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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조선을 향한 생명과 사랑, 윌리엄 스크랜턴’(2015.12.26.토.작성)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 5장

 

[ ‘조선을 향한 생명과 사랑, 윌리엄 스크랜턴’]

 

2015년 12월24일 오후 6시30분에 방영되는 JTBC 성탄절 다큐멘터리 ‘조선을 향한 생명과 사랑, 윌리엄 스크랜턴’을 시청했다.

우연히 tv채널을 돌리다가 보게 되었는데, 수첩에 메모까지 하면서 감명깊게 보았다.

 

메모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받아 적은 내용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겠다.

1885년 4월 두 사람의 외국인 선교사가 일본에 함께 있었다.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미국 뉴저지주 드류신학교(감리교 신학대학)를 졸업한 아펜젤러와 예일대학, 뉴욕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스크랜턴 이었다.

 

이들이 조선에 입국하게 된 경위는 1883년 시카고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종이 보빙사절단을 미국에 보냈는데, 사절단의 일원인 민영익과 볼티모어 여자대학 총장을 지냈던 '가우처'박사 가 기차 안에서 만난 것이다.

민역익은 "선교사를 보내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가우처 박사에게 부탁했고, 가우처 박사는 아시아지역 감리교 선교사인 로버트 맥클레이에게 조선의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당시 일본에 파송되어 있던 맥클레이는 개화파인 김옥균에게 전달했고, 김옥균은 고종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고종황제로 부터 의사와 영어교사 역활을 하는 선교사 파견 허락을 받는다. 맥클레이는 클리블랜드에서 의사 개업을 하고 있던 윌리엄 스크랜턴 가정을 찾아와 조선으로의 선교사 지원을 부탁하게 된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19세기 말 죽음에까지 이르는 전염병인 장티푸스에 두번이나 걸렸는데, 이때 "내가 만일 낫게되면 나 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장티푸스 등과 같은 전염병 퇴치에 힘쓰겠다."고 서원기도를 했다고 한다.

 

일본 해안교회(최초의 개신교)의 이수정 앞에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2인의 선교사가 나타나 그들은 같이 예배드리고,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건네받게 된다. 또한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 등으로 정국이 불안하므로 안정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면서 고종의 조카사위였던 박영효에게 조선말을 배웠다.    

 

1885년 5월, 일본을 출발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은 조선에 입국하여 미대사관의 도움으로 정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한달 뒤 가족들이 합류했다.

정동교회(감리교)는 시병원이 있었던 자리이고, 보구여관과 이화학당이 연이어서 있었다.

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몇달간 진료를 하다가 자기 집에 무료로 진료를 했다. 고종이 '시병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스크랜턴은 조선 백성의 의료 환경 및 실정을 미국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보고서와 편지를 썼다.(감리교 선교사 보고서)

 

첫해에 842명을 진료하고 34달러의 수익을 냈다. 이후 스크랜턴은 사대문 밖으로 병원을 이전한다.

안전한 사대문 안에서의 병원진료보다는 위험한 사대문 밖에서 병원진료하고자 하는 그를 말리는 아펜젤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펜젤라 목사님은 양반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이곳 정동에 남으세요. 사대문 안에는 양반들만 있어요. 힘없고 가난한 상민들은 사대문 밖에 있으니 그들에게 도움이 절실하므로 사대문 밖에서 진료해야 되요." 

 

스크랜턴은 서대문 밖 애오개 언덕 시약소, 상동 시약소, 동대문 밖(백정, 가파치 등이 살던 동네) 시약소 등을 설치한다.

후에 정동 시병원을 상동 시병원으로 옮기고, 상동교회를 세우면서 초대 담임 목사를 한다.

상동교회 필지 3필지를 스크랜턴이 1988년 11월1일 샀다는 기록과 1901년 교회 건립 설립자 명단 기록이 있다.

 

스크랜턴의 모친 매리 스크랜턴은 최초의 여자 선교사이고 이화대학을 설립하여 고종으로 부터 '이화'라는 현판을 하사 받는다.

진명여학교 교육에 힘썼으며 달성 매일학교, 수원과 인천에도 학교를 세우고, 여성 전용 병원인 '보구여관' 를 세웠다.

 

1902년(광무 6) 아펜젤러가 배 전복사고로 죽게된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아펜젤러가 탄 배와 일본 상선이 충돌하여 익사했다.

스크랜턴은 조선에서 세딸을 낳았고, 아펜젤러가 사망한 즈음 미국에 있었는데, 미국에서 쉬고 싶었으나 다시 돌아왔다.

 

헤이그 밀사 파견의 이준 열사가 상동교회 청년이었고, 전덕기(후임 목사), 이회영, 주시경, 서재필, 안창호 등이 상동교회를 다녔다.

일본 선교사이면서 한국 감리교를 감독했던 친일파 해리스 감독과 스크랜턴은 갈등을 빚어 감리교 선교사직을 사임한다.

2년 뒤 어머니 매리 스크랜턴 여사가 별세하여 양화진 묘지에 묻힌다. 이때 묘지명 'IHS'는 아들인 스크랜턴이 직접 쓴 것이다.

 

감리교 선교사직을 사임한 스크랜턴은 이후 10년간 민간인 신분으로 요양원 운영, 광산노동자 등의 치료에 힘쓰다가 조선을 떠났다.

 

스크랜턴의 후손들은 현재 영국 솔즈베리에 살고 있는데, 스크랜턴의 묘지는 그곳에 없다.

후손의 가족앨범 사진에서 '고베에서 찍은 스크랜턴 부인과 네딸의 사진을 찾아냈다. 

조선을 떠난 스크랜턴 가족은 일본의 고베에 머물렀던 것이다.

일본의 고베 해성병원에서 조선인 동포들을 진료하며 5년간 일한 스크랜턴은 그곳에서 별세했다. 

일본의 고베 외곽 외국인 묘지에서 스크랜턴의 이름을 그의 사후 70년만에 찾아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가보면 130년전 선교사의 발자취를 볼 수 있는데,

윌리엄 노블 선교사와 스크랜턴이 친밀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1934년 한국 선교사 최고 책임자였던 윌리엄 노블은

 스크랜턴이 "죽음은 이방에서 옆방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현재 스크랜턴 설립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서  매년 1년에 한번씩 '스크랜턴 연합예배'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조건없는 사랑을 베풀고 생명과 용기를 준 사람, 스크랜턴!

 

- 2015년 12월26일 토요일 8시30분...수산나 -

 

션, 조선 백성 생명 살리려했던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 다큐 진행자로 나서

입력 2015-12-24 11:07 수정 2015-12-24 11:10

 

션이 JTBC 성탄절 다큐멘터리 ‘조선을 향한 생명과 사랑, 윌리엄 스크랜턴’의 진행자로 나선다.

24일 오후 6시 30분에 방송되는 ‘조선을 향한 생명과 사랑, 윌리엄 스크랜턴’은 130년 전 조선의 백성을 살려내고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물론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바쳤던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의 이야기를 담는다. 제작진은 “밀도 높은 인터뷰 영상과 현장중심의 스토리 전개 등을 통한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팩션 형식으로 선보인다”고 전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구한말 가난하고 병들었던 조선의 백성을 사랑했고, 그 사랑 때문에 선교사라는 신분까지도 버렸던 미국인 의사였다. 한국에 온 첫 번째 의료선교사였던 그는 정동에서 2년 만에 50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했다. 고종이 시병원, 즉 무료로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푸는 뜻이란 사액 현판을 하사할 정도로 평민, 서민들과 소통하며 그들을 위로했던 진정한 의사였다. 그는 친일파와 일제의 억압 속에 감리교 목사직을 버린 뒤, 버림받은 광산 노동자들과 일본으로 이주한 외로운 한인 노동자들을 위해 살다 간 ‘선한 마리아인’의 표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션은 이번 다큐멘터리를 통해 내레이션과 함께 브릿지 멘트 등을 하며 윌리엄 스크랜턴의 삶을 전한다.

제작 관계자는 “션의 삶에 평소에도 많은 감동을 받았던지라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부터 그를 진행자로 생각했다. 션이야말로 스크랜턴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최적의 전달자라 생각된다”며 캐스팅 이유를 밝혔다. 이어 “브릿지 멘트를 딸 때도, 내레이션 더빙을 할 때도 션은 스크랜턴과 마치 대화를 하는 듯 했다”며 “진짜 사랑을 실천한 스크랜턴에게 고맙다는 말을 대신 전해준 션에게 감사하고 이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출처]국민일보 / 조경이 기자 rookeroo@kmib.co.kr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출생

1856. 5. 29, 미국 코네티컷
사망 1922, 일본 고베
국적 미국

 

요약 미국 북감리교 계통의 한국 의료선교사.

한국 이름은 시란돈(施蘭敦). 1878년 예일대학교, 1882년 뉴욕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결혼한 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업하고 의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고 1884년 미국 감리회의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12월 4일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85년 2월 3일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같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G. Appenzeller) 부부와 함께 한국으로 출발했다. 부녀자들의 입국이 어렵자 어머니와 부인을 일본에 두고 그해 5월 3일 감리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서울에 도착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북장로의 선교사인 알렌(H.N. Allen)을 도와 제중원(濟衆院)에서 의료사업을 하다가 1885년 9월 10일 정동에서 민간의료기관으로 진료소를 열어 1886년 6월 15일 시설을 갖추고 병원 이름을 시병원(施病院)이라고 했다.

1887년 동대문에 부인전문병원인 보구여관을 설치했으며, 1894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그는 특히 전염병에 걸려 버려진 환자를 데려다가 치료하고, 고아들을 돌보았다. 스크랜턴의 선교병원은 부녀자와 어린이 치료를 전문으로 하게 되었고, 여의사들의 도움으로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그밖에 한글성서번역위원회의 번역위원으로서 성서사업에도 큰 공헌을 했다.[출처]다음 백과사전

 


출신

한국어로 시란돈으로 표기되는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은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에서 출생했다.

가족환경

그의 부모와 가족환경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뉴헤븐에서 제조업을 하던 평범한 인물이었던 아버지(William T. Scranton)는 그가 열 여섯되던 해인 1872년 별세하였다. 반면 어머니 플레처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2.9∼1909.10.8)은 뿌리깊은 감리교 가정출신이었다.메리의 부친(E Benton)과 오빠도 감리교 목사였다. 매사추세츠 주의 감리교회 목사 집안의 딸로 태어나 1855년에 뉴헤븐의 윌리엄 스크랜턴과 결혼하여 둘 사이에 외아들을 두었으며 나이 40세가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메리는 감리교 목사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믿음이 깊었고 해외 선교에도 관심이 깊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도 해외 선교 기금을 헌금하는 외에 지역 해외선교회 모임의 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선교사 파송

스크랜턴은 어려서부터 이런 어머니에게 신앙적·사상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스크랜턴은 처음부터 선교사를 목적한 것이 아니었다. 1878년예일 대학교를 졸업했고 뉴욕 의과대학에 진학, 1882년에 졸업했다. 졸업하던 그 해, 그는 룰리 와이드 암즈(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였고 클리블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그러던 중 1884년 여름, 일본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 Maclay)를 통해 한국 정부가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락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알려졌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감리교회에서는 한국 선교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되었고 선교사 물색에 나섰다. 그때 매클레이가 클리블랜드로 스크랜턴 가족을 만나러 왔다. 당시 상황을 스크랜턴 부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884년쯤인가 제 생각으론 매클레이 박사인 것 같은데, 선교사 한 분이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머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는 홀에서 나를 만나서는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해외선교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국내 전도나 아메리카 토착민 선교에 관련해 조금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며 국내 전도인들을 돕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내 대답은 '어이구머니! 안될 말이에요'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렇다면 가지 않는 게 좋겠군요'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스크랜턴 부인의 계속된 증언이다.

"그 해 초여름, 스크랜턴 박사가 지독한 장티푸스 열병에 걸렸습니다. 그때 아이까지 심하게 앓고 있어 남편을 돌볼 틈이 없었고 어머님이 그를 간호하였습니다. 남편이 회복된 후 우리는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그때 남편은 내게 놀라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자신은 중앙 아프리카를 제외한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나가 자신을 헌신하기로 하였다고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저도 가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참 있을 후 '거기에 제 뼈를 묻겠어요'하였습니다. 나는 결혼하던 날 결심한 것 중의 하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거역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열병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스크랜턴은 선교사로 남은 여생을 헌신할 것을 결심한 것으로 보이며 그 과정에서 병간호를 맡았던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모자가 함께 선교사로 헌신할 결심을 한 것이다. 이러한 스크랜턴 모자의 병상 결심은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와 해외여선교회에 통보되었고 그에 따라 먼저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이 1884년 10월에, 아들 스크랜턴이 1884년 12월에 한국 선교사로 각각 임명받았다.

선교 활동

아펜젤러 목사 부부·아내·어머니와 함께 1884년 2월 3일 출발, 인천에 도착했으나 갑신정변으로 조선 정국이 불안하여 잠시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거기서 수신사 박영효에게서 한국 말을 공부하였다. 그 해 5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고 의사이자 장로교 선교사인 앨런 박사가 설립한 광혜원에서 6주간 근무한 후 정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하여 1886년 병원을 세우고,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의 어머니 스크랜턴(Scranton.M.F) 여사는 이 집에서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하였을 때, 에이비슨 박사와 함께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 후 감리교 선교부의 간부로 성서 한역 통일회 회장이 되어 성서 번역에도 힘썼다.

1907년 선교 정책을 둘러싸고 친일파해리스 감리교 감독과 의견 충돌을 일으켜 선교사직과 함께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하고 성공회로 교파를 옮겼으며, 평신도로서 서울평북 운산, 충남 직산, 중국 대련 등지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죽음

1917년 일본 고베로 건너 간 후 1922년 별세하였다. 그는 고베의 로코산(六甲山)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출처]위키백과

 

(15) 가우처 목사 & 맥클레이 선교사 History Makers / ♡ 두드림(DoDream)

2011.02.09. 21:15

우리나라는 1882년 미국과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고 1883년 5월 비준서를 교환한다. 고종 황제는 미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그것이 바로 견미단 이다. 쉽게 말하면, 미국이 문을 열어 줘서 고맙다고 조선의 고위 인사 몇 명을 초청해서 미국 견학을 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전의 친척이었던 민영익을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대리공사에 홍영식, 수행원에 서광범, 유길준 등을 비롯하여 6명의 사절단을 꾸린다.

 


  미군 해군 함정을 타고 7월 제물포를 출발해서 태평양을 건너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까지 두어 달 동안 견미단 일행은 별의별 상상을 다 한다. '과연 저 코쟁이들이 사는 나라는 어떻게 생겼을까?' 배에서 내린 견미단 일행은 채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미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를 타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가야했다.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이 나라의 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했지만 그거야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고, 우리의 견미단 일행은 꿋꿋하게 조선의 법을 준수했다. 본디 양반 출신은 어디가도 절대 갓을 벗지 않는 법, 견미단 일행은 갓을 쓰고 도포 자락이 펄럭이는 조선의 옷차림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당연히 미국 사람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견미단 일행이 연신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같은 칸에 타고 있던 미국 사람들은 이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쑥덕거린다. 그렇다고 그깟 일에 주눅들 견미단 일행이 아니었다. 양반의 근엄한 자세를 절대 흐트러뜨리지 않고 꿋꿋하게 앉아 있었다.

 

  얼마 후 기차가 볼티모어 역에 정차하는 순간, 한 신사가 견미단 일행과 같은 칸에 올라탔다. 그들은 다른 미국인들과는 달리 견미단 일행을 보자마자 커다란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 신사는 바로 가우처 목사였다.

  가우처 목사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에야 주님께서 오신다"는 말씀을 늘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목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 조선이라는 곳에서 온 저 사람들에게 과연 천국 복음이 전파되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3일 동안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가우처 목사는 조선이란 민족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문호가 개방되었으나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가우처 목사는 견미단 일행과 헤어지고 나서 그 길로 교회로 와서 온 성도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오늘 조선이라는 민족을 만났습니다. 그곳에는 선교사님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야 비로소 문호가 열렸으니 곧 선교사님이 파송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에서 조선까지 가려면 동부에서 일주일이 넘게 기차를 타고 서부로 가서, 두 달 동안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야 하니 기차와 배 삯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선교사님이 조선에 들어가서 생활하려면 선교비가 많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곳으로 들어갈 선교사님을 위해서 믿음으로 미리 헌금합시다."

 

  가우처 목사와 성도들은 미국 감리교회 선교본부에 조선 선교를 위해 사용해 달라며 2천 달러를 송금했다. 하지만 미국 감리교회는 아직 조선 선교에 대한 계획이 없었기에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가우처 목사는 조선과 지리상 가깝다는 일본에 파송된 극동 지역담당 선교사인 맥클레이 에게 직접 편지를 써 보낸다. 조선에 직접 찾아가서 그 나라를 살펴보고 하루 빨리 선교사를 파송하도록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해 달라는 편지였다. 월드 크리스천 마인드를 가진 가우처 목사는 견미단 일행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을 이상한 나라에서 온 신기한 사람들이 아니라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하는 미전도 종족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은 이토록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그 '한 사람' 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차츰차츰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가우처 목사의 편지를 받고 맥클레이 선교사는 직접 조선 땅으로 건너가기 위해 준비한다.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김옥균을 생각한 것이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조선의 개화파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다. 신사유람단원으로 일본에 왔다가 예수님을 영접한 이수정의 소개로 한국의 개화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과 가까워졌던 것이다. 특히 김옥균과 각별했다. 맥클레이 선교사의 사정을 듣고, 김옥균은 고종 황제 앞으로 보내는 친서를 써 준다.

 

  "고종 황제님, 우리나라에도 서양 의사를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나라는 한번 콜레라 전염병이 돌면 2,3만 명이 죽습니다. 그런데 여기 일본에서는 서양 의사들 덕분에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의 피해가 현격히 줄어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우리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서양 의사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두 가지 윤허를 받아낸다. 의사와 조선의 엘리트들을 교육시킬 영어 선생 3명을 보내 달라고 한 것이다. 비록 포교 활동은 안 되지만 의사와 언어 선생 자격으로 문을 연 것이다. 그러니 벌써 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뛸 뜻이 기뻐하며 고종 황제의 두 가지 윤허에 대한 정보를 본국에 보낸다. 이 정보에 속히 반응하는 선교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 16:9~10)


  먼저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미전도 종족에 대한 정보를 듣고도 반응하지 않으면 그 민족은 복음을 들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썼던 미전도 종족이었을 때 우리 민족에 대한 정보에 반응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 교회가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우리나라에도 할일이 많은데… 우리 교회에도 할 일이 많은데…" 라는 생각만 한다면 아무리 성령이 충만해도 사도행전 10-11장과 같은 마인드 장벽에 걸려서 다른 민족을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편안히 자기 교회 성도들과 자기 교회만을 섬기다 천국에 갈 것이다.

 

  한국 교회가 다른 민족을 위해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며 영광스러운 선교사의 삶의 본을 보여 줄때, 다른 민족도 우리민족처럼 하나님께 돌아올게 될 것이다.

 

출처 - 『복음에 미치다』

 

 메리·윌리엄 스크랜턴 모자, 이화여대 창립 등 여성 교육 앞장… 극빈자 등 대상 병원 사역 주력

입력 2009-10-08 20:37

 

메리·윌리엄 스크랜턴 모자, 이화여대 창립 등 여성 교육 앞장… 극빈자 등 대상 병원 사역 주력 기사의 사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과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은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 선교의 장을 연 선구자다. 모자(母子)가 한국 복음화에 헌신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로 어머니는 여성 평등과 교육에, 아들은 의료와 교회 개척에 헌신했다. 이들은 병원을 중심으로 한 교회 사역으로 수많은 민중의 영적·육적 아픔을 어루만졌다.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연회 서기로 재직하던 스크랜턴 여사가 의사였던 아들과 한국 선교에 나서게 된 것은 장티푸스에서 아들을 구해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아들은 언더우드보다 한 달 늦은 1885년 5월에 입국했으며, 어머니는 6월에 들어왔다. 아들은 한국에 와서 알렌을 도와 제중원에서 일했으며, 1886년 고종의 호의를 얻어 시병원을 열게 된다. 개원 후 4년간 치료한 환자가 1만2200명이 넘었다.

성 밖으로 내몰린 극빈자와 버림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병원 사역은 교회 개척과 함께 진행됐다. 아오개교회(현재의 아현교회)가 1888년 아오개 진료소, 상동교회가 1890년 상동병원과 함께 시작됐다. 영혼 구원과 육체 구원의 양 날개를 붙든 것이다. 스크랜턴은 1906년까지 선교 주관자로 감리교 선교사 대표를 맡기도 했으며, 1890년대 한글 성경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의사 목사 교사 번역인 등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역 후반부 친일 성향의 선교지도부와 마찰을 빚고 선교사를 사임한 뒤 1922년 일본 고베에서 생을 마감했다.

스크랜턴 여사는 1886년 6월 서울 정동에 자리를 잡고 이화학당을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이화학당’이라는 편액을 하사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했다. 그녀는 여성교회를 조직하고 지방 전도 활동을 펼쳤으며, 20년간 감리교뿐 아니라 전체 기독교 여선교사들의 대모로 활동했다.  

이화학당과 교회에서 자기 계발과 인간 해방을 맛본 조선인들은 그녀를 존경하는 마음에 ‘대부인(大夫人)’으로 불렀다. 그녀가 25년간 한국 사역을 마치고 1909년 임종했을 때 상여를 따르는 무리가 8㎞나 늘어섰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출처]국민일보

 

[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9) 어머니의 마지막 사역과 별세

‘대부인’ 8㎞ 운구행렬 수천명 시민들 동행

입력 2015-08-11 00:04
[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9) 어머니의 마지막 사역과 별세 기사의 사진
‘대부인’ ‘노부인’이란 칭호를 받았던 메리 스크랜턴은 당시 서울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 십자가 묘비에 헬라어 예수(IHSUS)의 약자, ‘IHS’가 새겨져 있다(왼쪽). 1911년 ‘The Korea Mission Field’ 6월호에 ‘교회의 승리자’란 제목으로 메리 스크랜턴의 삶이 다뤄졌다. 이덕주 교수 제공
스크랜턴 대부인은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달리 건강 문제를 제외하고는 선교 사역과 주변 상황은 무난했다. 이화학당에 나가 종종 영어를 가르쳤고 상동교회와 부인성경학원을 통해 양육한 전도부인 을 경기도 일대에 파송해 교인을 지도했다. 대부인은 서울 달성궁 자택에 주로 머물며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곳에 힘을 싣는 것으로 마지막 힘을 다했다. 



여성 깨우는 교육에 마지막 힘 쏟다 

스크랜턴 대부인이 생의 마지막에 봉사한 영역은 교육이었다. 대표적인 것은 진명여학교 설립이었다. 진명여학교는 고종황제의 계비인 엄황귀비와 그의 동생 엄준원이 세운 ‘준황실’ 학교였다. 엄준원의 딸이 상동교회 부속 공옥여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근대 여성교육기관 설립 뜻을 전했던 것이다. 이에 스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 출신 여메레를 소개하고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여메레는 일본 도쿄의 ‘황실여학교’를 시찰했고 1905년 엄준원의 달성궁 사택에서 사숙 형태로 학교를 시작했다. 곧바로 고종황제는 ‘진명(進明)’이란 이름을 지어내려 보내고 경복궁 옆 창성위궁(현 창성동) 부지와 건물을 하사함으로 1906년 4월 정식 개교했다. 초대 교장은 엄준원이었지만 학교 운영의 실질적 책임은 학감 여메레가 맡았다.  

여메레는 이화학당의 초창기 학생이었다. 이제 어엿한 한국교회 여성 지도자가 되어 ‘귀족원’ 학교를 맡아 운영하게 됐으니 이는 기독교 선교 20년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병약한 중에도 진명여학교에 나가 영어를 가르쳤다. 1907년에는 평양에도 진명여학교 분교가 설립됐고 여메레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진명여학교와 함께 스크랜턴 대부인이 새로 시작한 교육사역은 여성 지도자 양성을 위한 단기 교육과정을 개설한 것이다. 당시 교회와 가정, 지역사회에는 여성 지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문제는 여성 문맹률이 너무 높다는 것이었다. 지방교회의 여신도 중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성을 가르칠 여성교사가 태부족이었다.  

전도부인 양성기관인 감리교 부인성경학원이 있긴 했지만 현장에서 필요한 여성 지도자들을 제때 공급하기는 어려웠다. 이화학당과 공옥여학교 등이 있었지만 기혼 여성들은 배울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스크랜턴 대부인은 교회의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한글을 비롯해 기초과목, 성경을 가르치는 여학교를 시작했다.

학교 설립엔 이화학당 초기 졸업생으로 일본 유학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 1906년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서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사(BA) 학위를 받고 돌아온 하란사가 힘이 됐다.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조선 여성이 가르친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많은 여성들이 지원했다. 1907년 시작했다. ‘상동여자중학교’의 탄생이었다.

한편 스크랜턴 대부인의 지휘를 받는 전도부인들은 모두 9명이었는데 이들은 외진 산골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9명의 전도부인들은 1년간 4000 가정을 방문했고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여성만 2만 명이 넘었다. 전도부인들은 남성 사역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안방 깊숙한 곳과 산골까지 파고들며 복음을 전했고, 우상 숭배와 봉건적 관습의 노예로 살던 여성들을 해방시켰다.  



한국인들의 참 어머니, 별세하다 

스크랜턴 대부인의 건강은 1908년 눈에 띄게 나빠졌다. 지방 순회는 엄두고 내지 못했고 진명여학교 사역에서도 손을 뗐다. 이듬해에 접어들자 더 악화됐다. 이전 같으면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을 만했는데 이번에는 포기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1904년 한국으로 귀환하면서 이미 한국에서 뼈를 묻을 것을 결심했다. 친정 부모와 남편이 묻혀 있는 미국 하트포드나 뉴헤이븐보다 동료 선교사 존 헤론과 윌리엄 홀이 묻혀 있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던 것이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문병하러 온 후배 선교사와 전도부인들에게 조언을 하며 ‘병상 목회와 선교’를 감당했다. 1909년 6월 미국 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연례회에 제출된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됐다. “한국인들은 그를 사랑하는 친구로 여기는데 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그를 ‘노부인(The No Puin)’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칭호입니다. 그는 온 정성을 다하여 여성을, 그리고 한국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마침내 스크랜턴 대부인은 1909년 10월 8일 금요일 아침, 조용히 숨을 거뒀다. 향년 77세였다. 그는 견디기 힘든 육체적 고통을 기도와 찬송, 성경읽기로 극복했고 병상에서 간호하는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는 사랑의 본을 보였다. 혼수상태에 들어가기 사흘 전에는 집안 하인들과 가까이서 사역했던 토착교인 몇 명을 초청해 마지막 성찬을 거행하기도 했다.  

장례식은 10월 10일 주일 오후에 상동교회에서 거행됐다. 유가족들은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익숙한 3일장 관습을 따랐다. 장례식 날 운구 직전에는 궁궐에서 관리가 나와 시신이 담긴 관 앞에서 세 번의 절을 하며 예를 표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왕비’ 같은 존재로 남았다.

그의 상여가 남대문을 떠나 양화진에 이르기까지 8㎞의 운구행렬에는 연령과 성별, 신분을 초월해 수천 명의 시민들이 동행했다. 그의 별세 소식은 한말 대표적 민족 언론이었던 ‘대한매일신보’에 실렸고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기록됐다. 추모 분위기는 해를 넘겨 이어졌고 1911년 선교사 잡지였던 ‘The Korea Mission Field’ 6월호 표지에 ‘교회의 승리자’란 제목으로 메리 플레처 스크랜턴의 삶이 다뤄졌다.

그의 양화진 묘지는 헤론과 홀의 무덤 바로 건너편에 조성됐다. 아들 스크랜턴 박사의 손으로 마련된 소박한 화강암 묘비가 세워졌다. 3층 기단 위에 세워진 라틴십자 모양 묘비에는 헬라어 ‘예수(IHSUS)’의 약자 ‘IHS’가 새겨져 있다. 아들의 눈에 어머니는 오직 예수로 인해, 예수를 위해, 예수처럼 살기를 원했던 ‘예수의 사람’이었다.  

[출처]국민일보 /이덕주 교수(감신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 1...진입계단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 2...진입계단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 3...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 4...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 5...표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