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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3월23일 [(자) 사순 제3주간 목요일]매일미사 묵상 / 예덕나무 1장


[매묵]2017년 3월23일 [(자) 사순 제3주간 목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주님, 존엄하신 주님께 간절히 비오니, 구원의 축제가 다가올수록, 저희가 더욱 큰 열정으로 파스카 신비를 준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민족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버티지 못한다며, 내 편에 서지 않으면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민족이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7,23-28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23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를 모시고 힘을 얻은 저희를 인자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이 신비를 올바른 삶으로 드러내며,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지요.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입니다. 경탄해 마지않는가 하면 일부는 오히려 예수님을 모략하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었다고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설득력 있는 논리로 그들의 허구를 타파하십니다. “만일 마귀 두목이 마귀를 내쫓는다면, 그것은 마귀의 세력이 망하는 길이다. 마귀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는가? 따라서 사탄, 곧 마귀를 내쫓은 것은 당연히 악의 세력에 반대되는 힘이다. 곧 하느님의 힘이 마귀를 내쫓은 것이다.” 이 말씀은 악령의 세력과 하느님의 거룩한 영의 영역이 대조되면서, 악령은 점차 쫓겨나고 하느님 나라가 확산한다는 것을 암시하지요.
따라서 오늘 묵상해야 할 점은, ‘악’이냐 ‘선’이냐, 또는 ‘어둠’이냐 ‘빛’이냐, 이 점을 늘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 사이에는 중간이 없기 때문이지요. 어둠과 빛의 싸움에서 예수님의 편을 들지 않는 사람은 악마의 편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오늘날 선과 악의 구별이 모호해질 때가 있습니다. 악의 세력이 선으로 위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건 주님의 편에 설 수 있도록, 선과 악을 식별하는 능력을 키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온전한 삶을 사십시오. 

침묵, 들음, 순종, 겸손의 일련의 영적 삶에 충실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삶입니다. 

잘 듣기위한 침묵이요 잘 들을 때 순종과 겸손입니다. 


참 중요한 영적 삶의 요소들입니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온전한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옮겨갈수록 온전한 삶입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나 이렇게 산다.’와 ‘수도자의 삶’이란 시를 나눕니다.


-없어도 있는 듯/어려워도 어렵지 않은 듯 

아파도 아프지 않은 듯/기쁘지 않아도 기쁜 듯 산다

웬만하면 다 지나쳐버린다

담아두지 않는다/물흐르듯 산다

무슨 말을 하랴?/그냥 흙되어 깊이 묻혀서 산다

밝고 바르게/자유롭게 자연스럽게 산다

내 어머니도 형님들도/이렇게 사셨다

세월이 깨우쳐 준 가르침이다/나 이렇게 산다-


-하루하루 서로 사는 게 다 보인다

말씀으로 산다/거짓이나 꾸밈이 없다

환상이나 거품이 없다/할 말도 없다

존재자체가 가난이고/평화다/고맙다

있는 그대로/단순투명한 

무죄한/하루하루 현존의 삶이다/하느님 나라의 삶이다-(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 신앙인은 머리로서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이 아니라,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는 하느님을 말씀을 흘려 듣기만 하고, 나 자신 안에서는 싹을 피워내지 못합니다. 부드러운 마음, 열려진 마음으로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싹을 피워내고, 백 배의 열매도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손지호 베드로 신부님)



3.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3126일 수요일 성 니콜라스 축일 아침 미사 중에 환시체험을 했습니다. 그 후 그는 내가 본 것과 내게 계시된 것에 비교할 때 내가 쓴 모든 것은 지푸라기처럼 여겨진다.”라고 고백하며 신학대전을 완성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자신의 글이 하느님 존재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달리 말해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객관적 증명 대상이 아니라 내 선택의 문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구약 성경 탈출기3장에서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하느님을 뵙는 신비체험을 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먼저 당신을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의 체험을 통해 우리 곁에 계셨음을 잊지 말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실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존재론적 증명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모세는 집요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존재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확신만으로 무엇인가를 남에게 전달하고 이해시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80평생을 살아오면서 처절하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탈출3,12)

 

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탈출3,18~20)

 

즉 하느님은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그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증명하여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윤경재 요셉)


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루카 11,14). 이 치유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그런데 몇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11,15-16).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부인한 군중들에게 공통된 문제는 교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명의 근원이요 길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지도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교만했기에 고집스럽고 완고했으며, 목이 뻣뻣해져 자기 위주로 생각하며, 감사할 줄 모르고 불만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누구든 마음속에 교만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하면 자기 생각에 갇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재판관처럼 남을 판단하곤 합니다. 고집이 고래 힘줄보다 더 세지고, 완고하기가 강철판보다 더 강해지기도 하지요. 그 결과는 비참할 뿐입니다. 무엇이든 제멋대로 하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 화가 치밀고, 마음은 공허해지고 삶은 무절제해지기 마련입니다.

잘 알고 있듯이 참 신앙의 기초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이 자신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그분 편에 서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늘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실천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도구이자 사랑받는 소중한 사람임을 알기에 모든 사람과 피조물을 존중할 줄 알지요. 겸손한 사람은 오해 받고 무시당해도 화내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부드럽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온유함과 자비로우심을 호흡하기에, 하느님의 말씀과 다른 이들의 말을 마음을 열고 들으며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믿기에, 두려움 없이 자신을 개방합니다.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허둥대지 않으며, 남의 잘못에 대해 판단하거나 화내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 겸손한 사람은 늘 하느님과 예수님 편에 서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가난하고 고통받고 억울한 이들 편에 섭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하느님의 것임을 알기에 기꺼이 주님께 되돌리고, 서로 나눌 줄 압니다. 하느님 편에 선 사람은, 가난한 이와 함께 하시고 영혼과 육신의 고통을 받는 이들, 구속받는 이들을 해방시키신 그분의 일에 동참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3월23일 [(자)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오늘날 선과 악의 구별이 모호해질 때가 있습니다. 악의 세력이 선으로 위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건 주님의 편에 설 수 있도록, 선과 악을 식별하는 능력을 키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아멘...수산나 -




예덕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