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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Operation Chromite, 2016)
- 관람객
- 8.57(7,438)
- 기자·평론가
- 3.41(8)
- 평점주기
- 개요
- 전쟁, 드라마2016.07.27.110분한국12세 관람가
- 감독
- 이재한
- 내용
-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불과 사흘 만에 서울 함락,
한 달 만에 낙동강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을 빼앗기게 된 대한민국.
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리암 니슨)는 모두의 반대 속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성공확률 5000:1,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단 하나, 인천으로 가는 길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뿐이다.
맥아더의 지시로 대북 첩보작전 ‘X-RAY’에 투입된 해군 첩보부대 대위 ‘장학수’(이정재)는
북한군으로 위장 잠입해 인천 내 동태를 살피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천 방어사령관 ‘림계진’(이범수)에 의해 정체가 발각되는 위기에 놓인 가운데
‘장학수’와 그의 부대원들은 전세를 바꿀 단 한번의 기회, 단 하루의 작전을 위해
인천상륙 함대를 유도하는 위험천만한 임무에 나서는데...
역사를 바꾼 비밀 연합작전
그 시작은 바로 그들이었다!
배우 / 감독
감독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관람(28일)했다. 110분 분량의 짧은 영화였다.
그동안 돈을 내고 영화관에서 한국 영화를 관람한 것은 ‘친구’, ‘도둑들’, ‘국제시장’에 이어
이 영화가 네 번째다.
![](http://data.newdaily.co.kr/data/photos/20160730/shp_1469881352.jpg)
잘생기고 연기잘하는 배우들, 적당한 분량의 컴퓨터 그래픽(CG), 실화가 주는 감동 등 대작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무난한 영화였다.
‘인천상륙작전’과 관련된 영화 평점(네이버 7월29일자 기준)을 보면 10점 만점에 관람객은 8.61점, 기자와 평론가는 3.41점인 것으로 나타났다.
평론가들의 한 줄 메시지에는 “2016년판 똘이장군”, “멸공의 촛불”, “시대가 뒤로 가니 영화도 역행한다” 등 영화를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이처럼 대중과 소위 전문가(?)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데 대해 한 네티즌은 “빨갱이들은 싫어하겠지,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좌파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평론가들의 평점이 낮은 것으로 여겨진다.
영화의 줄거리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불과 사흘 만에 서울 함락, 한 달 만에 낙동강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을 빼앗기게 된 대한민국. 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리암 니슨)는 모두의 반대 속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성공확률 5000:1,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단 하나, 인천으로 가는 길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뿐이다. 맥아더의 지시로 대북 첩보작전 ‘X-RAY’에 투입된 해군 첩보부대 대위 ‘장학수’(이정재)는 북한군으로 위장 잠입해 인천 내 동태를 살피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다...(하략)》
![](http://data.newdaily.co.kr/data/photos/20160730/shp_1469881398.jpg)
이 영화의 가장 큰 공은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했던 ‘엑스레이(X-ray) 작전’을 알렸다는 점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대한민국 해군정보국 첩보대는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에 잠입해 북한군 해안포대 위치, 병력배치 상황, 주둔 병력의 규모와 해안방어태세 등을 파악하는 작업을 했다.
작전 D-day가 임박해 영흥도 첩보기지는 철수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미군이 상륙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를 기습, 임병래 중위를 비롯한 한국 해군 첩보대원 9명과 해군 의용대원 30명이 전투를 벌였다.
敵으로부터 포위될 위기에 처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다른 대원들이 보트로 탈출할 수 있도록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공격을 차단했다. 그러나 두 대원은 끝내 탈출에 실패하고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인천상륙작전을 불과 24시간 앞둔 시점에서 포로가 될 경우 작전이 실패할 것으로 판단한 두 대원은 결국 자결(自決)을 택했다.
![](http://data.newdaily.co.kr/data/photos/20160730/shp_1469881374.jpg)
미국은 두 대원의 공로를 인정해 1953년 7월6일 은성훈장을 수여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1954년 1월4일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들의 유해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해군은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유도탄고속함(PKG-722,723) 10번함(임병래함)과 11번함(홍시욱함) 함명으로 제정하여 현재 조국의 바다를 지키고 있다. 보훈처에서는 2014년 9월의 전쟁 영웅으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를 선정했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개봉 3일 만에 100만, 6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중인 영화 '인천상륙작전' 속 장면들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냈다.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당시 인천 앞바다 영흥도를 거점으로 실제 활약했던 해군첩보부대의 X-RAY 작전을 담았다. 실화가 주는 묵직한 감동이 흥행을 견인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가운데 제작진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영화적 상상력이 더해진 세 가지 장면에 대해 기획 배경을 밝혔다.
#1. 맥아더는 정말 대한민국 소년병을 만났을까?
영화 속 맥아더는 6.25 전쟁 발발 직후 비밀리에 한국을 방문한다. 거기서 혼자 참호를 지키고 있는 소년병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작전 성공의 결의를 다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맥아더는 6.25 전쟁 발발 직후 1950년 6월 29일 한강 전선을 시찰하면서 한국군을 만났다고 전한다.
또한, 제작진은 당시 실제 맥아더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는 한국인 참전 용사의 인터뷰 기사 내용도 참고했다. 인터뷰 기사에 등장하는 신동수씨(6.25 전쟁 당시 일등병)는 ‘왜 후퇴하지 않느냐’고 묻는 맥아더에게 ‘상관의 명령이 없으면 죽어도 후퇴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매체는 전한다. 이에 맥아더는 ‘꼭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화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처음에는 소련군인 줄 알고 싸우려고 했다’면서 ‘나중에야 맥아더 사령관인 것을 알았다’고 전했다. 당시 육군 3사단(백골부대) 소속으로 서울 영등포 진지를 지키던 그는 총상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한 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2. 정말 비행기와 로프를 이용해 포로를 수송했을까?
영화 속에는 인민군 인천방어사령부 사령관 림계진(이범수 분)의 참모인 류장춘(김희진 분)이 로프에 꽁꽁 묶인 채 비행기에 매달려 날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날아가는 비행기에 고리를 달아 포로를 묶은 밧줄을 공중에서 낚아채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이 장면에 대해 제작진은 "1952년 황해도에서 켈로 부대가 북한군 포로를 공수할 때 이용한 방식을 차용했다"고 전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CIA와 미 공군이 실제 사용했던 방식으로, 지대공 회수 시스템(Fulton surface-to-air recovery system) 또는 스카이훅 시스템(Skyhook system)이라고 불린다. 전투지역에서 물자를 급박하게 운반하거나 인원을 이동시켜야 할 때 사용했다. 적군 뿐 아니라 비상시 아군의 탈출을 위해서도 활용됐다.
![](http://news.hankyung.com/nas_photo/201608/01.12116431.1.jpg)
#3. 맥아더는 정말 태풍을 뚫고 일본에서 인천으로 향했을까?
영화 속에서 일본 고베항에 정박하고 있던 연합군은 태풍 케지아를 뚫고 인천으로 향한다. 해상에서 태풍의 세력권에 들어간 연합군 선단은 높은 파도로 어려움을 겪지만 태풍을 뚫고 인천 앞바다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을 연기할 수 없었던 맥아더는 9월 11일, 태풍의 영향권이 가장 약한 방향을 골라 전 함대의 인천 진군을 명령했다. 함대는 거친 항해를 했지만 예정대로 인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예진 한경닷컴 기자 genie@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newsinfo@hankyung.com
영화 ‘인천상륙작전’ 관객이 1주일 만에 350만명을 넘었다. 성공확률 5000 대 1의 기적 같은 승리를 가능케 한 첩보부대의 ‘X-RAY 작전’과 ‘켈로부대’ 활약상이 이제야 대중에 알려졌다. 이 영화 덕분일 것이다. 다른 6·25 비사(秘史)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인천상륙을 위한 또 다른 작전이 동해안에서 극비리에 진행됐다. D데이를 앞두고 북한군 병력을 분산하기 위해 펼친 장사상륙작전이다. 경북 영덕군 장사리에 상륙한 육군 제1유격대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주력부대를 동해안으로 유인함으로써 맥아더의 양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부대원 772명은 대부분 중고생인 10대 학도병이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 군에서 받아주지 않자 떼를 써서 교복 차림으로 참전한 소년병들. 훈련기간은 2주에 불과했다. 무기는 소총 한 자루였고, 양식은 3일분이었다. 이들이 민간 선박 문산호를 타고 해안 가까이 도착한 것은 새벽녘. 태풍 케이지로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뭍에 닿기도 전에 적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수십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무전기가 바닷물에 젖어 고장나는 통에 지원요청도 할 수 없었다.
나머지 소년병들은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상륙작전을 감행해 교두보를 확보하고 인민군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허를 찔린 적은 대규모 병력이 상륙한 줄 알고 낙동강 전선의 주력부대를 황급히 이곳으로 돌렸다. 학도병들은 전차와 포대를 앞세운 정예군과 맞서 1주일간 혈투를 벌였다. 배가 좌초했으니 철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싸운 결과 270명을 사살하고 4명을 사로잡았다. 이 과정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다쳤지만, 정규군을 상대로 올린 놀라운 전과였다.
작전이 끝나고 돌아온 학도병들은 그제서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곧 다른 작전에 투입돼 뿔뿔이 흩어졌고 장사상륙작전은 역사 속으로 묻혔다. 작전이 군사기밀이었기에 휴전 이후에도 전모는 가려져 있었다.
이들의 사연은 생존자들이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를 결성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7년 해병대가 바닷속 문산호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배의 모형이 복원되고 전몰용사위령탑도 세워졌다. 그러나 이 눈물겨운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할 때마다 동해안의 소년병들을 떠올리게 된다. 피흘려 지킨 대한민국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 1주기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한국경제
“약혼녀에 손톱·발톱 남기고 X-레이 작전 투입된 장소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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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왜곡 논란 불 보듯…미화·단순화 덫에
- 2016-07-27 17:33
-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메일보내기
사실 관계 확인…"맥아더 '평화주의자가 나라 망친다'던 철저한 현실주의자"
![](http://file2.nocutnews.co.kr/newsroom/image/2016/07/27/20160727171450672797.jpg)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의 결과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역사적 사건에 뛰어든 실존·허구의 인물들을 통해 그 과정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려내느냐에 성패가 달렸다. 하지만 영화는 미화와 단순화의 덫에 걸린 나머지 복잡다단한 사건의 섬세한 결을 살려내지 못했다. 그 중심에 사실에 대한 왜곡이 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는 당시 작전을 이끈 실존인물인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1880~1964)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 리암 니슨이 연기한 극중 맥아더는 '휴머니스트'에 가깝게 그려졌다.
지난 13일 열린 내한 기자회견에서 리암 니슨조차 "전설적인 카리스마를 지녔지만 대립과 충돌을 일으킨 인물"이라고 할 만큼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다면적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 속 맥아더는 아군이 전멸한 진지에 홀로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울 테니 "총과 실탄을 달라"는 소년병에게 감동해, 작전을 두고 미국 대통령과도 척을 지는 인간미로 무장하고 있다.
역사·군사학 등 관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승리 외에는 대안이 없다"(There's no substitute for the victory)는 맥아더의 말에서 전쟁에 임하던 그의 입장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전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시작했으면 군인으로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는 압록강·두만강 지역의 중국 쪽 병참선(전쟁 물자를 보급·수송하는 도로, 철도, 수로, 항로 등)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중국 본토도 폭격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 등 미국 워싱턴 당국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것이라는 위험성을 염두에 두고 이를 막았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전선에서 한쪽 팔이 묶인 채 싸운다는 한탄을 자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영화에서 맥아더가 휴머니즘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 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그는 오히려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평화주의자'라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였다.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한 역사학자는 "1930년대 맥아더가 참모총장 자리에 오르는데, 당시 군대·군비가 축소되는 걸 보면서 '평화주의자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얘기할 정도였다"며 "결국 1942년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현실주의자 맥아더가 빛을 보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영화에서 미군 측 인사들이 맥아더에게 '인천상륙작전을 강행하는 것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장면에 대해서는 "맥아더는 이미 한국전쟁 전인 1944년과 48년 대선에 나가려 했는데,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큰 표 차로 진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나이도 70대이고 미 대선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시기"라고 일축했다.
◇ "전쟁은 단순히 이분법으로 볼 수 있는 차원의 것 아냐"
![](http://file2.nocutnews.co.kr/newsroom/image/2016/07/27/20160727171638581264.jpg)
영화에서는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첩보작전의 면면은, 현실에서는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이들의 증언이 서로 엇갈리면서 여전히 논란을 낳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관계 전문가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영흥도에서 미리 준비했던 한국 해군의 작전이 'X-레이' 작전이고, 팔미도의 등대에 불을 밝힌 것은 미 해군 첩보대 작전이었다"며 "팔미도 작전에 참여한 한국인이 몇 명 있는데, 그들의 증언이 서로 달라서 말하기 조심스럽다"고 전했다.
이어 "실제로 당시 고트부대라는 첩보국의 대장인 최규봉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회고록을 통해 자신이 첩보작전을 주도해 성공했고 맥아더 사령관이 탄 기함에 올라 악수도 했다고 쓰고 있다"며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당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켠 미 해군 첩보대원 유진 클라크라는 인물의 사후 유고집이 2002년 즈음 나왔는데, 여기에는 최규봉이라는 이름이 안 나온다"고 덧붙였다.
극중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인천시민들이 연합군을 환영하는 시가행진 장면 역시 고증이 아쉬운 부분이다. 당시 연합군이 261척의 배를 이끌고 7만 5000여 병력을 상륙시키기 위해 월미도부터 융단폭격을 가한 상황에서, 이는 불가능한 장면이라는 것이 관계 전문가의 견해다.
그는 "당시 사진이나 기록에서는 (인천시가지에서 연합군을 환영하는 인파를) 보지 못했다"며 "서울 지역에 미 해병 1사단의 탱크가 들어왔을 때 주민들이 박수를 치고 하는 장면은 있지만, 인천시가지는 제가 볼 때 거의 불가능하다. 상당히 과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영화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안에서 양 진영의 첨예한 대치가 폭발한 격인 한국전쟁이 지닌 역사성을 철저히 외면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상영시간 내내 강조되는, 연합군과 국군은 '선'으로 북한군은 '악'으로 단순하게 규정한 이분법적인 역사인식 탓이다.
한 역사학자는 "한국전쟁을 평가할 때 남북한의 전쟁에서 국제전으로 전환된 전쟁이라고들 말한다. 미국의 유명한 한국전쟁 전문가 윌리엄 스툭은 '한국전쟁이야말로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낸 전쟁'이라고까지 평가한다"며 "가장 극심한 냉전기에 벌어진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할 수는 있지만, 전쟁은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볼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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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김나라 기자]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 속 '인천상륙작전'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활약상일 것이다. 하지만 스크린으로 옮겨진 '인천상륙작전'의 러닝타임 111분을 채우는 건, 또 다른 영웅들이었다. 그 성공 이면에 가려진 한국인들의 숭고한 희생이다.
사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첫 출발점도 크게 새로울 건 없었다. 제작사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정태원 대표는 최근 마이데일리에 "학도병 이야기를 담은 영화 '포화속으로' 이후, 진짜 군인 이야기를 영화화하고 싶었다"며 "그 중에서도 이기는 전쟁을 다루고 싶었는데, 그러다 인천상륙작전이 떠올랐다. 이를 심층적으로 조사하면서 X-RAY 작전 등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들을 접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에 그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발판이 된 X-RAY 작전과 팔미도 작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를 수행한 해군 첩보부대를 비롯해 켈로부대의 실제 활약상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가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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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원 대표는 "당시 작정 중 전사한 故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등 그분들을 떠올리면서 작품을 제작했지만, 극 중 X-RAY 작전의 첩보 상황은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 첩보작전이기 때문에 결과만 알려져 있지, 그 과정까지 알아내는데 한계가 있었다"며 "영화에서 맥아더 장군의 모습은 실제와 가깝고,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장면은 다큐멘터리를 참고해 똑같이 재연했다"고 말했다.
영화는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등을 모티브로 한 해군 첩보부대 대위 장학수(이정재)가 8명의 부대원들과 목숨을 걸고 X-RAY 작전을 수행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여기에 북한군 인천 방어사령관 림계진(이범수)과의 팽팽한 대립, 인천 시립병원 간호사 한채선(진세연)과의 멜로 에피소드가 더해졌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는 어땠을까?
◆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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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7만 5,000명의 연합군과 261척의 함정이 투입된 대규모 작전이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수도 서울하고 근접한 인천을 점령해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고, 심리적 타격감을 안길 것을 노렸다. 그러나 성공확률은 5,000대 1. 인천은 좁은 수로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시간이 제한적이었다. 단 2시간만 가능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인 장사상륙작전과 X-RAY 작전,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 등을 꾸몄다. 이는 학도병들과 군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X-RAY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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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은 1950년 7월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인천의 지형과 적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을 요청했다. 한국어와 지리조차 모르는 미군 첩보부대를 투입할 수는 없었기 때문.
그 결과 17명의 해군 특수첩보대가 탄생됐다. 영화에선 8명으로 각색됐다. 당시 해군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은 자신을 포함 임병래, 김순기, 장정택 중위 등 정보장교와 김남규, 정성원, 박원풍, 차성환, 한유만, 홍시욱 등 정보국 소속 사병 6명, 7명의 민간인으로 첩보부대를 꾸렸다.
이들은 8월 20일 첩보활동을 개시했다. 인천 영흥도를 거점으로 서울, 수원 등지까지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일명 X-RAY 작전. 항공 사진 촬영, 북한군의 인천지역 병력 규모, 기뢰 위치 및 제거, 상륙 지점 지형 등을 탐지했다. 이 정보들은 미극동군사령부에 송신돼 인천상륙작전의 세부계획을 수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 개시가 임박함에 따라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첩보활동을 뒤늦게 알아차린 북한군 1개 대대가 14일 영흥도를 기습했다. 영흥도에는 뒷처리를 위해 남은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등 6명의 대원과 해군 의용대원들이 있었다.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나머지 대원들을 마지막 보트로 탈출시키고, 북한군의 포로가 될 위기에 직면했다.
두 사람은 포로가 될 경우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누설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 기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택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뒤 권총으로 자결했다.
하지만 영화는 이와 다른 결말을 전개했다. 정태원 대표는 "결말을 두고 오랜 회의를 거듭했다. 똑같이 간다면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져 결국 방향을 달리 했는데 힘든 결정이었다"며 "사실 이정재는 역사와 같은 결말을 원했었다"고 털어놨다.
# 팔미도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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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북파 공작 첩보업무를 수행하는 한미 특공대 '켈로 부대'에 대해서도 조명했다. 정식 명칭은 미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다.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국내외 곳곳에서 비밀 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화 말미에 그려지는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이다.
당시 특공대는 한국인 3명과 미국인 3명, 총 6명으로 구성됐다. 미 해군 첩보대대 유진 F. 클라크 해군 대위가 총책을 맡았으며, 클라크혼 육군 소령, 존 포스터 육군중위와 한국인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한국 켈로 부대 최규봉 대장이었다. 영화에선 서진철 역의 정준호가 켈로 부대를 이끄는 설정이다.
팔미도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인천만 전체 주변 해상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켈로 부대원들에겐 "9월 15일 0시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들은 이 곳을 점령한 북한군을 제거한 끝에 불을 밝혔고, 이 불빛을 신호로 연합함대 261척은 상륙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 장사상륙작전
![](http://cdn.mydaily.co.kr/FILES/201607/201607242042581120_6.jpg)
장사상륙작전은 영화에선 다뤄지지 않았지만,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토대를 마련한 맥아더 장군의 양동작전이다. 인천 상륙을 하루 앞두고 북한군의 경계를 분산하기 위해 극비로 수립, 작전명 174호라는 기만작전을 꾸몄다.
이 작전에 투입된 대부분은 학도병이었다. 참전병 772명 중 600여명이 10대 학도병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불과 보름 남짓 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됐다. 9월 13일 부산항에서 모여 문산호에 탑승, 14일 새벽 장사해안에 상륙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문산호는 좌초됐고, 학도병 60여 명이 전투 직전 숨졌다. 그럼에도 상륙 작전을 감행, 장사도 남쪽 고지를 탈취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 교두보를 확보하는 등 북한군을 동해안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총 772명 중 139명이 전사했고 92명 부상자 발생, 이외에 대부분이 실종되는 등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사진 = CJ엔터테인먼트, 마이데일리DB, KBS 1TV·EBS 1TV 방송화면 캡처]
김나라 기자 nara927@mydaily.co.kr
입력 : 2016.08.01 03:00
[우리가 잘 몰랐던 인천상륙작전]
켈로 부대… 한국인으로 구성된 미군 소속 부대, 팔미도 등대 밝혀 상륙 지원
![故 임병래 중위](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08/01/2016080100221_0.jpg)
6·25 당시 해군 정보국장이었던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 회고록 '바다로 세계로'에 따르면, 우리 해군은 1950년 8월 13일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의 요청을 받고 17명으로 구성된 첩보대를 꾸렸다. 이들은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에 잠입한 뒤 북한군 해안포대의 위치와 수, 병력 배치 현황, 상륙 지점 지형 등의 정보를 수집해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상륙 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를 기습하며 작전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위기를 맞았다. 이때 첩보대의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가 적을 유인해 부대원들을 탈출시킨 뒤 총으로 자결했다. 포로가 되면 상륙 작전 정보가 새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54년 이들의 희생을 기려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해군은 유도탄고속함(PKG) 10번·11번함에 각각 임 중위와 홍 하사의 이름을 붙였다.
영화에서 엑스레이 작전은 큰 얼개만 남아있고 구체적인 내용들은 새롭게 구성됐다. 우리 첩보부대가 인천에 침투하기 위해 북한군으로 위장했다는 설정이 실제와 가장 차이 나는 부분이다. 첩보 부대와 북한군의 마지막 전투도 영흥도가 아닌 월미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며, 임 중위와 홍 하사의 자결 장면도 반영되지 않았다.
![6·25 전쟁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 함정 상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켈로 부대’의 모습.](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08/01/2016080100221_1.jpg)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등대 탈환을 위한 팔미도작전에 참전한 켈로부대 대대장 고 최희화 씨의 아들 최일도 목사는 “31일 만석이 된 영화관에서 어릴 적 무용담을 들려주시던 선친의 켈로부대 활동상을 보며 굉장히 큰 감동을 받았다”며 “이 영화가 혹평을 받은 것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6·25전쟁 최초의 승리한 해전인 백두산함 승조원으로 인천상륙작전, 영흥도작전, 군산양동작전 등에 모두 참전한 최영섭 예비역 해군대령은 “조국을 살리기 위해 나선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의 애국적 행위가 반공이란 이유로 평가절하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다음의 명장면에서 나는 극장을 뛰쳐나올 뻔 했다.
장면 1. 맥와더와 소년학도병이 만나 서로 경례하는 장면
장면 2. 대원 중 하나가 죽어가면서 "가, 가란말이야!"라고 절규하는 장면
장면 3. 도련님이 "다음 세상에서는 내가 형으로 불러줄게"라고 말하는 장면
장면 4. 북한군 장교를 비행기로 매달아 가는 장면
장면 5. 진세연이 연합군과 함께 사다리 타고 상륙하는 장면
장면 6. 연합군 사령관께서 친히 '상륙'하시어 전쟁영웅 장학수 대위의 시신 앞에서 경례하는 장면
[인천상륙작전 관람 후기]
영화를 보고나서 제일 궁금한 것이 영화에 나오는 장면의 사실 여부였다. 인터넷으로 인천상륙작전에 관여했던 사실에 대하여 검색을 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7만 5,000명의 연합군과 261척의 함정이 투입된 대규모 작전이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수도 서울하고 근접한 인천을 점령해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고, 심리적 타격감을 안길 것을 노렸다. 그러나 성공확률은 5,000대 1. 인천은 좁은 수로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시간이 제한적이었다. 단 2시간만 가능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인 장사상륙작전과 X-RAY 작전,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 등을 꾸몄다. 이는 학도병들과 군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소재가 된 '엑스레이(X-RAY)' 작전은 실제 6·25 전쟁 당시 우리 해군 첩보 부대가 연합군의 인천 상륙을 지원하기 위해 인천에 미리 잠입해 북한군 동향을 수집한 첩보 작전이다.
6·25 당시 해군 정보국장이었던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 회고록 '바다로 세계로'에 따르면, 우리 해군은 1950년 8월 13일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의 요청을 받고 17명으로 구성된 첩보대를 꾸렸다. 이들은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에 잠입한 뒤 북한군 해안포대의 위치와 수, 병력 배치 현황, 상륙 지점 지형 등의 정보를 수집해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상륙 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를 기습하며 작전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위기를 맞았다. 이때 첩보대의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가 적을 유인해 부대원들을 탈출시킨 뒤 총으로 자결했다.
- 영화는 북파 공작 첩보업무를 수행하는 한미 특공대 '켈로 부대'에 대해서도 조명했다. 정식 명칭은 미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다.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국내외 곳곳에서 비밀 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화 말미에 그려지는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이다.
당시 특공대는 한국인 3명과 미국인 3명, 총 6명으로 구성됐다. 미 해군 첩보대대 유진 F. 클라크 해군 대위가 총책을 맡았으며, 클라크혼 육군 소령, 존 포스터 육군중위와 한국인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한국 켈로 부대 최규봉 대장이었다. 영화에선 서진철 역의 정준호가 켈로 부대를 이끄는 설정이다.
팔미도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인천만 전체 주변 해상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켈로 부대원들에겐 "9월 15일 0시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들은 이 곳을 점령한 북한군을 제거한 끝에 불을 밝혔고, 이 불빛을 신호로 연합함대 261척은 상륙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 이정재가 죽게되는 '월미도 조명탄' 작전은 없었다.
- 장사상륙작전은 영화에선 다뤄지지 않았지만,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토대를 마련한 맥아더 장군의 양동작전이다. 인천 상륙을 하루 앞두고 북한군의 경계를 분산하기 위해 극비로 수립, 작전명 174호라는 기만작전을 꾸몄다.
이 작전에 투입된 대부분은 학도병이었다. 참전병 772명 중 600여명이 10대 학도병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불과 보름 남짓 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됐다. 9월 13일 부산항에서 모여 문산호에 탑승, 14일 새벽 장사해안에 상륙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문산호는 좌초됐고, 학도병 60여 명이 전투 직전 숨졌다. 그럼에도 상륙 작전을 감행, 장사도 남쪽 고지를 탈취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 교두보를 확보하는 등 북한군을 동해안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총 772명 중 139명이 전사했고 92명 부상자 발생, 이외에 대부분이 실종되는 등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우리 역사 속의 숨은 영웅들를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 2016년 8월5일 금요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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