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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3월24일 [(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매일미사 묵상/노간주나무 3장


[매묵]2017년 3월24일 [(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주님, 주님의 은총을 저희에게 인자로이 내려 주시어, 언제나 저희가 지나친 욕망을 끊고,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라며,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복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ㄴ-34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의 권능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오늘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저희가 충만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율법 학자 하나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신명기 6장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그러고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레위기 19장의 말씀을 드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며, 두 계명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 “나는 누구까지를 내 이웃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잘 알고 있었지요. 문제는 이웃의 범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당초 자기 민족 전체를 이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웃의 범위를 점점 축소해 나갔지요. 차츰 신분이 비슷한 사람끼리, 잘사는 사람끼리, 같은 학파끼리 이웃을 형성해 나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 이웃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차별을 없애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범위를 무한히 확장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수 취급하던 이방인까지도, 죄인을 비롯한 그 어떤 처지에 놓인 사람까지도 이웃으로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나의 이웃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누구까지를 나의 이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 점에 대해 묵상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단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자기에로의 전환입니다. 곧 ‘내’가 중심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바로‘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또한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 4,12)(이영근 신부)



2. 오늘 복음의 율사가 예수님에게 한 질문은 ‘첫째가는 계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계명을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입니다. 오늘의 율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율사로서는 할 수 없는 파격적인 발언을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 율사는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두려운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얻어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에서 물러섰습니다. 그는 신앙이 하느님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서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율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졌던 선입견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 등에 대한 애착으로 선입견을 갖습니다. 그 선입견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것에 대한 애착보다는 이웃의 필요를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김에서 사랑이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을 자기 생명의 원천으로 삼아 실천하며 삽니다. 그것은 개체유지나 종족유지의 본능을 넘어 하느님에게로 도약하는 사랑입니다. 인간 본능으로 말미암은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느님을 동기로 한 도약이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3.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온전한 치유로 사람이 되는 길도 사랑뿐입니다. 


정체성의 위기도 자존감의 결여도 사랑 결핍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을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평생 공부가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의 공부입니다. 

늘 사랑을 공부해도 사랑에는 여전히 초보자 학생에 불과할 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할 때 시를, 성서의 시편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마침내 시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삶이 기도가 되고 시가 될 때 그 인생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답고 향기롭겠는지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4. 현대 가정 공동체의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사랑스런 존재, 매력 넘치는 존재가 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코복음 1228)라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결국 사랑이 전부라고 가르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복음 1229~31)

 

예수님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를 묵상하면서 사랑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가 생각을 고쳐먹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더군요. 사랑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로 노력하는 것은, 애써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으려고 혈안이 됩니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또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에 앞서 내가 먼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내게 주어진 오늘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환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 사랑스러운 존재, 매력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크게 넓게 바라보면 가족도 부부도 사실 어차피 타인입니다. 타인의 삶에서 과감히 뛰어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서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내 안의 혁명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나와 철저하게 맞지 않는 그를 바라보는 내 시각의 대대적인 전환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를 고통과 십자가의 근원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연구대상으로 바라보면 좋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문제 행동들 앞에서 분노하고 짜증내기보다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내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인가? 고민하고 연구해나가시면 좋겠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 오늘 독서에서 호세아는 말합니다. “지혜가 있거든, 이 일을 깨달아라. 슬기가 있거든, 이 뜻을 알아라. 야훼께서 보여 주신 길은 곧은 길, 죄인은 그 길에서 걸려 넘어지지만 죄 없는 사람은 그 길을 따라 가리라.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셈에는 약은 모습을 보이고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보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중요한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대충대충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슬기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의 계명이나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하는 지혜와 슬기입니다.

평생토록 매일미사를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 몇 백 단씩 바치는 묵주기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몇 십 년 동안 레지오를 근속했는지, 사목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았는지, 돈을 얼마나 많이 가져다 바쳤는지, 얼마나 성서를 많이 읽고 썼는지, 하는 등등의 것들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러한 행동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아무런 의미 없이 그런 행동만 되풀이 되었을 때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한 모든 행동들은 나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평생 기도했다면 내가 더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더 용서를 잘 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서를 많이 읽고 썼다면, 내 생각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느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사순기간 동안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닌 진정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율법의 참 의미를 우리의 생활에서 제대로 실천해 나가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신자들이 됩시다.(손지호 베드로 신부님)

 
6.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입고도 가나안의 풍요신을 섬겼고, 제관들은 재물에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에서 멀어져버린 그들에게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14,2) 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가장 큰 계명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시선과 의식을 하느님께 집중하고,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쏟아 부어 미친 듯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언어를 빌면, 항상 하느님을 생각하고, 항상 갈망하며, 모든 지향을 하느님께 두고,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모든 기력과 영혼의 감각과 육신의 감각을, 하느님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치고, 다른 데에 쓰지 않음으로써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주님의 기도’ 묵상 5절).

유한한 사랑에 갇혀버리곤 하는 우리가 이런 사랑을 살아내기란 매우 어렵지요.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도전으로 남는다 하여도,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려고 힘써야겠지요. 하느님을 생각하고 갈망하는 시간을 늘리고, 딴데 시간과 힘을 쏟기보다 주님께 시선을 두려 노력하며, 내가 지닌 힘과 감각을 ‘먼저’ 하느님께 바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웃도 자신도 사랑할 수 없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떠나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고 만남으로써, 진정 자비의 사람이 되고 사랑할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내 안에 하느님 사랑이 꿈틀거리는 그만큼 우리는 자신도 이웃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기에, 높은 자존감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혐오하고,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지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장점과 단점, 온전함과 상처들, 자신의 한계와 내면의 어두움들을 깊이 이해하고, 그런 자신을 남김없이 수용함으로써 자신도 사랑하게 됩니다.

이제 하느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온 마음과 힘과 넋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깊이 사랑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나아가 그 사랑으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겠지요. 참으로 소중한 자신처럼 남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그리고 최고의 사랑을 받고싶듯이 극진히 이웃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깊이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애정 깊은 날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3월24일 [(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 4,12)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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