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64번 | 이스라엘 들으라 | 영성체 성가 154번 | 주여 어서 오소서 |
예물준비 성가 210번 | 나의 생명 드리니 | 영성체 성가 497번 | 우리를 위하여 |
예물준비 성가 340번 | 봉헌 | 영성체 성가 170번 | 자애로운 예수 |
파견 성가 478번 | 주님께 영광을 드리자 |
입당송
시편 84(83),10-11 참조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에제키엘이 너희에게 예표가 되고, 그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게 될 것이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4,15-24
15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16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17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를 두고 곡을 하지 마라.
머리에 쓰개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콧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도 먹지 마라.”
18 이튿날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그다음 날 아침에 나는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
19 그러자 백성이 나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일러 주지 않겠습니까?”
20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나에게 내리셨습니다.
21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떠나온 너희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22 ─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한 것처럼 하게 될 것이다. ─
콧수염을 가리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을 먹지도 못할 것이다.
23 머리에는 쓰개를 그대로 쓰고 발에는 신을 그대로 신은 채,
슬퍼하지도 울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죄 때문에 스러져 가면서 서로 바라보며 한탄할 것이다.
24 에제키엘이 이렇게 너희에게 예표가 되고,
그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신명 32,18-19.20.21(◎ 18ㄱ 참조)
◎ 너희는 너희를 낳으신 하느님을 저버렸다.
○ 너희는 너희를 낳으신 바위를 저버리고, 너희를 세상에 내신 하느님을 잊어버렸다. 주님은 보시고 분노하시어, 당신 아들딸들을 물리치셨다. ◎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감추고, 그들 끝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리라. 그들은 타락한 세대, 불충한 자식들이다.” ◎
○ 신도 아닌 것들로 나를 질투하게 하고, 헛것들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다. 나도 내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질투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을 분노하게 하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5,3
◎ 알렐루야.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6-22
그때에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30(129),7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재산이 넉넉하고 지위가 높음을 ‘부귀’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부귀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만, 부귀는 칼날이나 창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방종하게 굴면 사람의 뼈와 살을 베고 찌릅니다. 그런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책 『설원』에는 부귀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부’는 만족할 줄 아는 데 있고 ‘귀’는 물러남을 구하는 데 있다.” 만족하고 물러날 줄 아는 지혜만 있다면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예수님께 질문을 드린 한 젊은이가 모든 계명을 잘 지켰음에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주님 말씀에 슬퍼하며 떠납니다. 사실 젊은이의 질문은 두 가지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가?’였고, 둘째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 두 번째 질문을 스스로 되묻고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내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것이 무엇일까?’로 말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많은 무엇이 우리를 차지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한계를 깨닫고, 우리의 욕망이 무엇인지 올바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사랑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말을 인용하시면서 ‘친절한 사랑은 오로지 내어 주고 섬기는 데서 오는 기쁨을 체험하게 한다.’(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94항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도 이 ‘부’와 ‘귀’를 노래합니다.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하지 마라. 죽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은,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시편 49[48],17-18.21).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강론]
8.17.“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 -
유대인들은 부와 재산은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부와 재산을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처럼,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마태 19,17)
이는 생명을 얻는 데는 선한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율법을 지키는 것이 생명으로 가는 길의 시작은 되지만, 완성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곧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더 나아가 행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질병이 없고 건강한 사람, 실수하지 않고 죄짓지 않는 사람, 악습이 없고 상처주지 않는 사람, 상처가 없고 성숙하고 교양 있는 사람, 능력 있고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완전무결한 사람,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일까?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당신께로 와서 따르라고 하십니다. 곧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고, 받은 복을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복을 받은 이는 복을 주는 이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팔라”, “주라”, “오라”, “따르라”는 네 가지를 실행하라 하십니다. 이는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십계명을 넘어, 이웃사랑을 넘어, 원수사랑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것까지 따르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기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사실, 부자는 자신의 영생을 위해 죄짓지 않고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율법을 지켰다 하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비우라고 하십니다. 나아가서 자신을 비우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나누고 선을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곧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 19,21-22)
우리도 오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따라 나서는지, 아니면 머뭇거리고 주저하거나 슬퍼하고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들려주신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말씀을 따름으로써,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가리고 있는 겹겹의 옷을 벗기시고, 벌거숭이로 만드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제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
구원의 여정
-회개, 만남, 버림, 따름-
요즘 저에겐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침 식사후, 점심 식사후 산책때 잠시 시냇가를 걷는 것입니다. ‘시냇물’ 동요를 부르며 시냇가를 걷다보면 늘 거기 그 자리에 물오리들을 보게 되고 사진도 찍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물오리가 아니라 오랜만에 맑게 흐르는 시냇물을 보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시냇물이 마르고 물오리가 사라지면 그때는 시냇가의 산책도 끝날 것입니다.
흘러야 삽니다. 맑게 흐르는 시냇물은 그대로 구원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해 흐르는 구원의 여정입니다. 이런 주님의 방향을 잊고 정체되어 웅덩이에 고인 물이 될 때 썩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분도 수도자의 삶은 밖으로는 정주의 산같은,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같은 내적여정의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 우리는 밖으로는 정주의 산처럼 그 자리에 머무르지만 내적으로는 구체적 일과표라는 회개의 시스템에 따라 계속 맑게 흐르는 강처럼 삽니다. 바로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셋째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대로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한 구원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떤 부자는 이점에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 부자는 참 좋은 사람이요 좋은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인간의 본능적 영적 갈망을 대변하는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사막 수도자들은 물론 우리의 궁극적 물음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접근법이 지혜롭습니다. 저는 여기서 웃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실현이자 하늘 나라의 구원이신 주님을 앞에 두고 이런 질문을 한 젊은이 때문입니다. ‘나무들’이란 구체적 수행들만 봤지 ‘숲의 주님’을 보지 못한 부자입니다. 수행엔 충실했는데 삶의 방향이자 삶의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까맣게 잊은 어떤 젊은 부자입니다.
무엇을 해야 구원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 구원인데 주님을 만나지 못한 수행이니 영원히 목마를 수 뿐이 없습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 하는데 계속 손가락의 수행에만 몰두하는 참 좁은 시야의 젊은 부자입니다. 이웃관계의 금령의 계명도 다 지켰고 부모 공경과 이웃사랑도 다 했는데 영적 갈증과 삶의 허기는 여전합니다. 이에 비하면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 모심으로 영적 갈증과 허기를 해결하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요.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구원의 여정에 빛나는 이정표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매일 미사입니다.
무엇을 행하여 구원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따라야 구원입니다. 말그대로 주님과 만남의 은총의 선물이 구원입니다. 아무리 수행에 충실해도 삶의 방향, 삶의 목적,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적 갈증과 허기의 해결은 요원합니다. 젊은 부자의 말이 내면의 답답함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삶은 구원의 여정이자 주님과 만남의 여정임을 까맣게 몰랐던 부자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감으로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의 여정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젊은 부자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궁극의 처방을 제시합니다. 바로 다음 복음 말씀은 사막 은수자의 아버지 안토니오를 회심시킨 말씀이기도 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소유의 삶에서 존재로의 삶의 전환을, 바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고 “나를 따라라” 말씀대로 당신을 따라, 맑게 흐르는 강으로 살라는 구원에의 초대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여정은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맑게 흐르는 구원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의 관계만이 근원적 영적 갈증과 허기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바로 참행복의 완전한 삶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있음의 표지가 주님을 따르는 일이요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우정의 관계입니다. 젊은 부자의 반응은 바로 탐욕에 소유된 인간의 보편적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젊은이의 삶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복음 사가입니다. 아마 젊은이에 대한 주님의 정확한 진단은 이 부자에게 평생 화두가 됐을 것이며 혹시 주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어도 그의 삶에는 결정적 전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참 많이 사용하는 말마디가 삶의 '여정'입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여정입니다. 그냥 막연한 되는 대로의 여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와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버림과 추종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는 에제키엘 아내의 죽음을 상징으로 삼아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너희는 너희를 낳으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너희를 세상에 내신 하느님을 잊어버렸다.”
주님을 잊을 때 '무지의 늪'에서 표류하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기억해야할 주님이시며 날로 깊어져야 할 주님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물론 모든 성인들과 신심깊은 형제들 모두가 우리에겐 회개의 생생한 표징이자 상징이 됩니다. 다시 주님께 돌아와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새롭게 구원의 여정에 오르라는 회개에의 초대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어제 받은 도반 사제의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수도원 주유소에 기름을 넣으려 가려고 합니다. 내일 고해성사를 주실 수 있으신가요?”
주님과 구원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는 평생 성사가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요 주기적으로 바치는 고백성사입니다. 아멘.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댐’이 되기보다 ‘폭포’가 되리라!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선한 일일까요? 이것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자신이 선하다고 정한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선한 일이라고 여기고 하지만 사실 악한 일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만약 자기 생각으로 선한 일이라고 여기는 일들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선한 일을 말하고, 공자 맹자도 선한 일을 말합니다. 선한 일로만 구원에 이른다면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어떠한 일을 할 때, 그것이 선해지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어야 합니다. 개가 죽어가는 주인을 구했다면 이것은 사람 쪽에서 보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개는 그것이 선한 일인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주인에게 잘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으로서 아무리 선해지려고 노력해봐야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라고 하십니다. 계명은 선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을 하되,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만 하는 선행은 선행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셔야 합니다. 주님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냥 선한 일을 하는 사람과 계명에 있기에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젊은 사람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 때문에 선한 일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구원에 길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단계 더 높은 선함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자기 능력이나 재산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 선함 자체이신 분의 통로가 되라는 뜻입니다.
세계 1위 부자 ‘빌 게이츠’는 어머니의 권유로 2위 부자 ‘워런 버핏’을 처음 만납니다. 처음에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별로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단 만나고 보니 말이 잘 통했습니다. ‘어떻게 더 많은 돈을 벌 것인가?’만을 생각해오던 빌 게이츠에게 워런 버핏은 ‘어떻게 잘 쓸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선재단을 설립하면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2010년 설립된 빌 게이츠 재단의 자선단체가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입니다. 빌 게이츠는 자기 재산의 95%를 기부하기로 합니다. 워런 버핏도 재산의 99%를 기부하기로 하고 게이츠 재단에는 83%를 내놓기로 합니다. 이후 수많은 재벌의 기부 릴레이가 이어졌습니다.
빌 게이츠는 오늘 예수님을 만난 젊은 부자 청년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부자 청년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빌 게이츠는 그 부자 청년보다는 잘 대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모든 재산을 기부하라고 하면 빌 게이츠라고 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도 빌 게이츠는 빈곤국 코로나 백신 공급을 위해 1억 5000만 달러를 지원하였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선의 영광은 빌 게이츠와 그 재단에 함께 도움을 주고 있는 워런 버핏에게 돌아갑니다. 물론 그 일도 훌륭하고 주님께서 갚아주시겠지만, 더 완전한 선행은 ‘선하신 분은 주님뿐’임을 입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이런 분들은 마치 ‘댐’과 같은 역할인 것 같습니다. 댐은 홍수 조절도 하지만 가뭄 때 품고 있던 물을 공급하여 그 물줄기가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이 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참으로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완전해지려면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의 선함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아두었다가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며 주님의 자비에 나 자신까지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태석 신부님이 ‘폭포’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가난한 이들에게로 찾아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분이 돈을 많이 벌어 도왔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그런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열렸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중 의사가 된 이들이 벌써 40여 명이 넘고 기자, 공무원,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이웃을 돕겠다는 제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보며 그분의 능력이나 재산보다는 그분 뒤에서 활동하신 선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저도 댐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에 혼돈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돈을 모았다가 필요한 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섭리보다는 나의 의지로 선행을 하려는 것이기에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그때그때 흘려보내 주려 노력합니다. 선하신 분은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마더 데레사가 참으로 큰 선행을 했지만, 그분이 남겨주신 더 큰 선행은 청빈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김으로써 그분의 도움을 받으시는 분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우리가 무언가를 내어놓으며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선해지려 할 때, 그분의 선하심이 가려집니다. 따라서 참으로 완전한 선행은 마치 폭포수처럼 나에게 많은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여, 그것을 거침없이 당장 흘려보내 주는 주님 섭리에 맡기는 삶입니다.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텃밭의 호박을 보았습니다. 꽃이 피더니 드디어 호박이 열렸습니다. 2개가 옆집 울타리를 넘어갔습니다. 참 사람 마음이 요상합니다. 우리 울타리에도 넉넉하게 호박이 열려있었는데 옆집으로 넘어간 호박이 아깝게 여겨집니다. 호박은 굳이 울타리를 가리지 않고 생긴 대로 열리는데 나는 왜 울타리를 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소유가 있고, 권리가 있는 세상입니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세상입니다. 커다란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채우지만 부자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거스를 수 없다면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는 넓은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는 자캐오를 예수님께서는 축복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바늘귀처럼 작게 보일 뿐입니다.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8차선 고속도로처럼 넓게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울타리의 호박은 내가, 옆집으로 간 호박은 옆집에게 나눠주어야 하겠습니다.
지붕 공사로 비용이 제법 들어갔습니다. 정부의 지원금으로 해결 할 수 있었는데 하느님께서는 나눔의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평생구독자이신 어르신께서 노안으로 신문을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또다시 구독료를 보내 주셨습니다. 코로나19로 남미로 가는 신문의 발송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르신께서 후원금을 가져오셨습니다. 미국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시다가 지금은 정년퇴임을 하셨습니다. 80이 훌쩍 넘으셨는데도 손수 운전하셔서 신문사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치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던 것처럼 어르신들께서 보내주신 구독료와 후원금은 딱 지붕 공사의 비용 만큼이었습니다.
예전에 읽은 만화인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밥이 있었고, 숟가락이 있었습니다. 다만 숟가락이 몹시 길었습니다. 지옥은 긴 숟가락을 자기 입에 넣으려다보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대부분 흘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숟가락을 탓하며 불평하였습니다. 천국은 긴 숟가락으로 이웃의 입에 밥을 넣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서로의 입에 밥을 먹여주니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배려해주는 나눔의 문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청년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합니다. 복음을 읽어보면 청년은 아주 모범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계명을 잘 지켰고, 그릇된 길은 가지 않았던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칭찬을 받을 거라는 기대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청년의 대답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계명들을 잘 지켰고, 나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런 다음 나를 따라 오시오.’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슬퍼져서 예수님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나이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사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어떤 분들은 가족들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족은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두려움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두려움은 사실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걱정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5. [매일 미사 묵상 결론 기도문]
2020년 8월 17일 월요일[(녹)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복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역사책 『설원』에는 부귀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부’는 만족할 줄 아는 데 있고 ‘귀’는 물러남을 구하는 데 있다.” 만족하고 물러날 줄 아는 지혜만 있다면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스스로 되묻고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내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것이 무엇일까?’로 말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많은 무엇이 우리를 차지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한계를 깨닫고, 우리의 욕망이 무엇인지 올바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