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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성서

[그룹성서 마르코반 제10차 수업] (2018.5.14.월)/간식 3장

 

[그룹성서 마르코반 제10차 수업] 
일시: [2018년 5월14일 월요일. 10시~12시]
장소: 분당 요한성당 B223호, 10시~12시

참석: 9명/결석 1명(김** 안나)

 

입강:
1. 성가 46번 '사랑의 송가'
2. 기도: 서** 미카엘라

 

본강: 제4과 열두 제자의 선택과 예수님의 가르침...배움 4번, 묵상 1-3번

 

배움 4. 마르 4,21-34에 나오는 비유는 어떤 것이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등불의 비유(4,21-22)

누가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등경 위에 둔 등불처럼 계속 드러날 것이다. 그 신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드러날 참된 하느님 나라요, 예수의 신원이다.

 

2. (4,23-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이 말씀은 인간의 노력에 덧붙여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며, 모든 청중(제자)에게 경청을 권고하면서 게으르거나 무관심한 이들을 경고한다.

 

3.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4,26-29)

하느님 나라를 씨앗에 비유하시다. 하느님 나라는 드러나지 않게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느님의 돌봄에 힘입어, 하느님의 때에 '저절로' 열매를 맺어 이루어질 것이다. 하느님의 권능과 활동은 나름대로 때와 리듬을 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때에 연연하여 절망하거나 조급해 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미래를 확신하고 기다려야 한다. 유다항쟁처럼 로마의 지배에 폭력으로 대항하려는 이들에게 오히려 인내하고 희망하며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라는 가르침을 주었을 것이다.

 

4. 겨자씨의 비유(4,30-32)

팔레스티나에 무척 흔한 겨자씨는 매우 작고 하찮지만 모여드는 하늘의 새도 깃들일 수 만큼 크게 자란다. 이 비유는 종말에 모여들 각 나라의 백성(이방인)을 모두 품을 만큼 큰 안식처거 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키워준다. 또한 엄청난 세력이 압도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고' 느끼는 예수 시대와 초대 교회의 제자 공동체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묵상과 생활 1.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인지 묵상해 봅시다.

 

네이버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무엇인가를 찾아 보았다.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죄, 하느님의 능력을 인간의 잣대로 재거나,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죄를 짓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 개개인은 성령이 활동하는 성소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사랑하는 저마다의 성소를 인간의 잣대로 재거나 판단하는 것은 죄이며, 이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생각한다.

 

법륜스님의 강론에서 부처님의 탄생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떠오른다. 천상(신들의 세계)와 천하(인간의 세계)에서 나홀로 존귀하다는 의미이다. 존귀한 나외의 다른 것, 즉 이념, 사상, 규칙, 율법. 돈, 명예, 권력을 앞세워 괴롭힌다면 그것을 자아를 상실케 하는 죄가 된다고 한다. 그 뒤에 이어 나오는 탄생게는 "삼계개고 아당안지"이다. "삼계가 괴로움에 빠져 있으니 내가 당연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이다...기독교의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사랑의 이중계명과 일맥사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서강대 최진석 교수의 EBS 철학 강의도 떠오른다. 우리 사회가 어떤 기준을 마련할 때에 그것은 개인을 억압하는 폭력이 된다고 한다. 미인대회가 만들어져 미인의 기준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그 기준에 소외되는 사람은 폭력에 노출된다는 말이 생각난다. 또한 최진석 교수의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강론에서 유난히 강조했던 이야기가 계속 나의 뇌리를 맴돈다.

 

살아 생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 두가지: 충고하기와 충고받지 말기

살아 생전 절대 잃지 말아야 할 것 두가지: 자기에 대한 무한신뢰와 무한 사랑

 

성령을 모독하는 죄의 결론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저마다의 성소를 존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묵상과 생활 2. 뿌려진 모든 씨가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를 뿌리는 복음 선포자의 마음은 어떠해야 하겠는지 묵상해 봅시다.

 

복음 선포자의 마음가짐에 대한 질문을 받고 네이버에 '복음 선포자'를 치고 검색하여 여러개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중 차동엽 신부님의 글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거침없는 복음 선포자 '필리포스'>를 읽고 바로 '이것이다'를 외치며 즐거워 했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 열두사도의 맹활약으로 신자들의 수효가 점점 늘어났다. 그리스 말을 쓰는 유다인들이 '식량배급' 문제로 본토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해댔다. 그래서 열두사도가 제시한 해법이 일곱 봉사지의 선출이었다. 온 공동체가 동의하여 그들에게 식탁 봉사자 직을 맡겼다. 오늘의 교회 공식직함으로 부제직의 기원이다. 이들 일곱 가운데 괄목한 활약을 한 인물이 '스테파노'와 '필리포스'이다. 사도행전은 필리포스 부제가 얼마나 야물딱지게 복음을 전했는지를 소상히 전해준다. 필리포스의 맹활약은 동료 부제 스테파노의 순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테파노의 장렬한 순교 직후, 예루살렘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박해의 주동자는 아직 회개하기 전의 청년 '사울'이었다. 그는 닥치는대로 신자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처넣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유다와 사마리아 여러 지방으로 뿔뿔히 흩어진다. 그들은 변방을 두루 돌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때 필리포스 부제는 흩어진 신자들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그는 사마리아의 한 도시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필리포스에게 홀연히 천사가 나타나 하느님의 전갈을 건넨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 길이다."(사도 6,26)...그는 즉시 광야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필피포스 부제는 에디오피아 여왕 칸타케의 내시를 만났다. 그 내시는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던 고관으로서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마침 그때 내시는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던 참이었다. "학대받고 천대 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있는 어린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필리포스는 내시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내시가 묻는다. "여기서 그가 누굽니까?" 이렇게 해서 필리포스 부제는 그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된다. 그의 삶,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들은 내시는 그들이 물가에 이르자 화통하게 세례를 청한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필리포스 부제는 이 화통한 청원에 역시 화끈하게 세례를 베푼다. 이리하여 내시는 북아프리카의 첫번째 그리스도인이 된다. 아프리카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주춧돌이 된 것이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시의 유에없는 결단과 함께 필리포스의 용단에 감탄한다. 무절차의 예식을 베푼 그의 거침없음은 결코 만용이 아니었으리라.

 

오늘날과 대비하여 보면, 예비자의 교리를 받아야 한다. 이것을 배워야 하고 저것을 외워야 한다. 교육을 10개월 꼬박 채워야 한다. 찰고를 통과해야 하고...등등...밟아야 할 과정을 일절 생략하고 생명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심장의 직관에 순명했습니다. 절차보다 상황이 먼저요. 형식보다 생명이 먼저요. 법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하늘 명령을 따름이었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화가 납니까? 우리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과 중상하는 자들이 있어 고통스러웁니까?

그럴 때, 십자가의 예수님을 떠올리고, 돌에 맞아 순교한 스테파노 부제 등을 떠올립시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처럼, 필리포스 부제처럼 회개하고, 성령 충만하여...

담대하게 거침없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믿음으로 증거하는 복음 선포자가 됩시다.

 

묵상과 생활 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가 떨어진 곳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을 가르킵니다. 말씀을 듣거나 읽는 나의 자세는 어떠한지 묵상해 봅시다.

 

요즘 구속 기소된 이** 전 대통령을 떠올린다. 유튜브에 올라온 여러가지 사안을 들어 보면...권력의 자리에 앉은 그가 청탁 등의 불온한 돈을 너무나 많이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기도를 올리고 있다. "죽을 때 가지고 갈 돈도 아닌 것을 그가 회개하여 축적한 대부분의 돈을 중국의 주윤발처럼 99% 기부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해주십사고 기도한다."...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기도를 한다고 하니...그런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ㅠㅠ...기독교인을 무지막지하게 탄압하던 사울이 다마스커스에서 회개하여 바울로 변심하는 기적이 일어났으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 본다.

 

소망교회의 장로라는 사람이...적어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 나눔의 정신이 없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분은 말씀의 씨앗이 길가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말씀의 씨앗은 새가 먹어 버리고, 가라지 같은 세상의 씨앗이 자라나...돈과 명예, 권력 등의 바벨탑을 높게 올린 듯 하다. 바벨탑을 흩어 버릴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

 

나도 혹시 가라지 같은 세상의 씨앗이 자라지 않는지 수시로 점검해야 하리라.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여..부와 명예와 미모와 인기를 취득한 친구를 부러워 하고,...마음속에 이런 가치를 상중하로 분류하여 좀 더 상위층으로 가기 위해 마음의 가시덤불을 만들지는 않을까 성찰해본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숙제: 제5과 배움 1-3 / 묵상 1번

 

 

간식 1

 

간식 2

 

간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