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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0년 8월 20일 목요일[(백)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에게 나타난 성모 마리아 성화 및 해설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444번 나는 주를 의지하리라 영성체 성가  157번 예수 우리 맘에 오소서
예물준비 성가  215번 영원하신 성부 영성체 성가  500번 평화의 하느님
예물준비 성가  511번 미약하온 우리 제물 영성체 성가  174번 사랑의 신비
파견 성가  443번 자애로우신 주님

 

  베르나르도 성인은 1090년 프랑스 디종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시토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뒤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되었다.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몸소 모범을 보이며 수도자들을 덕행의 길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저서도 많이 남겼다. 1153년에 선종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1174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830년 비오 8세 교황은 성인을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입당송

주님은 복된 베르나르도를 지식의 영으로 가득 채우시어, 하느님 백성에게 풍성한 가르침을 전하게 하셨네.

본기도

하느님,
복된 베르나르도 아빠스가 하느님 집을 향한 열정으로 타올라
교회에 빛을 비추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도 불타는 열정으로 언제나 빛의 자녀답게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영을 넣어 주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6,23-2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3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곧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24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25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26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27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28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1(50),12-13.14-15.18-19(◎ 에제 36,25 참조)
◎ 정결한 물을 뿌려 모든 부정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
○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저는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시편 95(94),7.8
◎ 알렐루야.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알렐루야.

복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집회 15,1-6)와 복음(요한 17,20-26)을 봉독할 수 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말과 행동으로 교회의 화목을 위하여 헌신한
거룩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기념하며
주님께 일치와 평화의 예물을 드리오니
이 제사를 인자로이 받아들이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요한 15,9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복된 베르나르도를 기리며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이 성사의 힘으로 그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강생하신 말씀을 열렬히 사랑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혼인은 한 사람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일생 동안의 통과 의례 가운데 한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였습니다(요한 2,1-12 참조).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중요성도 두 번씩이나 언급하시는데,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확실한 계명(마태 5,31-32 참조)과 함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라는 선언을 통하여 강조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드실 때도 혼인은 좋은 예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 잔치의 비유’가 그렇고,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도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 잔치의 비유’를 묵상합니다. 임금이 혼인 잔치를 열고 종들을 보내어 초대받은 사람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참석을 거부하고 심지어 임금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분노한 임금은 군대를 보내 복수를 하고, 종들에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 잔치에 데려오게 합니다. 마침내 혼인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는 하인들에게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혼인 잔치는 가장 풍성한 잔치였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화려하게 치장을 하였고 손님들도 합당한 예복을 갖추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랑 신부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거리에서 불려 온 사람들은 종들을 무작정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초대받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의 입성을 혼인 잔치의 초대로 비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늘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믿음의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갖추어 입고 준비해야 할 우리의 예복을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알려 주십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피에트로 페루지노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에게 나타난 성모 마리아>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축제祝祭의 삶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救援의 자리다-

 

 

요즘 정주서원의 깊이에 대한 깨달음이 새롭습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들의 특징적이자 으뜸서원이 정주서원입니다.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가는 삶을 뜻합니다. 그러니 정주의 깊이는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외관상 자유롭지 못할 것 같아도 내적으로 이탈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하는 정주생활입니다.

 

늘 한 눈에 환히 보이는 바오로 수사님이 묻힌 곳이 정주서원의 깊이를 더합니다. 영원히 주님 안에, 수도원 안에 정주의 삶을 상징하는 수사님이 묻힌 자리입니다. 내가 영원히 정주할 곳은 여기라는 자각에 삶은 저절로 비워져 훨씬 단순해지고 홀가분해지는 느낌입니다. 요즘 산책시 자주 부르는 ‘금강에 살으리랐다’ 2절에 ‘금강’대신 ‘수도원’을 넣어 불러 보기도 합니다.

 

-“이 몸이 스러진 뒤에 혼魂이 정녕 있을진데

혼이 나마 길이길이 금강에 살으리랐다

생전生前에 더럽힌 마음 명경明鏡같이 하고져”-

 

현세는 물론 연옥 정화를 연상케 하는 깊은 내용입니다. 이미 정주의 삶을 통해 명경같이 깨끗이 정화되기 시작한 정주의 수도형제들임 깨닫습니다. 깨달아 알면 정주의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의 자리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노래한 ‘행복기도’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아주 예전 불렀던, 요즘도 산책시 자주 부르는 ‘일터로 가자’의 노래의 참 흥겨운 3절도 생각납니다.

 

-“낙원이 어데냐고 묻지 말게나

심으며 웃은 얼굴 어화 낙원이로구나

내가슴엔 비가 개어 하늘 푸르고

내가슴엔 언제나 봄바람 분다

어화 어화 어화디야 일터로 가자

이 나라의 주인이 너와 나로구나”-

 

어제는 마침 2년만에 고백성사차 들렸던 수녀님에게 청아淸雅한 음성의 동요 몇곡을 들은 후 감사의 메시지와 화답글입니다.

 

-“천상의 음성! 동요 감사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입니다!”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사진도 찍고 노래도 부른 날입니다. 큰 환대와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삶의 축제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살 줄 알면 삶은 축제가 되고 살 줄 모르면 삶은 고해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축제인생을 살라고 한 번뿐이 삶의 축제에 초대받은 인생들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축제의 자리이자 구원의 자리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어제에 이어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로 시작되는 혼인 잔치의 비유가 참 심오합니다. 그대로 축제인생에 초대된 우리 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은 고맙게도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시대, 광야여정중의 우리를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미사은총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날마다 축제인생을 살게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초대받은 사람들은 어리석었습니다. 무지에 눈멀었습니다. 일에 눈멀었고, 돈 벌기에 눈멀었고 폭력성에 눈멀었습니다. 예외없이 삶의 축제에 초대받은 사람들인데 참으로 많은 이들이 무지에 눈멀어 축제인생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축제인생 하늘 나라를 못살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초대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은 바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무지에 눈이 멀으니 삶의 우선 순위를 잊었습니다. 우선 주님의 천상 축제의 잔치에 참석함이 우선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초대에 응답했다 하여 저절로 구원이 아닙니다. 초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세례받았다 하여 구원이 아닙니다. 평생 항구하고 충실한 사랑 계명의 실천의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바로 복음에서 혼인 예복이 상징하는 바 이런 충실한 수행의 응답입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바로 천상의 미사잔치에 참여한 우리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과연 미사잔치에 합당한 마음의 예복을, 즉 믿음, 희망, 사랑이란 신망애信望愛의 예복禮服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진선미眞善美의 예복禮服을 입었는지 살펴 보게 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회개한 깨끗한 영혼들에겐 즉시 에제키엘 예언서의 축복이 실현됩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를 지키게 하겠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크고 귀한 은총의 선물은 없습니다. 주님의 초대에 회개로 응답한, 바로 이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에게 선사되는 놀라운 성령의 축복,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의 축복입니다.

 

오늘은 12세기 영성으로 전 유럽을 석권했던 마지막 교부라 칭하는 그 유명한 시토회의 창립자 클레르보 수도원의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입니다. 시토회,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이 최고로 존경하여 받드는 사부입니다. 참으로 다방면에 천재였던 불가사의의 인물입니다. 클뤼니 베네딕도회에서 시토회로 판도를 바꾼 성인입니다. 관상생활을 지향했지만 고행생활로 병약한 몸에도 2/3는 교회 문제의 해결사解決士로 유럽을 여행했습니다. 유럽 전체가 사목활동의 현장이었습니다.

 

교황은 물론 왕들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 바쁜 와중에도 그렇게 많은 주옥같은 설교와 주석 등 무수한 영성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정말 불가사의입니다. 연옥같은 세상에서 참 치열히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았던 대 영성 수도승이었습니다.

 

성인은 22살에 31명 친지들과 수도원에 들어갔고 얼마후 아빠스가 되었고 만63세 선종할 때까지 참 치열히 살았습니다. 성인이 선종할 당시 전 유럽에는 성인에게서 시작한 500여개의 수도원이 번창하고 있었다 합니다. 12세기 당대는 물론 오늘날도 수도승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대 영성가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입니다. 혹자는 20세기 토마스 머튼을 성 베르나르드 이후 최고의 수도영성대가로 꼽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지상에서 천국을 살라고 하느님께서 교회의 주신 참 좋은 선물,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된 성인입니다.

 

오늘 입당송 “주님은 복된 베르나르도를 지식의 영으로 가득 채우시어, 하느님 백성에게 풍성한 가르침을 전하게 하셨네” 란 말마디와 기도문중, “하느님의 집을 향한 열정으로 타올라, 교회에 빛을 비추게 하셨으니”, “말과 행동으로 교회의 화목을 위하여 헌신한” 이란 말마디들이 성인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가 아닌 축제의 구원을,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2.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강론]

 

8.20.“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

 

오늘 <복음>은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잔치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는 구원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상하게도 이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고도 응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심부름꾼들마저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과 응답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응답하지 않은 이들에는 또 다시 두부류가 있으니, 자신들의 생업을 핑계 삼아 응답하지 않은 이들과 심부름꾼들을 붙잡아 때리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박해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먼저 하느님께 초대를 초대받았으나 응답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선택받았으나, 세속적인 탐욕과 진리에 대한 곡해로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임금은 말합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이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마태 22,8-9)

 

이는 하느님의 초대에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의 초대는 인간적인 기준으로서의 선악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자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설령 초대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잔치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 때 대문에다 예복을 미리 준비해두었고, 손님들이 예복을 입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을 모독하는 태도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응답한 이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곧 예복을 입은 이와 입지 않은 이입니다.

그렇다면, 초대받은 자가 입고 들어가야 하는 예복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렇습니다. 아버지 뜻의 실천이 곧 예복입니다.

 그러니, ‘오늘 당장’ 우리는 아버지의 뜻의 실행이라는 예복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초대는 먼 훗날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벌어지는 초대인 까닭입니다.

 하늘나라의 잔치 역시 먼 훗날의 벌어지는 잔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잔치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의 예복을 갈아입고 이 은혜로운 잔치에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어서 혼인잔치에 오시오.”(마태 22,4)

 

주님!

당신의 초대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양팔 벌려 보듬게 하소서!

시대의 질곡과 고통을 기꺼이 온 몸에 걸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는 빛나는 예복을 차려 입게 하소서!

먼 훗날이 아니라바로 오늘 지금 당장 예복을 차려 입게 하소서아멘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오래 가려거든 조연상을 노려라!

 

오늘 복음 말씀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혼인 잔치는 행복한 하늘 나라 잔치입니다. 어떻게 행복한 나라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선은 그 잔치 초대에 응해야 하고, 그다음은 잔치 손님으로 쫓겨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배우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분이 ‘안성기’씨를 꼽을 것입니다. 안성기씨는 영화가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스캔들 없이 꾸준한 연기 생활을 60년 이상 이어왔습니다. 2017년 데뷔 60주년 간담회 때, 배우로서의 꿈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래 가는 거죠.”

 

60년을 이어와도 꿈이 ‘오래 가는 것’이라는 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영화가 행복이기에 그 행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 한국 국민 배우로서의 길을 꾸준히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그는 그 이유를 ‘욕심’에서 찾았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배우로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연기 외에 욕심이 없어야 마음 편히 연기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동반자이자 큰 행복’인 만큼 그것에만 집중하기 위해 욕심을 버리는 작업을 반복해왔습니다.

 

“이것 자체가 큰 욕심일지는 모르겠지만 배우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고 봐요. 일 자체에 대한 욕심은 많아야겠지만 일 외적으로 욕심이 많으면 안 되죠. 그럼 내가 편할 수가 없어요. (대인관계, 인기, 명예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의 폭을) 넓혀 놓으면 연기할 때 집중이 안 돼요. 그러니 배우에게 좋은 일이 아니죠.”

[출처: ‘58년 연기 비결? 욕심 없어야 한다’, 김미리 기자, 마이 데일리, 15-03-25]

 

 

오늘 복음에 따르면 혼인 잔치에 초대받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은 ‘욕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이들은 혼인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은 세상 행복에 대한 욕심을 어느 정도는 끊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에 참석했어도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혼인 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았어도 끝까지 가지 못하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을까요? 주연에 대한 욕심입니다. 연기자로 따지자면 끝까지 주연만 하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안성기씨가 오랜 주연을 해오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조연을 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지만 그는 ‘아, 이것이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다!’라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유재석씨가 오래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인공이 아니라 항상 어느 자리에서나 조연을 선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을 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튀어나온 못은 망치를 맞게 되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주인공이 되려는 것도 욕심입니다.

 

할리우드 연기자들이 가장 피하는 배역은 ‘예수’입니다. 예수 역할을 하면 그 이미지가 너무 강해 더는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 가려면 영광을 받는 역할을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요즘 코로나가 다시 극성입니다. 그리고 주범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전광훈 목사’입니다. 그는 2018년 교계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에 당선됐습니다. 올해 1월 회장 연임에 성공했으나 직무가 정지된 상태라고 합니다. 누가 봐도 그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주연’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한 말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냐. 전광훈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 기분 나빠도 할 수 없다.”

“앞으로 점점 더합니다. 앞으로 10년 동안의 대한민국은 전광훈, 대한민국은 전광훈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다니까요.”

작년엔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 보좌(寶座)를 딱 잡고 살아.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내가 이렇게 하나님하고 친하단 말이야. 친해.”

 

 

혼인 잔치에 참석하려면 세상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과 재물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정도도 희생할 수 없다면 교회에 머물 수 없습니다. 교회에 머무는 것은 마치 혼인 잔치에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 손님이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혼인 잔치 손님은 자신을 초대한 이와 신랑 신부가 영광을 받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행동하면 그곳에서 쫓겨난 수밖에 없습니다.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오직 하느님과 이웃들이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조연을 맡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오래 행복하고 싶은 곳에서 원하는 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연상이 아닌 항상 조연상을 노리십시오.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터키의 이스탐불에는 아름답지만 슬픈 역사를 간직한 세계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소피아 성당입니다. 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지금의 이스탐불을 콘스탄티노플로 정하였고, 로마의 새로운 수도로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 교회를 지어서 봉헌하였는데 그 이름이 소피아 성당입니다. 아름다운 성당은 이슬람이 그 지역을 지배하면서 이슬람의 사원인 모스크로 사용되었습니다. 1934년 터키의 대통령은 소피아 성당을 박물관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교회와 모스크로 사용되었지만 상대방의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서로의 역사를 존중하는 의미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유네스코는 예술적인 의미의 가치와 상대방의 종교를 포용하는 의미에서의 가치를 존중하였고,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저도 성지순례를 갔을 때,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소피아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터키 정부는 박물관인 소피아 성당을 다시금 이슬람의 사원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터키 정부의 결정을 막을 수는 없지만 안타까운 일이라고 유감을 표명하였습니다.

 

한국은 새롭게 성전을 신축하는 곳이 많습니다. 사제성소도 많고, 세례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창 신부님들도 대부분 교우들과 함께 새 성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상가 건물에서 지내면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고, 주택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본당으로 모금을 가기도 했고, 물건을 팔기도 했습니다. 눈물과 땀이 모여 새로운 성전을 신축하고 축성할 때는 모두가 기뻐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수고와 땀을 모두 잊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교우들에게 눈에 보이는 성전을 신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을 신축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살아있다면, 말씀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면, 말씀이 내 삶의 중심이 된다면 눈에 보이는 성전이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종교에 의해서 성당을 빼앗기지도 않지만 유럽과 미국의 많은 교구는 성당을 축소하거나, 매각하기도 합니다. 사제의 수가 부족하고,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는 교구도 240개의 본당을 120개로 줄였고, 앞으로는 80개로 줄인다고 합니다. 안타깝지만 현실입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비록 지금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유배를 와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22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유배지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새로운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며 낯선 땅에서도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소피아 성당이 이슬람의 사원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당의 숫자가 줄어들고, 매각하는 것도 받아들여야하는 현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간다는 것은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기쁨, 자유를 얻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이미 천상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들 역시 영원한 삶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함께 기도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좋은 선택을 하였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잔치에 초대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봉사가 주님의 잔치에 함께 할 수 있는 예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5. [매일미사 묵상 결론 기도문]

 

2020년 8월 20일 목요일[(백)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복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우리는  아버지의 뜻의 실행이라는 예복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