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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1월5일 목요일 [(백) 주님 공현 전 목요일] 매일미사 묵상/풍산가문비 4장


2017년 1월5일 목요일 [(백) 주님 공현 전 목요일] 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하느님, 외아드님의 탄생으로 신비로이 인류 구원을 시작하셨으니, 하느님의 종들에게 굳은 믿음을 주시어,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시나이다. 아멘.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자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부르시고, 필립보에게 이끌린 나타나엘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미 보고 계셨다는 사실에 놀라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한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1-21

복음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3-51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와 또 다른 요한의 제자에게 이미 했던 말입니다(요한 1,39-40 참조). 필립보는 같은 고향 출신인 안드레아로부터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필립보는 이 기쁜 소식을 또다시 나타나엘에게 전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당신의 예지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필립보와 만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라삐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성경 공부에 전념하곤 하였습니다. 이로 보아 나타나엘 역시 성경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 곧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더 신비로운 계시를 해 주십니다. 창세기 28장 12절에 나오는 야곱의 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야곱과 하느님 사이를 오가면서 축복을 전해 주는 예표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 기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축복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기쁨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전하고 있습니까?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우리가 잡은 핸들이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듯이, 사람의 몸은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누군가를 위한 삶을, 본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깊이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멈추면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명동에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식당이 있습니다. 요리하는 분들의 정성을 볼 수 있었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청결하기 때문에 믿음이 가는 식당입니다. 마치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와서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감출 것이 없다면, 자신이 있다면, 부끄러움이 없다면 말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세요.’ 지난해 모든 혼란은 와서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은 연탄 한 장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 이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4) 구역"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Jonari(요나리) '이라고도 부릅니다.
첫째 창은 나에 대해서 나만이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둘째 창은 나에 대해서 나는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
셋째 창은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 부분이 있습니다
.
넷째 창은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는 부분이 있습니다
.

이것은 누구나 다 적용되는 4개의 창입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부분이 결코 많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나 자신도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겠으며 또 내가 안다고 한들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양,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양, 말하고 판단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무지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했던가요
?


그렇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요?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를 알 수 있겠습니까? 나를 아는 분은 오직 나를 만드신 창조주뿐이십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알고 싶으면 나를 만드신 하느님을 알아야 하고 그분을 통해서만이 나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원형이시고 나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
걸을 제도 누울 제도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
.
말소리 내 혀 끝에 채 오르기 전에, 주는 벌써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
알으심이 너무나 놀랍고도 아득하와, 내 힘이 미치지 못하나이다
.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새벽의 날개를 이 몸이 친다 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몸을 잡아 주시리다.
당신은 오장육부 만들어 주시고, 어미의 복중에 나를 엮어 내셨으니

묘하게도 만들어진 이 몸이옵기, 하신 일들 묘하옵기, 당신 찬미하오니
당신은 내 영혼도 완전히 아시나이다.
은밀한 속에서 내가 지음 받았을 제, 깊숙한 땅 속에서 내가 엮어졌을 제
,
당신은 내 됨됨이를 알고 계셨나이다.(시편
138)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3. 요한 1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길은 사랑뿐임을 알려줍니다. 사랑하지 않는 한 그 무엇을 한다 하여도 죽음 안에 머무른다는 것이니(1요한 3,14)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공허한 사랑의 메아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은 나의 실제 얼굴을 보고자 하십니다.

죽음의 다리를 건너 생명의 땅으로 가기 위해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거나,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3,17-18)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때 영원한 행복으로 갈 수 있는 ‘생명의 다리’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명의 길이요 구원으로 가는 다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된 필립보의 태도를 본받아야겠습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요한 1,45) 하고 알려주지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그에게 “와서 보시오.”(1,46) 하고 말합니다.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을 말과 행동을 통해 실제로 체험하도록 이끌어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죽음의 다리를 건너 영원한 행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나 혼자가 아니라 사랑을 거부하며 죽음에 머물고 있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그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메말라 가는 오늘입니다. 우리 서로 서로 참 생명과 행복으로 건너갈 수 있는 사랑의 티켓을 얻어 실천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됩시다. 마음을 열고 예수님처럼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죽음의 다리 저편에서 펼쳐지는 ‘생명과 행복의 축제’에 함께 참여하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4. 우리는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나의 삶이 이러니 너희도 내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아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났으면 전해야 합니다.(반영억 라파엘 신부)

5. 유대의 랍비 신비주의자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쉘은 말합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바로 이 고백이 우리의 성소와 직결됩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중 다음 대목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누구나 지닌 성소의 갈망입니다. 

누구나 그분의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을 지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을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우리들입니다. 

존재감 충만한 삶입니다. 


성소의 신비, 성소의 선물입니다. 

주님 아닌 아무도 알 수 없는 성소의 신비입니다. 

우리 경우만 봐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람의 얼굴이 다 다르듯 

성소의 계기도 다 다르고 결코 비교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각자 그만의 고유한 성소입니다. 

나이나 출신지, 재능, 성격과 관계 없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신비입니다.


어제 복음에 이은 오늘 복음만 봐도 성소의 신비를 짐작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두 제자는 주님께 불림 받았고, 

시몬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를 통해 주님께 불림받았습니다. 

오늘 필립보는 주님께 직접 “나를 따라라.”불림 받았습니다. 

이어 나타나엘은 필립보를 통해 주님께 불림을 받습니다.(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1월5일 목요일 [(백) 주님 공현 전 목요일]

복음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와 또 다른 요한의 제자에게 이미 했던 말입니다(요한 1,39-40 참조).


감출 것이 없다면, 자신이 있다면, 부끄러움이 없다면 말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세요.’ 지난해 모든 혼란은 와서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나의 삶이 이러니 너희도 내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아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 ​2017년 1월5일 목요일 [(백)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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