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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4월8일 [(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묵상/신나무 4장


[매묵]2017년 4월8일 [(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묵상


입당송
시편 22(21),20.7 참조
주님, 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 저를 도우소서. 저는 인간도 아닌 구더기, 사람들의 우셋거리,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본기도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모든 이가, 뽑힌 겨레, 임금의 사제단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을 바라고 이루어, 영원한 생명으로 부름받은 백성이, 같은 마음으로 믿고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아다가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하실 것이니, 그제야 민족들은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되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는 카야파 대사제 말대로,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실 것이다(복음).

제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7,21ㄴ-28
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22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4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법규들을 따르고 내 규정들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25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너희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이 영원히 그곳에서 살며,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
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27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카야파 대사제의 예언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는 카야파의 말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뜻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흩어진 하느님의 백성을 하나로 모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실 ‘영원한 평화의 계약’에 대해 예언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온갖 죄악에서 구원하실 것이며 당신의 거처가 영원히 백성들 사이에 있게 될 것”이라는 에제키엘의 예언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카야파는 이 예언의 완성을 전하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언’은 불확실한 미래를 예견하고 대비하는 기능을 가집니다. 그래서 예언은 많은 사람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자아냅니다. ‘성경의 예언’은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을 고대해 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역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늘 열려 있게 됩니다.
에제키엘과 카야파의 행적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에 대해 숙고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충실한 당신의 종들에게 정의의 징벌을 주시지만 더할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거두시지 않습니다. 그 사랑과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담겨 있습니다. 사순 시기의 정점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 우리는 죄의 비참함과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 침잠하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우리 삶을 성찰해봅니다. 나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보다는 세속의 물질과 권력의 힘에 더 의존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힘을 믿고,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경험과 지식, 인맥의 힘에 의해, 세상을 움직이고 지배한다고 생각하며 처신하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세상의 힘에 기대어 예수님을 추방하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는 말아야겠지요. 나와 이 땅에서 당신의 거룩함과 선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사회변혁을 이루어나가는 새로운 몸짓을 시작해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 예나 지금이나 가진 자들과 특권을 누리는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고슴도치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들을 방어합니다. 그리고 사악한 악의에 차서 계략과 음모를 꾸며댑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비단 교회 밖의 일반 사회에만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바로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바로 내 자신의 삶 안에서도, 아주 교묘하게 강력한 영향력으로 행사되기도 합니다.

이를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영적 세속성”이라 지적하고, 강렬하고 단호하게 경계하셨습니다.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무려 다섯 개의 항(93-97항)을 배려하여, 이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영적 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 교묘한 방법입니다.”(93항)

“이 숨 막히게 하는 세속성은 성령의 순수한 공기를 들이마실 때에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이 없는 종교적 겉치레 밑에 감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복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97항)

앙리 드 뤼박은 이러한 “영적 세속성이 교회 안에 스며들면, 단순히 도덕적인 다른 모든 세속성보다 더 엄청난 재앙이 될 것”([교회에 관한 성찰])이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사실, ‘영적 세속성’에 빠진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결국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 세속성’은 참으로 두렵고 위험천만한 일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자기 기득권과 자기중심성을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렇게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끊임없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는 일은 그토록 중대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의 큰 차이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곧 믿는 이들은 희망을 그분께 두는 이들이요, 믿지 않는 이들은 희망을 그분께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두는 이들입니다. 곧 그분이 바라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고자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희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이 갈리게 됩니다.
오늘, 나는 진정, 어디에 누구에게 희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이영근 신부)

2017년 4월8일 [(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카야파 대사제의 예언.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

사순 시기의 정점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
우리는 죄의 비참함과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 침잠하게 됩니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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