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성서 마르코반 제7차 수업]
일시: [2018년 4월16일 월요일. 10시~12시]
장소: 분당 요한성당 B223호, 10시~12시
참석: 7명/결석 2명(이**베네딕타,채**프란체스카 로마나)
입강:
1. 성가 21번 '지극히 전능하신 주여'
2. 기도: 김** 세노비아
본강: 제2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묵상과 생활 3
제3과 예수님의 전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읽기: 2,1-3,12....배움 1, 배움 2
묵상과 생활 3. 내가 고통 중에 있었을 때 남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랐으며, 나는 그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성경쓰기를 하면서 극복했다. 구약과 신약을 8개월 썼다.
성경필사를 할 때 무념무상, 아무 생각도 안하면서 편안하게 시간을 흘러 보낼수 있었다는 사실에 하느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하다.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 남이 나에게 말없이 동행해주기를 바란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018년 4월11일, 사순 제4주일(기쁨의 주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의 강론 일부를 함께 하겠습니다.>
사순 제4주일은 "기뻐하여라.(laetare)" 곧 기쁨의 주일로 부릅니다. 기쁨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곧, 상황이 절망스럽게 보일 때조차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인간에게 구원과 기쁨을 가져다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선포에 귀를 기울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인정하는 용기를 되찾았을 때(이를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한계를 염두에 두도록 부르심 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한 불안과 근심, 그리고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며, 우리는 그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절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치유의 길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며, 결코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이때문에 오늘 나는 "기뻐하며", 우리는 "기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즐거워 하여라, 예루살렘아"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신, 자비 넘치는 하느님 아버지께 참되고 위대한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또한 많은 슬픔을 안고 있지만,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때, 작은 기쁨이 자라나고 확신을 준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와 죄, 그리고 나약함을 보게 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것과 가까이 계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 한계와 나약함, 그리고 죄가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한계와 나약함, 우리의 불충, 우리의 죄보다 훨씬 더 큰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을 잡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갑시다.
배움 1.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통하여 당신의 권능을 어떻게 드러내십니까?(2,1-12)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2,5)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2,10ㄱ)
많은 고대문화권에서 그렇듯, 유다인들도 병과 죄를 한 덩어리로 인식하였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 병과 불행의 원인을 죄에서 찾는 일반사조를 의문시하는 견해도 나타났다.(욥 1-2장:10장 참조) 이 사조는 예수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예수께서는 병보다 죄를 근본문제로 파악하셨다. 그래서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율법학자들은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2,7)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유일하게 죄를 지을 수 없는 의로우신 하느님 한분외에는 누구도, 메시아도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신명 6,4 참조) 따라서 죄를 용서 받으려면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율법 규정대로 성전에 가서 속죄제물을 드리고 보상을 해야 했다.(레위 4,1-5. 26:민수 5,5-8) 그러면 대사제가 제의와 희생제물을 통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였다. 죄의 용서, 그것은 대사제가 지닌 고유 권한이자 막강한 권력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누군데 이런 율법규정을 무시한채 죄를 용서하는가? 기존의 사회규범과 율법규정을 무시하는 대단히 파격적인 말씀이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경악한다. '자신을 감히 율법 위에 두다니! 이런 짓은 하느님의 권위를 짓밟고 그분을 모독하는 일이 아닌가?' 속으로 의아하게 여기는 그들의 생각을 곧바로 당신 영으로 알아채시고, '치유와 용서' 중 어느쪽이 더 쉬우냐고 물으셨다.(2,9) 사람에게는 둘 모두 어렵지만 하느님께서는 둘다 쉽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2,7ㄱ) 여기서 처음으로 '사람의 아들'이란 말이 등장한다. 이 단어의 뜻은 여럿이지만, 묵시사상에서는 하느님에게서 권한을 받아 종말의 심판을 맡을 존재로 여겼다.(다니 7,13 참조) 그렇더라도 사람의 아들이 사죄권까지 받으리라 믿는 유다인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로 자처하시는 예수께서는 당신이 지닌 권한을 알게 하겠다고 이르신다. 마침내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가라고 말씀하셨다.(2,11) 그러자 그는 일어나(직역하면 일으켜져)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오시면 다리 저는 이가 사슴처럼 뛰리라고 노래하였다.(이사 35,6) 지금 이 땅에 사슴처럼 뛰는 일이 일어났다. 사실 중풍병자처럼 질병으로 마비되어 있거나 알게 모르게 죄악과 미움, 외로움에 짓눌린 사람들은 모두 악의 세력으로 매여있어 생명력을 잃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이 악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어, 육체와 영혼의 생명을 하느님께서 지으신 본모습으로 회복시키신 것이다.
배움 2.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어떤 질문을 했으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1. 질문: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대답: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2. 질문: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대답: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단식할 것이다."..."새 천조각은 헌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 안식일에 밀밭사이를 질러가게 되었다. 제자들이 밀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질문: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합니까?"
대답: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다윗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1번 질문과 답에 대한 설명
구약성경에서 죄인은 하느님께 거역하는 악인으로 나온다.(집회 41,5-10 참조) 하지만 복음서에서 죄인은 유다사회의 정결체제에서 버림받고, 내쫓긴, 배척된 무리를 대변한다. (이점에서 모든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죄인이라고 보는 바오로의 신학적 견해와 구분된다.(로마 3,9 참조)
70년에 성전이 파괴된 후 라삐 유다교는 식탁을 제단으로 여겨 음식과 식탁 교제 규정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점에서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예수님은 의인과 죄인을 가른 바리사이들의 표현을 빌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선언하셨다. 중풍병자의 치유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드러내셨다면, 여기서는 죄인을 받아들여 모든 이가 구원받는 새로운 때가 임하였다고 밝히신다. 죄인이라 불렸던 세리 레위는 이제 예수의 제자로 새롭게 바뀌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새 제자의 낮은 삶의 자리에 들어 오시어 죄인도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품어 주는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보여 주신다.
2번 질문과 답에 대한 설명
바리사이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일주일에 두번(루카 18,12 참조),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다.(모세가 월요일에 시나이산에 올라갔다가 목요일에 내려왔다는 전승에 따라)...그러나 예수 일행은 자주 먹고 마시며 즐겼나보다. 그것도 볼썽사납게 죄인들과 자주 어울렸으니 경건한 이들이 보면 영 못마땅했으리라.(먹보요 술꾼 루카 7,34 참조) 예수께서는 먼저 신랑과 혼인잔치에 빗대어 답변하셨다. 신랑이신 메시아가 지금 혼인잔치를 베푸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서 모든 이가 주님으로 기뻐하는 때라는 뜻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때에는 혼인잔치 손님들도 슬퍼하며 단식할 것이라고 말하셨다. 또한 헌옷과 새헝겊, 헌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의 비유를 드셨다. 여기서 헌 것은 기존의 유다사회와 세상, 새 것은 예수를 통해 드러나고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를 가르킨다. 둘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전부 새롭고 강력하기에 그것에 걸맞는 새로운 제도와 생활방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기존의 낡은 관례를 뛰어넘어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회개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예수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도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3번 질문과 답에 대한 설명
초기 그리스도교는 안식일과 주일을 함께 기념했다. 안식일에는 다른 유대인처럼 일을 하지 않고, 회당에 모여 기도하거나 했으며, 주일에는 신자들끼리 따로 모여 성찬식을 했다. 그러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가 심해지고 갈등도 커지면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인이 회당에 오지 못하게 막고, 이단자들인 그리스도교가 절멸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렇게 갈등이 심화되면서 점차 유대교와 분리된 별도의 종교로서 그리스도교가 정립된다. 2세기 문서를 보면 "우리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면서,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기쁜 축제일에 노동을 하면 분위기에 안 맞잖아요."라는 개념에서 주일날 노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숙제: 제3과 예수님의 전권을 반대하는 사람들...배움 3-4 / 묵상과 생활 1
그룹성서 간식
분당 요한성당... 요한마당 연필성화 전시회 1
분당 요한성당... 요한마당 연필성화 전시회 2
분당 요한성당... 요한마당 연필성화 전시회 3
분당 요한성당... 요한마당 연필성화 전시회 4
'그룹성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룹성서 마르코반 제9차 수업] (2018.4.30.월)/간식, 남설악 오색약수 등 5장 (0) | 2018.05.04 |
---|---|
[그룹성서 마르코반 제8차 수업] (2018.4.23.월) / 간식 등 꽃꽂이 사진 7장 (0) | 2018.04.24 |
[그룹성서 마르코반 제6차 수업](2018.4.9.월)/분당 요한성당 야외 성모상 봉헌 꽃 등 6장 (0) | 2018.04.12 |
[그룹성서 마르코반 제5차 수업] (2018.4.2.월)/간식사진 등 8장 (0) | 2018.04.03 |
[그룹성서 마르코반 제4차 수업] (2018.3.26.월)/아치에스 행사 사진 등 11장 (0) | 2018.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