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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2016년 9월26일 [(녹)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우리들의 묵상 / 모감주나무 5장


2016년 9월26일 [(녹)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우리들의 묵상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욥을 칭찬하시자 사탄은 욥의 소유를 쳐 보시면 주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제1독서).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논쟁이 일어나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세우시고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 욥기의 말씀입니다. 1,6-22

복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6-50


오늘의 묵상

욥 성인의 위대함은 자신의 재산과 자녀들, 곧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도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단순함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가 욥 성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되, 하느님만이 자신을 알아주고 그분이 준비하여 놓은 천상의 상급을 얻으려 살아가는 순박함과 겸손함을 간직합시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은 우리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 천상 지혜가 넘치게 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성당에 돌아와서 성경책을 보았는데, 오늘 제1독서의 내용이었습니다. ‘알몸으로 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간다 해도 감사 할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고해도 감사할 뿐입니다.’ 욥은 가진 모든 것을 아무 이유 없이 잃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누구를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저는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고, 모든 것이 잘 풀렸습니다. 계속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분노하면서 지냈다면 저는 사제생활을 잘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제게 다가온 위기와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욥 성인의 말씀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 오늘 제1독서 욥기의 장면은 흡사 하느님의 종 욥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같습니다. 

욥의 믿음을 확인하고 싶은 하느님의 호기심이 발동하신 것 같습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유혹, 고통, 시련-’이라 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욥의 시련을 허용하셨지만 분명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어 연속되는 욥의 시련에 불행입니다.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중에 겪게되는 우리의 고통과 시련이란 생각이 드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무려 4회에 걸쳐 욥이 닥친 불행을 전하는 소식들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의문을 품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욥의 기민한 대처가 참 반갑고 믿는 이들의 모범이 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 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첫째 시련을 통쾌하게 통과한 욥입니다. 


오늘 복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이 벌어진 상황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처가 참 기민하고 지혜롭습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유혹과 고통, 시련을 잘 통과해 갈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해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 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관대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선사되는 이 관대한 마음이 유혹과 고통, 시련을 잘 통과하게 합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막지마라’, 건들이지 말고 ‘그냥 놔두라(leave him alone)’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기고만장한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제자들의 분위기를 바로 잡으며 시야를 넓혀 관대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바로 겸손하고 관대한 믿음만이 유혹과 고통, 시련의 영적전투에서 하느님의 승리로 이끄는 최상의 영적 무기임을 깨닫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요즈음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있어 보이고 싶은 경향이 강해져, 심지어 ‘있어빌리티’란 신조어가 나올 정도입니다. '있어빌리티'란 '있어'와 능력이라는 영어의 ‘어빌리티’(ability)를 합성한 말입니다.

‘부자형’ 있어빌리티는 고가의 물품을 SNS 속 사진에 살짝 드러냄으로써 우회적으로 재력을 과시합니다. '인맥형' 있어빌리티는 SNS상의 프로필 작성과 구성원의 면모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과시합니다. '센스형'은 자신만의 장소나 음식을 올림으로써 독특한 취향을 알리려 합니다. 그러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SNS의 그런 모습을 진짜로 보는 의견은 6.4%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 허세라는 말이지요.

제자들의 경우도 하느님도 예수님도 아닌 자신들이 지닌 것들을 내세워 서로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허세를 부린 것입니다. 우리도 속물근성이 발동하면 그런 처신을 하곤 하지요. 그렇다면 참으로 실속 있고 ‘큰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려는 태도를 버려야겠지요. 내 삶의 기준이 하느님과 예수님으로 삼는다면 삶의 방향이 뚜렷해집니다. 시작도 선택도, 관계맺음이나 일의 실행도, 궁극적인 내 인생의 목표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착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삶의 기준인 이타적 사랑을 지니지 않은 채 서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것을 마치 자기 것인양 착각하여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비교하려거든 하느님과 비교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 되려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추시고 작아지시고 비우신 예수님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주도권을 인정할 줄 아는 하느님 앞에서의 정직함과 가난한 마음을 지녀야겠지요. '있어빌리티'의 허세를 철저히 버리고, 다른 이에게 드러나는 선을 시기하지 않으며,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다른 이들 아래 자신을 둘 줄 아는 겸손을 지니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 높아만 가는 푸르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주님을 향한 그리움을 키워가고, 허세를 버리고 겸손하게 일상의 고통과 수고로움을 견뎌내며, 가난하신 예수님을 품음으로써 진정 '있어 보이는' 우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4. 이렇듯 반드시 반대하고 어려움을 주는 사탄의 역할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가톨릭교회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톨릭 시성 조사 과정은 매우 엄격하고 세밀한 조사를 거칩니다. 그 과정 안에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 즉 악마의 변호사라는 역할을 두는데, 그는 사사건건 시성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데블스 애드버킷은 의무적으로 '악마'의 관점에서 사사건건 의혹을 제기하고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그래서 자칫 조사위원들이 성인 후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로 기울 수 있는 위험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성인으로 공식적으로 추대되는 것처럼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세력에 맡겨져 자녀, 재산, 건강, 명예 등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잃고 나서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라는 기도를 올릴 수 있어야 참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지금 잘 살고 있다고 하고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도 아직 욥과 같은 시련을 겪어보지는 않았으니 너무 자신하지 말아야합니다. 주님은 연옥과 같은 시련을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를 단련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시민 중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완전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전삼용 요셉신부)


2016년 9월26일 [(녹)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오늘의 복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오늘 제1독서 욥기의 장면은 흡사 하느님의 종 욥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욥의 시련을 허용하셨지만 분명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어 연속되는 욥의 시련에 불행입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무려 4회에 걸쳐 욥이 닥친 불행을 전하는 소식들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의문을 품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욥의 기민한 대처가 참 반갑고 믿는 이들의 모범이 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 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첫째 시련을 통쾌하게 통과한 욥입니다. 


 가톨릭 시성 조사 과정은 매우 엄격하고 세밀한 조사를 거칩니다.

그 과정 안에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 즉 악마의 변호사라는 역할을 두는데,

그는 사사건건 시성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데블스 애드버킷은 의무적으로 '악마'의 관점에서 사사건건 의혹을 제기하고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그래서 자칫 조사위원들이 성인 후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로 기울 수 있는 위험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성인으로 공식적으로 추대되는 것처럼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세력에 맡겨져 자녀, 재산, 건강, 명예 등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잃고 나서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라는 기도를 올릴 수 있어야 참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지금 잘 살고 있다고 하고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도 아직 욥과 같은 시련을 겪어보지는 않았으니 너무 자신하지 말아야합니다.

주님은 연옥과 같은 시련을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를 단련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시민 중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완전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려는 태도를 버려야겠지요.

내 삶의 기준이 하느님과 예수님으로 삼는다면 삶의 방향이 뚜렷해집니다.

시작도 선택도, 관계맺음이나 일의 실행도, 궁극적인 내 인생의 목표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삶의 기준인 이타적 사랑을 지니지 않은 채 서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것을 마치 자기 것인양 착각하여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비교하려거든 하느님과 비교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 되려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추시고 작아지시고 비우신 예수님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주도권을 인정할 줄 아는 하느님 앞에서의 정직함과 가난한 마음을 지녀야겠지요.

'있어빌리티'의 허세를 철저히 버리고, 다른 이에게 드러나는 선을 시기하지 않으며,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다른 이들 아래 자신을 둘 줄 아는 겸손을 지니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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