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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0년 8월 14일 금요일[(홍)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초상화 1점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55번 착하신 목자 영성체 성가  153번 오소서 주 예수여
예물준비 성가  511번 미약하온 우리 제물 영성체 성가  496번 주님은 우리 사랑하셨네
예물준비 성가  332번 봉헌 영성체 성가  169번 사랑의 성사
파견 성가  199번 예수 마음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1917년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다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여기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용소에서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는 그를 대신하겠다며 앞으로 나갔다. 결국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을 받고 처절한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1년 지하 감방에서 선종하였다. 이러한 그를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다.

입당송

마태 25,34.4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오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본기도

하느님,
거룩한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사제가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를 열렬히 사랑하여
영혼들을 돌보며 이웃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언제나 이웃에게 봉사하며
죽기까지 성자를 닮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다. 그런데 너는 불륜을 저질렀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6,1-15.60.6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어라.
3 너는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의 혈통과 태생으로 말하자면, 너는 가나안 땅 출신이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고 너의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다.
4 네가 태어난 일을 말하자면, 네가 나던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 주지 않고, 물로 네 몸을 깨끗이 씻어 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
5 너를 애처롭게 보아서, 동정심으로 이런 일을 하나라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네가 나던 날, 너를 싫어하여 들판에 던져 버렸다.
6 그때에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살아남아라!′ 하고 말하였다.
7 그러고 나서 너를 들의 풀처럼 자라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서 꽃다운 나이에 이르렀다.
젖가슴은 또렷이 드러나고 털도 다 자랐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벌거벗은 알몸뚱이였다.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9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돌고래 가죽신을 신겨 주었고,
아마포 띠를 매어 주고 비단으로 너를 덮어 주었으며,
11 장신구로 치장해 주었다.
두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고,
12 코에는 코걸이를, 두 귀에는 귀걸이를 달아 주었으며,
머리에는 화려한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13 이렇게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아마포 옷과 비단옷과 수놓은 옷을 입고서,
고운 곡식 가루 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었다.
너는 더욱더 아름다워져 왕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4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5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지나가는 아무하고나 마구 불륜을 저질렀다.
60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63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나는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는 수치스러워할 것이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6,59ㄴ-6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9 “나는 네가 한 대로 너에게 해 주겠다. 너는 맹세를 무시하여 계약을 깨뜨렸다.

60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61 너와 맺은 계약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내가 네 동생들과 함께 네 언니들도 데려다가 너에게 딸로 삼아 주면,
너는 네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고 수치스러워할 것이다.
62 이렇게 내가 너와 계약을 세우면,
그제야 너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63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이사 12,2-3.4ㄴㄷㄹ.5-6(◎ 1ㄹ 참조)
◎ 주님은 분노를 거두시고 저를 위로하셨나이다.
○ “보라, 내 구원의 하느님. 나는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해 주셨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을 민족들에게 알리고, 높으신 그 이름을 선포하여라. ◎
○ 위업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이 하신 일 온 세상에 알려라. 시온 사람들아,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

복음 환호송

1테살 2,13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
◎ 알렐루야.

복음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지혜 3,1-9 또는 1요한 3,13-18)와 복음(요한 15,9-17)을 봉독할 수 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이 예물을 바치며 간절히 비오니
저희가 거룩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를 본받아
저희 삶을 주님께 봉헌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요한 15,13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자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거룩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가 이 성찬례에서 받은 사랑이
저희 안에서 불타올라
저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조선 시대에는 남성만이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행실이 음탕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하는 것, 곧 칠거지악으로 불리는 일곱 가지 항목은 부인을 쫓아낼 수 있는 명분을 뜻하였습니다. 그러나 ‘삼불거’라고 하는 ‘여성 보호’ 조항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칠거지악을 저지른 아내라도 버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 경우로, 돌아가서 의지할 데가 없거나,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거나, 가난할 때 같이 고생하다가 뒤에 부귀하게 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나 삼불거는 실제로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탈출기에 나오는 십계명에는 이혼을 허락하는 계명이 없습니다. 오히려 간음과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시비 거는 이혼장에 대한 규정은 신명기(24,1-4 참조)에 나옵니다. 사실 신명기의 이 규정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남편이 함부로 이혼할 수 있는 명분이나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이유로 부인을 함부로 내쫓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 설교에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마태 5―7장 참조).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느님의 처음 의도대로 남녀의 결합이 가지는 존엄성을 회복시키고자 말씀하신 것이 오늘의 복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는 수백 겁의 인연이 쌓여야 비로소 부부의 인연이 맺어진다는데, 예수님의 혼인 선언이야말로 부부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큰 계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결국 끝까지 해내는 사람의 비밀!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결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유가 합당하다면 아내를 버려도 좋은 것 아니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이 맺어주셔서 한 몸이기 때문에 감히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그러면 어째서 모세는 아내를 버려도 좋다는 율법을 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는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와 같아서 그것에 맞는 음식을 준 것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왜 결국엔 끝까지 가야 할까요? 왜냐하면, 결혼은 끝까지 가는 것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행복이 목적이 아니라 결혼생활이 끝날 때 변한 나의 모습이 목적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한 것입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며 많은 사람이 감동하였습니다. 분명 그 두 분 어르신들이 살아오면서 많이 다투기도 하고, 많은 실수도 서로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갔기에 많은 분으로부터 박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삼국을 통일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유비도 죽고, 조조도 죽고 손권도 죽었습니다. 세 나라의 건국 영웅들이 다 죽었지만, 중국은 통일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비의 ‘제갈량’과 조조의 ‘사마천’만이 마지막 두 영웅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사마천은 항상 제갈량에게 패했습니다. 당대 제갈량을 이길 영웅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중국을 통일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제갈량과 겨루어 승리다운 승리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마천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워런 버핏도 성공의 비결을 물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왠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한 가지 길로 끝까지 가면 반드시 어떠한 형태든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여기서 끝까지 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끝까지 견디면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중도에 실패하는 것을 겁내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일등이 목표가 아니라 끝까지 뛰어 결승점을 통과하면 그것이 이기는 것임을 압니다.

 

사마의와 제갈량의 전투에서 사마의는 제갈량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시간만 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갈량이 사마의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위해 선물을 보냅니다. 그 비단으로 싼 상자 안에는 여인의 장신구와 옷이 들어있었습니다. 여자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당당하게 한 판 붙자는 말이었습니다. 사마의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그 상자를 들고 온 군사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군사는 제갈량을 자랑하였습니다. 음식도 반밖에 안 드시고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으며 업무에 집중하고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생각했습니다.

‘얼마 못 가겠군!’

결국, 천하의 제갈량은 54세에 과로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통일의 주인공은 사마의가 되었습니다. 일단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승리하는 것보다 끝까지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는 것만이 좋다는 것을 안다면 게으를 수 있습니다. 열매는 맺히겠지만 볼품없을 수 있습니다.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합니다. 가정생활을 엉망으로 하면서 끝까지 가기만을 고집한다면 그 결혼생활에서는 끝까지 견뎌낸 상대만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서 안 되는 것은 ‘소명’입니다. 이것 역시 믿음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결혼의 주체가 자신이라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결혼의 주체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일을 맡기신 것이니, 당연히 끝까지 가야 하면서도 ‘잘’ 가야 합니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는데 갔다 오기만 하면 성공이라고 여기고 다른 곳을 헤매다가 다음 날 들어온다면 비록 일은 했으나 칭찬을 듣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일을 하거나, 누구와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나에게 맡겨진 ‘소명’인지 살펴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하느님 앞에서 그 상대가 주님께서 선택하신 상대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이 있으면 결혼하고, 일단 결혼했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사마의가 관직에 올라도 될 나이가 차자 조조가 그에게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조가 두려운 나머지 그 벼슬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북한에서 김정은이 내리는 관직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사마의는 조조의 성격을 알기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중풍 병자 흉내를 냈습니다. 이를 믿지 않은 조조는 사마의를 염탐하게 시켰고 사마의는 몇 년 동안이나 중풍 병자 흉내를 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마의도 이 정도면 하늘의 뜻이라 여겨 결국 받아들입니다. 사마의는 이후 몇 대의 조조 후손을 임금으로 모시며 통일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끝까지 가려면 하늘의 뜻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임을 확신한다면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결과도 좋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일도 없습니다. 시련을 잘 견뎌냅니다. ‘끝까지 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이 일을 맡기신 분이 주님이시다.’ 이 두 믿음만 있다면 끝까지 가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한 자매님이 찾아왔습니다. 프리메이슨, 전자 칩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약속도 있어서 요점만 이야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이야기로는 찾아오지 말아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제가 해결 할 수도 없는 문제를 듣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기에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해도 상대가 듣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물며 별로 유익하지 않은 말을 기꺼이 시간을 내서 듣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상대방의 마음과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육사는 호랑이에게 살아있는 동물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어 죽이는 버릇이 더 사나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주더라도 조금씩 잘라서 준다고 합니다. 잡아 찢는 버릇이 사나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재주와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면 로마가 왜 망했느냐고 묻기 보다는 로마가 어떻게 천년동안이나 계속될 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당파싸움으로 조선이 망했느냐고 묻기 보다는 당론이 있어서 조선이 600년을 존속했느냐고 묻습니다. 염색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젊어 보인다고 하는 후배 신부님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누수로 지붕 공사를 했는데 생각보다 비용이 적게 나왔다는 말을 들으니 역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넘어져 다친 사람에게 잘 보고 다니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말은 하지 않으면 한번 후회하지만 말은 잘못하면 수천 번 후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선출직인 정치인들에게 한 번의 말실수는 본인은 물론 소속된 당에게도 큰 피해를 주곤 합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들도 항상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애정이 애증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잔치를 벌입니다. 돌아온 동생을 보고 형은 잔치를 벌인다고 불평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랑이 없는 말입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용기를 주는 말, 위로를 주는 말, 희망을 주는 말로 더위를 식히면 좋겠습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왜 하와를 만들어 주었느냐고 불평했습니다. 카인은 동생을 죽인 후에 내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고 불평했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셨음에도 이방의 신을 섬겼습니다. 아합은 이미 가진 포도밭도 많은데 나봇의 하나밖에 없는 포도밭을 빼앗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기에 이스라엘의 잘못을 용서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뉘우치기만 한다면 진홍같이 붉은 죄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다홍같이 붉은 죄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회개하고 뉘우치면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부부가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헤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부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셨기 때문에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단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포로수용소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 희망을 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셨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이 별이 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주님 중심의 홀로와 더불어의 삶-

 

 

어제도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혼자만이 아닌 더불어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점심식사후 즉시 시냇가 물오리를 구경하고 동요를 힘차게 부르고 돌아오던 중, 수도원 성전에서 기도하고 돌아가던 착한 자매를 만나 잠시 함께 걸으며 동요를 부르고 십자로 중앙에서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진도 찍고 강복도 드렸습니다. 나이 70을 넘으니 이런 자유로움입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너무 예쁘고 멋져요! 늘 이렇게 사세요!”

“신부님! 오늘 저에게 특별한 노래 선물을 주셔서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오늘은 사진도 예쁘게 나왔습니다. ㅎ ㅎ 감사합니다!!”-

 

마침 오랜만에 처음으로 남편과 피정온 자매가 있어 9시경이 끝나자마자 형제님을 만나자하여 고백성사와 강복을 드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부부 사진을 찍어 전송해 드렸습니다.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부부예요! 늘 이렇게 사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신부님이 부르지 않으셨으면 그냥 간다고 했는데,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이웃이 행복할 때 참으로 나도 행복합니다.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중심으로 홀로와 더불어의 삶일 때 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수녀님으로부터 받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동영상 메시지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진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글입니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꽃은 자신을 위하여 향기를 퍼트리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위해 태어났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너무나 공감이 가는 참 아름다운 행복의 법칙입니다. 아마 2000년동안 가톨릭 교회 역사상 전세계 신자들과 다정하게 소통한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유일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열렬히, 항구히 주님을 사랑할 때 홀로와 더불어 여정중에 있는 도반 형제자매들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참행복도 성취될 것입니다.

 

공동체와 유리된 혼자만의 행복은 자기도취의 착각이며 환상일 수 있습니다. 탐욕과 이기주의와 무관심이 참으로 오늘날 유해한 영적 바이러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평생 선교사로 살다가 순교한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역시 감동적입니다. 성인에 관한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는 한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열명을 처형했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명의 처형 대상자중 한 폴란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이를 본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자원해서 죽겠다고 걸어 나갔다. 나치의 허락을 받고 다른 아홉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힌 그는 아사형에 처해졌다.’

 

1982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만47세 순교하신 콜베 사제 시성식 때 그에게 ‘자비의 순교자’란 칭호를 부여했고 수감자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오늘 아름다운 본기도 역시 그대로 성인의 삶을 요약하며 참 행복한 삶의 비결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 거룩한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사제가,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를 열렬히 사랑하여, 영혼들을 돌보며 이웃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언제나 이웃에게 봉사하며, 죽기까지 성자를 닮게 하소서.”

 

죽기까지 성자 예수님을 닮는 것이 참 행복한 삶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독서는 예루살렘의 역사를 부정한 아내의 역사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항구히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대한 배은망덕의 예루살렘 역사입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이웃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한 역사였더라면 이런 불행과 재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불륜이 상징하는 바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당신께 돌아와 당신 중심의 행복한 삶을 살라는 우리 모두를 향한 회개의 촉구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가 주님을 떠난 불행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과 이혼, 독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물론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어느 경우든 주님을 중심으로 홀로와 더불어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립단절의 혼자만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 이상적 부부일치의 혼인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로 맺어진 부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혼과 독신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하나만의 성소가 아닙니다. 결혼 성소도 있고 수도 성소도 있고 독신 성소도 있습니다. 옛 신학교 시절 혼인법 마지막 시간 강의를 잊지 못합니다.

 

“교회법을 총동원해 살 사람은 살게 해주고 도저히 못 살 사람은 헤어지게 해주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생 하느님을 찾아가는 각자 고유의 인생 여정중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홀로와 더불어 여정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하느님을 향해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과 조화속에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러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020년 여름호 분도 계간지 표지의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 산다”라는 구상 시인의 글귀와 그림도 이를 요약합니다. 아주 예전 무려 23년전 써놨던 사랑이란 자작시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고독과 연대는, 홀로와 더불어는 함께 갑니다. 고독의 깊이 없이는 더불어 친교의 깊이도 없습니다.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토마스 머튼은 갈파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님 중심의 홀로와 더불어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4.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강론]

 

14.“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탈출했고, 탈출이 생기면 다른 죄수 열 명이 지하 감방에서 굶어주어야 하는 ‘수용소 규칙’에 따라 지명된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사람이 울부짖으며 외칩니다.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습니다죽기 싫어요.”

 

그렇습니다. 결혼과 가정은 이토록 중요합니다. 독일 병사가 그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순간,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수인번호 16670번, 마리아 꼴베 신부(1894-1941)였습니다. 꼴베 신부님은 다른 아홉 사람과 함께 아사 감방에 갇혔고, 그가 2주 이상 물과 음식 없이 생존하자 독약을 주사하여 죽였습니다. 1941년 8월 14일,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이튿날인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꼴베 신부님은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의 아내와 자식들과 그 가정을 위해 대신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가정’은 그토록 귀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결혼의 근본정신을 창조의 원리를 통해 대답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해준 이유가 이혼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혼이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창조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태 19,5)

 

교부들은 이 말씀을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로 해석해 왔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하여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하여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이는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아서>에서 이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예레 32,3)

 

그러니,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남편으로 맞이하는 예수님의 아내가 되는 혼인성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이 깊은 관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가장 품위 있는 존재로 부각시켜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사는 것, 그분과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서로를 위하고, 서로에게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닌 서로의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부족하기에, 서로를 껴안아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태 19,4)

 

주님!

제 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이 밀치고 들어올 틈새를 열게 하소서!

제 안에 자리를 내어주게 하소서당신이 들어와 머물게 하소서.

찔려 상처 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기에깊이 찔리어 피 흘리게 하소서!

상처 입고서야 자신을 떼어낼 수 있기에깊이 상처 입게 하소서아멘. 

 

5. [매일미사 묵상 결론 기도문]

 

2020년 8월 14일 금요일[(홍)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복음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