싱가포르는 국부 리콴유(李光耀) 초대 총리의 국장을 치르면서 새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2014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만6112달러로 세계 8위라는 데 놀랐다는 사람이 주변에 많았다. 함께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불리던 나라가 어떻게 이런 부자 나라가 됐느냐는 이야기였다. 지난해 2만8739달러를 기록한 한국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살펴보니 싱가포르는 이미 2006년 3만 달러, 2010년 4만 달러 시대에 각각 진입했으며 2011년부터 5만 달러대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과 결정적으로 엇갈린 대목은 2004년 이후 새로운 전략을 채택해 경제구조를 혁신적으로 바꾸었으며 금융업·서비스업·관광업·컨벤션산업 등을 일궈 제2의 도약을 이뤘다는 점이다. 제2의 도약은 정부가 주도했다. 불황으로 2001년 성장이 2.2%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자 그해 12월 통산산업부(MTI) 산하에 경제검토위원회(ERC)를 설립해 대책을 마련했다. 위원회는 2003년 2월 단기 대처 방안과 향후 15년간 적용할 장기전략을 각각 제시했다. 장기전략의 핵심은 국가정책의 방향을 ‘효율’에서 ‘혁신’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자유무역협정(FTA) 확대, 해외 투자 유도, 기업가의 도전·창조정신 함양, 제조업·서비스업 혁신, 인재 양성 등 5대 전략이었다. 한국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다른 점은 싱가포르는 이를 행동으로 옮겨 성장세를 되찾았다는 점이다. 2004년 8.3%, 2005년 6.4%, 2006년 7.9%의 높은 성장을 이뤘다. 2009년 잠시 0.8%로 떨어졌으나 2010년엔 14.8%의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2011년 세계적 경기침체에도 5.2%의 성장을 이뤘다.

 경제 발전은 깨끗할 뿐 아니라 혁신적이기까지 한 공무원이 주도한다. 흔히 ‘정부 주도’라면 비효율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나라에선 오히려 안전성·효율성과 동의어로 통한다. 특유의 공직 시스템 덕분이다. 공무원은 공기업이나 각종 위원회·협의회 등 특수부서 근무자와 정규 부서에서 일하는 행정공무원으로 나뉜다. 특수부서 근무자는 민간기업 직원처럼 유연하게 사고하고 기민하게 행동하면서 미래 비전과 혁신 전략을 수립하는 ‘주식회사 싱가포르 기획실’ 직원이다. 행정공무원은 국가 전략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책임지는 ‘관료형’ 공직자다.

 이들이 가장 일관성 있게 유지해온 것이 기업과 부자에게 관대한 정책이다. 법인세는 주요 국가 최저 수준인 1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25.9%보다 한참 낮다. 프랑스가 부자증세를 위해 75%까지 높이려다 포기한 최고 소득세율이 이 나라에선 20%에 불과하다. 기업과 투자를 유치하려는 국가전략의 일환이다. 선진국 글로벌 기업 7000여 개, 중국계 기업 1500여 개, 인도계 1500여 개가 아시아 본부나 글로벌 본부를 싱가포르에 두고 있다. 삼성전자에 도전장을 낸 중국 스마트폰업체 샤오미가 글로벌 영업본부를 싱가포르에 설치한 것은 이런 이유가 있어서다. 이렇게 유치한 외국 기업은 일자리의 44%를 제공해 실업률을 2%로 유지하는 주춧돌이 되고 있다.

 물론 싱가포르도 사회문제가 적지 않다. 홍콩과 미국에 이어 전 세계에서 가계수입 불평등이 가장 심한 것이 대표적이다.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최저임금제도도 도입하지 않았을 정도다. 보편적 사회보장 시스템도 없다. 정부는 성장의 기회를 제공할 테니 생계는 개인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한 싱가포르 친구는 “한국인들은 ‘빨리빨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싱가포르인들은 ‘나는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지 자선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에 익숙하다”고 귀띔했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비즈니스를 성공시켜야 하는 철저한 ‘능력주의’ 사회 풍토가 엿보인다. 최근 극빈층 의료보호제도가 생기는 등 변화의 조짐이 있다고 한다.

 경제성장과 사회 변화 등 한국과 싱가포르는 비교되는 게 한둘이 아니다. 민주화와 사회 발전에선 한국이 앞섰다고 자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나름의 비전으로 미래 생존전략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어떤 구체적인 생존전략으로 미래를 개척하려 하는가.

채인택 논설위원

 

 

[리콴유 장례식] 巨人은 구두닦이한테도 인생을 배웠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입력 : 2015.03.30 03:06 | 수정 : 2015.03.31 14:23

[리콴유, 단골 日 帝國호텔의 긴짱과 21년 光낸 우정]

-日 만행 잊지 않았지만…
"자기 일에 자부심 가져… 그게 일본의 성공 이끌어"

-"처음엔 총리인 줄 몰랐다"
보디가드 없이 혼자 와… 엄격해 보이지만 따뜻한 분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 총리가 생전 일본에 올 때마다 단골로 찾던 도쿄 데이코쿠 호텔 슈샤인 코너의 주인장‘긴짱’이 작업 중 싱긋 웃으며 카메라를 보고 있다.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 총리가 생전 일본에 올 때마다 단골로 찾던 도쿄 데이코쿠 호텔 슈샤인 코너의 주인장‘긴짱’이 작업 중 싱긋 웃으며 카메라를 보고 있다. 42년동안 이곳에서 구두를 닦아온 그는 "처음엔 고인이 보디가드도 없이 혼자 구두를 닦으러 와서, 그런 높은 사람인 줄 몰랐다"고 회상했다. /김수혜 특파원
125년 된 최고급 호텔 지하에 '긴짱(キンちゃん·82)'이 앉아 있었다. 도쿄 도심 데이코쿠(帝國)호텔 아케이드 맨 구석, 엘리베이터와 꽃집 사이 '슈사인(shoeshine) 코너'다. 91세로 타계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내가 만난 특별한 일본인"으로 그를 꼽았다. 이유가 뭘까.

요금은 1000엔, 소요 시간은 8~20분이다. 긴짱에게 발을 맡기고 "고인과 어떤 인연이냐"고 물었다. 그는 "일본에 올 때마다 꼭 들르셨다"고 했다. 둘은 1994년 처음 만났다. 마지막은 3년쯤 됐다. "처음엔 총리인 줄 몰랐어요. 유명한 사람은 구두만 내려 보내는데, 그분은 보디가드도 없이 혼자 오셨거든요."

리 전 총리는 젊은 날 목격한 일본군의 만행을 평생 잊지 않았다. 책도 썼다. 그러면서도 싱가포르 국민에게 "일본인의 근면은 배우라"고 당부했다. 그가 별세한 이튿날(24일) 아사히신문에 추모 글이 실렸다. 그를 여러 번 인터뷰한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 전 주필이 썼다. "고인이 단골 숙소 데이코쿠호텔의 구두닦이에게서 일본의 장점을 봤다"는 대목이 있었다.

리 전 총리는 1999년 닛케이신문에 회고록을 연재하며 긴짱 얘기를 썼다. "일본 문화는 자기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1994년 데이코쿠 슈샤인 코너에서 2인조를 만났다. 지금껏 본 적이 없을 만큼 구두를 말끔히 닦았다. 일본인은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뭔가 할 때 자기 능력의 최대한까지 한다. 그것이 일본의 성공을 이끌었다."

긴짱은 "고인을 처음 뵌 날 그저 말 없는 신사인 줄만 알았다"고 했다. 그는 구두를 보면 어느 나라 구두인지, 어떤 메이커인지 금세 안다. 때로 신는 사람 성격까지 보이곤 한다. "제가 '손님, 영국제 처치 구두군요' 했더니 '메이커까지 알아보느냐?'고 놀라셨어요. 사실 저는 메이커만 알아보는 게 아니라 메이커에 따라 구두약도 달리 써요."

그는 특제 양념을 자랑하는 요리사처럼 스무 개 넘는 구두약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이건 영국 구두 닦는 약, 이건 프랑스 구두 닦는 약…."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도 지금 기자가 앉은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재미나게 들었다. 끝난 뒤 "정말 잘 닦았다"고 흡족해했다. 긴짱이 "팁 주는 손님보다 '굿 잡(Good job)'이라고 해주시는 분이 좋다"고 했다. "그분은 '생큐' 하고 악수까지 하셨어요. 엄격해 보이지만 따뜻한 분이었어요."

긴짱은 중학교 졸업 후 후쿠오카에서 영사 기사로 일했다. 프레드 애스테어가 현란하게 탭댄스 추는 영화를 보고 '구두와 관련된 일을 하리라' 결심했다.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로 일하며 침을 '칵' 뱉어서 구두 닦는 법을 배웠다. "요샌 물로 닦아요." 도쿄 시내 다른 건물에서 일할 때 훗날 데이코쿠 사장이 된 단골이 "우리 호텔로 오라"고 했다. "일본 제일의 구두닦이가 필요하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 뒤 42년간 이 자리를 지켰다. 일본 출장을 기다려 신발장 속 구두를 모조리 싸오는 미국 단골도 있다. 5년 전 아사히가 그를 인터뷰했다. 그는 "마음을 담아서 닦으면 신발이 응답해준다"고 했다. "구두를 닦는 10분 동안은 세계 일류를 독점할 수 있다"고 했다. 관두고 싶었던 적은 없을까. 그는 "없다"고 했다.

2010년 일본 작가 무라마쓰 도모미(村松友視)가 '데이코쿠호텔의 불가사의'라는 책을 썼다. 이후 일부러 찾아오는 젊은 손님들이 생겼다. 데이코쿠는 1박에 최소 4만9000엔이다. 여기 묵을 처지는 못 되지만, 1000엔 내고 '리콴유가 인정한 구두닦이'와 인생 얘길 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중 한 명이 블로그에 "감동했지만, 우리 세대와는 상관없다"고 썼다. 긴짱은 허허 웃었다.

수십년치 일본 기사 어디에도 그의 본명이 없었다. 그는 이름을 가르쳐줬다. 신문엔 쓰지 말라고 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저는 평생 '슈사인 긴짱'으로 알려지고 살아왔어요."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헤럴드경제=인터내셔널섹션]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와 우리나라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닮은꼴 지도자로 소개돼 이목이 쏠린다.

미국의 경제지인 포브스는 29일(현지시간) 박근혜 대통령이 리콴유 전 총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을 소개한 뒤 리 전 총리가 박 대통령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닮은 곳이 있다고 전했다.

포브스는 두 지도자의 공통점에 대해 먼저 외관상으로 민주주의를 믿지 않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리 전 총리는 자신이 만든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의 정적들을 감옥에 보내고 언론에도 재갈을 물리는 등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사진=게티이미지

박 전 대통령도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를 체포와 고문, 수감을 위한 기구로 활용하고, 유신헌법과 비상계엄령 등을 통해 점차 자신의 통제권을 강화해 나갔다고 소개했다.

두 지도자의 두 번째 공통점은 경제적 성공 모범 사례를 만들어 역사에 자리매김한 것이라고 매체는 전했다.

리 전 총리는 일본의 지배와 영국의 철수로 말미암아 힘들었던 싱가포르를 세계적인 수준의 기본시설을 갖춘 나라로 변모시켰다고 평가했다. 매체는 리 전 총리가 싱가포르를 지배했던 말레이시아 지도자들과 맞서면서 중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싱가포르를 경제·금융 중심지로 키워나갔다고 전했다.

포브스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재벌을 활용해 경제발전을 일궜다고 소개했다. 재벌을 감독·지도해 이들이 자동차, 조선, 전자기기 등을 만들어 미국, 영국, 일본의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포브스는 특히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인 삼성, 현대, LG, SK 등은 박 전 대통령의 추진력과 안목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포브스는 두 지도자가 남들이 예상하지 못한 극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차지한 점도 비슷하다고 소개했다.

리 전 총리는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를 통해 1인자로 올라섰다. 포브스는 리 전 총리가 박 전 대통령을 6차례 방문했다는 사실도 전하면서 그가 박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감탄했다고 덧붙였다.

ygmoon@heraldcorp.com

 

 

 

“리콴유 키즈 이후 20년 뒤가 걱정” 정치민주화 숙제 떠안은 싱가포르

입력 2015-03-31 03:00:00 수정 2015-03-31 16:41:57

[포스트 리콴유, 싱가포르의 고민]
기로에 선 ‘경찰국가’


싱가포르 사람에게 “리콴유 전 총리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은 없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10명 중 9명은 “없다”고 답한다. 리 전 총리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대해 “경제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여서 리더십을 흔들면 망한다”며 이해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싱가포르의 권위주의 통치는 널리 알려져 있다. 곳곳에 사복경찰이 돌아다니고 폐쇄회로(CC)TV가 촘촘히 설치돼 있다. 한 싱가포르인은 “주변에 감시 카메라가 보이지 않아 담배를 피웠는데 누군가 다가와 벌금을 물렸다. 사복경찰이었다”고 말했다.

언론 통제도 엄격하다. 헌법상 언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하위 법인 국가안보법에서 민감한 주제나 조화를 해치는 토론을 금지하고 있다. 난양이공대(NTU) 언론학과 앙펑화 교수는 “언론은 모두 국가 소유이며 인터넷에 대한 검열법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30일 리 전 총리를 비판하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애머스 이(17)가 선동방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마침내 리콴유가 죽었다’라는 제목의 8분짜리 동영상에서 “리콴유는 지독한 독재자였지만 자신을 민주적인 인물로 여기도록 사람들을 속여 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토론 사이트인 ‘온라인시티즌’의 게시 글에는 “리 전 총리의 유산에 대해 다양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반박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교육도 통치에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3년 전 싱가포르에 온 한 교민은 “싱가포르는 초등학생에게 태형 집행 장면이 담긴 영상을 보여 주고, 중학교 때부터 리 전 총리의 업적을 부각시킨 싱가포르 근대사를 가르친다. 자연스럽게 국가에 대한 자부심, 복종 의식 등을 심는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의 권위주의 통치는 이제 변화의 시점을 맞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키쇼어 마부바니 전 유엔 주재 싱가포르대사는 25일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는 그동안의 성장에 감사하지만 새로운 정치적 분위기를 원한다”고 지적했다. 민심의 변화를 반영하듯 2011년 총선에서 집권당인 인민행동당(PAP)은 역대 최저인 60.1%를 얻는 데 그쳤다. 이에 리셴룽 총리는 국민의 의견을 자주 듣는 등 ‘대화의 리더십’을 추구하고 있다.

엔지니어로 일하는 게리 청 씨(48)는 “리 총리 등 ‘리콴유 키즈’들이 싱가포르를 주도할 향후 20년은 걱정이 없다. 문제는 그 후”라며 “다양한 정치적 요구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지가 싱가포르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NYT는 “싱가포르가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 경제 모델뿐 아니라 정치 모델에서도 민주화를 이뤄야 할 때”라고 전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지난 3월 23일 새벽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인 리콴유 전 총리가 타계했습니다. 전 세계 많은 대통령과 총리 등 국가 정상들과 국빈급 인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싱가포르를 방문해 장례식에 참석했던 점을 봐도 그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추앙받는 훌륭한 지도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서울 면적의 1.8배에 불과한 좁은 땅덩어리에 자원도 인구도 버젓이 없는 작은 섬나라 싱가포르. 개인소득이 400달러에 불과했던 이 가난한 항구도시를 아시아 최고인 5만 6000달러로 끌어올려 세계적 국가로 만든 그에게 재미있는 면이 있습니다. 바로 너무 껌을 싫어했다는 것이죠. 영국 BBC 뉴스는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기사를 냈습니다.

☞ 링크 바로가기< Why Singapore banned chewing gum>  

아시아의 위대한 거장, 리콴유와의 대화(Giants of Asia: Conversations with Lee Kuan Yew)를 집필한 칼럼니스트 플레이트는 리콴유 전 총리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회고합니다.



"껌을 씹는 것은 반유토피아적인 행동이고 아주 바보같은 짓입니다. 껌 씹는 것은 아주 역겨운 악행이며 싱가포르가 발전하는데 가장 실제적인 위협이자 적입니다. 유토피아 싱가포르를 건설하는데 방해가 되는 껌을 처단하는 길은 한가지뿐이었죠. 바로 껌 씹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해 법으로 막는 것입니다. "

리콴유 전 총리는 1990년에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향력을 행사해 1992년 싱가포르 정부가 껌 판매를 아예 금지할때도 적극 찬성하며 강하게 의견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2000년 영국 BBC 방송의 피더 데이와의 인터뷰에서도 리콴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싱가포르는 (너무 청결을 강조한 탓에) 보모의 국가라는 놀림을 받기도 하죠. 하지만 결과는 30년전에 보다 훨씬 쾌적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됐다는 것입니다.”

리콴유는 당시 상업과 금융업 분야에서 창의력을 꽃피우자라는 캠페인을 막 벌이고 있었고 인터뷰를 진행한 피더 데이는 길거리 보도블록에 붙은 껌딱지가 엄혹한 규제속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이 속박된 싱가포르의 사회에 일종의 창의력이 발현되는 징조로 볼수 있지 않냐고 질문했습니다.

리콴유는 이 질문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습니다. “지하철 문에 껌을 붙이는 시민들의 행동으로 지하철 문이 닫히지 않는 사고가 종종 발생합니다. 껌을 지하철 문에 붙이는게 창의적인 발상이나 자유로운 사고의 표현일까요? 그건 그냥 짓궂으면서 사회를 어지럽히는 나쁜 행동입니다. 껌을 씹지 않아서 창의적인 생각이 잘 안 난다구요? 그러면 껌 대신 바나나를 드세요." (If you can't think because you can't chew, try a banana)

파이낸셜 타임스도 재밌는 기사를 냈는데요, 지금도 싱가포르에서는 지난 2004년 미국의 껌 제조회사 '리글리'의 로비로 당분이 없는 의약용 제품이 일부 제한적으로 판매가 허용되는 것 이외에는 여전히 일반적인 껌 판매가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습니다.

☞ 링크 바로가기 

껌판매 금지 조치 당시 관련됐던 한 전직 공무원은 지난주 타계 직전 "껌이 잇몸 건강에 좋으며 그래서 의약용으로 사용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당시 조치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고 파이낼셜 타임스가 전했습니다.



사실 작은 섬나라를 세계적인 교역의 허브로 만들 야심찬 계획을 가진 리콴유는 청결과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국민성을 고집했습니다. 리콴유는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싫어했습니다. 쓰레기 투기와 길거리 낙서, 노상 방뇨는 물론 가래침은 물론 그냥 침을 뱉는 것 자체도 시민들의 모든 더러운 행동을 경멸했습니다. 공중 도덕을 제 1의 덕목으로 여긴 리콴유는 이 모든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엄청난 벌금을 부과하는 법을 시행했습니다. 심지어는 공중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뒤 물을 내리지 않는 행동도 벌금이나 태형(caning sentence, 곤장을 맞는것) 대상이었습니다.

쓰레기 투기 금지 조치에도 문제가 해소되지 않자 벌금은 계속 인상돼 첫 적발됐을때는 2,000싱가포르달러(약 160만원), 두번 이상 적발된 경우는 이보다 5배 많은 벌금을 현재 부과합니다. 지난 1월에는 아파트 창문 밖으로 담배 꽁초를 던져버린 시민에게 역대 사상 최고인 벌금 1만 9,800싱가포르달러(약 1600만원)가 부과됐다고 합니다.

청결한 도시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한 강한 법치로서의 규제. 이런 이미지로 각인되는 싱가포르는 외국 기업 1만여개, 세계 유수 은행들이 200여개나 진출해 있는 세계적인 금융 무역 물류 유통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싱가포르는 최근 인구가 급감하고 있다고 합니다. 출산율이 최하위권으로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다른 나라로 이민가는 인구가 늘고 있다네요.

아마도 껌을 씹지도 못하고 함부로 껌을 길거리에 뱉기만 해도 곤장으로 맞는 이 과도한 법치가 후유증을 낳는것은 아닐런지. 자유분방함, 해방, 일탈을 꿈꾸는 문명인의 욕구에 배치되는 과잉 규제, 조금은 느슨한 규제속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싱가포르 시민들이 숨통을 조이는 벌금과 태형에서 도망가고 싶어해서 그런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출처]KBS 인터넷뉴스/김학재 기자/입력2015.03.31 (09:34)

 

한겨레신문 [세상 읽기] 리콴유, 에어컨과 민주주의 / 이강국

 2015.03.30 1등록 8:56

얼마 전 별세한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성공을 가져다준 한 요인으로 에어컨을 들었다. 그는 총리가 되자마자 공무원들이 일하는 건물에 에어컨을 달았고 그것이 정부의 효율성을 높였다고 말했다. 효율적인 정부를 세워 싱가포르를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로 이끈 리콴유의 실용주의를 잘 보여준다.

싱가포르의 기적도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국가의 적극적인 경제개입이 결합된 실용적 모델 덕분이었다. 싱가포르는 낮은 세금과 경제개방으로 세계의 기업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교육과 산업 발전을 위해 전략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정부가 80% 이상의 국민들에게 공공주택을 제공하며 항공사에서 동물원까지 여러 공기업들을 소유·관리한다. 싱가포르의 경제발전은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기초하고 있다. 성장의 이면에서 리콴유는 아시아의 가치와 문화를 강조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눌러왔다. 그의 아들이 현재 총리이고 가족들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은 금지되어 있고 언론자유도 없는 나라. 덩샤오핑에게 개혁개방의 모델이 되었던 싱가포르는 권위주의에 기초한 번영을 꿈꾸는 중국에 다시 미래의 모델이다.

리콴유 사후 한국에서도 부패를 척결하고 비전을 실천한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다. 심지어 자유를 유보해서라도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마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과거 싱가포르와 한국은 개도국에서는 독재가 성장에 도움이 되고 민주주의는 사치품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을 보면 권위주의가 성장률을 높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적 변화를 고려한 경제학의 최근 실증연구들은 민주주의의 발전이 경제성장을 촉진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러 학자들은 혁신과 성장의 촉진을 위해 부와 권력의 집중을 막는 민주적이고 포용적인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싱가포르는 다른 독재정권들과 달리 청렴하고 발전지향적인 정부의 주도하에 경제성장의 혜택을 모두가 공유하며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최근 싱가포르는 빈부격차와 부의 집중이 심각해져 우려를 던져주고 있다. 나라는 부자인데 많은 노동자들은 가난하여 상대적 빈곤율이 무려 20%를 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부는 공식적 빈곤통계조차 발표하지 않고 있다. 또한 2000년대 이후 소득불평등이 악화되어 2014년 상위 10% 가구의 소득이 하위 10%에 비해 18배나 된다. 그러나 정부의 재분배 기능은 미약하여 가처분소득 기준 지니계수가 0.412로 다른 선진국들보다 훨씬 높다. 인구의 4분의 1이 넘게 늘어나고 있는 열악한 처지의 외국인 노동자들도 갈등의 씨앗이다. 실업보험도 없을 정도로 인색한 싱가포르 정부가 2007년부터 빈곤층을 위한 지출을 늘렸고, 올해 부자들의 최고소득세율을 20%에서 22%로 인상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불만과 변화의 기운은 이미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당은 지난 2011년 총선에서 역대 최저인 60%의 득표율을 얻었고 이후 보궐선거에서도 패배했다. 여전히 여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 높지만 정치체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리콴유 사후, 이러한 변화의 요구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이제 싱가포르도 사회안전망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고 좀더 평등한 발전모델을 추구해야 할 때다. 지속적 성장을 위해 성장의 과실과 권력을 시민들 모두와 나누는 노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리콴유가 떠난 지금 싱가포르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에어컨이 아니라 더 많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다.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사람·문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인 리콴유의 죽음을 보는 아시아 주요 매체의 시각
(미디어원=구윤정 기자)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 총리가 향년 91세로 타계했다.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싱가포르는 올해 독립50주년을 맞는다. 리 초대 총리는 불모지였던 작은 땅 싱가포르를 아시아 경제 강국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라 평가받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뉴스트레이트 타임즈>(The New Straits Times)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와의 민족성·정체성 차이 때문에 한 나라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싱가포르정부에게 2년 뒤 말레이시아에서 분리 독립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리콴유는 국영방송을 통해 싱가포르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는 리콴유가 남긴 정치적 후회 중 하나로 꼽는다.”고 보도했다.
 
중국의 <인민일보>(The People’s Daily)의 경우, 리 전 총리의 타계소식과 장례식 일정 등을 비교적 짧게 보도했다. <인민일보>“25일부터 28일까지 의사당에 안치돼 오전10~8시까지 국민의 조문을 받을 예정이며, 장례는 29일 오후 2시 싱가포르대학교 문화센터에서 국장으로 치러진다고 보도했다. <아시아엔>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중국 주요매체 보도 원문을 싣는다.
 
싱가포르 <스트레이트타임즈>(The Straits Times)
 
리콴유 전 총리는 여론이나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다. 그가 추진했던 정책들의 결과가 끝내 결실을 맺었을 때에야 시민들이 자신을 돌아봐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 전 총리를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책 <리콴유>에 따르면, ‘나는 매우 완강한 사람이다. 만약 어떤 일을 해야겠다고 결정하면, 내 영혼과 마음을 다해 밀어붙인다. 모든 사람이 나에게 등을 돌려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대로 진행한다. 이것이 리더가 해야 할 일이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발언대] 敵의 무덤에도 꽃을 뿌린 리콴유

  •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동남아학
  • 입력 : 2015.03.31 03:00

     

    지난 3월 23일 타계한 리콴유 초대 싱가포르 총리에 대한 추모 열기가 동남아 전체에서 계속되고 있다. 한때 적국이었던 인도네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고 리콴유 총리가 인류 사회의 공동 번영에 공헌한 것은 물론 싱가포르를 선진 국가로 발전시키고 인도네시아의 가까운 친구였음을 강조했다.

    동남아의 언론 매체들은 연일 리콴유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유력 일간지 콤파스(Kompas)는 24일자 1면에 리 전 총리가 자카르타의 칼리바타 영웅추모공원을 방문해 꽃을 뿌리는 장면의 사진을 싣고 이런 설명을 달았다. "리콴유 총리가 1968년 싱가포르에서 교수형을 당한 인도네시아의 두 해병 우스만(Usman)과 하룬(Harun)의 묘역에 꽃을 뿌리고 있다. 1973년 리콴유가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싱가포르 방문을 희망했을 때 수하르토는 두 해병에게 꽃을 바치라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 리콴유는 (기꺼이) 이 조건을 받아들여 1973년 5월 28일 칼리바타를 방문했다."

    두 해병의 죽음은 수카르노 초대 인도네시아 대통령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카르노는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를 표방하며 비동맹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1963년 9월 싱가포르와 북부 보르네오 두 지역을 포함한 영연방 말레이시아가 전격 출범하자 이를 비동맹운동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그는 즉시 대결 정책을 선언하고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에 특공대를 보냈다. 싱가포르에 잠입한 두 해병은 1965년 3월 10일 오차드가의 맥도널드하우스에 폭탄을 장치해 33명의 사상자를 낸 뒤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66년 수하르토가 집권한 후 두 나라 사이의 대결 정책이 공식 종결되자 인도네시아 신정부는 리콴유에게 두 해병에 대한 사형 재고를 요청했다. 그런데도 리콴유는 1969년 교수형을 강행했다.

    싱가포르는 거대한 말레이 문화권의 바다(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 떠 있는 작은 섬나라다. 리콴유가 이 도시국가를 이끌면서 가장 우위에 둔 정책은 국가의 생존 전략이었다. 이를 위한 원칙과 결단에는 어떠한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감수했다.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고 그 바탕 위에 선린과 경제 발전을 두었다. 적을 처형했으나 그 적의 무덤에 꽃을 뿌린 것도 그의 이런 국가 경영 철학이 바탕이 된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입력 : 2015.03.31 03:00 | 수정 : 2015.03.31 08:57

    자신의 블로그에 애도 표시
    리콴유와 평생의 라이벌… 말레이반도 현안 놓고 대립

     

    지난주 타계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와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마하티르 모하맛(89)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리콴유의 죽음에 애도를 표시했다.

    두 사람은 말레이반도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했지만, 영국 식민통치에 시달린 두 나라를 빠르게 현대 국가로 발전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리콴유가 두 살 많다.

    마하티르는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리콴유와 나'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리콴유와 가까운 친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죽음에 슬픔을 느낀다"며 "아시아가 훌륭한 지도자를 잃었다"고 적었다.

    그는 "(리콴유와 나는) 논쟁을 하면서 여러 번 서로 칼을 부딪혔지만 적대감은 없었다. 새로 탄생한 각자의 국가에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견해가 달랐을 뿐"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충돌한 사건은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떨어져 나왔던 일이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마하티르는 "리콴유가 중국계 등 연방 내 소수 인종을 대변하면서 연방을 분열시킨다"며 싱가포르를 내쫓으려는 움직임에 앞장섰고, 싱가포르의 자치정부 총리이던 리콴유는 마하티르에 대해 "말레이족만 우선시한다"며 비난했다. 결국 싱가포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양국 간 현안이 있을 때마다 서로를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1989년 마하티르가 심장 수술을 받게 되자 리콴유가 호주에 사는 싱가포르인 심장 분야 권위자에게 수술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하는 등 인간적 차원에서는 앙금 없이 교류했다고 마하티르는 소개했다. 당시 수술은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여서 마하티르가 다른 의사의 집도로 수술을 마쳤다.

    
	2005년 4월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에서 리콴유(왼쪽) 전 싱가포르 총리와 마하티르 모하맛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

     
     
    2005년 4월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에서 리콴유(왼쪽) 전 싱가포르 총리와 마하티르 모하맛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 /AP 뉴시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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