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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1월26일 [(백)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매일미사 묵상/가시오가피 3장


2017년 1월26일 [(백)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매일미사 묵상/가시오가피 3장


오늘 전례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은 바오로 사도의 제자요 선교 활동의 협력자였다. 티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티토는 크레타 교회를 맡아 돌보았다. 바오로 사도는 그의 서간 여러 곳에서 이들을 칭찬하고 있다. 또한 바오로 사도의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둘째 서간’과 ‘티토에게 보낸 서간’에는 성직자와 신자들의 지침에 도움이 되는 권고가 많이 담겨 있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티모테오와 티토에게 사도의 지혜와 용기를 주셨으니, 그들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현세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다가, 마침내 천상 고향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인사하며,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라고 한다. 바오로 사도는 같은 믿음에 따라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하며 은총과 평화를 빈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1,1-8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또는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 1,1-5
복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9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복된 티모테오와 티토가 열성으로 전파하고 굳게 지킨 믿음을, 저희가 더욱 풍성히 가꾸어 나가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전통을 따라 복음이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의 ‘일흔두 제자’는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선포가 이루어짐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됩니다.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에게 대표적인 제자는 두 명이었습니다. 그는 티모테오를 ‘사랑하는 아들’로 불렀으며 티토를 ‘착실한 아들’로 불렀습니다. 오랜 감옥 생활로 쇠약해진 바오로 사도에게 두 명의 제자는 큰 위로와 힘이 되었고 그를 대신하여 신생 교회에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들 같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것, 힘과 절제와 사랑의 영을 지닐 것을 당부합니다. 신앙의 진리에 대한 충실함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지니도록 권고합니다.
배금주의,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논리에 의해 많은 사람이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폐쇄적이지 않고 자기 안위에 힘쓰지 않으며 거리에 나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상처받는 아픔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역동성이 우리에게 신앙의 열정과 위안을 준다는 신뢰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여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참평화를 선물로 받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른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대한 가차 없는 전지작업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수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때로 냉혹할 정도의 끊음과 버림과 자기 비움입니다.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의 삶에서 오늘날 주교님들의 삶을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들의 삶에 있어 영예와 안정된 사목터, 존경과 박수갈채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저 기약 없는 순례길, 고통과 가시밭길로 점철된 십자가 길만이 그들의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나 재주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꾸며진 삶의 모습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 자신 자체를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 안에서 인정을 받는 능력과 재주만을 강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뜻은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말이지요. 무엇을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지를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3.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10,1~4)

세계 오지여행을 다녔던 한비야 씨는 한 인터뷰에서 여자 혼자 다니는 여행이라서 더 유리한 점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오지에서 주민들이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받아 주었으며, 그 집 주방에 스스럼없이 들어가 같이 일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여자라서 경계심보다 측은한 마음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되니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귀중한 오지여행에서 받은 사랑의 빚에 감사하며, 이후에 월드 비전이라는 구호단체에 들어가 가난과 기아와 질병과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를 위해 일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주님께 기도하며 도움이 필요한 곳을 다니는 그녀의 길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38절에 사랑도 빚이니 사랑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라는 말씀을 그녀는 실천했습니다.


선교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베풀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받은 사랑의 빚을 갚으러 가는 길입니다. 나아가 그들이 사랑을 베풀 기회를 주러 가는 길입니다. 그들이 베푸는 사랑이 보잘것없이 작더라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러기에 처음 들어간 집에서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그 집에 평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에게 기꺼이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평화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라슈르 공동체를 세워 정신지체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장 바니에 신부는 봉사의 스캔들이라는 책에서 봉사자는 베푸는 마음조차 잊을 것을 강조합니다. 겉옷을 벗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예를 듭니다. 겉옷은 신분과 명예의 상징입니다. 예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행동은 자신이 도움을 베푼다는 알량한 자존심마저 다 버리라는 요구였습니다. 마음속에 찌꺼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버리라는 요구입니다. 자신을 알리고 명예를 자랑하려는 은밀한 욕구로 가득한 마음을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장 바니에 신부는 봉사라는 것이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치부를 들어내고 고백하여, 자신이 지닌 은밀한 상처를 치유 받는 기회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리 떼 가운데 선 힘없는 양처럼 목숨을 잃더라도 대들거나 정당방위 행동마저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정당방위라도 폭력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작은 방심으로 인해 폭력으로 오염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믿을 것은 뜻을 같이 하는 선교여행의 동반자뿐입니다. 여행에서 오는 현실적 위험과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주님께서는 둘씩 짝을 지워 보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로 향하는 순례길과 복음 선포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은 우리가 맡아야할 길입니다. 이 길에 비폭력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만 필요합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벗어 던져야 합니다. 가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은 뜻을 같이하는 동반자와 동료들의 기도뿐입니다.
(윤경재 요셉)


4. 천석꾼은 천가지 근심이지만 만석꾼은 만가지 근심을 지닙니다.
가진 것 없어도 사랑을 베풀며 부요하고 자유롭게 사는 한 지인이 무심코 던진 말이 저에겐 신선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주님은 삶의 전쟁터로 당신의 일꾼들인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말그대로의 무소유의 삶은 살 수 없어도 무욕의 이탈의 정신이 내적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내적자유를 누릴 때 평화입니다. 사실 평화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산상수훈인 참행복 선언에서도 주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19).


이웃에게 짐이 아니라 선물이 되는 삶입니다. 
요구하지도 피하지도 않고 어느 자리에나 만족하며 이웃의 환대에 자신을 맡겼기에 참으로 자유로웠던 복음의 제자들입니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치유,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의 비전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체험이 우리를 치유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합니다. 
언젠가의 하느님의 나라 체험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 체험의 자리입니다.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5. 제가 가지고 있는 많은 습관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좋은 습관이고 어떤 것은 꼭 고쳐야하는 습관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3살 버릇이 80"까지 간다고 했던가요, 그런 습관을 고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그래서 서양 사람은 "습관은 제 2의 천성"이라고 이야길 하나 봅니다. 요즘은 지적인 능력과 재능보다는 평소에 자신이 꾸준히 해왔던 습관 때문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자주 보게 됩니다. 통신과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이렇게 작은 습관을 꾸준히 키워온 사람들의 모임이 많이 생기게 되고,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그들은 프로는 아니지만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고, 그 좋아서 하는 일 때문에 인생의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조재형 기브리엘 신부)

6.  "미션"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이 영화는 중남미에 파견된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구와니 폭포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한 선교사가 파견되어 복음을 증거 합니다.

처음에는 많은 시련과 고통이 따랐지만 선교사의 집념과 열정으로 많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복음으로 인한 기쁨과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식민지 확장에 눈 먼, 열강의 야욕 때문에 마침내 이 원주민들이 사는 지역에까지 노예사냥을 합법화 할 것을 요구합니다. 노예상인들의 약탈과 폭력 그리고 이에 맞서는 선교사인 신부와 원주민들의 대항이 처절하게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분노와 함께 감동이 어우러져 우리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성체를 높이 들고 걸어가면서 총탄에 맞아 순교하는 선교사와 원주민들을 보면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모습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직업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직업이라는 말은 부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각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소명, 즉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라는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사명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수동적인 자세에서 능동적인 자세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영화 속에서 노예상인들의 약탈과 만행에 맞서서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끝내는 쓰러지는 선교사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위험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 사명을 지키고 수행하는 참다운 제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시련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과 반대를 기억한다면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주님께 의탁하는 선교사의 마음자세로 각자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김근배 아벨 신부님)

7.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3-4) 하십니다. 복음선포는 ‘이리 떼 가운데로’ 가는 것처럼 하느님 부재의 상황, 복음적 불안정과 불확실한 미래에 던져지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이리 떼 가운데 가는데 아무런 방어 장치도 지니지 말고 가라시니 너무 가혹한 것 같기도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세상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 의탁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예수님 친히 함께 하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도구와 방편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체의 소유와 애착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생계유지를 위한 것들을 비롯한 일체 것들과 걱정 근심, 불안과 염려와 같은 것들로 마음속을 채우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떠난 빈자리에 주님께서 찾아오실 때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10,4)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길거리에서 만나면 멈추어 긴 인사를 나누었지요. 그런 인간적 예의를 지키느라 평화를 전하고 병자를 치유하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일이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했던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복음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사랑을 품어야겠지요. 나를 비우고 내 안에 하느님을 모셔야 복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1월26일 [(백)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오늘의 복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10,1~4)

삶은 전쟁입니다. 주님은 삶의 전쟁터로 당신의 일꾼들인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라슈르 공동체 장 바니에 신부는 봉사라는 것이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치부를 들어내고 고백하여,

자신이 지닌 은밀한 상처를 치유 받는 기회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리 떼 가운데 선 힘없는 양처럼 목숨을 잃더라도 대들거나 정당방위 행동마저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길에 비폭력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만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은 뜻을 같이하는 동반자와 동료들의 기도뿐입니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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