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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시편 84(83),10-11 참조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8,1-10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3 과연 너는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는 심오하지 않다.
4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5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6 그러므로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7 그러므로 나 이제 이방인들을, 가장 잔혹한 민족들을 너에게 끌어들이리니
그들이 칼을 빼 들어 네 지혜로 이룬 아름다운 것들을 치고
너의 영화를 더럽히며 8 너를 구덩이로 내던지리라.
그러면 너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무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9 너를 학살하는 자 앞에서도 네가 감히 ′나는 신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너를 살해하는 자들의 손에 달린 사람일 뿐이지 신이 아니다.
10 너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죽음을 맞이하리라.
정녕 내가 말하였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신명 32,26-27.28과 30.35ㄷㄹ과 36ㄷㄹ(◎ 39ㄷ)
◎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 나는 생각하였다. “그들을 산산조각 내고,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기억을 지워 버리리라.” 그러나 원수가 뽐낼까 보아, “우리 손이 더 강하였다. 이 모든 것을 한 이는 주님이 아니다.” 이렇게 적들이 착각할까 보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 정녕 이 백성은 생각이 없고, 슬기가 없는 자들이다. 바위이신 분이 그들을 팔아 버리지 않으신다면, 주님이 그들을 넘겨주지 않으신다면, 어찌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을 수 있으며, 두 사람이 만 명을 몰아낼 수 있으랴? ◎
○ 그들에게 멸망의 날이 다가오고, 재난이 삽시간에 닥친다. 주님은 당신 백성의 권리를 감싸 주시며, 당신 종들을 가엾이 여기시리라. ◎
복음 환호송
2코린 8,9 참조
◎ 알렐루야.
○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23-30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30(129),7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어제의 복음과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내용도 ‘부’에 관한 것입니다. 젊은이가 떠난 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십니다.
사실 마태오 복음에서 ‘부자와 하늘 나라’에 대하여 알아들으려면 산상 설교의 시작인 행복 선언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러나 마태오와 달리 루카는 같은 행복 선언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루카 6,20 참조). 그리고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라고 말하는 마태오와 다르게 루카는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루카 6,21)이라고 언급합니다. 곧 루카는 실재적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차이를 보이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마태오가 복음을 전하려던 교회는 루카가 속하였던 교회와는 달리, 비교적 부유한 신자들이 주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유한 신자들에게 하느님 보시기에 참된 부자가 무엇인지를 강조하여 가르치려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마태오가 이처럼 윤리적으로 각색한 이유는 교회 안의 부유한 신자들이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제 복음의 젊은이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오는 많이 가진 이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이가 부자라는 사실을 교회 공동체 신자들에게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많이 가졌어도 스스로를 부족하다 생각하면서 항상 노력하는 겸손한 사람이 부자이면서 동시에 예수님 말씀처럼 “완전한 사람”(마태 19,21)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진 ‘부’를 나누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으로 자신의 빈 곳을 채우는 ‘마음이 가난한 이’가 바늘구멍을 온전히 통과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강론]
8.18.“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당신을 따르지 못하고 물러간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 19,24)
여기에서, “부자”란 단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 재물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란 단지 물질적인 재화 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가정, 재능과 지식, 이념과 신념 등 자신이 애착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재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마저도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에 대한 집착이라면, 버려야 하는 재물이요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곧 재물 때문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한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와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난과 빈곤은 하느님의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 19,2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이는 구원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자력으로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구원이 사람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가진 재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죄인이든 자신(우상)에 대한 애착을 끊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마태 19,30)
그러니, 오늘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 볼 일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것에 애착하고 있는가? 나 자신의 몸과 소유물인가? 자신의 재능과 지식인가? 혹 나의 신념이나 이상, 그리고 자기 방식의 사랑인가? 내가 만들어 놓은 공동체 상이거나 하느님 상인가?
그렇습니다. 내가 바라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바라고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하느님이셔야 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마태 19,23)
주님!
생각이 제게는 재물입니다. 붙들려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자신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생각 속의 당신이 아닌, 당신이신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아멘
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파스카 주님의 구원 은총
-회개, 가난, 겸손-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들입니다. 어제는 우리 수도원의 고 정훈만 세례자 요한 수사의 7주년 기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배밭 노동중 불의의 사고로 44세로 선종한 수사입니다. 문보물 수사의 고마운 권유에 화답해 아침 배밭 선종터에서 간단히 기도를 바쳤습니다. 또 힘든 중에도 성가정을 이루어 사는 가족이 예뻐 사진도 찍어 드렸습니다. 이 두 경우 저에겐 생생한 회개의 표지, 구원의 표지가 됩니다.
어제는 제 수도사제로서의 삶에 대한 묵상중 새삼스런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분명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고 이런 회개와도 같은 깨달음을 통해 점차 가난하고 겸손한 내적 삶으로 변모될 때 바로 이것이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우리 나이로 41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사제 서품후 거의 매일 미사를 봉헌했고 강론을 썼습니다. 때로 강론이 잘 생각이 안나서 옛 강론을 사용할 까 하는 유혹에 옛 강론들을 들춰 봤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활용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도저히 에너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흡사 40대 강론들이 봄철 같다면, 50대 강론들은 여름철 같고, 60대 강론은 가을철 같고, 지금 70대에 들어선 강론은 겨울철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여 40-50대의 강론들은 에너지가 충만하기에 도저히 지금 기력으로는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런 내외적 변화와 더불어 총체적 가난 체험에 이어 겸손해지는 마음입니다. 사실 숱한 병고와 죽음을 통해 체험하는 가난한 인간 존재입니다. 참으로 예외 없이 가난한 존재, 연민의 대상인 인간입니다.
어제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산더미 같던 쓰레기들이 잘 정리, 정돈되어 있었고, 그 비밀을 알고 수도형제에게 찬탄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산더미 같은 쓰레기들을 말끔히 보기 좋게 분류하여 정리 정돈한 것을 보니 정말 ‘정리의 달인!’ ‘정리의 천재!’입니다. 디테일에 참 강합니다. 장상은 숲도 보고 나무들도 보고, 디텔일에 강해야 한다고 하지요. 작고 하찮아 보이는 가난한 작은 숨겨진 노동이 마치 숨겨진 보물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리 정돈에 남달리 희열과 재미, 행복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은사, 은총의 선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잘 들여다 보면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어제 저녁기도시 계속된 후렴,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라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바로 모두가 하느님 자비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구원이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새벽에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떠오른 파스카 주님의 은총이었고, 구원의 은총 제목에다 파스카 주님을 앞에 추가하여, ‘파스카 주님의 구원 은총-회개, 가난, 겸손-’으로 정했습니다. 참으로 파스카 은총의 십자가의 주님이 구원의 열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주제도 참 중요하고 우리 영성생활에 직결됩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과 재앙, 비극은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 자비의 은총의 빛만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무엇이 무지입니까? 바로 인간의 탐욕과 교만입니다. 아무리 공부많이 하고 학식 풍부해도 탐욕과 교만의 무지에 눈멀면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살 집 하나면 되는데 무지의 탐욕으로 다주택을 보유한 자들이 문제가 아닙니까?
오늘 복음 말씀 소주제는 ‘부자는 구원받기 어렵다’와 ‘추종과 보상’이고, 제1독서 에제키엘 서는 ‘티로 임금에게 내리는 심판’입니다. 복음은 탐욕의 무지를 제시하고, 제1독서는 교만의 무지를 제시합니다.
어제 부자 청년 일화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기준에 미달된 부자청년은 바로 탐욕에 소유되어 있었기 때문임을 봅니다. 부유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탐욕의 발동으로 탐욕에서 벗어나기가 거의 힘들다는 것입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정말 탐욕의 부富의 위험은 우리를 내적으로 부패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광신狂信도 약이 없지만 탐욕貪慾의 부富로 인한 내적 부패도 답이 없습니다. 인류역사를 봐도 외적의 침입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내부의 부패와 분열, 성적 타락으로 망한 나라들입니다. 이 또한 뿌리에는 무지가 또아리 틀고 있음을 봅니다. 하여 수도생활의 개혁은 늘 물질적 부유함에서 사막의 가난으로, 세속화에서 사막의 고독으로, 바로 철저한 회개의 삶을 통해 원천의 순수로 향했던 것입니다. 복음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거듭 반복하면서 부자의 탐욕이 구원의 결정적 걸림돌임을 천명하십니다. 말씀대로 라면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쉽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난해도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부자들에 대한 증오와 원망, 탐욕으로 찌들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라 하여 다 구원문 통과가 힘든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회개의 파스카 은총으로 소유물의 주인이 되어 자선과 선행의 나눔의 착한 부자로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쉽지 않습니다. 소유가, 자리가 의식을 결정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따라, 소유에 따라 돌변하고 변질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하느님 은총에 깨어 있는 자만이 소유로부터, 자리로부터 자유로운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은총에 의해 참으로 내적으로 가난해지고 겸손해 질 때 구원이니 그대로 파스카 신비 은총의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자는 구원 불가하다는 말씀에 놀란 제자들에게 주님의 다음 말씀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파스카 주님의 무상 은총으로 깨달아 회개하여 내적 가난과 겸손의 순수를 회복할 때 비로소 부자든, 빈자든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구원 은총이 무지에 대한 결정적 답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주님은 구원 은총에 버림으로 응답하여 당신을 추종한 이들에게 내세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마지막 말씀이 정신 번쩍 나게 합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 끝까지 방심해선 안된다는 경고입니다. 마지막 순간의 방심으로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 패가망신 무너져 내리는 경우도 주변에서 종종 보지 않습니까.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도처에 널린 악의 덫의 유혹들입니다. 제3차 대전은 나라 간 무기 대결이 아닌 코로나 19 팬데믹 감염병과 시작된 듯합니다. 전인류의 회개와 연대가 절실한 현실입니다. 노심초사 코로나 19와의 전쟁에 최선을 다하는 정은경 중앙방역대책 본부장의 호소가 참 간절했습니다.
"코로나19는 전파 속도가 워낙 빠르고 감염력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한 번 감염원에 노출되면 대규모의 환자가 발생하는 데다, n차 전파로 이어질 경우 마치 둑이 무너지듯 방역이나 의료 대응에 한계가 올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감염이 될 수 있다는 게 참 무서운 말인 것 같다.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염을 시킬 수 있고 (감염 사실을) 본인도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마스크 착용과 예방수칙을 지키는 것만이 최상의 예방법이라고 거듭 당부드린다.”
코로나19도 어찌 보면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교만으로 자초한 재앙처럼 생각됩니다. 오늘 제1독서 티로 임금은 그 좋은 지혜와 부에도 불구하고 무지의 교만으로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있다. 너는 신이 아닌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에 비긴다.”
마침내 그 좋고 많은 지혜와 재산에도 불구하고 무지의 교만으로 이방인들,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 비참한 죽음의 종말을 맞이한 티로 임금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무지의 탐욕과 교만에 답은 파스카 주님의 구원 은총뿐임을 깨닫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 끊임없는 회개와 가난과 겸손으로 살아갈 때 무지의 치유와 더불어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의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시어 회개와 가난, 겸손의 삶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2코린8,9). 아멘.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 하느님께서 부자를 구원하시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은 이런 불편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구원받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즉, 부자는 구원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부자도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쉰들러는 자신의 재산으로 1,100명의 유태인 포로들을 구출해 줍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아끼려 했던 차와 금 배치를 보며 그것까지 팔지 못한 것에 마음 아파합니다. 정말 사랑이 있다면 가진 것을 나누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쓸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부자로 남아있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남아있는 재산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돈이 많은 사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주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구원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성경에서의 부자는 소유한 돈의 액수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믿는 것이 많을수록 부자입니다. 저는 행려자들 무료급식소에서 행려자들 사이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이들이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문지를 하나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신문지를 많이 가진 사람에게서 하나를 훔쳐 갔을 때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들이 부자입니다.
이런 분들은 하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주님은 재산의 양을 줄여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재산이 그들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어 구원하십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에 ‘회심기’란 부분이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어먹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3년 전,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절의 경내지가 종단의 몇몇 사무승들의 농간에 의해 팔렸을 때, 나는 분한 생각 때문에 며칠 동안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전체 종단의 여론을 무시하고 몇몇이서 은밀히 강행한 처사며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눈앞에서 넘어져 갈 때,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도저가 산을 헐어 뭉갤 때, 정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웠다. 함께 살던 주지 스님도 다른 절을 맡아서 가고, 그 그늘에서 붙어살던 나는 그야말로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다른 도량으로 옮겨 차라리 눈으로 보지나 말자고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법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이 말이 떠오른 순간 가슴에 맺혔던 멍울이 삽시간에 술술 풀리었다.
그렇지!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거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인연 따라 있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거다. 언젠가 이 몸뚱이도 버리고 갈 것인데.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전까지의 관념이 아주 달라졌다. 내가 주지 노릇을 하지 않고 붙어살 바에야 어디로 옮겨 가나 마찬가지 아니냐. 중생들끼리 얽혀 사는 사바 세계라면 거기가 거기지. 그렇다면 내 마음 먹기 탓이다. 차라리 비리의 현장에서 나를 키우리라.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옛사람의 말도 있지 않더냐.
이때부터 팔려나간 땅에 대해서도 애착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본래 사찰 소유의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도들이 희사를 했거나 아니면 그때까지 주인이 없던 땅을 절에서 차지한 것일 게다. 그러다가 그 인연이 다해 내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경내지가 팔렸다고 해서 그 땅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니고 다만 소유주가 바뀔 뿐이다.
이날부터 마음이 평온해지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 그토록 시끄럽던 불도저며 바위를 뚫는 컴프레서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들렸다.”
이것이 부자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무엇이 있다고 부자가 아니고, 무엇이 없다고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내 것으로 생각하면 부자이고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가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자를 어떻게 구원해주실까요? 바로 당신이 ‘주(인)님이 되어주심으로써’입니다. 신문지 하나도 내 것이라고 믿으면 부자이고, 수억 원의 재산도 주님 것이라 믿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 모든 것의 주님임을 일깨워주심으로써 우리를 가난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가난한 자 되게 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주님께 많은 것을 드린다고 착각했을 때 주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내 것’이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말이 이해되었습니다. 종은 아무리 가져도 그 가진 것이 다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신 이는 그분의 종이기 때문에 일절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믿음을 주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가 받은 것 중 일부를 도로 봉헌함으로써 굳건해집니다. 내 소유가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는 방식이 새로운 계약을 위한 선악과인 ‘십일조’입니다.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방에 선풍기가 있습니다. 선풍기에는 전원, 시간, 속도, 회전의 기능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눌러야 하는 곳은 전원입니다. 회전을 먼저 눌러도, 속도를 먼저 눌러도, 시간을 먼저 눌러도 선풍기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기본으로 전원을 누른 다음에 다른 기능을 누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시동을 걸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다른 것들을 작동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급하거나, 서두르면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저도 성격이 급한 편이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설명서를 읽어보면 방법이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공인 인증서도 차분하게 과정을 밟으면 5분이면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 서두르다보면 10분이 걸려도 다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현명한 여인이 두레박에 나뭇잎을 넣었다고 합니다. 갈증에 지친 남자가 급하게 마시다 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것도 힘들지만, 코로나19로 경제적인 어려움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천문학적인 재정지원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는 대부분의 나라가 비슷합니다. 문득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돈의 중요성과 저축의 필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루가 15, 8-10)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은전 한 닢을 되찾은 양 한 마리처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다음은 적극적인 재테크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마태 25, 14-30)는 목표 수익률 100%의 공격적인 재테크입니다. 예화 속의 주인은 종에게 금융기관의 수익률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잘 키워야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잘 키워나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맹목적인 저축에 대한 경고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가 12, 16-21)는 돈 자체에 탐닉하는 수전노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곳간이 미어터지게 재물을 모아도 소용없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인의 목숨을 가져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나눔의 미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눔이 참 행복임을 가르치십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 19-31)는 나눔을 모르는 부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탐닉을 싫어하셨습니다. 부자를 미워하신 게 아니라 나눔을 모르는 부자를 책망하셨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된 것이 죄가 아니라 모은 돈을 나누지 않은 것이 죄가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던 자캐오(루가 19, 1-10)를 축복하셨습니다. 자캐오와 가정이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은 삶과 신앙이 하나였습니다. 밥을 푸기 전에 성호경을 먼저 그었습니다. 일이 생기면 먼저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불렀습니다. 손에는 늘 묵주가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함께 하였습니다. 기일이 되면 새벽미사에 모두 함께 갔습니다. 전날에는 가족들이 모여 연도를 바치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여행을 가면 가장 먼저 알아보는 것이 성당의 위치였습니다. 가족들의 이름도 세례명을 많이 부르셨습니다. 물론 신앙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은 부족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먼저 찾은 적이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양심을 속인적도 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이웃과 다투기도 했습니다. 성찰하고 뉘우치며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판공 때면 길게 줄을 서면서 성탄을 기다렸고, 부활을 기뻐하였습니다. 코로나19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신앙의 기본기를 다잡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꼭 필요하지 않았던 일에 너무나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음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고, 감사하고,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사람에게 하느님나라는 언제나 활짝 열려있습니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정녕 이 백성은 생각이 없고, 슬기가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5. [매일미사 묵상 결론 기도문]
2020년 8월 18일 화요일[(녹)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복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이 말이 떠오른 순간 가슴에 맺혔던 멍울이 삽시간에 술술 풀리었다.
그렇지!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거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인연 따라 있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거다. 언젠가 이 몸뚱이도 버리고 갈 것인데.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전까지의 관념이 아주 달라졌다.(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에 ‘회심기’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