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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역사저널 그날 <강화도령 철종>-용흥궁 등 사진 2장

 

[KBS1 역사저널 그날 <강화도령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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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13년 임술민란(경상도 진주, 함경도 함흥, 전주 등 30여곳)이 발생,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함...전정,군정,환곡 중 환곡의 피해가 큼...경상도 우병사 백낙신의 불법수탈은 피폐한 관리자의 교과서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방법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냄(1862년 진주민란의 원인)....귀양갔으나 3년 후인 1865년에 풀려나고, 이듬해 영종진첨절제사(永宗鎭僉節制使)로 강임되어 부임하고...승승장구 하여, 1877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 자리까지 오른다...ㅠㅠ...

 

강화도령 철종(哲宗)


고단한 왕족의 삶
 조선 제25대왕(재위 1849∼1863) 철종은 강화도령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처음 이름은 원범(元範)이고 자(字)는 도승(道升)이며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그는 사도세자(장조莊祖로 추숭)와 후궁 임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 인(裀)의 3남인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3남 중 막내이다. 즉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다.

사도세자 정조 순조 (익종) 헌종
                은언군 상계군
                              풍계군 * 은전군의 양자로 감  
                             전계군 회평군(원경)
                                             영평군(경응)
                                            철종(원범)
             은신군 남연군    흥녕군(이창응)  *남연군은 인조의 7대손으로 은신군

                                                            에게 양자로 온 것임
                                           흥완군(이정응)   
                                           흥인군(이최응)
                                           흥선대원군 고종 -순종
            은전군  풍계군 완평군



** 은언군, 은신군은 후궁 임씨의 소생이고 은전군은 후궁 박씨의 소생임.    ​   
조선24대왕 헌종이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후손이 없었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 7촌이었다.  7촌이라야 사도세자의 후손들인데 항렬로 따져보면 헌종의 아저씨가 되므로 이치에는 맞지 않으나 당시 정권을 농락하던 김씨네는 자기들 마음대로 주무르기 편한 왕손을 찾다가 강화도에 유배되어 농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원범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운 것인데 이분이 나중에 철종이라는 묘호(廟號)를 받은 분이다.
그럼 강화도령은 왕손인데 왜 강화도에 가서 농부처럼 생활을 하였는가?
사도세자는 후궁과의 사이에서 아들 3명을 두었는데 은언군과 은신군은 행실이 좋지 않다고 하여 영조47년(1771) 2월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은신군은 그해 4월12일 제주도에서 병사하고 은언군만 남았다. 은전군은 정조 즉위 후 홍상범 등이 꾸민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누구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느냐고 문초하자 그들의 입에서 은전군의 이름이 거론되었고 그래서 은전군은 자결하도록 명을 받고 자결하였다.
은언군의 큰아들 상계군은 홍국영이 정조의 양자로 세우려다가 실패하게 되자 강화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자살하였다. 그래도 정조는 같은 아버지의 핏줄이라고 은언군과 조카들을 잘 보살펴 주었는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정조를 따르는 무리들을 처치하기 위하여 벌인 순조1년(1801) 신유박해 때 은언군의 부인과 상계군의 부인이 왕족으로서 천주교를 믿다가 발각되어 은언군과 그 부인, 상계군의 부인이 같이 사사(賜死)되었으며 은언군의 둘째인 풍계군과 막내인 전계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순조22년(1822) 자유롭게 살도록 해 주었으나 헌종10년(1844) 민진용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여 문초결과 전계군의 큰아들인 회평군을 왕위에 옹립하고자 하였다고 하여 전계군과 회평군은 사사되고 둘째인 영평군과 막내인 원범(철종)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농부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왕이 되었으나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원범으로 하여금 왕위를 이으라고 하여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별안간 왕이 된 원범은 나이가 19세나 되었지만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철종2년(1851) 9월에는 대왕대비의 친척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는데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親政)을 하였는데 정치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뿌리 깊은 세도정치의 굴레를 벗어나 제대로 된 정치를 펴나갈 수 없었다.  왕비의 아버지인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으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모든 권력은 김씨네가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왕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자연히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곡(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백성들은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삼남지방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특별 기구를 설치하고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三政)의 폐해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하는 등 민란수습에 진력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현상에서 최제우가 동학(東學)을 창도하여 그 세력이 무섭게 뻗어나가자 교주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를 씌워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아들은 없고 궁인 범씨(范氏)가 낳은 영혜옹주 하나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에게 출가하였으나 몇 달 만에 사망하였다.  철종이 사망하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12살의 명복이 왕위에 오르니 이분이 고종황제이다. 
 
 강화도령과 관련된 이야기
 강화도령은 현 종로구 익선동 164번지 부근에서 태어났고 강화도령이 6살 때쯤 집을 나갔다가 간신히 집에 돌아왔는데 그 뒤에는 한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강화도령이 14세 때 외가가 있는 강화도로 유배 가서 외가인 염보길의 집에서 살았다.
 24대 왕인 헌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강화도령을 모셔 와서 임금으로 삼기로 정해지  고 서울에서 정원용대감이 가마와 많은 호위 군사를 거느리고 강화도에 나타나자 강  화도령은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고 외가집 다락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임금이 된 철종은 자신이 어릴 때 살았던 현 종로구 익선동에 아버지 전계군의 사당 을 크게 짓고 누동궁이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형인 영평군을 살도록 하였다.  강화도령을 모시러 왔을 때 형인 영평군은 놀라 도망가다가 마루에서 떨어져 뒹구는 바람에 팔이 부러졌으며 그 바람에 “곰배대감” 이라고 불렸다. 


                                               철종외가(강화군선원면)

[출처] 강화도령 철종|작성자 2008jsl

 

 

강화도령 철종이 살던 집....'용흥궁' 가는 길

 

강화도령 철종이 살던 집....'용흥궁' 담과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