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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아산상 대상 받은 곽병은 원장 / 은방울꽃 4장



주간조선 [2283호] 2013.11.25  피플 / 조성관 편집위원


“치료의 50%는 환자의 마음을 여는 것 돈벌이가 아니라 목적의식 있는 의사 돼야”

아산상 대상 받은 곽병은 원장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원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원주의 슈바이처’를 곰곰이 생각했다. 사회복지 분야의 최고상으로 평가받는 아산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곽병은(60) 갈거리사랑촌 원장. 신문에서는 모두 그를 ‘원주의 슈바이처’라고 표현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슈바이처 박사에 비유할까.
   
   지난 11월 15일 곽병은 원장과 인터뷰를 하려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아산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인터뷰 건으로 전화 통화 부탁드립니다.’ 한 시간 뒤에 답신 문자가 왔다. ‘죄송하지만 인터뷰는 어렵겠습니다.’ 통화도 못해 보고 인터뷰를 거절당했다. 무안했다. 기자는 아산재단 관계자에게 자세히 설명하면서 “곽 원장이 시간을 두고 인터뷰 여부를 좀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11월 18일 곽 원장과 통화가 됐고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그는 “곧 출간되는 책 원고를 손보는 일이 많아 인터뷰를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화 통화에서 “병원이 원주시 중앙동 국민은행 건너편에 있으니 찾기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에 보도된 사실을 종합하면 그가 아산상을 받게 된 업적은 이렇다. 중앙대 의대 시절부터 봉사활동을 했다. 국군원주병원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는 노인요양시설과 지적장애인시설을 찾아 자원봉사를 했다.
   
   1989년 의사인 부인과 함께 강원도 원주시 중앙동에 부부의원을 열었다. 원주교도소 의무과장도 맡았다. 1991년 사재 5000만원으로 ‘갈거리사랑촌’을 열었다. 그는 이곳에서 갈 곳 없는 장애인과 노인들을 돌봤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겨울, 그는 노숙인을 위해 중앙동에 무료급식소 ‘십시일반’을 열었다. 200원을 받고 백반 점심을 제공하는 공간이 십시일반이다. 노숙인의 자립을 돕는 원주노숙인센터를 세우기도 했다. 지금까지 원주노숙인센터를 거쳐간 노숙인만 연인원 140만명에 이른다. 노숙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갈거리협동조합도 세웠다.
   
   11월 19일 오후, 약속장소인 밝음병원 로비 대기실에 들어섰다. 잠시 로비를 둘러보는데 곽 원장이 쓴 시 ‘아버지’가 액자로 걸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의 방 문에는 ‘제1진료실 원장 곽병은’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놀란 점은 그의 얼굴이었다. 얼굴빛이 윤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건조했다. 적어도 얼굴만 놓고 보면 성공한 의사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또한 그는 의사가운을 입지 않았다. 당연히 의사가운 포켓에 꽂혀 있는 필기도구도 보이지 않았다. 의사라고 소개하지 않으면 그냥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로 보일 법한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다. 그의 진료실에는 3면에 자연풍경 사진 여러 점이 붙어 있었고, 그의 데스크톱 컴퓨터의 바탕화면에도 자연풍경이 슬라이드쇼로 펼쳐지고 있었다.
   
   “출퇴근할 때 항상 원주천 둔치를 걷습니다. 원주천 둔치를 아침 저녁으로 걸으면서 10년 동안 사진을 찍어 왔죠. 예전에는 디카로 찍다가 요즘은 휴대폰으로 찍습니다. 냇가를 걸으면 좋은 게 많아요. 명상할 수 있어서 좋고, 자연과 접해서 좋고요. 멀리 갈 필요도 없어요.”
   
   ‘원주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그는 군복무 외에 원주와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일까. 대답은 의외였다. 그가 태(胎)를 묻은 곳은 경기도 이천군 마작면 오천리, 부인 임동란씨의 고향은 서울 마포. 부부는 원주와 어떤 혈연적 관계도 없었다.
   
   “원주에서 군복무를 한 인연이 저를 원주와 맺어주었습니다. 선산도 아예 이천에서 원주로 다 옮겼어요. 제가 살고 있는 곳은 흥업면 대안리 ‘갈거리사랑촌’ 마을 건너편이죠. 갈거리에는 원래 여덟 가구가 있었는데 전부 떠나고 제가 갔을 때는 한 가구만 남아 있었죠. 갈거리는 칡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에요.”
   
   그는 중앙대 의대 출신이고, 부인은 이화여대 의대 출신이다. 고향도 다른 의사 부부가 원주에 와서 터를 잡은 지 25년이 지났다. 한 사람의 뜻이 아무리 좋아도 배우자가 호응하고 뒷받침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지금은 보훈병원으로 바뀐 국군원호병원에서 수련의 1년차일 때 아내를 만났죠. 1979년 결혼했는데 이미 그때 의사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말고 중류생활을 하는 데 만족하며 봉사하는 인생을 살자고 했죠.”
   
   상류생활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어 있는 사람이 스스로 상류생활을 마다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돈 잘 벌고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 의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대다수다. 이것은 부모의 바람이다. 언론에는 심심찮게 일부 의사들이 저지른 갖가지 비리가 보도된다. 탐욕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의사들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양심을 저버린다.
   
   “아내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죠. 제가 설득했고 결국 마음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원래 착한 사람인데, 저 때문에 더 착해졌습니다.(웃음) 사실 자녀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어려울 게 없습니다. 우리는 일찍부터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노라고 자식에게 선언했습니다. 부부가 자동차 한 대씩 있고, 노후생활 할 돈 있고 가끔 해외여행 할 정도면 된 거 아닙니까?”
   
   의사인데 그는 왜 가운을 입지 않을까? 가운을 입지 않은 채 진료를 하는 의사를 본 적이 없다.
   
   “우선은 귀찮아서 가운을 입지 않습니다. 가운을 입으면 넥타이를 매야 하잖아요. 넥타이도 거의 매본 적이 없어요. 또 다른 이유는 환자들에게 동네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보이기 위해서예요. 제가 이대로 밖에 나가면 노숙인인 줄 아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그는 언제부터 의사로서 사회봉사를 생각했을까.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인데. 맛난 거 먹고 등 따스운 걸 좋아하는 게 사람의 본능 아닌가.
   
   선친 곽한근(1932~2004)은 의사였다. 서울대 의대를 나온 곽한근은 서울 서대문의 독립문 교차로 부근 대로변에서 현제병원을 운영했다.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술도 무료를 해주곤 했죠. 의사로 활동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애쓰셨어요. 친할머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성당에서 연령회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신자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주는 일을 헌신적으로 하셨습니다. 시신을 닦아주고 염하는 일을 맡아 하셨어요.”
   
   부모 중 한 사람이 의사면 자녀들 중에 의사를 택하는 사람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는 4남매 중 장남인 병은에게 의사의 길을 권했던 것일까.
   
   “아버지는 내가 의사가 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농대에 진학해서 나무를 심으면서 나무처럼 살라고 했지요. 의사는 정신적·물질적으로 힘든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의사가 되어 사회에 봉사하는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할머니의 선행과 아버지의 봉사정신이 제게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2004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장남은 틈틈이 아버지를 그리는 편지를 썼다. 수신인은 있지만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장장 3년간 써왔다. 그는 3년 탈상(脫喪)을 하는 날 편지 쓰기를 멈췄다. 그는 “편지를 그대로 두려니 아까워서 책으로 묶었다”고 말한다. ‘그리운 아버님’이다.
   
   그가 의대를 선택하는 과정이나 의사가 되어 걸어온 길은 요즘의 세태에 비춰 보면 무척 낯설다. 이과생 중 수능 성적 1등부터 전국의 의대를 다 채운 뒤 공대를 선택한다는 입시 트렌드가 정착된 지 오래다. 명문대 공대 1학년생들조차 의대를 가기 위해 반수하는 숫자가 상당하다.
   
   “대학에 가서 자주 특강을 합니다. 요즘은 공부 잘하고 특목고 나와 실력이 되니까 의대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아요. 의사로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목적의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dd></dd> <dd class="use_caption">▲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dd>


   인생을 살다 보면 직간접으로 의사를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는 의사가 환자 얼굴도 보지 않고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며 진료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드물게는 환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의사를 접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의사라는 직업은 머리가 좋은 사람보다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하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군의관 시절을 포함해 30년 이상 환자를 마주하는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저는 환자에게 박수를 치라고 권합니다. 그러면서 웃게 만듭니다. 한번 웃게 되면 의사와 환자 사이에 교류가 생깁니다. 치료의 50%는 환자의 마음을 여는 것이고 나머지 50%는 의술이 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환자 얼굴도 안 보고 진료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로봇입니까? 그렇게 하면 치료의 한계가 옵니다.”
   
   인터뷰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그의 책상 뒤편으로 이상한 물건이 보였다. 검정색으로 된 깔대기 같기도 하고 메가폰 같기도 한 물건! 그는 웃으며 이렇게 설명했다.
   
   “아, 이거요. X레이 필름을 가지고 만든 겁니다. 노인 환자들에게 주로 사용하죠. 노인 환자들은 대개 귀가 잘 안 들리잖아요. 어디 아프시냐고 큰소리를 치면 목이 아파서 진료를 하기가 힘들어요. 이걸 귀에다 대고 여쭤보면 금방 의사소통이 됩니다. 노인이 되면 다 외로워요. 저는 병원이 노인들에게 노인정 역할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호원이 노크를 했다. 예약한 환자가 대기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그가 기자 일행에게 잠시만 자리를 비켜 달라고 했다. 진료실을 나가는데 제2진료실 원장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부인 임동란이었다. 임동란 원장의 진료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환자 진료가 끝나고 다시 그와 마주 앉았다. 부인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제가 의대에 진학하니까 아버지께서 의사 부인을 얻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의사 부인을 얻으면 나쁜 점도 있겠지만 같이 의지하고 이해하고 서로 도울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었죠. 그래서 의사 아내를 찾았죠.”
   
   그가 국립원호병원 레지던트(수련의) 1년차인 1978년이었다. 새로 들어온 인턴 중에 두드러진 여성이 보였다. “스타일 좋고 예쁘고 인간관계 좋은 인턴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4남매 중 맏이라 성격이 원만한 사람을 찾았죠. 보통 때라면 그녀는 제가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인턴이 가장 무서워하는 선배가 레지던트 1년차라 마음 놓고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술 사주고 하면서 마음을 얻었죠.(웃음)”
   
   이렇게 말하곤 그는 부인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냉정한 조정자 역할을 잘하잖아요. 남자들은 의리 찾으면서 기분에 좌우될 때가 많지만. 1979년 결혼해 지금까지 살면서 아내가 반대하는 일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어요. 지금까지 해온 사회봉사활동 모두가 아내와 상의해서 해온 일입니다. 그러니까 다 잘되었잖아요.(웃음)”
   
   그는 의사이면서 사회복지가다. 1991년에 세운 ‘갈거리사랑촌’은 사회복지법인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에 기증했다. 그는 운영만 맡고 있다. 의사의 영역과 사회복지의 영역은 다르다.
   
   그는 1996년 상지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해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기왕 시작한 거 박사학위까지 받고 싶었다. 숭실대 박사과정에 응시했으나 면접에서 낙방했다. 그는 2001년 가톨릭대 사회복지대학원 박사과정에 합격해 박사 공부를 했다. 2006년 ‘사회복지시설의 사회화’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갈거리사랑촌은 흥업면 대안로의 지적장애인 시설 ‘베닉노의 집’, 노인복지시설인 ‘아녜스의 집’, 여성노숙인쉼터 ‘옹달샘’ 등으로 구성되었다. ‘베닉노의 집’에는 34명의 지적장애인이 생활한다. 사회복지시설에 거주하는 구성원들은 지역공동체와 왕래가 잦다. 교회도 가면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한다. “지역민과 교류해야 행복해진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무료급식소 ‘십시일반’은 원주시 중심가인 중앙동에 있다. ‘십시일반’에서 하루 평균 120~130명이 점심을 해결한다. 1년 365일 쉬는 날이 없고 토요일은 국수를 제공한다.
   
   “점심값은 공짜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200원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200원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점심 한 끼를 아침 겸 저녁으로 먹는 사람들도 있어요. 점심값 200원이 모아지면 이 돈으로 장학금을 줍니다.”
   
   그의 취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일이다. 1989년 문을 연 ‘부부의원’은 2013년 2월 15일 곽 원장의 환갑날 문을 닫았다. 그는 부부의원을 하는 25년간 일기를 써왔다. 일기를 바탕으로 쓴 원고가 ‘140만 그릇의 밥’이라는 제목으로 곧 출간될 예정이다. 이런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아산상 대상까지 주어졌다. 상금이 무려 2억원이다. 오는 12월 6일 세 번째 그룹사진전을 연다.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탁상 달력과 벽걸이 달력으로 만들어 수년째 지인들에게 선물해 왔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에게 부인과 젊은 시절 찍은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거야 많지만 제 아내는 사진 나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자기는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안기부’가 되겠다네요.(웃음) 나야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니 얼굴이 나갈 수밖에 없지만, 아내는 11월 25일 시상식 때도 서울에 안 갑니다. 한 사람은 병원을 지켜야 하잖아요. 제가 지금까지 이러저러한 상을 여러 번 받았는데 한 번도 안 왔어요.(웃음)”
   
   이상했다. 그와 불과 두 시간 만났을 뿐인데 30년 된 지인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왜 그럴까.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기자는 신비하게 몸과 마음이 가뿐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베푸는 사람은 모세보다 위대하다’는 탈무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의 영광은 팔할은 부인 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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