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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KBS 1TV '역사저널 그날' <동학농민운동>-운현궁 대문 등 사진 3장

 

KBS 1TV '역사저널 그날' <동학농민운동>

 

2015년 12월2일 수요일 12시30분~2시까지 [KBS 1TV '역사저널 그날' <동학농민운동>]을 시청했다.

시청하면서 마음이 착잡하다....ㅠㅠ...

 

죽창으로 무장한 하얀옷을 입은 농민군이 많이 모여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는 말이 나왔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분노한 동학농민군이 고부성→황토현→황룡촌→전주성 등을 함락한다.

1894년 4월27일 전주성을 함락한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안 12개조를 주장하고, 전주화약을 체결하며 자진해산 한다.

그러나 정부는 폐정개혁을 지키지 않고, 파견된 안핵사 이용택이 다시 농민을 탄압한다...ㅠㅠ...

이에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하여 전라도 지역에만 53개소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소란을 틈타 일본 거류민 보호 목적으로 일본 후비보병 제19대대 700여명이 상륙하게 되므로....동학농민군이 '반외세'를 외치며, 다시 집결했는데...

독일식 전법을 받아들인 경력 7년이상의 베테랑 일본군인들이 치밀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동학농민군을 학살한다.

일본의 소총은 영국식 스나이더, 동학농민군은 재래식 화승총으로 화력에서 월등히 뒤졌다.

사정거리 차이가 800m/120m...1분에 스나이더는 15발 / 화승총은 1발 사격 후 재장전 2~3분 소요... 결국...30~45발/1발의 차이로 현저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19 대대 일본군인은 단1명 죽었는데, 대부분의 농민군은 무더기로 학살되었다...ㅠㅠ...

사람 머리에 볏집을 씌워 불을 붙여 죽이는 '우지개....서로 목을 잘라 죽이게 하고 마지막 사람까지 목을 잘라 죽였다는 태안의 목내미샘 등...

일본군의 만행이 잔혹하여 이런 광경을 목도한 일본군 대위가 트라우마에 시달려 스스로 자살했다고 한다...ㅠㅠ...

이들 700여명의 19대대 일본인 병력은 1년 후 명성왕후 시해에 가담했다고 한다...ㅠㅠ...

 

만민평등사상과 청춘과부의 재가 허락 등 여성인권사상을 가진 동학농민군을 일본군, 관군 뿐 아니라 민보단(양반군인)과 보부상 단체 등까지 일본군을 도와 탄압한다...ㅠㅠ...

임술민란봉기의 장본인 백낙신이 3년 후 복직하고 이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승승장구 하듯이...

동학농민봉기의 원인제공자 고부군수 조병갑도 기사회생하여 고등법원 판사가 되어 동학교 제2대 교주 최시형의 사형을 판결한다...ㅠㅠ...

동학농민혁명은 그동안 '반역'으로 평가되어 홀대받아오다가, 2004년 3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110년만에 재평가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기득권의 갑질벽을 뚫기가 이리도 험난한지 역사가 증명한다...ㅠㅠ...

 

 

폐정 개혁 12개조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 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 폐지한다.

7. 청상 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집강소

1894년 6월 폐정개혁의 실시를 약속받은 농민군은 해산하였으나 정부는 폐정개혁을 외면하였다. 농민군은 스스로 폐정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가 설치되면서 동학교도가 각 고을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호위군을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집강소가 농민군의 자치적 행정기관으로 확립됨에 따라 농민군은 지역적 차원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생활질서를 변화시켜나갔다. 이는 농민군의 비약적 성장이자 조선사회의 역사적 전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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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동학농민운동

1894년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중 봉기

일본의 조선침략 야욕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존재

동학농민운동!
1894년, 조선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 “조병갑의 목을 베어라!”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고부성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지금까지의 민란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일 것’이라는 과격하고도 뚜렷한 대상을 지시하고 또한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경사(京師)로 직향할 것’이라는 지역을 넘는 국가적 변혁까지 선언한 것! 고부지역 농민들이 일으킨 난의 불씨는 주변 곳곳으로 번져 지역 간 연대가 이뤄지고 열흘 만에 만여 명이 넘는 농민들이 결집하기에 이른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중 봉기로 일컬어지는 동학농민운동! 그들은 대체 왜, 무엇을 위해 일어선 것일까?
 

■ 동학농민군의 전략, 전술 ‘집중해부’!
동학농민군들은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서 연달아 승전보를 울리고, 그 기세를 몰아 조선왕조의 본관인 전주성까지 점령한다. 전투 경험도 없는 농민들이 화포로 무장한 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만물각을 통해 당시 동학농민군의 전략, 전술을 집중 해부해본다.

 


■ 동학농민군, 무엇을 꿈꾸었나!
1894년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 이후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폐정개혁안 12개조를 주장하고 군.관.민 최초의 신사협정과도 같은 전주화약을 체결해내며 자진해산한다. 당시 양반 지주층의 반발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놀라게 한 폐정개혁안..대체 무슨 내용이 들어있던 것일까? 또한 농민주체의 자치기구, 집강소를 통해 폐정개혁안은 어느 정도나, 어떻게 실현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 반봉건에서 반외세로!
자진해산 후 각자의 일터로 돌아간 동학농민군. 그런데 다시 한 번 동학농민군의 깃발이 오른다. 이번엔 수십만 명, 전국적 규모였다. 게다가 달라진 깃발의 구호! 척왜척양(斥倭斥洋)! 이들은 왜 다시, 무엇을 위해 깃발을 든 것일까?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동학농민군. 전문가들은 이때의 싸움을 두고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었다고 말하는데...!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은 일본 병사마저 정신병에 시달릴 정도로 잔인하고 집요하게 이뤄진다. 급기야 동학농민군과 관련된 가족들은 족보를 바꾸고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을 정도. 일본군이 이토록 동학농민군 토벌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이 당시 조정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오랜 시간 비적으로 혹은 난亂으로 매도되어 온 동학농민운동! 스튜디오를 분노와 눈물바다로 만든 그 숨은 이야기가  2015년 8월 9일 일요일 밤 10시 30분에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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