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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6년 12월28일 수요일 [(홍)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매일미사 묵상/처진소나무 5장



[매묵]2016년 12월28일 수요일 [(홍)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매일미사 묵상


오늘 전례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순교로 이해하고 기억해 오다가 중세 이후에는 더욱 성대한 축일로 지내 오고 있다. 아기 예수님 때문에 죄 없는 가운데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본기도

하느님, 죄 없이 살해된 아기 순교자들이 말도 배우기 전에,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으니, 저희도 오늘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하느님은 빛이시고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으시다며,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시라고 전한다(제1독서).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고,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복음).


제1독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1,5─2,2

복음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8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하신 성체로 저희를 기르시니, 성자의 탄생으로, 말도 못 하는 죄 없는 아기들이 순교한 이 축일에, 저희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내려 주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헤로데 왕이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 사는 아기들을 무자비하게 죽입니다.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장차 유다의 왕이 되시리라는 예언을 듣고는 예수님을 자신의 정적으로 여긴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찾지 못하자 급기야 갓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려고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결과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까? 아기 예수님 때문에 무죄한 아기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것이지요. 어떻게 본다면 살해당한 아기들은,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 메시아요, 구세주이심을 피로써 증언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고, 자기에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제거하는 자들을 많이 봅니다.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힘없고 죄 없는 어린이들을 희생양으로 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 무죄한 어린이들이 얼마나 죽어 가고 있습니까? 산업 현장에서도 많은 어린이가 착취를 당하고 있지요. 심지어 낙태로 어린 생명이 쉽게 희생되기도 합니다. 마치 박해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어린 생명과 힘없고 자기 자신을 보호할 힘조차 없는 이들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이토록, 죄 없으면서도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써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 진정한 순교일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도 훗날, 그렇게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사랑으로 가실 것입니다. 진정한 순교를 당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더러는 부당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혹 무죄하면서도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일을 순교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곧 그 일을 ‘죄 없이 죽은 분’, 곧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을 드러내는 순교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이영근 신부)


2.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며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반영억 라피엘 신부)


3. 사회의 구조악의 어둠을 몰아내는데 ‘빛의 연대’連帶보다, ‘연대의 일상화日常化’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4. 예수님의 방법은 철저한 섬김이요, 나눔이었습니다. 권력을 지녔지만 사용하지 않았고, 섬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길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5. " 어린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고통이 그들에게만 닥치는가!" 라고 하느님을 향하여 큰소릴  것입니다그런데 하느님에게 아무리 큰소릴 치고 물어봐도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그야말로 "적막감 자체입니다그러다가 우리는 지치고지치다 못해 포기하면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응답이었다고 섣부른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하느님은 인간이 고통을 당하고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우리가 하느님의 의지를 담고 있는 성경을 통해서 본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대부분의 재앙들은 우리 인간의 행동이 빚어낸 결과들인데도 아무 죄없는 하느님께만 원망의 소리를 하였습니다.(정성훈 모세 신부)

6.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가장 어두운 시기인 바빌론 유배 당시, 학살당한 자식들의 어머니들의 참혹한 울부짖음이 회상된다. 유배는 제2의 종살이로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거역하고 지은죄의 응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빌론 유배의 역사를 회상시키며 예수께서는 이러한 죄의 응벌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되살려 내실위대한 분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 하나의 이야기의 끝을 모두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맺음으로써 성서에서 약속하신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처럼 유년사화는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를 보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어떤 분으로 신앙해야 하는지 알려주려는 것이 목적이다
.

그러기에 하느님은 베들레헴의 무고한 아이들을 다 놓아두시고 왜 아기 예수만을 구했는가에 대해 골몰할 필요도 없고, 한 명의 구세주 때문에 무고한 아이들이 희생양이 될 수 있는가 의아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무고한 어린이들의 희생을 애도하고 기념하는 날을 정했을까
?

오늘 성서말씀을 통해서 어른들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또는 무관심 속에서 무고하게 학대 받고 버려지고 죽임을 당하는 무력한 어린이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어른들의 이기심 때문에 낙태되고 있는 죄 없는 아기들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내몰린 아이들자본주의의 횡포 속에 굶어 죽는 아이들사회의 잘못된 제도로 희생되고 도태되는 가난한 아이들, 그 책임은 하느님이 아니고 고스란히 우리 사람에게 있다
.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이제 우리가 무죄한 아기를 죽이는 또 다른 헤로데가 되거나, 어떠한 난관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또 다른 요셉이 되거나 선택의 기로에 섰다는 말씀이다. 나는 어느 쪽인가? 나는 무죄한 어린 생명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행동하라는 말씀이다
.(이인옥 세실리아)

7. 유다인들의 임금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소식을 동방박사에게 들은 헤로데는 그 어린 임금을 죽여야만, 자기 후손이 왕통을 이어가리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잔혹하게도 예수 탄생과 비슷한 시기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모두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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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태어난 아기들의 생명을 빼앗은 헤로데의 잔혹함보다 아기 예수를 지키기 위해 그런 처사를 허용하신 것 같은 하느님께 더 시선이 머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실 수 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심지어 마태오 저자가 그런 일이 미리 구약에 예언되었다고 전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슬며시 책을 덮어버리게 됩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의 꼬무락거리는 몸짓을 떠올리며 내 몸뚱어리는 진절머리를 칩니다. 아기를 갓 낳은 엄마들의 자그마한 꿈을 송두리째 앗아간 큰 슬픔을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하는지 몰라 내 가슴속에는 찬바람만 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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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서는 적절한 때에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불행을 허용하시는 것일까? 인간들의 작은 꿈을 꼭 그렇게 훼방 놓으셔야 하는가? 이런 숱한 의구심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 --> 그런데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오릅니다. 지금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그냥 흘려들어도 될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지? 내 질문의 상대방은 누구이지?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질문을 제기할 상대방이 있었습니다.

) --> 이 모든 의구심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태양은 빛나고 지구가 돌고 있었습니다. 창공의 별들은 여전히 깜박거리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사계절은 바뀌어도 여전히 찾아왔습니다. 내가 분노를 느끼며 항의를 제기하는 순간에도 무엇인가 일하는 손길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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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질문하는 것은 그분의 일 처리 방식이었지 그분께서 일하고 계시지 않음이 아니었습니다.

) --> 그동안 내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그분께서 일하고 계시지 않은 것처럼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내 질문은 실상 하느님께서 제 방식대로 일하셔야 한다고 억지를 부린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우리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내 손에 쥐어진 칼 중 어떤 것을 휘두를는지는 바로 내 결정에 달렸습니다. 나는 헤로데가 될 수도 동방박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계셨을 뿐이었습니다.(윤경재 요셉)






8. 헤로데는 분노를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표출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기 권력 유지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정적들을 잔인하게 살해해버립니다. 그는 메시아의 탄생을 막강한 정치권력의 등장으로 오해하여 두려워하며 분노하고 무죄한 아기들까지 죽여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분노의 뿌리인 탐욕을 버려야겠습니다.

또한 헤로데처럼 자기 목표만 생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에만 눈이 멀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자기 이익에만 몰두할 때 점점 다른 이들의 아픔에 대한 애정이 무디어지고 두려움이 일어나 무의식 중에 무죄한 어린이들의 피를 강요하는 행동도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지요.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12월28일 수요일 [(홍)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오늘의 복음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오늘 복음을 보면 헤로데 왕이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 사는 아기들을 무자비하게 죽입니다.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장차 유다의 왕이 되시리라는 예언을 듣고는 예수님을 자신의 정적으로 여긴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찾지 못하자 급기야 갓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려고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의 생명을 빼앗은 헤로데의 잔혹함보다 아기 예수를 지키기 위해 그런 처사를 허용하신 것 같은 하느님께 더 시선이 머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실 수 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심지어 마태오 저자가 그런 일이 미리 구약에 예언되었다고 전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슬며시 책을 덮어버리게 됩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의 꼬무락거리는 몸짓을 떠올리며 내 몸뚱어리는 진절머리를 칩니다. 아기를 갓 낳은 엄마들의 자그마한 꿈을 송두리째 앗아간 큰 슬픔을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하는지 몰라 내 가슴속에는 찬바람만 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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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서는 적절한 때에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불행을 허용하시는 것일까?

인간들의 작은 꿈을 꼭 그렇게 훼방 놓으셔야 하는가? 이런 숱한 의구심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이 모든 의구심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태양은 빛나고 지구가 돌고 있었습니다.

창공의 별들은 여전히 깜박거리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사계절은 바뀌어도 여전히 찾아왔습니다.

내가 분노를 느끼며 항의를 제기하는 순간에도 무엇인가 일하는 손길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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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질문하는 것은 그분의 일 처리 방식이었지 그분께서 일하고 계시지 않음이 아니었습니다.

) --> 그동안 내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그분께서 일하고 계시지 않은 것처럼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내 질문은 실상 하느님께서 제 방식대로 일하셔야 한다고 억지를 부린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우리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내 손에 쥐어진 칼 중 어떤 것을 휘두를는지는 바로 내 결정에 달렸습니다.

나는 헤로데가 될 수도 동방박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계셨을 뿐이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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