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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 2017년 1월25일 수요일 [(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매일미사 묵상/히어리 4장


[매묵] 2017년 1월25일 수요일 [(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매일미사 묵상


오늘 전례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교육받은 철저한 유다인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한 뒤 그리스도의 바오로 사도로 변신하였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니, 오늘 그의 회심을 경축하는 저희가, 그의 모범을 따라 진리의 증인이 되고, 언제나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니아스에게 세례를 받게 된 사연을 백성에게 들려준다(제1독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이르신다(복음).

제1독서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2,3-16<또는 9,1-22>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5-18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복된 바오로 사도가 뜨거운 사랑으로 모든 교회를 돌보게 하셨으니,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 마음에도 그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회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회개, 세관장 자캐오의 회개는 지상에서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이루어진 회개이지만,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에 살던 신자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려던 청년이 빛이신 예수님을 신비롭게 만나 이루어진 회개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의 회심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인물로 바오로 사도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출신, 학식, 기득권 모두를 쓰레기로 여기며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 지상의 지혜가 아닌 천상의 지혜, 사람의 능력과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되는 하느님의 계획을 깨달았습니다(로마 8,21 참조).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에서 시작됩니다. 사울이라고 불렸던 바오로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라는 스테파노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세계사적 사건인 바오로의 회개는 순교자의 희생에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바치도록 우리에게 권고합니다(로마 12,1 참조).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베네딕도 규칙서 72,11).
“오직 하느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아,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규칙서> 머리말 30절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이영근 신부)

2.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믿지 못하고 있음을
 빤히 알면서도
 당신의 소중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저의 불신에
 발등이 찍히고 또 찍히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오늘
 제가 하는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소서.
 파스카를 살고
 당신을 선포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3.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를 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필리3,13). 아마도 지난 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 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방법으로 더 분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반영억 라파엘 신부)

4. 하느님의 의중(意中)이란 하느님의 '의지(意志)'요, '의도(意道)'요,
'섭리(攝理)'요, '계획'이요, '계명'이요, '법'이요, '뜻'이요, '마음'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 늘 하느님의 의중을 잘 헤아려야 한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슬퍼하시는지를 말이다.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 바로 '죄'이다.
죄는 하느님이 제일 싫어하시며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는 것이다.

죄가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죄를 지으면 하느님을 또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계속 못 박는 것이다.


사순절은 하느님께 못 박힌 십자가의 못을 빼내드리는 시기이다.
그분의 고통을 덜어드리려 '죄를 보속'하는 거룩한 시기이다.
(이해욱 신부)


5. (유시찬,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중에서)
중(中)이란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전체를 취하고 아우르는 것입니다.
기쁠 때는 슬픔을,
건강할 때는 질병을, 명예를 누릴 때는 모욕을, 부귀를 누릴 때는 가난을, 바라보며 전체를 취한다는 말입니다.
감정의 격렬한 기운과
움직임에 충실하면서도 그 감정으로부터 초연히 떠나 있는 바로 거기에 진정한 ‘중’이 있고 마음의 고요가 있으며 그로부터 참된 내적 에너지가 솟아나옵니다.
전체를 취하고 아우르는
 ‘중’의 모습으로 살아보면 어떨까요? 분명히 새로운 관계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참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빠다킹 신부)


6.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코 16,17-18)

7. 바오로의 주님과의 만남이 참으로 극적입니다.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하늘로 부터의 큰 빛의 체험과 동시에 이어지는 주님과 주고 받는 대화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 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박해받는 이들과 하나되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8.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연구에서 도전과 응전을 이야기합니다. 인류의 문명과 역사는 도전과 응전을 통해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겨울을 견디어낸 나무가 더욱 단단해지듯이,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새로운 길과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시련과 고통을 디딤돌로 여기지만 실패하는 사람은 시련과 고통을 걸림돌로 여기기 마련입니다. 원망과 분노, 핑계와 좌절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비록 교회를 박해하였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인생의 후반부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인생이라는 경기에서도 후반전이 중요합니다. 비록 전반전에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후반전에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삶과 영성을 묵상하면서 우리들 또한 십자가와 수난의 영성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조재형 신부)

9.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제가 하겠나이다 하지 않고, 거의 언제나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만 하는데, 기도를 들어달라는 말은 기도대로 하느님께서 하시라는 요구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에 우리도 그분처럼 회심을 한다면 기도를 할 때 대뜸 이것이 필요하니 그것을 주소서 하는 식이 아니라 “주님, 제가 당신 앞에 왔나이다. 제가 무엇을 하기를, 어떻게 하기를 당신은 원하십니까?” 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무얼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여쭐 때 주님께선 우리에게도 바오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과 똑같은 대답을 하실 겁니다.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

그러니 회심이란 <청하는 사람>에서 <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좀 더 풀어 얘기하면 내 원하는 것을 청하기만 하는 사람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기꺼이 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임을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바오로 사도 회심 축일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60125))

10. 깨달은 자는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한다
 
 논어 헌문 5장에 有德者 必有言(유덕자 필유언)’ 이라고 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씀이 있다고 공자께서는 썼습니다. 말씀은 말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주자는 이라고 주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은 하늘이 인간에게 본래부터 주신 것을 새로 얻음을 말하니, 곧 깨달음을 뜻합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노자 도덕경(道德經)를 깨닫는 책이란 뜻이 됩니다.
 
공자님의 말씀은 즉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 꼭 맞는 본보기가 사도 바오로입니다. 그의 서간에 나타난 언행은 오직 주님께 대한 깨달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바오로의 서간이 신약성경 정경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자기를 부르신 주님의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어려운 사명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사도로 불림을 받은 것에 합당한 태도를 지키는 데에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오로의 장점과 약점을 모두 쓰셨습니다. 여러 사람과 협조하는 능력, 사물과 인물을 꿰뚫는 통찰력, 폭넓은 지식, 타인을 염려하는 이해력, 경제적 도움을 바라지 않는 자존심, 지나치게 빨라 두서없어 보이는 머리 회전, 머릿속 표현을 요령껏 말하지 못하는 눌변, 발작하는 병을 앓아 생긴 열등감 등등 바오로 서간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장단점을 모두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을 비우고 전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바오로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학자들은 지금의 그리스도 교회가 바오로 덕분에 생겼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지금의 교회는 바오로의 교회이라고까지 말하지만, 그는 그렇게 불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동안 자신이 범한 죄를 뉘우치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조금도 감추거나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앞에서 겸손을 실천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비움과 낮춤을 보고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마저 비우시고 낮추셨는데 하물며 주님을 박해하던 죄인인 자신이 어찌 자신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11. 하느님을 박해하던 사울을 바오로로 회심시키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이제는 바오로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바오로 안에 사시게 된 것이지요(갈라 2,20). 방향을 바꾸어 딴 사람이 된 그는 뜨거운 열정과 사랑으로 다마스커스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 타르수스, 안티오키아, 로마,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그침 없이 복음을 선포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여행 중에 4년간이나 옥고를 치렀고 죽을 위험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39도의 매를 다섯 차례 맞고, 로마인들에게 태형을 세 번 당하고, 세 번 파선 당하여 바다에서 일주일간 표류하기도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배고픔과 목마름, 단식, 추위, 노고 등을 견뎠고, 네로 황제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그러나 어떤 시련도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지요.

회심한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온 세상에서’ ‘모든 사람과 피조물’을 위해 남김없이 되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유다인과 이방인 가릴 것 없이 모두의 구원을 위해 그가 배우고 익히고 지녔던 모든 것은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쳤던 바오로 사도처럼 말입니다.

특히 신음하는 피조물을 향해서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사랑과 열정으로 복음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인간과 생태환경, 세상과 피조물 사이를 가르는 온갖 요소를 극복하여 화해와 일치의 길로 이끌어야겠습니다. 오늘도 회심의 은총을 청하면서, 내 힘을 빼고 생명력 넘치는 주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행복한 회심의 날이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12. 바오로 사도는 철저한 유다인이었고 율법학자였다. 처음에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교회와 한 몸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에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개종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그의 개종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축일은 8세기부터 프랑스 지방에서 먼저 지내오다가 10세기말에 교회력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의 개종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또 다른 공현이며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모습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다.

사도의 개종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들 중의 하나이며, 박해자였던 사울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켜준 사건이었다. 그의 개종은 또한 하느님 앞에 크나큰 겸손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개종은 그의 가르침의 많고도 중요한 요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특히 거룩한 은총과 교회의 잔인한 박해자 사울로를 사도로 변화시킨 능력에 대한 권능의 주제에 대한 그의 학설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개종축일을 지내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방인의 사도로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분이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까지 주시면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 사도들은 그러기에 또 다른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다. 부활을 체험하였다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였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선교의 사명 역시 이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주님께서는 이 복음선포를 항상 협력해 주시고 계시다. 이 도우심을 믿고 우리는 용감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주님을 알게 된 것은 특권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무요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알고, 신앙 안에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함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들 중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듯이, 즉 어렵고 힘들어도 해내야 하듯이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우리가 받은 우리의 세례의 사명을 다 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말씀을 살며. 그 말씀을 우리도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복음선포의 삶이 나 자신과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여 모두가 복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도 사도 바오로와 같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자.(조욱현 토마스 신부)


 2017년 1월25일 수요일 [(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오늘의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2017년 정유년 닭띠해, 동생이 회갑을 맞은 해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에 깨달음이 왔다,
마르코 복음 16장 17-18절에 있는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코 16,17-18)

비유로 말씀하신 이 말씀이 21세기에 살아가는 나에게 가슴으로 와닿지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 그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고,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감사합니다. 주님!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 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박해받는 이들과 하나되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박해받는 이를 위로하는 제가 되겠나이다. 아멘. 수산나 -



히어리 1...잎


히어리 2...7월의 열매


히어리 3...꽃


히어리 4...꽃눈의 싹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