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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0년 8월 12일 수요일[(녹) 연중 제19주간 수요일]/아이반 아이바조스키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성화 및 해설 1점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456번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영성체 성가  151번 주여 임하소서
예물준비 성가  342번 제물 드리니 영성체 성가  197번 나그네 양식이요
예물준비 성가  220번 생활한 제물 영성체 성가  167번 생명이신 천상 양식
파견 성가  438번 주께 감사드리자

입당송

시편 74(73),20.19.22.23 참조
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예루살렘의 역거운 짓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9,1-7; 10,18-22
주님께서는 1 내가 듣는 앞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도성의 징벌이 다가왔다. 저마다 파멸의 무기를 손에 들고 나와라.”
2 그러자 북쪽으로 난 윗대문 쪽에서 여섯 사람이 오는데,
저마다 파괴의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는 서기관 필갑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와서 구리 제단 곁에 섰다.
3 그러자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때까지 자리 잡고 있던 커룹들 위에서 떠올라 주님의 집 문지방으로 옮겨 갔다.
주님께서는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 필갑을 찬 사람을 부르셨다.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5 그분께서는 또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6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아낙네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주님의 집 앞에 있는 원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7 그분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집을 부정하게 만들어라.

그 뜰들을 살해된 자들로 채워라. 가거라.”
그러자 그들은 도성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쳐 죽였다.
10,18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나와 커룹들 위에 멈추었다.
19 그러자 커룹들은 날개를 펴고, 내가 보는 앞에서 땅에서 치솟았다.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들도 옆에서 함께 나갔다.
그들이 주님의 집 동쪽 대문 어귀에 멈추는데,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 나는 크바르 강 가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떠받들고 있는 생물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커룹임을 알 수 있었다.
21 그들은 저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도 넷인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같은 형상이 있었다.
22 또 그들의 얼굴 형상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보았던 모습,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3(112),1ㄴㄷ-2.3-4.5-6(◎ 4ㄴ)
◎ 주님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네.
○ 찬양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
○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양받으소서. 주님은 모든 민족들 위에 높으시고, 그분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네. ◎
○ 누가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 같으랴? 드높은 곳에 좌정하신 분, 하늘과 땅을 굽어보시는 분. ◎

복음 환호송

2코린 5,19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 알렐루야.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자비로 이 예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교회가 드리는 이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47(146─147),12.14 참조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저희를 구원하시고
진리의 빛으로 저희를 굳세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마태오는 다른 복음사가들과 달리 복음서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유독 강조합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을 지닌 ‘임마누엘’입니다(마태 1,23 참조). 이는 천사가 요셉에게 알려 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은 복음서의 마지막인 예수님의 승천에도 언급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ㄴ-20).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또 한 번 쓰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특히 강조하는 두 번째는 ‘교회’라는 용어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며 하늘 나라의 열쇠를 그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에서 처음 언급되었고(마태 16,18 참조),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는 오늘 복음에서도 사용됩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그렇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교회에 주어진 권위와 권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가 가지는 권위는 파문을 결정하거나 취소하는 힘이 있음을 말합니다. 교회는 형제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시고자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죄를 저지르는 형제들이 회개하도록 끊임없이 타이르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머릿수가 아니라 모인 이들의 하나 된 마음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큰 희망을 품어 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아이반 아이바조스키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결속력이 사랑 기반인 공동체의 특징

 

오늘 복음은 ‘교회에 죄의 용서 권한이 있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죄인인 형제가 교회의 말까지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 취급하라고 합니다. 교회의 결정이 곧 하늘의 결정인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시기 위해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죄의 용서의 권한인 ‘하늘 나라의 열쇠’가 교회에 있음을 천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도 성령을 내어주시며 이 지상에서 사도들이 용서하면 용서받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용서의 권한의 근저에는 교회공동체의 결속력이 하느님의 ‘사랑’ 때문임을 말합니다.

 

모든 공동체가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공동체를 모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회사도 하나의 공동체라 한다면 그것은 돈이라는 힘 때문에 모인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로 부르기보다는 ‘집단’으로 부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삼국지’에서 두 공동체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평화로운 한 마을에 느닷없이 군인들이 나타나 남자들을 끌어가서 목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죽은 남자들의 목을 수레에 달아 질질 끌고 다닙니다. 옆에 있던 대신이 장군에게 물어봅니다. “아니, 저 백성들을 왜 죽였습니까?” 장군은 말합니다. “심심해서!”

이 사람이 삼국지의 ‘동탁’입니다. 동탁은 이렇게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나라를 장악한 인물입니다. 물론 그 나라가 평화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황건족과 같은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조조와 같이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시도들이 번번이 실패한 이유는 동탁 옆에 있었던 호위무사 ‘여포’ 때문이었습니다.

 

동탁은 어떻게 죽게 될까요? 여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당시 임금을 볼모로 잡은 동탁의 폭정을 보다 못한 왕윤이란 신하가 임금을 구해내기 위해 계략을 핍니다. 자신의 딸처럼 아끼는 ‘초선’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초선은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명입니다. 왕윤이 초선에게 말합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내 이제 너를 여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하고 동탁에게 바칠 생각이다. 네가 할 일은 저들 사이에서 이간질하여 여포가 동탁을 죽이도록 하는 것이다.”

초선은 잘 해냈고 여포는 자신의 여인을 빼앗은 동탁을 죽여버립니다. 두려움으로 뭉친 집단은 더 큰 두려움이 찾아오면 와해되기 십상입니다.

 

이와 상반되는 공동체를 만든 사람이 ‘유비’입니다. 유비는 귀족 출신이긴 했지만 가난하여 시골에서 돗자리를 짜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비와 관우와 힘을 합쳐 도적 떼로 변해버린 황건적을 토벌하는 의병이 됩니다. 그의 명성이 점점 커지자 동탁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된 조조가 그 싹을 잘라버리려 합니다. 도망만 다닐 수 없었던 유비는 전쟁의 신이라 불리게 될 ‘제갈공명’을 찾아갑니다. 제갈공명은 산 밑에서부터 걸어서 자신을 만나겠다고 세 번째 찾아오는 유비를 만나줍니다. 제갈공명을 얻게 된 유비는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제갈공명은 자신에게 그렇게 머리를 조아린 유비를 처음엔 잘 신뢰하지 못하다가 한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유비가 자신의 아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일이었습니다. 유비의 두 아내가 조조 군의 진영에 고립되어 있을 때 조자룡이 끝까지 찾아내어 아들을 구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자룡은 상처를 입습니다. 유비는 아기를 집어 던지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내 큰 장수를 잃을뻔했구나!”

이에 조자룡은 깊은 절을 하며 이렇게 맹세합니다.

“자룡은 이제 간과 뇌가 땅에 으깨어지기까지 주공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제갈공명도 이런 사람이라면 자신도 목숨을 바쳐도 될 것이라 믿게 됩니다. 시골 돗자리 장수였던 유비는 이렇게 사람을 모을 줄 알아, 조조의 위나라, 손권의 오나라와 함께 촉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유비는 관우를 살리기 위해서도 자기 목을 내어놓습니다. 처음부터 유비와 하나가 된 사람들은 유비의 사랑의 힘 때문에 모인 이들입니다. 그렇게 아들까지 집어던질 정도로 자신의 공동체를 사랑했다면 당연히 목숨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집어 던져 십자가에 매달으시며 교회라는 공동체를 모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아드님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모으신 이들을 위해 죄의 용서 권한을 주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위해 아드님을 주셨다는 것은 ‘다’ 주셨다는 말입니다. 결속력이 사랑 기반인 공동체의 특징은 모든 것을 청할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통한 죄 사함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랑에 감동하여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조자룡의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의 간과 뇌가 땅에 으깨어질지라도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서 누수가 있었습니다. 다음날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물받이가 바람에 떨어져 나갔고, 굴뚝의 벽돌은 흔들거리고, 지붕 사이에 나무는 삭았습니다. 언제나 맥가이버처럼 도와주시는 형제님이 이번에도 도움을 주셨습니다. 자재를 구입하고, 지붕에 올라가서 물받이를 새롭게 만들고, 벽돌은 고정하고, 낡은 나무는 새 나무로 교체했습니다. 칠을 새로 하니 깨끗해졌습니다. 한 여름에 지붕에 올라가서 일하는 것은 고된 일이라는 것 알았습니다. 지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합니다. 문득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란 영화가 생각납니다. ‘Sunrise Sunset'이라는 노래가 감미로웠습니다. 기자가 감독에게 질문했습니다. ‘왜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합니까?’ 감독이 대답했습니다. ‘전통이 붕괴되는 위기를 맞으면서도 그래도 아슬아슬한 균형(Balance)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유태인들의 운명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신앙은 유혹과 갈등, 번민과 욕망이라는 지붕위에서 하느님의 뜻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인호’를 이야기합니다.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호를 이야기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때였습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재앙은 양의 피를 묻힌 집은 건너갔습니다. 구약의 인호는 재앙을 피하는 표시였습니다. 신약에도 인호가 있습니다. 신약의 인호는 세례를 받으면서 은총으로 받습니다. 구약의 인호가 한번만 효력이 있다면 신약의 인호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신약의 인호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 될 수 있다는 표시입니다. 신약의 인호는 ‘특권’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인호는 ‘사명’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인호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인호를 받은 사람의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그에게 가서 잘못을 지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가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두가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도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모두가 은총을 받아 구원받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틀린 사람을 쫓아내고 격리시키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방법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고,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찾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시고,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도 용서하시고,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도 용서하십니다.’ 용서와 포용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은 하나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으셨지만 서로 다른 다양성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주님께서는 군사와 권력으로 하나를 만들 수 있었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공존을 모색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나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同化’가 아니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없애는 힘의 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들 역시 잠시 머물다 가는 세상입니다. 평화와 공존은 인류 지성이 추구했던 삶의 가치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3.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강론]

 

8.12.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공동체에나 늘 잘못을 저지르는 이가 있기 마련이고, 그를 어떻게 충고하고 교정시킬 것인지는 우리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형제간의 교정방법과 절차를 네 단계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혼자 단독으로 하는 교정이여, <둘째>는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교정이요,

<셋째>는 교회를 통한 교정이요, <넷째>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을 통한 교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고 있는 이러한 교정의 비공개성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단지 잘못한 형제에 대한 형식적인 교정방법과 절차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 곧 타인을 남이라 여기지 않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교정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앞서, 먼저 나는 형제의 잘못을 왜 고쳐주어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사랑의 마음에서 사랑을 품고 행하는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정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이거나 처벌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먼저 형제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의 [규칙서](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주지 않고 그대로 나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한 형제의 교정이 지극한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불편 때문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으로 잘못한 형제를 교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형제를 교정할 때는 사랑이 아니면 차라리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직 사랑과 신뢰, 그리고 하느님께 의탁하여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충고하더라도 사랑으로 충고하고, 침묵하더라도 사랑으로 침묵하라”고 말합니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 우리는 교정 받으면서 한갓 잔소리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마태 18,19)

 

그러니 우리가 서로 풀어야 할 곳은 하늘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라는 사실이요, 우리가 기도할 때는 하늘나라에 가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그러니 우리가 형제를 교정할 때에는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하며, 그리스도께 의탁하여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먼저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바를 행하라.”

 

오늘도 잘못한 내 형제에 대해서 무관심하지는 않는지, 혹 사랑이 없어서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그리고 사랑으로 충고하고 교정하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주님!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그가 내 형제임을 알게 하소서!

형제가 잘 되기를 위해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게 하소서.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은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사랑하는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우리의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교회 공동체 일치의 비결

-기도, 중심, 회개-

 

오늘 독서 에제키엘서는 ‘예루살렘이 받을 벌’과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난다’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복음 역시 ‘형제가 죄을 지으면 깨우쳐 주라’와 ‘함께 기도하면 들어주신다’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여기서 착안한 ‘교회 공동체 일치의 비결-기도, 중심, 회개-’라는 오늘의 강론 제목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보다 힘든 일은 없습니다. 일치의 완성보다는 일치의 과정중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저절로 일치는 없습니다. 일치보다는 분열로 향하는 경향이 강한 인간 공동체의 현실입니다. 보십시오. 나라든 가정이든 사회 곳곳에서 분열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공동체의 일치는 은총의 기적처럼 생각됩니다. 정말 가정이든 수도원이든 한결같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형제자매들을 보면 경이驚異롭기까지 합니다. 하여 가정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부부들에게 자주 유머러스한 그러나 진정성이 담긴 격려 말씀을 드리곤 합니다.

 

“잘살든 못살든 두분이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입니다. 함께 끝까지 살기만 하면 성인聖人이요 구원입니다. 또 혼자는 절대 천국에 못갑니다. 부부 점수 합하여 평균 점수 60점 넘어야 둘이 함께 구원입니다.”

 

혼자 열걸음 가는 것보다 함께 한걸을 가는 게 진정 진보입니다. 수도공동생활 역시 함께 사는 것이 가장 힘들고 중요한 수행입니다. 함께 사는 것이 도닦는 것입니다. 공동생활에는 답이 없습니다. 답이 있다면 매일 새롭게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주님의 중심의 파스카의 삶입니다. 어떻게 공동체의 일치를 이루어 살 수 있겠습니까?

 

첫째, 주님을 일치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공동체뿐 아니라 각자의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하여 늘 우리 삶의 중심인 주님을 향하고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평생 서로 좋아서 사는 게 아니라 서로 바라보는 주님 중심의 방향이 같아야 삽니다. 평생 삶의 중심인 주님을서로 바라보며 살아야 주님과의 일치요 서로간의 일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가 상징적으로 공동체의 와해瓦解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참으로 큰 죄가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삶의 중심 자리에 주님이 아닌 우상들이 자리잡고 있는 우상숭배가 바로 온갖 인간 불행과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

 

공동체의 일치가 아니라 분열로 직결되는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예수살렘의 벌은 우상숭배의 결과 스스로 자초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우상숭배의 죄의 결과 주님의 영광은 성전에서 떠나고 예루살렘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참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의 성전인 우리가 우상들을 삶의 중심에 둘 때 주님의 영광은 우리를 떠나게 되고 우리는 스스로 분열, 파괴되어 자멸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주님의 영광이 우리를 떠나는 것보다 큰 불행의 재앙은 없습니다.

 

둘째, 기도와 회개입니다.

 

주님 중심의 삶을 늘 새로이 강화하면서 견고히 해주는 참으로 결정적 수행이 기도와 회개입니다. 평생 기도와 회개를 통해 주님 중심의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혼자의 기도는 물론이고 주님 중심의 공동체 형성에 공동기도의 수행은 필수입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비로소 크든 작든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바로 여기 요셉 수도공동체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하루에도 공동미사전례에 이어 일곱 번의 시편 공동성무일도 전례를 바치기에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 중심의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악마의 분열을 막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잘하고 못하고가 없습니다. 마음따라 기분따라 감정따라 하는 기도는 힘이 없고 얼마 못갑니다. 그냥 한결같이 일과표의 궤도 따라 기도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주님의 중심의 공동체 형성과 더불어 내외적 질서와 안정, 그리고 평화입니다.

 

기도와 회개는 함께 갑니다.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회개와 겸손, 위로와 치유, 정화와 성화, 기쁨과 평화의 선물입니다.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이런 기도의 은총이 형제의 죄를 깨우쳐 주는 데 항구한 노력을 기울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교회 공동체에서 잘못한 형제들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치밀하고 섬세한지요. 절차에 따른 교정 과정을 보면 잘못한 형제에 대한 너그럽고 자비로운 공동체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또한 기도의 은총입니다. 교정의 목적은 벌이 아니라 화해와 치유에 있습니다. 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교정에 항구할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기도의 은총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공동체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땅과 하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땅의 공동체내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의 공동체내에서 화해로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란 말씀입니다.

 

하늘에서의 구원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땅에서의 공동체에서 시작됨을 봅니다. 여기 땅에서 공동체에 불통으로 막혀 있으면 하늘에서도 불통으로 막혀 있을 것이며, 여기 땅에서 공동체에 소통으로 열려 있으면 하늘에서도 소통으로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 주님 중심의 공동체의 일치에 미사전례가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분열의 치유와 더불어 공동체의 일치를 이뤄주시며 서로 간에 맺힌 것을 풀어 주시어 하늘에서도 풀려 있게 하십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너와 나의 우리를 소통으로 하나되게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5. [매일미사 묵상 결론 기도문]

 

2020년 8월 12일 수요일[(녹)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