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17년 3월26일 [(자) 사순 제4주일]매일미사 묵상
오늘 전례
▦ 오늘은 사순 제4주일입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데를 보시는 빛의 하느님이신 아버지께서는, 어둠의 세력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 눈을 열어 주시어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뵙게 하셨으니, 세상의 빛이신 주님만을 믿고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본기도
하느님, 말씀이신 성자를 통하여 오묘하게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이 다가오는 파스카 축제를 열렬한 믿음과 정성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사이의 아들 가운데 막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우게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며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 눈먼 사람을 보시고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게 하시어 보게 하시자, 눈이 멀었던 이가 예수님을 믿고 경배한다(복음).
제1독서 <다윗이 이스라엘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6,1ㄱㄹㅁㅂ.6-7.10-13ㄴ
제2독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5,8-14
복음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또는 9,1.6-9.13-17.34-38>
영성체 후 묵상
▦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신 이가 증언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 뜻을 실천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 주십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바르게 살아갑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이 장면은 하느님께서 진흙을 빚어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창세 2장 참조).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의미이지요. 이어 예수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자 그의 눈이 밝아집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일하면 안 된다는 자신들의 논리에 갇히고는 예수님을 죄인 취급해 버립니다. 더욱이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눈을 뜬 사람과 그의 부모까지 몰아붙이지요. 부모는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셨다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추방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얼버무려 버립니다.
하지만 눈을 뜬 사람은 바리사이들의 위협에 조금도 굴하지 않지요. 오히려 그들에게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상세하게 증언합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바리사이들로부터 회당에서 쫓겨나지 않습니까?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다가가시고,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지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그는 모든 것을 보게 되었고, 영적인 눈마저 뜨게 된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은 진실을 은폐하려 하지만 진실은 결코 어둠 속에 묻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빛의 아들로 처신했지만, 점점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하느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처신했지만 결국 하느님을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지요. 반면, 눈을 뜬 사람은 더욱 빛의 세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그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 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우리는 처음 세상을 보게 된 그 눈먼 사람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처음 보는 듯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기준에 따라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새로운 빛을 주신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아주 고질적인 병이 있습니다. 소위 1등 병인데 무엇이든지 자기가 일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등 병이 치유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둠을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은 경쟁자이고 그래서 내가 밟고 올라서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이웃이나 공동체의 형제들은 더 이상 나의 경쟁상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잘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의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보내 주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로 오시는 그리스도께 우리를 당신으로 변화시켜주기를 청합시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모두를 사랑함으로써 장차 당신의 부활을 함께 누리며 기뻐할 수 있도록 해주십사 기도드립시다.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
2. 그러니 주님의 은총으로 끊임없이 영적 시력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병이든 사고든 원인을 캐다보면 끝이 없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라 믿으시고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살아갈 수 있을지 구체적 처방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은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그 처방을 주실 것입니다.
사실 지난일 아무리 후회해도 누구를 원망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감사하면서 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 살면 거기 답이 있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소경의 신앙이 점점 명백해져 가고 있는 사실도 주목해볼 만하다. 예수님께 관해 연달아 질문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예수님을 ‘예수라는 분’(11절) ‘예언자’(17절)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33절)이라고 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날 때, ‘주님’(38절)으로 고백한다. 여기서 그의 신앙이 완전해진다. 이제 완전한 의미에서 ‘보게 된다.’ 육체적으로 시력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사람의 아들’(다니 7,13-14)이신 영광의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유다인들에게는 예수는 그저 한 ‘죄인’(24절)에 불과하다. 그는 안식일을 어겨가며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14절) 것 때문에, 또 “어디서 왔는지 알지”(29절)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그들은 소경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율법의 근본정신에는 귀를 막고 또 하느님의 ‘판단’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분을 ‘죄인’으로 배척하고 있는 유다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눈이 먼 것은 그들이 빛을 피하여 어둠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이며, 그들의 탓인 것이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미 단죄의 심판을 내리신다(39절). 이 심판은 따지고 보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단죄의 ‘심판’이다. 인간들의 구원이나 멸망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능력 여하에 달려있다.(조욱현 토마스 신부)
4. 바리사이들은 사람이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되는 것도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너희는 사람들의 외모와 능력,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지만, 야훼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신다.”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신만의 城에 갇혀서, 다른 이들의 생각을 보지 못하고, 편견과 독단과 아집과 이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그런 나 자신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몸이 있어도 참된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려고 왔다.”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거짓과 가식과 허영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보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참된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희망과 평화, 진실과 사랑이 한데 어울려, 참된 빛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기 전에, 저 땅 속에서 쉼 없이 양분과 물을 찾고 있는 뿌리를 볼 수 있다면 깨끗한 거리를 보기 전에,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볼 수 있다면 일등에게 찬사와 축하를 보내기 전에, 꼴등에게 위로와 격려를 먼저 할 수 있다면 용서받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나 이미 빛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참회와 절제, 자선의 사순시기도 벌써 반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난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난 과연 무엇을 보기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조재형 신부)
5.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요한9,3.11.)
어떤 수녀님은 침대형 휠체어에 누워서도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항상 밝게 사는 수녀를 보고 다윗의 돌멩이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다윗이 조약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듯이 그녀의 약한 모습으로 여러 가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하나씩 해 내는 모습이 하느님께서 세상에 던지는 작은 돌멩이처럼 보여서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기도를 부탁했어요. 너무나도 억울한 시련을 겪고 계셨습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하며 제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자신의 탓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그분의 마음이 되어 쓰라리고 괴로웠어요.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열 살 그 어린 나이에 몹쓸 병으로 내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어둠 속에서 통곡해 보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저분이 겪고 있는 일에 뭔가 그 자신의 탓이 있겠지 하고 말했을 거라고. 내 탓이 아닌데 이런 몸이 되었고 거추장스러운 거북이 껍질 같은 몸에서 겪어야 했던 참담한 일들을 되새기면, 그 누구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욥의 친구들처럼 가벼이 입을 놀릴 수 없게 됩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한 마디로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하필이면 내가 왜 이런 장애를 갖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이었던 것 같아요. 책을 통해서는 세상을 살아갈 기본적인 지식과 교양을 닦았고, 그림을 통해서는 혼자서 세상에 당당히 걸어 나오게 되었지만, 이것들이 궁극적인 해답이 되지는 못했지요. 지금은 알아요. 제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고 왜 장애를 갖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하느님은 가장 약한 자를 통해서 자신의 깊은 사랑을 드러내시기 때문이에요.” (윤경재 요셉)
6. 우리도 속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만나야겠습니다. 더 크고, 더 멋있어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며 허세를 부리는 세속적인 눈길을 거두어야겠지요. 사회적 지위, 학력, 재산과 업적, 재능 등 외형적인 조건으로 인간을 저울질하는 눈길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세속적인 눈길 속에 머무는 교회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영성생활의 질적 향상보다는 외형적인 성장과 효율에 치중하는 교회는, 가난하신 예수그리스도와 동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사목적 이유나 성장 논리를 앞세우며 사업을 벌이고, 성지를 개발하며, 이벤트성 행사를 벌리고, 신자수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눈길이 아니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보잘것없고 연약하지만, 올바르고 온화하며 진선미의 온전함을 지닌 다윗의 모습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하고, 이를 세상에 나타내 보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보잘것없고, 작고, 가난한 교회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작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야겠지요.
오늘 복음의 소경 치유 이야기 또한 어떻게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을 보시며 연민을 느끼시고 무엇이든 해주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눈길은 ‘지켜보는’ 바리사이의 눈길과는 달리,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눈길은 예수님의 자비의 눈길, 복음의 눈길이며 연민의 눈길입니다.
남의 아픔과 사회 불의에 무관심한 눈길, 반대만을 바라보는 대상화의 눈길, 바리사이처럼 꼬투리 잡기 위해 지켜보는 눈길, 뭐든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소유의 눈길을 버려야겠지요. 우리가 자비의 눈길로 다른 이들과 세상을 포용하는 눈길, 함께 하는 애정 깊은 친교의 눈길을 지니지 않는다면, 바리사이와 무엇이 다를까요?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눈으로 사람과 피조물,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고 대해야겠습니다. 나와 우리,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이 보이고 하느님이 드러날 때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언제든 찾아와 위로를 받는 교회가 될 때까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모두 태생 소경처럼 고통 받는 이들의 문제가 그들의 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요 ‘교회의 일’임을 자각해야겠습니다. 자비의 눈길로 바라봄으로써,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절름발이가 걸을 수 있게 하는 창조와 해방을 이어가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3월26일 [(자) 사순 제4주일]
오늘의 복음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그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 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일하면 안 된다는 자신들의 논리에 갇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더욱이 눈을 뜬 사람과 그의 부모까지 몰아붙이지요.
부모는 눈을 뜨게 해 주셨다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추방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얼버무려 버립니다.
눈을 뜬 사람은 바리사이들의 위협에 조금도 굴하지 않지요. 오히려 그들에게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상세하게 증언합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바리사이들로부터 회당에서 쫓겨나지 않습니까?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다가가시고,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지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그는 모든 것을 보게 되었고, 영적인 눈마저 뜨게 된 것입니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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