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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0년 8월 13일 목요일[(녹) 연중 제19주간 목요일]/지거 쾨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성화 및 해설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4번 찬양하라 영성체 성가  152번 오 지극한 신비여
예물준비 성가  510번 주님께 올리는 기도 영성체 성가  198번 성체 안에 계신 주님
예물준비 성가  221번 받아주소서 영성체 성가  168번 오묘하온 성체
파견 성가  6번 찬미노래 부르며

입당송

시편 74(73),20.19.22.23 참조
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2,1-1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3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꾸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배를 가거라.
행여 자기들이 반항의 집안임을 그들이 깨달을지도 모른다.
4 너는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떠나듯이 떠나라.
5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벽을 뚫고 나가라.
6 너는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마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
7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하였다.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다.
8 이튿날 아침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9 “사람의 아들아, 저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집안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너에게 묻지 않았느냐?
10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신탁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장과
그 안에 있는 온 이스라엘 집안에 관한 것이다.’
11 너는 또 말하여라.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12 그들 가운데에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78(77),56-57.58-59.61-62(◎ 7ㄴ 참조)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시험하고, 그분께 반항하며, 그분의 법을 지키지 않았네. 그들의 조상들처럼 등 돌려 배신하고, 뒤틀린 활처럼 어긋나 버렸네. ◎
○ 산당을 지어 그분의 화를 돋우고, 우상을 세워 그분을 진노케 하였네. 하느님은 들으시고 격노하시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셨네. ◎
○ 당신의 힘을 적에게 사로잡히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적의 손에 내주셨네. 당신 백성을 칼에 넘기시고, 당신 소유에게 격노하셨네. ◎

복음 환호송

시편 119(118),135
◎ 알렐루야.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자비로 이 예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교회가 드리는 이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47(146─147),12.14 참조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저희를 구원하시고
진리의 빛으로 저희를 굳세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에제키엘은 상징적인 행위를 많이 보여 주는 이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거슬러 심판을 선언하는 예언자의 활동에서 우리는 이 행위들을 만납니다. 특히 오늘 독서는 에제키엘의 행위 가운데 하나인 ‘유배 짐’을 언급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충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시면서, 그들이 다시 계약에 충실하도록 에제키엘을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쓰십니다. 에제키엘은 이 불충의 결과 가운데 하나로, 유배 짐을 싸서 어두울 때 도시를 떠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그리고 그분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 땅에서 내쫓기게 되리라는 암시를 시각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사실 ‘예표’란 어떤 중요한 면을 쉽게 이해하고 파악하게 하는 ‘무엇’입니다. 이스라엘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기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예표, 곧 행동으로 보일 예언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명령을 받은 대로 반드시 실행해야 하고 이를 지켜본 이들은 변화하는 반응을 보여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규범입니다. 먼저 수도 없이 용서하라는 용서의 빈도를, 다음으로 하느님께 엄청난 용서를 받았으니 동료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라는 용서의 당위성을 ‘매정한 종의 비유’로 알려 줍니다. 물론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종은 매정한 인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먼저 무한한 자비를 베푸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용서하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 속 매정한 종처럼 그 어떤 변화도 없이 옹졸하기만 하면, 그 인생이 어두워질 무렵 유배 짐을 싸서 어깨에 메고 이 세상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결국 예표이든 비유이든 주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깨닫고 변해야 합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지거 쾨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깨달음(覺)의 여정

-모두가 은총의 선물이다-

 

‘국제적 수도승 삶의 연대’란 영문 소식 책자의 제목이 반가웠습니다. ‘수도승의 이상적 삶과 죽음(The Monastis Ideal of Life and Death)’이란 제목이었습니다. 저는 강론 원고중 마음 깊이 각인 시키고 싶은 중요한 말마디에는 때로 반드시 괄호를 열고 한자나 영어를 집어 넣습니다.

 

참으로 살기위해, 참으로 죽기위해 이상적 삶과 죽음에 대한 탐구는 필수이겠습니다. 모든 시험이 날짜가 있지만 일생일대 최종의 마지막 시험인 죽음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벼락 공부는 어불성설이고 늘 깨어 삶과 죽음을 공부하며 죽음을 준비했다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어느 수도원이든 찾을 때 마다 우선 살펴 확인해 보는 것이 수도원 묘지입니다. 유럽 수도원들은 광대하고 수려한 터전에 자리잡고 있으며 내부의 한적한 자리에 수도원 묘지가 있습니다. 찾을 때마다 고향에 온 듯 편안함을 느낍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마음도 정리되고 참 홀가분해지는 느낌입니다. 자기비움의 수련에 수도원 묘지는 참 좋은 공부의 장입니다. 흡사 성지 순례의 느낌입니다.

 

왜관 수도원에 머물 때도 수도원 외곽의 낙동강 변, 산비탈에 위치한 수도원 묘지를 찾았고,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뉴턴 수도원에 2차례 얼마 동안 머물 때도 매일 수도원 묘지를 찾아 순례하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금도 눈에 밟히는 그리움의 처소가 수도원 묘지입니다.

 

삶과 죽음의 파스카 신비의 묵상과 삶에 참 좋은 공부처가 묘지입니다. 일반인들과 달리 묘비석에 묘비명은 없고 이름과 생몰연대만 나와 있는 수도원 묘지입니다. 일반인들의 묘지 역시 방문시에는 늘 확인해 보는 것이 생몰연대와 묘비명입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참 귀한 하느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수도원 묘지 순례가 심기일전, 역설적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를 살아도 평생을 살 듯 샘솟는 열정으로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요즘 산책시 자주 불렀던 동요와 더불어 생각나 부르기 시작한 아주 예전 즐겨 불렀던 ‘일터로 가자’ 노래입니다. 8.15이후 농촌 계몽과 동시에 ‘상록수’와 ‘흙’이라는 소설이 유행하며 4H운동과 함께 농촌에서 즐겨 불렀던 민요풍의 노래입니다. 가사도 곡도 아름다운 자연환경의 배밭 농사가 주업인 요셉 수도원 분위기에도 참 잘 어울리는 노래 1절과 3절을 소개합니다.

 

-“저건너 푸른봉에 구름헤치고 태양이 솟아오니 어화 새날이로구나

시냇물이 굽이굽이 감도는 들에 이슬맞어 젖는 흙은 향기를 풍긴다

(후렴) 어화 어화 어화데야 일터로 가자 이나라의 주인인 너와 나로구나

낙원이 어데냐고 묻지말게나 심으며 웃는 얼굴 어화 낙원이로구나

내가슴엔 비가개어 하늘 푸르고 내가슴엔 봄바람이 언제나 분다”-

 

얼마나 아름답고 흥겨운지요. 그대로 은총 넘치는 찬미가 같습니다. 여기 수도원 산책중 가끔 부르다 요즘은 매일 부릅니다. 이제는 동요와 더불어 성가의 좋고 쉬운 찬미가부터 배우는 마음으로 부르려 합니다. 사실 성가책 없이 제대로 끝까지 부르는 성가가 거의 없어 보지 않고도 외워 부르기 위함입니다.

 

하루 삶의 모든 계기를 깨달음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모두가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찬미와 감사의 삶의 생활화, 일상화와 더불어 행복한 깨달음의 여정을 살게 되는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하느님과 나에 대한 앎도 깊어져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점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나온 행복기도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모두가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하늘 나라 천국의 기쁨과 행복입니다. 하늘 나라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낼 때 ‘무지의 늪’은 ‘지혜의 숲’으로 변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도대체 예나 이제나 무지의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만이 무지에서 해방된 자유인이자 현자입니다.

 

오늘 복음은 무자비한,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정말 인정머리없는 인색한 무지한 종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마디도 있지만 정말 ‘자기인식(self-knowledge)’에는 빵점입니다. 만 탈렌트 천문학적 빚을 탕감받은 자가 조족지혈鳥足之血, 고작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그토록 모질게 대하다니요. 아, 바로 무지의 탐욕에 눈멀 때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바로 만탈렌트 빚진 자는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백탈렌트 빚진 자는 내 주변의 가난한 형제들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무자비한 무지한 종에 대한 호된 질책이 우리의 ‘무지의 눈’을 활짝 회개의 깨달음으로 이끌어 삶의 실재와 진실을 보게 합니다. 깨달을 ‘각覺’자 한자 안에 ‘볼 견見’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만탈렌트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은총의 선물로 가득한 인생임을 깨달아 안다면 저절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요 형제들에 대한 온갖 맺혔던 것도 저절로 다 풀리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동병상련의 연민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평화공존의 삶을 살 것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의 무한한 용서도 저절로 가능해 집니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해소입니다. 무지로 인한 문제라 깨달아 알게 되면 해결이 아닌 저절로 용서요 해소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전에는 하느님의 행동이 곧 예표였다면, 이사야 이후부터는 예언자 자신이 하느님께서 장차 이루실 일에 대한 예표가 됩니다. 오늘날도 눈만 열리면 주변에서 ‘회개의 예표’같은 사건들이나 형제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바이러스 감염병도 일종의 회개의 예표같은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바로 ‘반항의 집안’으로 지칭되는 무지의 죄악으로 눈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질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 대한 회개의 촉구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새삼 무지의 죄악에 대한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육신의 눈은 멀쩡해도 보지 못하는, 육신의 귀는 멀쩡해도 듣지 못하는 무지의 죄악에 병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회개의 은총을 위해 하느님을 향해 마음의 눈을, 마음의 귀를 활짝 여는 한결같은 의도적 노력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함은 물론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어 자유로운 현자가 되어 찬미와 감사의 삶에 전념하게 하십니다. 아멘.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은혜 갚을 절호의 기회, 용서!

 

우리 대부분은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하면 ‘용서’는 해야 하는 줄 압니다. 그렇더라도 용서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내가 주님께로부터 어떤 죄를 용서받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용서하려고 하니 용서가 매우 혹독한 고난의 길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평소에 내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용서할 기회를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묵상하면, 감히 ‘나도 용서할 기회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튜브에 나오는 어느 결혼식 축사의 주요 내용을 약간 각색해 보았습니다. 동업자이며 한 살 어린 나이지만 삼 년 전 결혼한 선배의 결혼식 축사입니다.

“진이 형. 십 년 전 우리는 결혼을 못 하든지, 아니면 축의금도 못 받고 몰래 결혼하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 했었지. 그때는 풀리는 일이 없었어. 그런데 결국 나도 삼 년 전에 결혼하게 되었고, 형도 지금 축의금 많이 받고 결혼하네. 앞으로 우리 열심히 일하며 갚아나가자.

 

형이야 당연히 잘하겠지만, 결혼 선배로서 하나만 얘기할게. 형수랑 싸우면 대체로 형이 잘못한 경우가 많으니까 일단 사과해. 혹시 형이 생각했을 때 형 잘못이 하나도 없는 것 같으면, 그래도 사과해. 그게 남자고 남편이고 가장이며 우리 같은 사람과 결혼해주는 아내에 대한 보답이야. 좋은 기회잖아.

 

그동안 한 번도 얘기 못 했었는데, 이 자리 빌어 이제야 얘기한다. 십 년 전에 나 오토바이 사고 나서 한 달 병원에 누워있을 때, 병원비 없어서 퇴원 못 하고 간호사들 눈치 보던 그때, 형이 친구니까 도울 수 있으니까 돕는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었던 그 봉투, 내가 오늘 다시 가져왔다. 그때의 나는 어리고 철도 없고 자존심만 세서 고맙단 말 못 하고, 그렇다고 안 받겠다는 말도 못 했지. 나중에 열 배, 백 배도 갚겠다고 큰소리만 쳤었는데, 딱 열 배 넣었다. 백 배는 앞으로 같이 벌자. 내가 책임지고 벌게 할게. 진짜로 고마웠다. 그동안 한 번도 잊어버린 적 없다.

 

형, 형은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다. 주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고 그런 형이 선택한 형수라, 형수도 같은 사람인 거 같네. 여태 그래왔듯이, 세상 밝게 비추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결혼 축하해. 잘 살아. 2020년 5월 30일, 형 덕분에 이 자리에 서게 된, 00으로부터.”

[출처: ‘신랑을 울게 한 친구의 반전 축사’, 유튜브 채널 ‘삼남 2인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은혜를 갚을 기회만을 노릴 것입니다. 축사한 동생은 십 년 전의 자신들의 처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에게 시집와 주는 것도 고맙고 그 결혼을 축하해주러 온 분들께도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십 년 전 자존심 때문에 고맙단 말도 못 했던, 그러나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그 은혜에 대해서 형의 결혼식은 정말 ‘원수 갚을’ 절호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당연히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피로 그 지옥 불을 꺼주셨습니다. 만약 이 죄의 용서의 은혜를 믿기만 한다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제발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 좀 있어라!’ 하면서 기회를 노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기회가 있으면 주님께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기쁘게 용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으면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감옥에 집어넣는 사람이 나옵니다. 백 데나리온이 약 천만 원이라고 하면 일만 탈렌트는 육조 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당연히 이 은혜도 모르는 사람을 주님은 하늘 나라에 사시게 할 수 없으십니다.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자기만 아는 사람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하고 있지 못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유튜브에 보면 하부리그 축구 경기에서 결승 골을 넣은 선수가 하나뿐인 관객 앞으로 달려가 구십 도로 인사하는 감동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4시간 동안 응원하러 왔던 그 관객은 엉엉 웁니다. 바로 고양 시민축구단이 평창에 와서 경기할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일곱 경기 연속 패하기만 하던 고양 시민축구단을 응원하러 혼자 평창까지 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라대관씨는 먼 길을 혼자 달려와 목이 터지라고 북을 치며 응원했습니다. 선수들은 골을 넣자마자 하나뿐인 그 관중에게 달려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억지로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도 분명 큰일입니다. 그러나 평소 주님의 은혜에 대해 깊은 묵상을 했다면 용서를 할 기회를 찾는 것은 더 큰 일일 것입니다. 어차피 용서할 것, 주님께 더 보답해드리기 위해 ‘용서를 은혜 갚을 절호의 기회’로 노리며 삽시다.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코로나19로 고백소에서 성사를 보는 일이 중단 되었습니다. 가끔 제가 있는 신문사 사무실로 성사를 보러 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오십니다. 성사를 보시고, 환한 모습으로 가시는 걸 보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기도는 이론과 방법을 설명해서는 그 깊이와 힘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도는 체험을 통해서 그 깊이와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호수가의 새끼 오리들이 제법 깊이 물속으로 자맥질하는 걸 봅니다. 가르쳐주지 않고, 배우지 않았어도 새끼 오리들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하느님도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 알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몰입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느낀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알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믿으면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알아갑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선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은을 제련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숙련된 제련사는 용광로 위에 있는 은을 유심히 지켜본다고 합니다. 은이 얇은 막이 되어서 제련사의 얼굴이 비출 정도가 되면 은은 불순물이 다 빠지고 온전한 은이 된다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불을 끄고 은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련사가 용광로의 은을 유심히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용서할 수 있을까요? 숙련된 제련사처럼 자신의 내면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분노, 원망, 불신, 미움,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빠지면 마음은 호수처럼 맑아질 것입니다. 호수처럼 맑아진 마음은 굳이 용서를 말하지 않아도 용서가 주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게 되고,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주게 되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주게 되고, 어둠에 빛을 주게 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용서(Forgive)는 '위하여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주는 것일까요?

 

첫째, 나를 위하여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용서해야하는 실질적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가 가득차면 내가 힘들고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화병’도 어쩌면 용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둘째, 상대방을 위해서 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수오지심’이 있습니다. 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한 사람도 가슴에 ‘한’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삶이 풍족해져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이런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을 위해서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가 범한 더 큰 잘못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4.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강론]

 

8.13.“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의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편에는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의 특성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것이요, <셋째>는 용서하되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는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무한히, 계속해서,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혹은 몇 번 용서해보고 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미처 받아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말입니다.

 

<둘째>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이는 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아니 잘못했노라고 인정하기도 전에,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내 형제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혹은 비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고백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용서에 참여하게 되고, 그 용서를 통해 구원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용서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먼저’ 우리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용서를 통해 타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하되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이는 용서의 태도를 밝혀줍니다. 곧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심 쓰듯이 혹은 값싼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의무감이나 보상을 얻기 위한 방편에서가 아니라, 남의 시선이나 평가 또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망도 원한도 없는, 분노도 미움도 보복도 없는, 오직 사랑만이 있는 용서입니다.

결국, “용서”란 왕이 빚진 종을 “가엾이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내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입었기에, 이제 우리 역시 이러한 용서와 자비를 이웃과 형제들에게 베풀어야 할 일 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꺾이고 또 꺾이어도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결코 버리지 않게 하소서.

또한먼저 용서를 청하게 하소서먼저 용서받았음을 알게 하소서아멘

 

5. [매일미사 묵상 결론 기도문]

 

2020년 8월 13일 목요일[(녹)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