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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1월9일 화요일 [(백) 주님 세례 축일] 매일미사 묵상/호랑가시나무 6장



2017년 1월9일 화요일 [(백) 주님 세례 축일] 매일미사 묵상


오늘 전례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므로 주님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전례력으로는 이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된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께 성령을 보내시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선포하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민족들의 빛이 되어,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풀어 주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내려오시며,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린다(복음).


제1독서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1-4.6-7<또는 사도 10,34-3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7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양식을 가득히 받고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오니, 저희가 성자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며, 주님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축일의 입당송은 왜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설명해 줍니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열렸네.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머무르시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예수님의 세례로 우리에게도 세례의 은총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온몸을 요르단 강에서 씻는 세례는 상징적 행위로 남아 오늘날에는 이마에 물을 붓습니다. 이 상징은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태어남을 보여 줍니다. 세례로 우리는 새로운 인생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하는 삶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한 삶입니다. 커다란 은총의 선물을 세례 때 받은 우리는,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의 것을 모두 끌어안고 내어 주지 않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고통과 슬픔을 이겨 내고 부활의 은총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뒤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저 장식품을 지니듯이 세례명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세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은총의 선물을 주는 통로입니다. 세례의 은총에 감사하며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그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다양한 세례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세례자 요한의 것입니다. 그 시대 세례 운동가들은 흐르는 물에 사람의 몸을 잠기게 하여 죄를 씻는, 일종의 정화(淨化) 의례를 행하였습니다. 그 운동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혹은 성전에 정해진 제물봉헌을 하지 못하여, 죄인이 된 사람들에게 죄를 씻어주며, 그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키는 의례였습니다.

요한이 행한 세례는 다른 세례운동가들이 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세례 운동가들의 세례는 필요에 따라 몇 번이라도, 죄를 씻어주는 정화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사람이 회개할 것을 약속하면서 일생에 단 한 번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일찍이 요한의 세례운동에 가담하셨습니다.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에게로 이어지는 이 회개 운동은 그 시대 유대교가 가르치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준수와 성전의 제물봉헌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지키고 바칠 것을 요구하면서 그 시대 유대교는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인,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잊어버렸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면서 심판하실 하느님을 상기시켰습니다. 후에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지만, 그 하느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자비를 사람이 실천하며 살아서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그분의 자녀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

요한의 세례운동은 율법과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하여, 죄인이 된 사람들에게 회개하면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그와 더불어 요한은 유대교가 지닌 민족적 배타성을 배제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은 이 돌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루가 3, 9)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내세워 타민족 앞에 우월감을 갖는 관행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타민족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월감은 그 민족 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우월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유대교는 율사와 사제들의 권위를 과장하면서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일시 가담하였다가 후에 독자적인 길을 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요구하던 바를 더 발전시켜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같이 물로 씻는 의례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의 죄를 직접 용서하는 실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절대화하여 강요하던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도 가히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는 않았다.(마르 2,27) 유대교는 질병을 인간 죄에 대한 벌이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주면서 병고가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주었습니다
.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세례’라고 불렀다고 전합니다.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루가 12,50), 혹은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등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세례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깨달음과 실천은 그분을 죽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로써 사람들에게 일으킨 운동은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실천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분이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면서 그것이 요구하던 바를 당신의 삶으로 실천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 죄에 대해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당신의 실천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효도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듯이, 하느님을 믿는 것도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에 충실하였습니다. 그 실천들이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기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하느님의 것이었기에 그분은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는 부활 신앙이 생겼습니다
.

그리스도인이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실천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입문 의례입니다. 결혼식이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의례이듯이,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삶을 시작하겠다는 의례입니다. 세상은 용서하지 않고, 잘못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차별하고, 높은 자와 낮은 자를 차별합니다. 그리고 높은 자와 가진 자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세상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갖지 못한 자와 낮은 자도 행복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가난한 이와 우는 이도 행복해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사는 신앙인은 그것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대가가 십자가로 돌아오더라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희망하면서 그것을 감수합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하며 아버지의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실 것을 빕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2. 세월이 흘러 이방인의 지배가 확대된 후 예루살렘 성전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차차 침례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유혈제사에 대한 반감, 정치권력에 아부하는 대사제에 대한 반감, 외교인의 개종 등이 침례운동이 확산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1세기에 활동하던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도 요한의 후예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자서전에 기록합니다. 그에 따르면 사제 가문 출신 세례자 요한이 새로운 침례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요한은 침례운동을 단순한 정결예식이 아니라 죄를 씻는 제사와 동등한 위치까지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세례운동을 통해 헤로데가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내는 성전제사를 상대화 시켰습니다. 이는 성전 예식에 도전하는 혁명적인 운동이었습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 6,6)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진노를 면하려면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회개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운동이 힘차게 출발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요한이 세례를 준 요르단 강물이 실제로는 정결예식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 왔듯이 세례자 요한도 요르단 강에서 침례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또 에세네파의 정결예식은 그들 공동체 안에서 수시로 거행되었으나, 요한의 세례는 두 번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일회적인 예식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과 베푼 사람 사이의 유대감을 강조하였는데, 에세네 등 격식을 차리는 전통파들이 외교인을 자기네 공동체에서 배척하는 것과는 달리 요한은 죄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회개하기를 청하는 사람은 모두 세례를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마태오 저자의 신학이 담겨있습니다. 의로움, 곧 정의는 마태오 복음서 5~7장 산상설교의 주제입니다. 이 정의는 죄인들과의 연대성을 의미하며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 되기를 결정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지칭합니다. 이 정의는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르단 강에 침례하심으로써 죄인들과 하나 되신 것입니다.

(윤경재 요셉)


3. 오늘 1독서의 ‘주님은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라는 말씀도 

흡사 주님의 종 예수님에 대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세례 요구를 극구 사양하는 요한에게 한 말씀으로 정리해 주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의로움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겸손과 자비,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가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오늘 이사야서에 소개되는 주님의 종은 그대로 의로운 예수님을 지칭하는 듯 합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4.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특혜를 받고 섬김을 받고 그래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않는 삶,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않은 삶 이였으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걸어가는 삶 이였습니다.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인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는 삶이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세례 받은 신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첫째, 바른 인생길을 가야합니다.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해야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소경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를 풀어주는 이가 되어야합니다.

둘째, 오늘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모든 영광과 기쁨은 하느님께로 돌리는 겸손함이 있어야합니다.

셋째, 하느님께서는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시듯이,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름이 예뻐서, 부르기 좋아서, 생일에 가까운 축일이 있어서 세례명을 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정하는 것은 이미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과 성녀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청하며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서 세례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을 한번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분들은 죄의 용서를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5. 세례 받은 자는 빛 자체이신 분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빛의 자녀’(1테살 5,5)로서 ‘세상의 빛’(마태 5,5)이 되어 “모든 의로움‘(마태 3,15)을 이루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세례의 약속을 한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한 길은 무엇일까요?

‘빛의 자녀’가 되려면 고난 받는 주님의 종처럼 살아야 합니다. 봉사하고 희생하는 충실한 종이 되는 것이지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성실하게 공정을 펴나가는 것”(이사 42,3)이지요. 어디서나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의 ‘모든 의로움’을 실현해나가는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이의 빛이 되어,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어야”(42,7) 할 것입니다. 세례 받은 우리의 소명은 해방의 도구가 되고, 생명의 기쁨을 전하여 가난 가운데 하느님의 풍요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희망과 자유의 복음이 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지요.

또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신적인 낮추심’을 혼으로 지니고 살아내야 합니다. 모두를 품기 위한 ‘비움’, 모두와 사랑과 생명을 주고받기 위한 ‘낮춤’을 사는 것이 세례 받은 이들의 몫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그렇게 비움과 낮춤의 자세로 거룩한 순례를 이어갑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각자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점점 메말라가는 이 시대에 자비를 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연민과 온정을 ‘모든 사람들’과 아낌없이 나눔으로써 주님의 얼굴을 드러내야겠지요.

우리 모두 고통과 갈등으로 가득 찬 삶의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녹여 세상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거룩한 세상이 되도록 힘쓰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 다시 한 번 세례 때의 약속을 회상하면서,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빛으로 오신 그분께 찬미를 드리도록 합시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1월9일 화요일 [(백) 주님 세례 축일]

오늘의 복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진노를 면하려면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회개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운동이 힘차게 출발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요르단 강에서 침례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에세네파의 정결예식은 그들 공동체 안에서 수시로 거행되었으나, 요한의 세례는 일회적인 예식으로 죄 사함을 받는 의식이었습니다.

 

또한 에세네 등 전통파들이 외교인을 자기네 공동체에서 배척하는 것과는 달리

요한은 죄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회개하기를 청하는 사람은 모두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이 세례 운동은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요한의 세례 운동이 요구하던 바를 당신의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 죄에 대해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당신의 실천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효도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듯이, 하느님을 믿는 것도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에 충실하였습니다. 그 실천들이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기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하느님의 것이었기에 그분은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는 부활 신앙이 생겼습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 받은 자는 빛 자체이신 분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빛의 자녀’(1테살 5,5)로서 ‘세상의 빛’(마태 5,5)이 되어 “모든 의로움‘(마태 3,15)을 이루어야겠지요.

‘빛의 자녀’가 되려면 고난 받는 주님의 종처럼 살아야 합니다. 봉사하고 희생하는 충실한 종이 되는 것이지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성실하게 공정을 펴나가는 것”(이사 42,3)이지요.

어디서나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의 ‘모든 의로움’을 실현해나가는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이의 빛이 되어,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어야”(42,7) 할 것입니다.

세례 받은 우리의 소명은 해방의 도구가 되고, 생명의 기쁨을 전하여 가난 가운데 하느님의 풍요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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