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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0년 8월 19일 수요일[(녹) 연중 제20주간 수요일]/렘브란트 <포도밭 일꾼들의 비유> 성화 및 해설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51번 주 나의 목자되시니 영성체 성가  156번 한 말씀만 하소서
예물준비 성가  212번 너그러이 받으소서 영성체 성가  499번 만찬의 신비
예물준비 성가  510번 주님께 올리는 기도 영성체 성가  172번 그리스도의 영혼
파견 성가  17번 정의의 하느님

입당송

시편 84(83),10-11 참조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4,1-11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8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9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10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3(22),1-3ㄱ.3ㄴㄷ-4.5.6(◎ 1)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복음 환호송

히브 4,12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 알렐루야.

복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30(129),7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에만 실려 있습니다. 이 비유의 첫째 부분은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의 고용과 이에 해당하는 품삯에 대한 주인의 지시가, 둘째 부분은 온종일 일한 일꾼들의 품삯의 지급에 대한 불평 그리고 이에 대한 주인의 응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평의 주된 이유는 주인이 일이 끝날 무렵에 온 일꾼들과 온종일 일한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에서, 특히 오늘날과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주인의 행동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일꾼이 자신의 품삯을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고, 일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의 체제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고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게다가 권력과 부는 소수의 지배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차지였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포도밭 주인의 처사에 대하여 그 누구도 뭐라 할 상황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비유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 정의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정의를 담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자면 비유 속 주인은 원래의 계약대로 품삯을 계산하였기에 결코 불의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오히려 이 정의를 깨뜨린 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일어난 먼저 온 일꾼의 질투입니다. 주인의 정의, 곧 하늘 나라의 정의에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자비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노동의 대가만이 아니라 구직을 걱정하며 장터에서 온종일 서 있던 이들의 정신적 고통의 대가도 고려하시는 자비입니다. 마지막 사람에게도 고용의 기회를 주어 생계를 보장하여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구원받은 첫째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꼴찌가 되어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돌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렘브란트 <포도밭 일꾼들의 비유>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감사는 태도다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기보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우리를 가난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종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종이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에 종은 아무리 가져도 부자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종임을 고백하는 방법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중에서도 나중에 첫째와 꼴찌가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어떻게 첫째와 꼴찌가 나누어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습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아침에 만난 이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쯤에도 나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시부터 온 이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주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은 조금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해 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이들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지 못하고 적게 받고 있다고 불평한다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더라도 꼴찌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려 한다면 어차피 갈 것, 꼴찌보다는 첫째가 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에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늦게 와서 가장 먼저 돈을 받고 간 이들이 가장 감사할 줄 알았기에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이라면 어떻게 감사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일한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말고 자신이 약속하여 받은 ‘한 데나리온’만 바라봐야 합니다.

 

저는 아침마다 제 방에서 운동합니다. 절 운동과 팔벌려뛰기를 합니다. 처음 팔벌려뛰기를 할 때는 50번 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0번씩 2세트를 합니다. 그래도 별로 힘들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근육이 조금 붙어서 나아진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운동하는 방향을 조금 틀었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엔 벽을 보면서 했다면 지금은 ‘십자가’를 보면서 뜁니다. 100번쯤 뛰면 힘이 듭니다. 그러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보면 ‘이것 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예수님은 날 위해 십자가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 더 뛰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감사의 힘일 것입니다. 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나를 똑같이 대우하는데, 왜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한 일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비교하면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데나리온’을 바라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데나리온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성체, 성혈’입니다.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이 주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주인은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사 때,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라고 사제가 말할 때, 그때만 보지 말고 우리 삶에서 그분을 끊임없이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솟아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갑자기 불림을 받아 하루 일했는데 10조 원을 받았다면 누가 1시간 일하고 10조 원을 받건, 2시간 일하고 10조 원을 받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성체의 가치를 모르니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체가 없으면 지옥행이어야 함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태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나는 ‘고맙습니다. 나는 진실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지나간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하면 그냥 시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고정하면 됩니다. 내가 그분께 해 드리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순간마다 십자가만 바라보고 그 사랑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합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호수에서 오리 가족을 보는 것이 작은 즐거움입니다. 2달 전에 16마리의 새끼들과 오리가 호수로 왔습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어미 오리가 앞에 있었습니다. 새끼들은 어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잠시 멀어졌다 싶으면 쏜살같이 어미 곁으로 달려왔습니다. 2달이 지난 지금 새끼들은 제법 컸습니다. 이제는 새끼들이 앞에 있고, 어미는 뒤에서 새끼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끼들을 믿고, 새끼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표징을 보여주셨고,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새끼오리들처럼 예수님의 곁에서 보고, 듣고, 따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둘씩 짝을 지워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병자를 고쳐주고,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고 돌아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강물은 흐르기 마련입니다. 뒤에 오는 강물에 자리를 내주고 더 깊은 바다로 가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오리만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강물보다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실수를 탓하기보다는 다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것도 큰 지혜입니다.

 

코로나19로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습니다. 처음 받은 것은 전 국민에게 주는 지원금이었습니다. 은행계좌로 1,200불이 왔습니다. 잘사는 사람도, 보통인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공평하게 받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재난지원금이 있었습니다. 은행계좌로 3,000불이 왔습니다. 직원 일인당 1,000불씩 주어졌습니다. 사장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세금을 내는 직원이 3명이라서 3,000불이 나왔습니다. 직원급여 지원금도 나왔습니다. 2달 동안 직원을 해고하지 않는 조건으로 나왔습니다. 25,500불이 은행계좌로 왔습니다. 코로나19로 홍보할 기회가 없었는데 정부의 재정지원 정책은 제가 일하는 신문사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도 정부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미국처럼은 아니지만 전 국민에게 일정액수의 지원금이 주어졌습니다. 저는 외국에 있기도 하고, 미국에서 이미 받았기 때문에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화살에 맞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화살의 종류가 아닙니다. 화살을 쏜 사람이 아닙니다. 화살에 맞은 이유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나중에 해결해도 되는 문제입니다. 코로나19는 세계 경제에 엄청나게 큰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정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도 미국과 비슷하게 재정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재정지원을 하였고, 앞으로도 해야 할 것입니다. 생산, 공급, 소비는 경제의 3가지 축입니다. 소비가 위축되는 시기에는 과감한 지원정책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정책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실행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의 일당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하루 생활에 필요한 금액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만큼은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 낮부터 일한 사람은 오후에 와서 일한 사람이 같은 일당을 받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일한 시간을 기준으로 일당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기준으로 일당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능력, 재능, 외모와 상관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찍찍이(velcro)' 같은 것이어서 우리 신경계통에 즉각적으로 단단히 둘러붙는 반면에,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선하게 보는 것 등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테플론‘ 같은 것이어서 신경계에 잘 붙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묘한 것은 우리가 이 긍정적인 감정들을 적어도 15초 이상 우리 생각 속에 붙들어 둘 때는 이 감정들이 신경계통에 더욱 단단하게 둘러붙는다고 합니다. 관상은 삶의 긍정적인 모습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착한 목자 영성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어제는 제 사랑하는 도반, 요셉 수도원의 착한 목자 원장 수사가 육체노동을 하고 있어 그 장면을 사진에 담아 격려 멧시지를 보냈습니다.

 

“요셉 수도원 주보 성인 노동자 성 요셉의 후예! 화이팅!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사진 인물, 자연 배경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시간되면 일 끝나고 갈 때, 두유 한잔+비타민1, 잡숫고 가세요!”

 

아마 150편의 주옥같은 시편중 가장 사랑받는 시편은 오늘 미사중 화답송 시편 23장일 것입니다. 화답송 후렴 시편 23장 1절은 언제 들어도 감미롭고 영혼에 깊은 위로를 줍니다. 아주 오래 전 묘비명을 청하는 이에게 지체없이 추천한 성구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저는 말을 바꿔, ‘주님은 나의 목자 부러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되뇌어 보기도 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있는 착한 목자 예수님 말씀입니다.

 

아주 예전 아빠스님 충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장상으로 생각지 말고 목자처럼 생각하라.’는 공동체 형제들을 ‘섬기고serve’ ‘보살피고care’ ‘떠받쳐주는support’ 일에 충실하라는 충고였습니다. 예전 교수 신부님의 ‘사제’나 ‘신부’ 명칭 보다는 개신교의 ‘목사’라는 명칭이 복음적이라는 언급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부단히 배워 닮아야 할 착한 목자 영성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통상 임금을 백성의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는 임금만이 아니라 다른 수장까지 포함됩니다. 오늘날로 하면 사회든 교회든 공동체의 크고 작은 모든 책임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착한 목자 영성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피를 토하는 듯한 말씀은 그대로 착한 목자 하느님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떼를 돌보지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물론 각계 각층 모든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 목자의 진위를 가려내는 거울같은 말씀입니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떼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겠다. 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계속 반복되는 ‘내 양떼’라는 말마디입니다. 바로 착한 목자 주님의 양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목자들은 주님의 양떼를 잠정적으로 위임맡은 이들이고 원래의 소유주는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목자들이 평생 배워 닮아 가야할 착한 목자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제가 요즈음 동요 부르는 행복에 살고 있습니다. 동요에 보면 유독 엄마라는 말마디가 많이 나옵니다. 착한 목자 주님의 마음에 가장 근접한 분이 엄마일 것입니다. 바로 ‘섬집아기’ 2절의 엄마의 마음은 그대로 착한 목자 주님의 마음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못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옵니다.”

 

동심으로 돌아가 착한 목자같은 엄마를 그리워 눈물짓게 하게 하는 동요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은 그대로 복음의 착한 목자 예수님을 통해, 또 곳곳에서 사목하는 착한 목자 주님의 종들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착한 목자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임자와 같다.”

 

이런 착한 목자 주님의 영성을 사는 목자를 지닌 공동체가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짧은 말마디에 착한 목자 주님을 그대로 닮은 포도밭 주인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기본 소득제’의 원조가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기본소득제는 재산이나 소득의 유무,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 등과 관계없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소생활비를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인권을 부여 받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자유롭게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와 존엄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권리입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의 정의요 자비입니다. 그대로 자녀들에 대한 자비롭고 착한 어머니의 마음도 이러할 것입니다.

 

이런 착한 목자 주님이기에 일한 시간과 양과는 무관하게 맨처음부터 있었던 자들은 물론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다섯시 모든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제공합니다. 모두에게 최저 하루 생계비 임금을 똑같이 제공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착한 목자 주님의 정의요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았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중국 백장선사의 가르침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도 나옵니다. 일하고 싶어도 다양한 사유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일에 관계없이 이유불문하고 이들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착한 목자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무위도식無爲徒食, 아무 하는 일 없이 놀고 먹기만 함에 빗댄 좀 모욕적인 말마디인데 착한 목자 예수님에겐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죄스러운 말마디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포도원 주인의 품삯을 제공하는 순서도 맨 끝에 온자로부터 시작하여 품삯도 똑같습니다. 맨먼저 온 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합니다. 인간의 상식적 분배정의의 측면에서 볼 때 너무 불평등하고 불합리합니다. 투덜대는 모습이 흡사 루가복음 15장 돌아 온 탕자 작은 아우를 우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불평하는 큰 아들을 닮았습니다.

 

“맨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참으로 편협한 시야요 옹졸한 마음은 그대로 우리의 마음일 수 있습니다. 분명 외관상 충실한 당대의 기득권층들을 대변한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회개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인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일화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친구여,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참 멋지고 매력적인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주제넘게 편협하고 옹졸한 세상 정의의 잣대로 주님의 자비를 재단하는 어리석은 일꾼입니다. 예수님의 ‘니가 뭔데, 니나 잘해’라는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얼마나 섬세하고 자상한 착한 목자 예수님의 마음인지요.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모습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기에 착한 목자 주님을 롤모델로 삼는 이들은 참으로 디테일에 강해야 할 것입니다. 비결은 단하나 형제자매들에 대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입니다.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입니다. 정말 가난한 이웃의 처지를 헤아렸다면 주님의 처사에 기뻐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장의 일한 시간이나 양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총체적 딱한 내적 현실을 통찰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많은 식솔의 부양을 책임진 가장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착한 목자 영성을 지닌 이들이라면 모든 공동체 성원을 참으로 아끼고 돌볼 것이며 해고에도 신중에 신중을 다할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각계 각층 다양한 지도자들이 필히 배우고 실천해야 할 착한 목자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하나하나 모두가 존중받고 배려받고 사랑받아야 할,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소위 갑질이나 혐오와 차별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착한 목자 영성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착한 목자 당신을 닮아 자비롭고 너그러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하느님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아멘. 

 

4.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강론]

 

8.19.- “더 큰 사랑을 위하여” -

 

요한 15, 9-17(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창설자 르나르도 똘로메이 대축일)

- “더 큰 사랑을 위하여”(Maiorem caritatem) -

 

오늘은 저희 올리베따노 연합회의 창설자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대축일입니다.

더 큰 사랑을 위하여”, 이는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시성 교황교서[사도좌 편지]의 제목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오늘 <복음> 중에 나오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씀입니다.

 

“더 큰 사랑”이란, 진정 어떤 사랑인지, 성인의 삶이 어때했는지를 교종 베네딕도 16세께서 성인의 시성식 때 하신 <강론>에서 잘 말해줍니다.

다음은 시성식 때 하신 교종의 강론 말씀 중의 일부입니다.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안에서, 기도와 노동을 통하여 사랑의 열매가 열렸습니다.

그의 존재는 성찬례와 같았고, 그의 삶은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로 이끄신 하느님 관상에 완전히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그는 1348년 큰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수도승임에도 불구하고, 병에 전념된 그의 수도승들을 돌보기 위해(시에나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머물기 위해) 몬떼 올리베또의 고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전염병의 희생물이 되어, 사랑의 확실한 순교자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인의 이 모범으로부터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으로,

최고의 희생으로 준비된 사랑으로,

그리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삶으로, 우리의 신앙이 인도되도록 우리에게 초대장이 도착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표현이 있습니다.

곧 기도와 노동,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 하느님 관상에 바쳐진 삶, 사랑의 순교자,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 희생으로 준비된 사랑,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음을 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조화는 결코 이론적인 숙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애덕적인 삶의 실존적인 실행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봅니다.

또한 이러한 애덕의 삶은 무엇보다도 기도와 더불어 실현된 삶임을 봅니다.

성인께서는 <편지 1>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덕들의 어머니는 애덕(사랑)이며,

동시에 이 애덕(사랑)을 발견하고 지키는 것은 기도입니다.”

 

성인께서는 모든 덕들이 사랑에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모든 덕들이 사랑에서 태어나며, 그 사랑을 발견하고 지키는 것이 바로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기도하셨으며, 당신에게 있어서 기도와 삶은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차고 넘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는 <편지 39>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애덕(사랑)은 늘 봉사에 봉사를 더하는 모습으로 자기를 들어냅니다.”

 

이는 사랑은 결국 형제들에 대한 ‘봉사’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곧 형제에 대한 봉사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죽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지금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성인께서는 실재로 페스트로 죽어가는 형제들에게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의 봉사였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순교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더 큰 사랑”을 실행했습니다. 진정 그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말씀을 온 몸으로 사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참으로 애덕의 부추김으로 고무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편지 8>에서 이렇게 말한다.

“애덕의 부추김으로 고무된 사람은, (곧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성경>의 증언을 따르는 사람은)

 ‘소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 천상공동체의 지극히 거룩한 사랑을 통해서 모든 선한 것들을 얻습니다.

이 사랑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만들어졌고, 이 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아름다운 방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만일 당신이 땅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땅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늘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이 아름다운 방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사랑으로만이 우리는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오로지 사랑으로만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되고,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이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그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1)

 

주님!

당신은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꼴찌들부터 품삯을 주십니다.

애시 당초 일을 부리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주님부르심은 이미 은총입니다.

은총은 계산이 아니라 자비인 까닭입니다아멘 

 

5. [매일미사 묵상 결론 기도문]

 

2020년 8월 19일 수요일[(녹)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복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하느님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지족하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