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23일 [(녹)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묵상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일곱 천사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는 것과 유리 바다 위에 있는 이들이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니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들은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5,1-4
복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19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먼저, 세상을 거꾸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성경과 복음서에 그 많은 예들이 담겨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예는 바로 박해와 순교입니다. 교회는 어떠한 순간에도 박해나 순교가 무서워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이를 하느님의 선물이요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디서든지 하느님을 증언할 좋은 기회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기에, 때로는 오해를 받거나 비방이나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적인 보호를 기대하거나, 손해를 막아 주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의 모든 고통을 결국은 주님께서 하늘 나라에서 보상해 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이 평소에 생각하고 추구하던 가치가 어떤 것인지 드러나고, 그가 하느님의 사람인지 세상의 사람인지가 드러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박해의 순간에도 세상의 헛된 인연이나, 재물이나 무기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한 말씀이 우리를 지키는 무한한 힘의 원동력입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방패요, 인내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2~19)
2. 저는 ‘걸림돌’이라는 말보다는 ‘디딤돌’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다가오는 시련과 아픔을 걸림돌로 여기면 원망과 분노가 생기고,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련과 아픔이라도 그것을 디딤돌로 여기면 용기와 희망이 생기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남자와 여자, 고용주와 노동자, 다양한 종교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또한 나무가 살아 있다는 표시이기도합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없고, 모든 것이 조용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죽은 사회일수도 있습니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그런 다양함이 또한 아름다움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3.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박해와 고통을 받게 될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유다인과 이방인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회당과 감옥에 넘겨지고 임금들과 총독들에게 끌려 갈 것입니다(21,12). 나아가 미움을 받고 목숨을 잃는 일도 겪을 것입니다(21,16-17).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힘든 길이지요. 제자의 길은 자신을 버리고 가야하는 길이요, 주님의 뜻을 따라 진리와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 남보다 더 성공해야 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야 하니 늘 반대에 부딪치고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그럼에도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니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21,18-19) 하고 권고하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진리와 사랑과 선에서 멀어져 살아가는 이들로부터 박해와 고통을 받을 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인내입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 온갖 어려움과 극도의 슬픔, 병,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일으켜세우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박해와 고통, 온갖 시련과 죽음마저도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며, 주님을 증언할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신 분께서 어떤 순간에도 영원히 함께해주신다는 믿음을 지닐 때 우리는 다가오는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인내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지요.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4. ‘검은 사제들’에서 한 아이 몸속에 들어간 마귀에게 사제들은 “왜, 이 세상에 왔느냐?”라고 물어봅니다. 그것들은 대답을 회피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원숭이인 것을 증명하러 왔다.”
우리 안의 어둠은 우리가 원숭이일 뿐이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믿게 만들기를 원합니다. 절대 인간은 바다를 걸을 수 없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숭이가 아닙니다. 바다를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이 육체적 본성인 666을 이겨야만 합니다. ‘666’은 결코 미래의 어떤 누구를 상징하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리로 덮인 불바다 위에 서 있는 이들은 모두 그 666을 이긴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가 다 666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666은 각자의 속에 있는 동물적 본성입니다. 교만이고 성욕이고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원숭이가 아님을 믿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 일입니다. 마치 마시멜로우 실험에서처럼 우리가 그것들을 참아내기만 하면 하느님 자녀의 본성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임을 믿어야합니다. 그 믿음이 없다면 우리 자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싸워 이겼다면, 우리 또한 마지막 날에 우리가 원숭이가 아님을 증명하게 해 주신 주님을 찬미하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전삼용 요셉신부)
2016년 11월23일 [(녹)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오늘의 복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2~19)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먼저, 세상을 거꾸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그럼에도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니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21,18-19) 하고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온갖 시련과 죽음마저도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며, 주님을 증언할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신 분께서 어떤 순간에도 영원히 함께해주신다는 믿음을 지닐 때 우리는 다가오는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인내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지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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